삿15:1-20, 라맛레히와 엔학고래, 23.8.16, 박홍섭 목사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갈수록 타락해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죄-하나님의 징계-부르짖음-사사를 통한 구원의 사이클이 반복될수록 악순환의 역사를 거듭하다가 급기야 12번째 사사인 삼손 시대에 오면 오직 자기 하나 잘살고 배부르면 된다는 식의 아주 저급한, 영적으로 거의 죽었다고 할 정도의 심각한 상태가 됩니다. 우상이란 우상은 다 끌어모으면서 자기 욕심만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마노아의 부부를 통해 삼손이라는 나실인을 세우십니다. 아무도 블레셋과 싸우려 하지 않아 혼자 싸워야만 하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자를 찢어 죽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하심으로 혼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일어서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능력의 장중에 붙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영적인 경계를 소홀히 함으로 나실인의 금기사항을 어기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개인적인 복수와 정욕의 차원에서 사용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삼손의 그런 실패까지 사용하셔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다 이루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비록 삼손이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일어서지만, 하나님은 그런 삼손에게 300마리의 여우와 그 여우 꼬리의 횃불을 통한 복수를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이방 블레셋이 차지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순응해서 자기 혼자 살기에 급급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마음이기도 합니다(1-8).
이렇게 삼손이 블레셋의 밭에서 그들의 곡식단과 감람원을 불지르고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하자 블레셋은 유다 지파의 3천 명을 동원하여 삼손을 결박합니다. 9-13입니다. 블레셋이 얼마나 간교한지 보십시오. 자기들의 밭을 불태우고 동족을 도륙한 삼손을 잡을 때 직접 부딪히지 않고 삼손의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배신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수수께끼 게임에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삼손의 아내를 이용해서 풀어낸 것처럼 삼손을 잡으려고 할 때도 동족인 유다 지파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레히라는 곳에 대부대를 집결시켜 놓고 삼손을 잡아 넘기지 않으면 자기들에게 대대적인 복수를 할 것처럼 유다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고민해보지도 않고 한걸음에 굴복합니다.
유다 사람들이 말이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11절에서 그들은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관할이 아니라 블레셋의 관할이 되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라든가 비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오직 이런 현실 아래서 별 탈 없이 자기 하나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살면 삼손은 쓸데없이 잘살고 있는 자신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그저 잘 먹고 잘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주관해야 할 자기들의 삶을 블레셋이 주관하든지 누가 주관하든지 그냥 편하게 잘살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세상의 기세에 눌려 숨을 죽이고 있어도 우리 교회만 성장하면 괜찮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삼손을 나실인으로 세워서 성령의 능력을 허락하시고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을 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 돌아와서 참된 사명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삼손과 더불어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일어났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서 그들을 사용하셨겠습니까?
지금 삼손을 잡으러 온 유다 사람들이 몇 명입니까? 3천 명입니다.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만약 이들만이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삼손과 더불어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일어났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부 편하게만 살고 싶었지 하나님의 뜻과 거룩한 사명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삼손을 자기들의 손으로 잡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넘깁니다. 예수님을 잡아 넘긴 가롯 유다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한 삼손의 반응을 보십시오. 놀랍게도 삼손은 자신을 잡으러 온 유다 사람들에게 순순히 잡혀갑니다. 삼손이 비록 자주 실패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아직 분명한 교회관이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블레셋을 치기 위함이지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을 치기 위함이 아님을 삼손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동족들의 손에 잡혀갈지언정 동족과 싸우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동족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잡혀 블레셋에게 끌려갈 때 하나님이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음을 믿었습니다. 믿지 못했다면 이렇게 순순히 유다 사람들에 의해 잡혀가지 않았겠죠.
오늘 우리에게도 손해와 부담을 피해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 삼손까지 잡아 넘기는 유다 사람들처럼 이기적인 모습은 없습니까? 이런 모습이 아니라 비록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그래도 싸워야 할 대상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유다 사람들에 의해 순순히 잡혀가는 삼손 같은 분명한 교회관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도록 은혜를 구하는 저녁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부분은 하나님이 이런 삼손에게 능력을 주시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이도록 하신 사건입니다. 14-17을 보십시오. 삼손에게 늘 이런 능력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능력을 주실 때에만 이런 괴력이 나타났습니다. 이번 경우에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순히 동족들에게 잡혀간 삼손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괴력을 허락하셔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만약 블레셋에 잡혀가기 싫어서 유다 사람들과 혈기로 싸웠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우리 가운데 자기를 잡으려고 오는 사람들과 충분히 싸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오히려 손해 보고 결박당해 잡혀가는 것 같은 억울함과 곤란함을 겪은 분이 있습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곧 하나님이 간섭하실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소리 지르며 다가올 때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모든 줄을 끊어버리게 하시고 우리의 손에 나귀 턱뼈를 들려주시면서 나를 향해 달려드는 블레셋을 물리치게 하시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할 것입니다.
누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진리의 편에 서서 싸우는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모든 세상의 줄과 위험의 줄과 고통의 줄과 불신의 줄과 정욕의 줄이 성령의 능력으로 끊어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 삼손의 손에 들려주신 나귀의 턱뼈처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은 기운이 고갈한 삼손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8-20을 보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삼손의 능력은 영구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에게 능력을 주실 때에만 가능했던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이 능력은 일정 기간 역사하다가 소멸되었습니다. 아직 블레셋의 적들이 남아 있는데 삼손의 능력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는 심히 목말랐고 힘이 빠지고 있었고 쓰러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을 것이 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도 이렇게 고갈되어 지쳐 쓰러질 때가 있다는 영적 교훈을 발견합니다. 성령 충만은 영구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라맛레히,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인 놀라운 일을 행하고 나서 곧바로 이렇게 영적 소진과 고갈의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일 천명을 죽인 라맛레히는 엄청난 승리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승리의 현장에서 삼손은 목말라 죽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승리를 경험한 바로 그 자리에서 침체 될 수 있습니다. 흥분하고 감동했던 그만큼 소진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라맛레히에서 부른 삼손의 노래인데 주어가 무엇입니까? “내가”입니다. 내가 천 명을 죽였다가 노래의 내용입니다. 삼손의 능력이 갑자기 다 사라지고 심한 목마름과 기근의 영적 침체로 빠져버린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삶의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될 때, 특별히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고 나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삼손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주어를 주님으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삼손은 부르짖으면서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다고 주님을 주어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 길 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무조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의 주어와 노래의 주어를 바꾸면서 내가 교만해서 주님이 주신 능력을 다 잃어버렸고 지치고 소진되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같이 부르짖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다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삼손 앞에 엔학고래의 샘물을 터지게 했듯이 부르짖는 자의 마음속에 성령의 생수를 터지게 하셔서 다시 회복되게 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엔학고래의 샘물이 터지는 이 회복의 은총이,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가 소진되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기쁨이 없어질 때입니다.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주위 사람들의 결점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면서 그가 미워질 때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감동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결단이 생기지 않을 때입니다. 기도가 싫어지고 찬송이 싫어지고 예배가 부담스러워질 때, 이것은 지금 나에게 성령의 감동과 능력이 떨어졌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 내 안에 성령의 능력이 고갈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워집니다. 남편이 미워지고 아내가 미워집니다. 교인들이 미워지고 예배드리는 것이 힘듭니다. 찬송을 두 번만 불러도 화가 나고 말씀이 조금만 길어져도 분노가 생깁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나를 이대로 두시면 세상의 힘에 먹힐 것이 뻔하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성령의 샘이 엔학고래의 샘물로 나의 영혼을 다시 소성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이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