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고리예"(Medugorje)는 "모스타르"에서 한시간 거리이다.
"메주고리예"에 도착해도 비는 꽤나 많이 내리고 있다.
"메주고리예"(Medugorje)는 길이고, 가게고, 聖堂이고 순례자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우리의 일정에 이곳이 있는 것은 이곳을 모두 보려하는 것은 아니다.
"두브로브닉"에 가는 길에 이곳이 있으니 끼워 넣은 기분이다.
성모님이 발현했다고 하는 산은 시간이 안돼서 아예 가지 못한다.
다만 이곳 聖堂과 "治癒의 예수像"을 보는 것이 모두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먼저 "治癒의 예수像"을 먼저 가 보기로 한다.
聖堂 옆으로 해서 조금 긴 길을 걸어가야 한다.
1981년 6월 24일 저녁.
보스니아 남쪽에 위치한 메주고리예는 山과 山사이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人口 3000천여명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마을 뒤의 포드브로드 산(Mountain Podbrdo)아래 크리니카(Crnica)언덕에 놀러갔던 6명의 청소년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미르야나 드라기체비치(Mirjana Dragioevic.16세)와 이반카 이반코비치(Ivanka Ivancovic.15세),마리아 파블로비치(16세),
밀쟈나 드라기체비치(16세), 비치카 이반코비치(17세), 야곱 촐로 (10세)이 그들이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聖母님을 본 것이다.
마을에 와서 이 사실을 이야기 했지만 어른들은 믿지 않았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힘든 담배와 포도농사를 지어야 했고 아이들까지도 농사일을 거들었다.
아이들이 힘든 일을 거들기 싫어서 허황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네 명의 친구들과 다시 가서 또 한번 聖母님과 만나게 된다.
이들이 성모님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유고슬라비아 정부 당국은 이들을 조사했고 수시로 감시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너희를 기도하라고 부른다.
너희와 기도와의 관계가 매일의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기도가 너희에게 기쁨이 되도록 하여라.
그렇게 되면, 너희와 삶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더 열릴것이며,
삶이 너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한 은총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 고맙다. “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네 명의 친구들과 다시 가서 또 한번 聖母님과 만나게 된다.
성모님을 본 청소년 6명중 3명은 지금도 성모님을 뵙거나 말씀을 듣는다는데,
특히 밀쟈나 자매는 1987년 8월 2일부터 매달 2일 성모님의 목소리를 듣거나 뵙는데,
유튜브에서 밀쟈나 자매의 동영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져서 지도에도 안나오던 메주고리예라는 마을이 많은 순례자를 불러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교황청에서는 조사중이라고만 밝혔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6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사목 방문했으나 메주고리예에는 들르지 않았다.
"치유의 예수상"앞에는 빗속에서도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의 양쪽 무릎 근처에 있는 바늘만한 구멍에서 아주 약간씩의 기름이 흘러나온다고 하는데
빗물에 젖어서일까? 아니면 나의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확인 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얼굴은 차마 표현하지 못한것일까?
아니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도록 한것일까?
아래에는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새겨놨는데 무슨 듯인지는 알지 못햇다.
"치유의 예수상" 뒤에 있는 陰刻 형태의 예수님 상.
"최후의 만찬."
아까 오면서 보니 길옆에 다섯개의 작은 집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이 그 마지막 집이다.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마지막 예언?
산상 교훈?
잔치집에서의 첫번째 기적.
세례자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음.
야외 미사장소.
지붕에는 여러나라의 말이 있는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우리나라 말도 있다.
聖 야고보 聖堂.
원래 1892년 ~ 1897년에 지어진 聖堂인데
이 지역의 지반이 약해 기울기 시작하여 1969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성당의 내부 모습.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여 제대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성당 앞 우측에 있는 聖母님.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아이들의 口述에 따라 만들었다고 한다.
聖堂 前景.
성당 마당에 있는 "平和의 聖母像"
이탈리아의 조각가 Dino Felicli 가 만들었다고 한다.
아직 로마 교황청에서는 聖地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개별적으로 참배하는 것은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아직도 조심스레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제 "드보르브닉"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