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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나귀의 사춘기
(민22:1-40)
민수기 22장 말씀은 이제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이스라엘 때문에 가나안 주변에 진치고 있던 나라들이 계속 무너져 내려가는 그런 소식을 모압 왕이 듣게 됩니다.
모압 왕의 이름은 발락입니다.
발람이라는 이 엉터리 선지자의 이름과 혼동이 되기 쉬운데, 이 모압의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이제 맞이해야 될 상황이 됐습니다. 근데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스폰서가 되어주신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이에요.
그래서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아주 특이하게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마음 속에 채택한 방법이 아주 특이합니다.
어떻게 방법을 모색하느냐 하면 이 앞에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 나오는거거든요.
근데 어떻게 방법을 모색하느냐 하면 군대를 동원해서 이길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영적인 세계에 영향력을 미쳐서 그 이스라엘을 돕고 있다는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의 신이라고 생각하는거죠. 이 모압 왕 바락은.
절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지마는 그 당시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종교사상이 참으로 잡다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던 그런 상황이고 모압은 바알을 숭배하고 있었던 그런 차에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신이 이스라엘에 스폰서가 되어준다고 믿고 있으면서 이 영적인 세계에서 어떤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서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데려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함으로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하여금 아모리를 이기게 하고, 바산의 왕 옥을 이기게 하고 하는 이런 모든 일들이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기운을 불어 넣어줘서 그렇게 됐다고 믿으면서 그 기운에 맞서려면 영계에서 그를 대항할만한 어떤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의 기운을 쏴서 이스라엘을 이겨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마치 비행기가 있는 오늘 날의 군대가 공군이 가서 적진을 완전히 하늘에서부터 포화를 다 퍼부은 다음에 그 다음에 보병이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영적인 세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축복해주는 그런 기운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만들고 그런 다음에 그런 기선 제압하에서 이제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섬멸시키겠다고 하는 작전을 세운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여러분!
민수기 22장 전반에 걸친 주제가 뭐냐?
마치 니체의 <권력의 의지>라고 하는 그러한 단어를 연상케할 정도로 지배적 본능의 발현입니다. 지배하고 나를 관철하고 어떠한 도덕적 윤리적 제재없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생을 향한 어떤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그런 권력의 의지, 니체가 주장했던 그런 단어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본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발람이라고 하는 엉터리 선지자. 선지자라는 말이 잘 안 어울리고 사술을 베풀고 주술을 베푸는 그런 샤먼에 가까운 무당에 가까운 주술가였습니다. 사술가였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술가 발람을 불러다가 이제 영계의 영향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이 모압 왕의 마음가짐,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기려고 하는 이러한 지배욕 이런 것들을 오늘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릇된 것이라고 보여주는 한 장면 중에 이제 그 발람이 발락 모압의 왕의 청을 듣고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하는 그런 청에 응해서 발락에게 가는 도중에 나귀와 문제가 생기게 되는 장면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아, 이놈의 나귀가 평생 안 그러다가 오늘 발람이 이제 나귀를 타고 발락에게 가는데 가는 길을 벗어나는 겁니다. 생전 안 그러던 게.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의 제목을 <한 마리 나귀의 사춘기>라고 말을 정했어요.
왜냐? 이제까지 말을 잘 듣던 나귀가 갑자기 길을 벗어납니다. 가야 될 길을 발람이 지금 가고 있는 중인데 자기는 이 길을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귀가 길을 벗어나요. 그래서 채찍으로 막 때렸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안 들어요. 또 한번 채찍으로 막 때렸습니다. 말을 안 들어요. 나중엔 어떻게 하느냐? 담벼락이 이렇게 있는데 그 담벼락에 갖다대고 발람의 발을 막 비벼댑니다. 그래서 나귀에서 내려서는 이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휘둘러 패버립니다.
마치 꼭 여러분 사춘기에 접어들어서 정말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우리들의 자녀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 동안 말을 잘 들었는데 이 놈의 사춘기가 되니까.
사춘기가 여러분 뭡니까?
가정과 부모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선언하고 '자립'을 생각하면서 갈등하고 반항하고 대립하는 시기 아닙니까? 그리고 이 부모와 가정의 어떤 소속감을 벗어나서 친구의 소속감을 찾고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며 이성에게서 소속감을 찾으려고 하는 그래서 멋도 부리게 되고 하는 게 사춘기 아니겠습니까?
근데 그 동안 말을 잘 듣던 이 나귀가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것이에요. 정말 나귀에게 무슨 사춘기라고 히는 말을 붙일 수가 있겠어요? 한 마리 한낱 짐승에 불과한데. 이 사춘기라는 말은 그래도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붙이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확대해서 본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 지배와 관계해서 사춘기라고 하는 것이 부모와 가정의 지배력으로부터 독립하고 해방하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 움직임이 가장 특징적인 시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볼 때 오늘 이 발람과 나귀의 사건은 아주 우리 인생의 전반에 걸쳐서 너무나도 치명적이고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스라엘 선민을 저주하기 위해서 요청한 발락의 명을 받고 가는 이 발람의 길은 패역한 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이 칼을 들고 막으시게 됩니다. 이때 이 발람이 이러한 사자가 자기 길이 악하므로 막고 있다는 사실을 못 보게 되고 나귀만 그 길을 보게 되는 거예요.
자,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이것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한번 우리가 생각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기른다 할 때 자녀를 기른다고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기른다고 하는 게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기르고 있습니까? 양육을 하고 있습니까?
자녀를 나귀처럼 타고 있는 것이에요. 결국 우리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자녀를 양육한다고 하는 것은 백이면 백 어떤 마음가짐이냐 하면 바람이 나귀에 올라타서 자기가 원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길로 나귀를 몰아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우리의 자녀를 올라타고 기른다고 하고 양육한다고 하지만 돌본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녀를 올라타고 내가 원하는 길 그게 물론 자녀의 길입니다.
그러나 내가 길을 정하고 내가 원하는 길로 그 자녀를 몰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를 몰아갈 때에 자녀에 사춘기가 임하면서 자녀가 내가 몰아가는 길로 가지를 않고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벗어날 뿐만 아니라 오늘 발람이 나귀에 탔다가 나귀가 발람의 발을 담벼락에 비벼대면서 발에 통증을 느끼게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까지 부모가 생각하기에는 이 길로 가야된다고 해서 그 길로 몰고 싶은데 나귀인 자녀들이 그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이게 사춘기에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춘기에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들놈을 길러보지 않는 엄마는 자녀 양육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제가 들었어요. 아, 사내놈들 뻐때고 부모에게 대항하고 대립하고 갈등하기 시작하면 속수무책 아닙니까?
근데 왜 괴롭습니까? 지금 발람의 마음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요게 바른 길인데 그 길에서 지금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이 나귀를 타고 있는 발람과 하나님의 관점을 한번 보시라는 거예요.
분명히 발람은 요 길이 맞는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귀가 벗어나서 나귀를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 발람이 정해서 가는 이 길이 사악한 길이고 패역한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막고 있는 거예요. 그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나귀가 보고 딴 길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막고 계신 길을 그것을 보면서 나귀는 딴 길로 가고 있는데 이 발람은 계속해서 그 길로 안 간다고. 그 길로 가면 죽어요.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 길로 가면 죽습니다. 근데 그 길로 계속 몰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의 사춘기를 어떻게 받아들이셔야 돼냐?
하나님이 막으시는 거예요. 내가 지금 자녀를 위해서 정해놓은 그 길이 사악한 길입니다. 패역한 길입니다. 그래서 막고 있는 거예요. 사춘기라고 하는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전혀 아니라는 거예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대항하고 반항하는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 부정적이고 더 못돼 먹고 패역한 게 뭐냐?
내가 내 자녀의 길을 정해놓고 나귀에 올라타듯이 올라타서 내 자녀를 그 곳으로 몰아가는 것 이게 더 패역한 것이고 이게 더 사악한 것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는 가운데 누구도 이런 식의 지배력을 발휘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이러면 큰일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춘기에 반항을 한다는 것은 그 아이들이 하나님이라고 인식을 못하지마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말합니다.
이거 사춘기는 하나님의 섭리에요. 하나님의 섭리가 겉으로 드러난 실현되어지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무슨 섭리?
이제는 그만큼 했으면 너희 품 안의 자식으로 그만큼 내가 시기를 정해서 너희 자식으로 맛보게 했으면 이제 됐다. 이제 내게로 돌려라. 이제 이 자식의 길은 내가 끌고 가는 것이지 네가 나귀에 올라타듯이 올라타서 걔를 몰고 가는 거 이제 그만 해라 라고 하는 섭리의 표현이 사춘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싸우는 거예요. 발람이 나귀를 패듯이 말입니다.
이제 그만 하라 그럴 때 그만 해라. 더 오다가는 칼에 맞는다. 이러고 기다리고 계셔서 자녀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겁니다.
왜? 부모가 공부를 하라고 하는 동안 공부를 안 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 아닌가보지요. 아니면 하나님이 공부를 시키시려고 해도 부모가 공부를 하라고 하는 마음 때문에 그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고 공부를 하는 상태가 계속 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맞물려서 공부를 해도 해야지요.
여러분, 제가 그랬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공부를 하라고 그럴 때는 종교 경전들 읽다가 완전히 포기하고 공부 공자도 말씀 안 하실 때 공부에 불이 붙어서 그야말로 박사학위까지 공부를 한 겁니다. 끝까지 밀고 나간 거예요. 내 스스로가 하나님과 함께 맞물려서 하고 싶어서.
이러한 인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럼 이 나귀의 사춘기, 아니 사춘기라는 말을 나귀에게도 붙였는데 인생살이에서 자녀에게만 사춘기라는 말을 붙이겠습니까? 아니에요. 모든 것에 다 불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사업에도 사춘기가 있습니다. 잘 될 때가 있고 못 될 때가 있어요. 근데 사업이 내가 나귀처럼 올라타서 이 길로 가야 된다, 내가 하는 일이 이 길로 가야 된다고 그러는데 그 길로 안 가요. 말을 안 들어. 아무리 지팡이로 때리고 채찍으로 때리듯이 해서 내 사업을 내가 원하는 길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안 갑니다. 사업에도 사춘기가 있다는 거예요. 사업이 나한테 반항합니다. 사업이 나와 갈들을 일으킵니다. 대립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왜 사업에 사춘기가 주어집니까?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 사업은 사업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뭐하는 사람이냐? 그 하나님의 길을 표현해내는 사람이지 내가 사업을 올라타고 내가 정한 길로 사업을 이끌어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업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가실 것인가, 사업을 하나님이 어떻게 예비히고 계신 것인가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모압 왕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면서 영적 세계의 질서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건이 나귀 사건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영적인 세계를 지배하기는 커녕 너는 이제까지 늘 타고다니던 나귀조차 지배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람에게 가르치고 모압 왕 발락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랍니다.
여러분!
인생살이가 모든 것에 사춘기가 숨어 있습니다.
인생살이 모든 일, 모든 과제, 모든 사업, 모든 인간관계, 자녀 문제 모든 것에 사춘기가 포함되 어 있습니다.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반항하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벗어나는 일들과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 사춘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이 길을 막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 안 좋은 길이기 때문에, 패역한 길이기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불신앙적으로 정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칼을 들고 막고 계셔서 내가 하는 사업이 미리 알아보고 마치 발람의 노새가 하나님의 사자가 막고 있는 걸 보고 딴 길로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사업이 미리 알아보고 딴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칼에 죽습니다. 그래서 딴 길로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인생살이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사춘기를 맞이하지 않습니까? 내가 관계하는 일,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고 자꾸 대립하려고 하고 갈등하려고 합니다. 이게 다 그들의 사춘기에요. 내가 관계하는 대상들의 사춘기라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사춘기의 특징이 뭐냐? 해방과 자립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고, 나의 보호와 나의 어떤 관리로부터, 나의 통제로부터 자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립이 어디 있습니까? 벗어난다고 해방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찾아내시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내가 관계하는 일과 사람과 자녀등이 사춘기의 특징을 드러낼 때 반항하고 대립하고 갈등구조를 겪을 때 이때 불평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서 자식이면 자식, 사업이면 사업에 대해서 당신의 권리 주장을 하시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내 뜻대로 안 가준다, 내가 몰아가는 방향으로 몰려가지를 않는다면 이건 감사할 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리 주장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보다 크신 분, 나보다 좋으신 분,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 그분이 당신 거라고 권리 주장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기꺼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정한 길로 그 사랑하는 자녀나 일들을 끌고 가려고 했던 나의 지배적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
니체가 정신이 돌아버렸어요. 초인과 권력의 의지를 부르짖다가...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극복하는 게 초인인데 어떤 게 초인이냐 하면 의존하고 싶은 마음, 도움을 구하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생을 향해서 갖게 되는 모든 본능을 그대로 밀고 나가라는 거예요. 관철하라는 겁니다. 그러다 미쳐버렸어요.
그게 됩니까? 될 수가 없어요.
근데 이 니체의 사상에 정말 점수를 줄 수 있는 그런 게 있다 그러면 뭐냐? 인간의 현실을 표현하는 거예요.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아폴론(Apollon)의 조화스럽고 정제되어 있는, 윤리와 도덕으로 억제되어 있는 인간성이 아니라,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광란의 있는 마음의 상태와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도록 길을 열어준다고 하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는 그런 점에서 공로가 있다면 있는 것이지요.
이 니체가 바그너의 오페라를 듣고 바그너를 좋아했거든요. 그 바그너의 오페라를 듣고 1876년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아, 드디어 너도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는구나. 이 비겁한 자여!’라는 말을 바그너를 향해 비판의 말을 던집니다.
이 니체의 비판 속에 바로 살 길이 있다는 것이에요. 역설적으로.
니체는 비판하느라고 바그너를 그렇게 욕했습니다. ‘아아, 드디어 너도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는구나.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너마저 정복을 당하는구나. 그리스도교의 이 윤리에.’
이 정복을 당한, 내가 지배하는, 나귀를 올라타고 내가 정한 길을 가게 하기 위하여 내 사업과 내 자식과 내 인생살이를 내가 지배하려고 하는, 그래서 모압이 발람을 불러서 영계에 영향을 일으킨 것처럼, 내가 정한 길을 이루기 위하여 영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이것도 지배력입니다. 내가 지배하려는 거예요.
내가 정한 길을 그 길에서 벗어나는 사업과 자녀와 일과 과제를 위하여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것은 모압 왕이 발람이라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는 마음과 똑같다는 겁니다.
이 민수기 22장이 하는 말이 권력의 의지, 내가 생각하려는 것을 관철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칠 것이다 라고 하는 내용을 전달해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이 안 되잖아요? 기뻐하세요. 기뻐 뛰세요.
아이들이 사춘기라서 말을 안 듣고 공부를 안 합니까? 감사하세요. 춤을 추세요.
왜? 나보다 크시고 나보다 월등하신 하나님이 그 자녀와 그 일을 내 것이라고 되찾아 갈 것이라고 하는 일이 그렇게 사춘기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나귀가 사춘기의 갈등과 반항을 보이지 않았다면 발람은 칼에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내 자식이 내가 하는 말대로만 그대로 따라주어서 끝까지 갔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는 이미 칼에 맞아 죽었을 것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정한 길을, 여러분이 지배해서 가려고 하는 그 패역함을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떻게 알았든지 안 가려고 그러고 벗어나려고 하는 바람에 여러분이 살고 여러분의 자녀가 사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사실을 마음에 꼭 기억하시고 살아가시면서 오늘 하루도 내가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내 뜻대로 내 인생의 길을 가려고 하는 이 지배적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의 지배가 나의 삶에 구석구석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시간을 갖고 하루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2007.08.28)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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