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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하니아 ~ 이집트 포트사이드
2023년 3월 9일. 항해 이틀째, 달 좋은 밤이다. 정말 밝다. 새벽 3시 32분. 지중해 크레타 섬을 빙 돌아 이집트로 향하는 야간항해. 영화 Mediterraneo(지중해) 주제가를 듣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지중해의 한 작은 섬으로 파견된 군인들이 지중해식 삶에 동화되어 전쟁을 잊고 그 섬에서 행복하게 산다. 뭐 그런 주제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근 한 달 이상 지중해를 겪고 난 후엔 그 영화가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지중해의 섬이 아닌 도시들을 겪었는데도 말이다.
오전 7시부터 12까지 일하고, 오후 3시까지 점심 먹고, 다시 오후 6시까지 일하고. 낮이면 모두 해안이나 거리 카페에 앉아 맥주나 차를 마시며 벗들과 수다 떠는 일상. 친구와 공동체와 사람의 삶이 녹아 있는 사회. Mediterraneo 들의 삶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인다.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경보다 더욱 부러운 것은 그런 그들의 삶이다. 나는 장거리 항해를 해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국식 삶을 살아야 한다. 나의 한국식 삶이란 뭘까? 경쟁의 틈에서 벗어나 늘 요트에서 머무는 인생? 돈을 최종 목표로 달리는 사회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역시 한국에서 지중해식 삶은 불가능하겠지. 그저 반사회적 인간 정도의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 4시 4분. 크레타 아요스 니콜라스 앞 바다를 지난다.
오전 7시 30분, 해가 뜨기 시작하니 갑자기 바다에 온기가 가득하다. 삑삑 소리가 나더니 레이더 플로터의 가드 존 알람 설정이 풀렸다. 갑자기 스위치 두 개와 다이얼 스위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일단 지정해 놓은 가드 존은 다시 가동된다. 하지만 언제 또 풀릴지 모른다. 만약 전원을 껐다 켜면, 더 이상 가드 존을 설정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크레타에서 레이터 플로터 수리한 35만원은 떡 사 먹은 게 된다. 아내는 그냥 중고라도 살걸. 이라고 말하지만 중고가 있어야 사지. 새로 마련하면 최소 400만원은 들어가고, 설치 기간 동안 기다려야 한다. 포트사이드에 도착했을 때, 작동이 안 되면 다시 수리를 맡기거나, 대리점을 찾아야겠다. 포트사이드에 그런 게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레이더 없이 야간 항해를 한다는 건 너무 위험하다. 일단 밥이나 먹자. 아내의 김치찌개로 아침을 먹고, 리나는 계란 볶음밥이다. 리나에게 잼 바른 빵도 먹이고 싶지만 아내가 찬성하지 않는다.
처음 가보는 나라의 마리나 행은, 어둠속에 손을 집어 놓고 문고리를 여는 느낌이다. 미지의 세계와 접촉해야 하는 거다. 누가, 뭐가, 있을지 그저 짐작할 뿐이고, 아는 이는 없다. 다행이 지금까지는 별 문제없이 여러 마리나를 잘 지나왔다. 앞으로 포트사이드와 지부티, 혹시 들르게 될지도 모르는 오만 샬라라(폰툰 항구가 없다고 해서 Pass 할까 고려 중)는 어떨까? 이런 걸 잘 정리해 놓은 자료가 의외로 찾기 어렵다. 선배 선장님께 문의하니 몰디브에 폰툰 마리나가 없다고 하신다. 큰일이다. 인도양을 건너 몰디브까지 10일 가량을 가면 물과, 연료가 다 소진 될 텐데, 보급을 어떻게 하지? 물론 어떻게든 되겠지만, 확실하지 않은 요소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만든다. 일단 몰디브에 검색한 곳으로 문자를 넣어본다. 그랬더니, 자기 담당이 아니라며 연락처 하나를 보내준다.
I am passing this request to my friend yacht agent. He will be pleased to assist you. he is CEO of Antrac Holding, the leading yacht agent company in the Maldives. 너무 감사한 소식이다.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Mohamed Antrac +960 777 6884 번으로 다시 문자를 보낸다. 모두 Whats app으로 보낸다. 답변은 즉시 왔다.
Good morning Kim. Could you please get your email for us to send the email with the details. 얼마든지! 냉큼 메일 주소를 보내고 기다린다. 3~4시간 후엔 인터넷도 끊길 거다. 이집트 포트사이드에서 메일을 받아 봐도 된다.
09시 00분. 곧 크레타 제일 끝 부분이다. 2시간 후엔 이집트 포트사이드로 침로를 변경한다. 그러면 3일 동안 지중해를 질러간다. 아내는 잠들고 리나는 혼자 능숙하게 요트 조정중이다. (당연히 거짓말, 그저 윈치에 매달려 놀고 있다.) 빌리 홀리데이를 들어 본다. 배 한 척 지나지 않는 쓸쓸한 지중해에 상당히 어울리는 것도 같다.
그 사이 몰디브의 Nashvaan Abdulla +960 783 8345 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Nashvaan Abdulla 가 최종적으로 마리나를 운영하는 사람인가보다. 그에게 필요한 내용을 다 말해 주었다. 잠깐 통화하고 연락이 끊어졌다. 메일로 자료를 준다고 했으니 포트사이드 가서 다시 연락하면 되겠다. 그러고 보니 정작 지부티는 알아보지 않았네. 인터넷 되는데 가면 지부티 마리나를 빨리 수배해야겠다.
오전 11시 30분. 크레타가 멀어지니 데이터 인터넷도 끝났다. 이젠 육지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망망대해 지중해를 항해중이다. 바람은? 쉣! 이다. 오후 1시에 아내가 만든 된장찌개와 오이무침으로 점심을 맛나게 먹었다. 항해 중 식사가 아니라 완전 만찬처럼 먹었다. 리나에게 빵과 잼, 우유도 먹이자고 했다가 분위기 급 냉랭. 빵 같은 건 몸에 나쁜 거고, 간식이다. 란다. 그럼 외국인은 평생 몸에 나쁜 것, 간식 먹고 사는 건가? 서로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부분은 넘어가자. 리나는 현재까지 잘 먹고 건강하게 항해 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둘 다 걱정한다. 부모니까.
오후 2시 30분. 레이더 플로터를 분해해 내가 직접 한 번 볼까? 고민한다. 일단 기본 기능은 되니까 그냥 두라는 아내 말에 그것도 옳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일 날이 좋으면 다시 뜯게 될 것 같다. 뜯어서 여기저기 닦고, 바람에 내부를 말리는 것, 밖에 못하더라도 한 번 뜯어보고 싶긴 하다. C-80 플로터는 15년 된 구형이다. 만약 교체를 한다면 같은 구형 모델을 구해서 교체하든가, 아예 신형으로 레이다 돔까지 다 같이 교체해야 한다. 비용이 크로아티아에서 400만 원 정도라고 들었으니, 다른 곳은 더 비쌀 거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일단 기본 기능으로 포트사이드까지 갈까? 아니면 여기서 확 뜯어 내용을 볼까? 선택을 해야 되는 상황이다. 포트사이드에는 수리점이 있나? 나는 내일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햇살이 점점 뜨거워진다. 밤에는 차가운 날씨가 예상 된다. 낮은 너울만 울렁거리고, 바람은 노고존이다. 포트사이드까지 거리는 356해리, 속도는 5.2노트다.
잠시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평생 나 자신에 이로운 방향으로 선택했다. 지혜를 짜내고 신중하게 결정했다. 결과는 대부분 참담했다. 그러나 그런 실패를 통해 인생은 전진했다. 나는 지금 아내와 리나를 데리고 지중해를 항해중이다. 내 인생의 잘 된, 또는 잘 못 된 선택의 결과다. 지금 지중해에서 내 삶을 판단한다면, 실패를 포함해서 대개 잘 된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 실수 역시 인생이고, 신은 모든 것을 아울러, 나를 용서하고 복되게 하기 때문이다. 잠시 기도한다.
오후 5시 30분. 리나는 콕핏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엄마의 신발을 선실내로 던지고, 엄마가 사온 곡물 뻥튀기를 먹고 있다. 몸을 부르르 떨기에 기저귀를 갈아준다. 한동안 뽀로로를 보다가 낮잠을 자는 아내의 이불을 들치고 자기 얼굴을 들이민다. 엄마에게 안아 달라는 신호다. 나는 내 딸 리나가 자라는 것을 1센티 곁에서 보고 있다. 이렇게 24시간, 거의 두 달을 가족과 밀착 생활 중이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고, 아마 대부분 한국 남자들에게 참 드문 경험일거다. 앞으로도 두세 달 더 이렇게 살 수 있다. 맨날 이쁘다며, 안아주고, 볼에 뽀뽀하고, 머리통만 깨물지 말고, 내 딸이 자라는 것을 이렇게 찬찬히 바라보자. 리나는 커다란 요구르트통에 빨대를 꽂고 더 먹겠다 난리치고, 아내는 내일 마저 먹으라며 리나와 전쟁 중이다. 김리나 19개월. 현재 지중해를 항해중이다.
오후 7시. 저녁을 먹었다. 양념 돼지고기가 맛있었지만, 양념이 너무 타서 제대로 구울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제대로 된 프라이팬과 냄비를 구할 수 없었다. 한 달도 못쓴 냄비가 녹이 나서 음식에서 녹내가 난다. 다 버렸다. 그리스 크레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눌러 붙지 않는 프라이 팬 하나를 구할 수 없었다. 내가 항해중인 여행자라서 못 구했다고? 대형마트에 가서 찾고 또 찾았는데? 어쩌면 지중해 국가의 요리 방법이 우리와 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크레타에서 해상 소방 훈련은 아무런 연락 없이 끝났다. 난 이런 부분이 너무나 싫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상황이 명확하길 바란다. 이렇게 흐지부지 뭔가 찝찝하게 마무리 되는 것은 뒷맛이 나쁘다. 내 성격이 나쁜 탓일 수도 있겠다.
임시선박국적증서를 가지고 해결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증서에 배의 등록번호 표기란이 아예 없다, 임시로라도 등록번호가 있어야 다른 나라에서 입출항 신고나 로그북을 작성할 텐데, 황당한 일이다. 제출한 서류를 보고 크레타 세관에서 내게 묻는다.
선박등록번호는?
어? 그런 건 없는데요? 이 배는 아직 대한민국에 가지 않아서요... 어쩌구 라고 했다간 일이 복잡해진다.
나는 조용히 이탈리아 국적이었을 때의 배 등록번호를 기록했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지나갔지만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된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배를 사서, 한국으로 오지만, 아직 한국에 도착해 정식 등록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등록번호는 없다. 한국배로 임시선박국적을 취득해서 가는 거니까, 임시등록번호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 그동안 다른 배들은 어떻게 한국까지 잘 온 걸까? 그 배들도 모두 판매국가 국적의 등록번호를 사용한 것일까? 한두 해 지난 일이 아닌데도 여전이 엉망이다. 이런 부분은 서둘러 정정되어야 할 것 이다.
‘그렇게 따지면 세계일주한 한국 선장들은 다 범법자들입니더.’ 라던 선배 선장님의 장탄식이 떠오른다. 국가의 시스템 부재와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이 국제항해의 대한민국 도전자들을 의도치 않은 국제 범법자로 양산하는 것이다. 소명의식 없이 그저 밥벌이로만 일하기엔, 국제적 책임이 막중하고 선량한 피해 국민도 생기는 일이다. 마치 ‘구유속의 개’라고 하겠다. 바다와 해양을 아는 분들, 또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해양공무원이 되기를 소망한다. 국제항해 보험 부분은 더 엉망이다. 하지만 여기서 끊자.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물려고 덤벼드는 광견들을 동요시키고 싶지는 않다. 생활 속의 악마들은 의외로 지근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시각 오후 8시 5분. 바람은 노고 존 7노트, 선속 6.0노트, 남은 거리 339해리. 2일 하고 9시간 남았다.
오전 3시 02분. 아내가 야간 견시를 마치고 선실로 들어갔다. 아내가 야간 견시 하는 동안 나는 콕핏에서 잔다. 운항 중엔 선실에서 자지 않는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빨리 대처하기 위해서다. 코를 골더라고 한다. 그저 달리는 배안에 있을 뿐인데도 이게 상당한 피로인가 보다. 리나가 잘 먹고 잘 놀아 다행이다. 게다가 밤에는 흔들리는 선실에서 잘 자기까지 한다. 이번 항해의 수훈갑이다. 달이 기울고 있다. 구름도 살짝 끼어 있다. 선속은 5.7노트. 아직도 이틀하고 2시간을 더 가야 한다.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만 이 공간이 실재함을 알려준다. 강릉의 벗들은 모두 잘 지내겠지? 우리 가족은 아마 그들의 일상에서 차츰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겠지.
오전 7시 30분. 아침 식사를 마쳤다. 배에 승선원이 갑자기 늘었다. 파리가 많다. 날씨가 따듯해지고 육지에 가까워지니 달려드는 줄 알았는데, 지중해 한가운데 갑자기 파리 떼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오전까지 대형 카고가 우리 곁을 지나갔다. 짐작하건데 그 배에서 우리 배로 무임 환승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문제없다. 우리는 크레타 수퍼마켓에서 파리채를 샀다. 사는 순간부터 야! 이건 진짜 엉터리다. 보기에도 한국선 500원 받아도 욕먹을 것 같은 모양새고, 원가는 중국서 한 30원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그것 밖에 없었다. 하나에 1유로, 두 개를 샀다. 파리를 야심차게 한 대 쳤다. 파리채가 부러졌다. 황당하다. 이런 물건이 유통 된다는 것이 신기하다. 한국서 우리가 사용하던 야들야들하고 질긴 파리채와는 사이즈와 차원이 다르다. 평생 처음 보는 불량 파리채가 대형 수퍼마켓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크레타는 이런 질 낮은 파리채로 고통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라고 혼자 추정해 본다. 파리채 하나로 쓸데없는 상상이다.
구름이 햇살을 가리자, 지중해는 무채색이 되었다. 아내는 단잠에 빠지고, 리나는 뽀로로 시청 중. 선속은 6.1노트. 조류가 돕고 있음이 틀림없다. 인터넷이 끊어진 작은 요트의 선장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 풍향풍속, 선속, 배의 위치, 엔진 RPM, 도착점까지의 거리와 시간. 그게 전부다. 정치나 경제, 연예가 끼어 들 여지는 전혀 없다. 어쩌면 이게 여행자의 필요한 전부일지도 모른다. 우크라니아의 전쟁도, 이제는 위험지구에서 해제된 아덴만의 해적도, 북한이 몇 발의 미사일을 더 발사했는지 전혀 알 길 없고, 당장 우리 생존에 필요한 관심사도 아니다. 바다 전방을 견시 하거나 과자 몇 개를 입에 털어 넣는 일상. 부자가 아니어도, 거의 반년을 돈 벌지 않아도,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지구에서 잠시 내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하지 않을 뿐.
며칠 전. 그러니까 정확히 3월 7일 오후 5시. 하니아 마리나 카페에서 타소스와 나눈 이야기다. 아테네에 있는 내 친구들은 내가 크레타에 산다고, 요트 일을 한다고 너무 부러워 해. 그래서 내가 말하지, 그럼 하니아로 와, 아테네 재산을 처분하면 하니아에서 좋은 집 살 수 있어. 그리고 요트 하나사서 나하고 같이 바다에서 일해. 그러나 단 한 명도 그렇게 안하더군. 100% 내 경험과 일치한다.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서울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랄까? 낙향이라는 단어 때문에 서울서 떠나 지방으로 가는 건 일종의 실패라고 인식되는 걸까?
하지만 문제는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잖아, 성공해서 불행하면 그게 성공인가? 실패했는데 행복하다면 그게 실패인가? 스스로 행복한 길을 찾아 가면 되지, 왜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단어에 매달리는 걸까? 행복을 찾아가는데, 성공과 실패는 별 의미가 없다. 아예 번지수가 다르다.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 하지만 크레타 하니아나 강릉 와서 요트 일을 하며 산다 해도, 돈타령을 시작하면 어디서 살든 마찬가지다.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세상에 행복은 머물지 않는다. 그럼 지중해의 망망대해에서 가족과 함께 파도에 흔들리는 건 행복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다. 나 역시 행복을 찾아 길을 떠난 여행자 일뿐이다. 내가 본 것을 말해 줄 순 있지만, 행복을 단정 지을 순 없다. 노트북을 펴고 끄적이는 내 등에, 리나가 와서 기댄다. 이건 확실하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바나나 한 개를 꺼내 리나에게 먹인다. 잘 먹는다.
등을 기대던 리나가 칭얼댄다. 잠투정인가? 안아주려니 잠깐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내게 안긴다. 내가 아니라 리나가 안아주는 느낌. 목이 메인다. 이런 건, 위로가 된다. 내게 와줘서 고맙다 리나야. 15초 정도 안아주던 리나는 다시 윈치에 매달리고 캐빈 커버로 올라가고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닌다. 윈치에 매달려 캐빈 커버로 올라가던 리나가 갑자기 얼음이다. 엇, 냄새가 난다. 똥도 싼 모양이다. 비상, 비상!
포트사이드 까지는 252해리, 선속 5.6노트. 파리와의 전쟁이다. 갑자기 초파리와 호랑이 무늬 파리가 달려든다. 도대체 이 망망대해 한가운데 까지 어떻게 날아 왔을까? 아니면 지중해의 대기 중에 머물러 사는 파리들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파리들이 있다는 건가? 죽음을 겁내지도 않고 파리채를 휘둘러도 잘 도망가지도 않는다. 마치 죽으러 온 파리 떼 같다. 어쩌면 수에즈에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파리 떼와 싸워야할지도 모른다. 파리채 하나는 이미 다 부서졌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대비 못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에프 킬라로 해결 될 상황도 아닌 듯싶다.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파리 떼와 언제까지 싸운단 말인가? 모기와 호랑나비까지 왔다. 오후 늦게 날이 차지면 사라질런가? 나만 맞는 특이한 사항이 아니라면, 수에즈를 통해 항해하려는 사람들은 파리와 모기에 대한 준비를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10일 오후 4시 30분.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멀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를 위해 누룽지를 데우기로 한다. 리나를 위해 고기를 좀 구울 거고, 아내가 만들어 놓은 양념돼지고기를 상하기 전에 먹어치울 예정이다. 원래대로라면, 유럽 빵도 좀 먹어야하고, 이탈리아에서 잔뜩 사 둔 스파게티도 먹어야 하지만, 한국 음식 재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상에 오를 가능성이 없다. 아마 동남아시아 쯤 가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점심에는 크레타에서 산 컵라면을 먹었는데, 무섭게 짰다. 나는 쇠고기라면, 아내는 닭고기 라면이었는데, 아내 것이 좀 더 나았다. 그래봐야 한국 라면 맛에 비교한다면 100점 만점에 10점주겠다. 내 라면은 5점. 크레타 사람들에게 한국 라면 맛도 나처럼 5점일까? 지구 반대편에 있어 입맛도 완전히 다르다. 아내는 이탈리아 피자를 수입하면 돈 될 거라고 하지만 나는 다른 의견이다. 그 사람들은 현지 재료로 제대로 만든 것이지만, 한국서는 제대로 된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냉동 된 것도 현지처럼 화덕에 제대로 만들려면 가격이 맞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미 한국엔 피자가 차고 넘친다. 알고 보니 피자라고 부르기에도 좀 부끄럽긴 하지만.
2023년 1월 28일 한국을 떠났다. 2월 20일 마리나스베바를 출항했고, 2월 28일 이탈리아 오트란토를 떠났다. 3월 8일 크레타를 떠나 3월 12일 이집트 포트사이드에 도착하면 우리 가족의 아드리아해, 지중해 항해는 끝난다. 무려 한 달 반 동안 EU 국가에 머물렀다. 어쩌다 유럽 한 달 살기가 됐다. 수에즈부터는 홍해, 인도양 항해가 시작된다. 수에즈는 에이전트를 찾았다. 비용이나 시간이 어떻게 될지. 포트사이드에서 물과 기름을 채우고, 코인 세탁을 할 수 있을까? 인터넷이 안 되니 질문할 수도 없고 오리무중이다. 가는 곳 마다 다 사람 사는 곳이니 뭐 어떻게든 되겠지. 걱정은 그만두자. 아버지 신장이 좋지 않다고 하니 걱정이다. 며칠 전 화상통화를 할 때 보니 얼굴이 많이 부우셨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오늘은 달이 안 보인다. 구름이 짙은 모양. 고두망산월 저두사고향 도 어렵다.
오후 9시. 정면에서 붉은 달이 떠오르다, 기다리고 있던 조그만 먹구름에게 삼켜졌다. 먹구름의 크기가 크지 않아 한 시간이면 달은 다시 떠오를 것 같다. 달이 사라지자 배 왼쪽의 북두칠성은 도시의 네온처럼 짙게 표시된다. 마스트 항해등이 다시 켜졌다. 접촉이 안 좋은지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1,400Rpm 선속 5.6노트. 남은 거리 190해리. 1일 9시간 남았다. 모레 오전 중이면 포트사이드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나비오닉스가 계산해 준다. Gary Moore 의 끈적끈적한 블루스가 잘 어울리는 밤이다. 제네시스는 검은 지중해를 달린다.
오전 4시 47분. 레이더 탐지 범위를 좀 더 넓게 설정한다. 가드존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넓게 설정해 두고 견시 하듯 보는 것으로 한다. 장애물과 1시간이상 여유를 두면 적어도 30~40분 이상 마음 편히 운항할 수 있다. 뭔가 포착 되면 줌인을 해, 자세히 보거나 가드 존 알람을 확인하면 된다. 같은 기계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필요한 기능이 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마음의 여유가 많이 달라진다. 엷게 해무가 끼는지, 달만 휘황한 밤바다. 여러 가수들이 부른 ‘봄날은 간다.’ 를 듣고 있다. 같은 노래를 여러 가수가 자기만의 음색으로 해석하는 것을 나는 좋아 한다.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는 없다. 정답이 어디 있나? 다 자신만의 세월이다. 이제 3월 중순. 4월, 5월, 6월이 남았다. 말레이시아까지 4월 중에 가고, 5월 중 대만 가오슝까지 가면 대강 예정대로 운항하는 거다. 중간에 또 어떤 일로 일정이 늦어질지 모르지만, 이것역시 마음의 문제다. 목표를 설정하고 매진하듯 달려가면 항해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못을 순간들. 과정을 즐기자. 과정과 일정을 줄타기 하듯 조절해야, 가장 스트레스 없는 항해가 될 거다. 동중국해를 지날 쯤, 나의 2023년 봄날은 가겠지.
오전 6시 15분. 이스라엘 방면에서 일출이다. 약간의 구름과 함께 멋진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동쪽 하늘 위로는 3대의 비행기들이 항적운을 남기며 제갈 길로 흩어지고 있다. 2시 방향 3마일에 카고 한 대, 9시 방향에 카고 한 대. 레이더엔 두 척의 배만 남고 깨끗하다. 아프리카가 다가올수록 햇살의 강도가 다르다. 오전 8시만 되어도 햇살이 창날 같이 느껴진다. 이집트를 통과 홍해로 나가면 점점 더 햇살이 강해 질 거다. 햇살을 가릴 방법에 대하 고민해야 한다. 안 그러면 새카맣게 타버릴 뿐 아니라, 너무 괴로운 항해 가 될 거다. 아침식사를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배들이 나타난다. 전후좌우로 4대의 카고가 지나간다. 수에즈가 가까워 진 탓일까? 아내는 배들이 나타날 때마다 손을 흔든다. 그 중에 한 배라도 아내를 본 사람들이 있을까? 지난번 지중해 항해 때 말이야, 세일 요트 한 대가 지나가는데 동양인들이 타고 있더라고, 그 아줌마가 굉장히 반갑게 인사하든데. 어느 나라 사람들일까? 이런 정도의 대화가 오간다면 아내의 손 흔들기는 대성공인거다. 리나는 쏘세지 달걀부침을 아주 좋아한다. 아낸 그런 건 몸에 나쁘다고 질색한다. 엄청 짜기는 하다. 그래도 아기에게 맨밥만 먹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내 눈을 피해 조금씩 먹이다가 딱 걸렸다.
오전 9시. 샤워를 했다. 배에는 750리터의 수돗물을 담을 수 있는 탱크가 있다. 앞뒤 각각 375리터, 현재 4일간 항해에 약 25%를 사용했다. 이런 식으로 아껴 쓰면 10일 이상 사용 가능하다. 계류장에서는 육전을, 항해 중엔 엔진 열로 물을 덥힌다. 이런 식으로 언제든 더운 물 사용이 가능하기에, 며칠에 한 번씩이라도 샤워가 가능한 거다. 홍해나 인도양등 장거리항해에서는 물 사용을 더 극도로 아껴야 한다. 이제 23시간 남았다. 드디어 포트사이드까지 하루 이내로 줄었다. 도착시간이 오전 5~6시로 나온다. 적당한 시점에 속도를 줄여야 한다. 너무 일찍 도착하면 근무자가 없을지도 모른다. 오전 10시쯤 도착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오늘 야간에 속도를 줄이자.
오후 1시. 아내가 맛난 햄 치즈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인버터를 켜고 전자레인지를 켜는 순간, 인버터가 다운된다. 지난번 항해에도 이런 상황이었는데, 오늘 아침 리나 밥을 데우는데 잘 되기에 점심에 다시 햄 치즈를 데우는 순간 바로 다운이다. 전자레인지 출력은 500w로 맞추어 두었다. 인버터는 1.5Kw 짜리라고 했다. 하지만 하도 구석에 박혀 있어서 확인하기가 어렵다. 전에 쓰던 배는 국산 인버터 3Kw 순수정현파로, 배 기주 운항 중에 전기밥솥으로 밥도 지었는데, 웬일일까? 무전기나 핸드폰 충전엔 이상 없는 것을 보면 용량이 작은 것일까? 200Ah 배터리가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엔진 발전기가 서비스 배터리와 선내 계기를 사용할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일까? 판단하기가 힘들다. 어쩌면 이배는 발전기가 따로 있으니, 대용량 전력 사용은 서비스 배터리와 인버터를 사용하지 말고 발전기를 사용하라는 것일까? 이따 저녁엔 발전기를 켜서 사용해보자. 일단 나는 이탈리아 공산품에 대한 신뢰가 없다. 분명히 제대로 된 인버터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산 인버터는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대비까지도 확실하다. 냄비와 프라이팬에서 시작된 이탈리아 공산품에 대한 개인적 불신이 여기저기로 번지고 있다.
쪽빛 바다, 옅은 구름에 가린 하늘, 제트기의 항적운. 하루 종일 같은 풍경이 데자뷰처럼 반복되고 있다. 들끓던 파리 떼가 싹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지? 그나저나 수에즈 근방은 제트기들이 정말 많이 지나다닌다. 항적운으로 하늘이 바둑판처럼 변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 궁금해진다. 문득 나에게 위성전화가 있지. 전원을 켜 여기저기 걸어본다.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참. 모르는 외국 번호는 잘 안 받나 보다. 시애틀 사는 여동생과 통화가 됐다. 아버지 안부를 묻는다. 특별한 상황은 없다. 다행이다. 이 뚜라야 위성전화기가 되기는 되네. 위급할 때 사용 가능하겠다.
오후 6시. 지중해 항해의 마지막 일몰이다. 엷게 깔린 구름 아래로 해가 졌다. 해가 진 후 구름에 잔영이 비쳐 바다가 불타는 듯하다. 선속은 5,2노트, 내일 오전 9시 30분 포트사이드 도착 예정이다. 작은 너울이 일렁이고, 바람은 없다. 발전기 라인을 점검하고 발전기를 켜 보았다. 잘 작동한다. 전자레인지를 사용할 경우엔 발전기를 쓰면 되겠다. 바람이 좋을 때 범주로만 가면 배터리 충전이 안 된다. 그럴 때도 발전기를 사용하여 충전하면 된다. 무시동 히터도 있으니 상당히 좋은 배다. 문제는 아무래도 사용 햇수가 있으니 막 사용하기가 겁난다. 한국에서야 사용하다 고장 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지만, 앞으로 중동과 동남아시아에서 뭔가 고장처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어지간히 큰 마리나가 아니면 수리점이나 대리점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싱가포르나 일본 정도면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러니 홍해, 인도양, 동중국해까지는 큰 기대가 없다. 조심조심 하면서 가는 수밖에. 선속 5노트로 내일 아침 도착 시간을 맞추며 천천히 포트사이드로 접근 중이다. 아직 전화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
리나를 목욕시켰다. 선실 화장실, 따듯한 물을 받아 놓은 좁은 통 안에서 물을 찰박거리며 잘 논다. 양치를 시키면 자꾸 칫솔을 물어뜯어 놓는다. 퇘퇘 칫솔 실을 뱉고 있다. 리나가 물을 찰박거리며 노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평화롭다. 물에서 꺼내 잘 닦고 기저귀를 갈아 놓고 콕핏으로 올라왔다. 아내가 비명을 지른다. 잠시 옷을 입히려는 사이, 리나가 마요네즈 병을 짜버린 모양이다. 곧 리나와 아내는 선실에서 잠을 청하고, 나는 야간 항해를 시작한다. 리나가 잠들면 아내가 견시 하러 올라온다. 레이더로 다른 배를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맘 편히 쪽잠을 잘 수 있다. 이제 자정까지는 나만의 시간이다.
오후 9시 27분. 레이더가 난리다. 포트사이드 58마일 전방인데, 대형 배들이 여러 척이다. 모두 수에즈를 건너야 하는 배들인가 보다. 어떤 배들은 멈추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속 5노트인 우리 배 보다 더 느리다면 그건 분명히 멈추어 있는 것이겠지. 아마 시간을 맞추려고 대기 중인가 보다. 배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VHF 16번은 조용하다. 우현 40마일 정도에 아프리카다. 멀리 도시의 불빛인 듯 훤하다. 포트사이드 앞에서 VHF 12번을 사용해 호출하라고 했으니, 일단 VHF 12번으로 무전기 채널을 바꾼다. 역시 고요하다.
2023년 3월 12일 오전 1시. Baltm 앞바다에 레이더가 배들로 꽉 찼다. 2시 방향에 육지도 잡힌다. 오가는 배들이 가득하다. 레이더와 바다를 같이 견시한다. 대개는 대형 배들이라 주의해야한다. 선속이 너무 느리다. 1,500 Rpm 으로 올려 선속 5.0노트를 유지한다. 역조류 같다. 이 상태라면 9시 포트사이드 앞바다 도착이다. 우현 해안이 아프리카라니, 뭔가 비현실적이다. 갑자기 아내 전화기가 로밍이 된다. 내 전화기는 여전히 먹통이다. 구형과 신형 차이인가? 전화기도 돈 값하는가 보다. 아내가 한국서 온 카톡을 읽는 사이 난 먹통 전화기를 잡고 부러워만 하고 있다. 아내는 잠시 눈을 붙이러 선실로 들어간다.
가드 존 경보가 날카롭게 울린다. 좌현에 대형 카고가 우리 배 앞을 가로질러 우측으로 진행 중이다. 거리가 200미터도 안 된다. 배의 속도를 늦춘다. 매캐한 매연 냄새와 함께 대형 카고는 우현으로 빠져 나간다. 다시 속도를 올린다. 불과 몇 분 사이의 일이다. 잠시도 견시를 게을리 할 수 없다,
오전 7시. 내 예상이 또 틀렸다. 너무 빨리 도착해서 바다에서 기다릴 경우를 대비에 속도를 늦추어 왔는데, 새벽부터 갑자기 역풍이 14노트 이상 분다. 속도는 4.5노트, 도착 시간은 11시 30분으로 확 늦추어졌다. 부랴부랴 1,500Rpm으로 올리고 속도 4.9노트 배 방향도 좀 더 포트사이드 쪽으로 돌려 시간을 10시 30분으로 줄인다. 이제 3시간 더 가면 포트사이드다. 가다가 익숙한 깃발을 발견한다. 통발이다. 작은 어선 하나가 통발을 뿌리고 있다. 배들이 많이 다니는 곳인데, 괜찮을까나? 아니면 우리 배가 너무 해안으로 붙었나? 생각이 많다. 그러나 나는 정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이렇게 짐작만 할 뿐. 아내가 카톡이 된다고 좋아한다. 내 전화도 되려나? 그래봐야 세상 소식인데, 왜 이리 반가운가?
무전기에서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에즈 운하에서는 최저 5노트, 최고 9노트라고 하는 것 같다. 이건 다시 확인 해 봐야겠다. 아침에 라면에 찬밥을 말아 먹었다, 부모는 이렇게 먹고, 리나는 돼지고기를 볶아서 계란 볶음밥을 만들어 먹였다.
오전 8시. 포트사이드로 가는 배들이 많다. 눈앞에 일렬로 도열한 것 같다. 포트사이드 쪽에서는 모래먼지가 불어오는 것 같다. 주변이 온통 노랗게 되고 있다. 멀리 육지에 정유시설 같은 것들이 많이 보인다. 리나는 아침식사를 하고 배에서 등반을 즐기고 있다. 좋은 암벽 등반가가 될지도.
채널 12번으로 불러도 대답이 없다. 이집트 에이전트로 전화하니 그냥 끊는다. 뭐지? 아 왔스앱에 단체 대화 방이 있었지. 문자를 남긴다. 캡틴 모세에게 연락이 온다. 굿모닝? 몇 마일 남았나? 굿모닝? 10.6마일이다. 너무 멀다. 내가 이미 메일을 보냈다. 인터넷이 안 돼 못 봤다. 큰 배들이 대기하는 곳까지 와서 Ch 12번을 불러라. 알겠다. 캡틴 모세와의 대화는 딱 필요한 내용만 주고받는다. 아마 이런 업무에 이골이 난 사람일 게다.
오전 9시 30분에 포트사이드로 4마일까지 접근하면서 Ch 12번을 부르니, 지난번 항구, 다음 갈 항구, 배의 총 톤수를 묻는다. 대답했다. 12번으로 기다리라고 한다. 상황을 에이전트에게 연락하니 에이전트는 옐로우부이 구역에서 대기해야 한단다. 옐로우부이? 거기가 어디야? 에이전트가 보내온 사진을 보니 큰 배들이 정박해서 대기 하는 곳인가 보다. 나는 다시 큰 배들이 대기하고 있는 구역으로 돌아가 앵커링을 하고 Ch 12번을 콜 한다. 대답을 안 한다. 다른 배들과 통신하는 것이 다 들리는 것을 보면 일부러 답을 안 하는 것 같다. 다시 에이전트에게 연락하니 기다리란다. 나는 옐로우부이 구역에서 파일럿을 태우고 포트사이드 요트마리나로 가야한단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가만히 VHF 12번을 들어 본다. 아하, 00에서 온 00 호 11.5미터 깊이에 앵커를 드롭했다. 위치는 북위 00.000.000 동경 00.000.000 이런 식의 대화들이다. 눈치 빠르게 나도 대형 배들이 앵커링 한 곳으로 가, 앵커를 내리고 위치 보고를 했다. 이러니 포트사이드 콘트롤에서는 얼마나 놀랐을까? 대형 배도 아닌 세일 요트가 대형 배들 앵커링 하는 곳에 가서 앵커링 하고 보고를 하다니. 아마 포복절도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게 완전히 헛짓이었다. 세일 요트는 그냥 옐로우부이 앞에 가서 장소 보고를 하고 파일럿을 요청하면 그만이었던 거다. 괜치 눈치껏 했다가 앵커만 날렸다.
문제는 선실에 있는 무전기는 다 들리는데, 핸디 무전기는 들리지 않는다. 거리가 안 되는 모양이다. 선실로 뛰어 내려가 채널 10번으로 바꾸고 다시 대화를 한다. 앵커링 할 필요 없고 바로 포트 콘트롤에 파일럿을 요청하란다. 뭐지? 헷갈리네. 일단 이미 앵커링 했고, 포트 콘트롤이 답변이 없다고 하니, 지금 즉시 12번으로 포트 콘트롤을 불러 파일럿을 요청하라고 한다. 하지만 12번은 답변이 없다. 다시 에이전트에게 말하니 대기하란다. 10시 10분에 다시 콜이 왔다. 아까 물었던 기본 정보들을 다시 묻는다. 다 대답했다. 지금 진행 방향 120도로 출발해서 진행하고 4마일 쯤 오면 다시 콜 하란다. 기쁜 마음에 오케이! 하고 앵커를 올리려는데 땅바닥에 걸렸다. 아무리 애써도 올라오지 않는다. 에이전트에게 연락하니 작은 배를 보내줄 수 있는데 비쌀 거라고 한다. 얼마 정도 인가 물어도 잘 모른다고 한다. 그냥 앵커 체인을 다 풀고 잘라버린다. 적당한 곳에 가 다시 사면된다. 지금 움직이고 있다고 무전을 하고 그대로 4마일을 간다.
와보니 노란 부이와 빨간 부이가 보인다. 아하 이게 옐로우부이였나보다. 에이전트가 보낸 사진이 나를 더 헷갈리게 했다. 나중에 인터넷이 되어 나머지 사진을 마저 보니 여기가 맞는가 보다. HM65번에서 기다린다고 하니, 곧 파일롯을 보낸다고 한다. 이때 선실 무전기의 마이크가 고장 난다. 참 가지가지 한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문제가 다 터진다. 그래도 어떻게든 하나씩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적당한 곳에 가면 선실 무전기와 앵커, 앵커 체인을 준비하자. 아직 진행 중이긴 하지만, 인터넷이 안 되는 곳에서 사진으로 위치를 확인하려한 점, 핸디무전기가 잘 안된 점, 앵커가 바닥에 걸린 점 등이 문제였다. 수에즈 운하의 통과는 다른 마리나에 정박하는 것과는 절차가 전혀 달랐다. 알고 나면 쉬운데, 모르는 상태에서 무전으로만 듣고 하기는 절대 쉽지 않다.
수에즈 운하 통과법 : 큰 배들이 정박하는 곳을 지날 때쯤, 12번 채널로 연락. 옐로우브이 있는 곳까지 와서 다시 12번 채널로 연락. 여기서 파일럿을 태워서 진행. 와 엄청 쉽다. 이 쉬운걸 그렇게 헤매나? 직접 해보시라고... 난리가 아닙니다요.
1시 되어 빨간 보트가 우리 배로 직진한다. 오더니, 파일럿이 옮겨 탄다. 활발하고 친절한 파일럿이다. 박시시는 없다. 9시 30분에 도착하여 무려 3시간 30분을 바다에서 대기했다.
2시에 포트사이드 마리나에 도착. 어휴, 이건 간이 정박지지 마리나가 아니다. 밖에 배 지나갈 때마다 파도가 엄청 들이 닥친다. 여기에 머무르긴 불가능하다. 배가 박살 나겠다. 일단 에이전트와 이야기 해보니, 수에즈는 마리나가 더 좋고 파도도 들이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당연히 수에즈로 가야지. 일단 일주일 정도 이집트에 머물기로 하고, 비자를 만든다. 처음부터 박시시다. 마리나 관리인에게는 20불, 검역하러온 의사에게는 5달러다. 나머지 관공서에는 에이전트가 다 정리하고 나중에 내게 한꺼번에 이야기 한단다. 그러라고 한다. 경유를 이야기 하니, 이스마일리아에서 넣으라고 한다. 리터당 1.75달러에 160리터 총 280불. 20불을 따로 내란다. 총 300불. 분명히 바가지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수에즈에 가서 넣을 걸 그랬나? 참 헷갈리게 만드는 나라다.
일단 도착하자마자 에이전트가 자세한 설명을 한다. 서류를 꾸미고 박시시에 대한 설명도 듣는다. 여기서 이스마일리아까지 하루, 거기서 수에즈 까지 하루다. 수에즈 마리나는 배에 좀 더 안전하다고 한다. 하루 정박료는 21달러. 비자 및 각종 서류 비용은 150~300불 사이란다. 도대체 뭐가 확실한 것일까? 일단 수에즈에 가야, 레이더 플로터니 뭐니 수리가 가능할 것 같다. 다시 경찰이 다녀간다. 보지도 않고 박시시만 받아 나간다. 한국 돈 만원, 다시 비자 출입국관리소에서 다시 각 만원씩 2만원, 그런데 거기까지 같이 간 에이전트 직원들이 박시시를 요구한다. 오고가는데 보트를 탔다. 보트 선장에게 한국 돈 5천원, 에이전트 직원들에게 각각 10달러. 오늘만 달러 총 45불, 한국 돈 3만 5천원. 합계 89,000원이 박시시로 나갔다. 박시시로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은 좋은데, 이래서야 어디 이집트 맘 편히 오겠나?
아내는 바닷물도 너무 더럽고, 박시시로 돈 뜯긴 것도 기분이 안 좋다고 아예 외출하지 않겠다고 한다. 나도 별로 나가고 싶지 않다. 파도에 팬더를 달아 둔, 아래 세이프티 라인이 하나 터졌다. 다행이 팬더 손실은 없다. 배에 까만 타이어 자국이 남았다. 일단 하룻밤만 여기서 버티고 바로 수에즈로 가자. 역사적이고 의미 깊은 수에즈 운하이고 꼭 지나가야만 하는 곳이지만, 그저 좋지 만은 않다. 뒷돈을 죄악로 교육받아온 탓인지도 모르겠다. 여긴 이미 무척 덥다. 멋진 모스크를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