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4:1-22, 사울의 옷자락만 벤 다윗, 24.8.14, 박홍섭 목사
블레셋의 침공으로 잠시 물러갔던 사울이 돌아와 정예군사 삼천을 이끌고 엔게디에 숨어 있는 다윗을 잡으러 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끈질김이 정말 대단합니다. 그 집요한 노력과 열정을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하튼 사울이 그렇게 다윗을 잡기 위해 엔게디에 도착했을 때 길가에 양의 우리가 있었고 갑자기 용변이 급해진 사울은 용변을 보기 위해 거기에 있는 굴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다윗의 일행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부하와 일행들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니 사울을 죽이자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기는커녕 사울의 겉옷 자락만 베고도 마음의 찔림을 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5-7이죠.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뱀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은 사울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든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므로 그의 옷자락만 베고도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일행들에게도 사울을 해치지 못하도록 단속했고 그 결과 사울은 무사히 볼일을 보고 굴을 나가 자기 길을 갑니다.
다윗의 이런 행동과 말을 보면 그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 자세와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사람을 자신이 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고달픈 도망자 생활이 계속되고 고난이 이어진다 하더라도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자신의 편리대로 해석하여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만 아니라 다윗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으니 언젠가는 자신을 왕으로 세우실 때가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고 있는 태도입니다. 그는 지금 기다리고 있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으로 사울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다윗은 굴에서 나간 사울의 뒤에서 소리쳐 말합니다. 사울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사울의 왕권을 탐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며 그럴 힘도 없는 죽은 개와 벼룩과 같은데 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간신들의 말만 믿고 이렇게 나를 죽이려 하십니까? 나는 조금 전에도 당신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죽이지 않고 겉옷 자락만 베었으니 사울과 자신 사이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해결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울이 소리 높여 웁니다. 원수 같은 자신을 선대한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잠시나마 진심으로 다윗에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뒤에 사울은 이전보다 더 악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진심이라고 반드시 사실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참된 진심은 변화와 회개의 사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한 추격을 멈추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진심은 잠시의 감정적인 반응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자기변명에 불과합니다. 조금 전의 사울의 행동은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울었다고 다 회개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울고 후회하고 뉘우치고 나서 똑같이 그 전의 일을 계속하면 얼마나 큰 자기기만입니까?
사무엘서가 계속 사울과 다윗의 대조를 이렇게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했던 힘 있는 왕입니다. 그런 그의 실상을 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리를 자기 힘과 수단으로 지키려고 다윗과 백성들을 죽이는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습니다. 다윗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특공대 3천 명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왕의 힘을 그렇게 폭력과 압제와 살인의 권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누구입니까? 고난과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뜻과 시기를 기다리면서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사울을 살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난이 더 길어지고 어려움이 더 깊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믿음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의 대조를 통해 하나님이 만들어내는 다윗의 모습과 하나님을 떠난 사울을 모습을 보여줍니다. 힘을 가지고 휘두르고 있는데 갈수록 망가지고 있는 사울과 힘이 없고 도망 다니는데 갈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다윗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누구의 길을 가고 있으며 누구의 삶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죽이려는 자가 있고 살리려는 자가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지만 죽이지 못하고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살립니다. 무엇이 이 둘을 이렇게 다르게 살게 했습니까? 단순한 성품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는 다윗의 믿음과 하나님이 주신 자리와 힘과 소유를 끝까지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사울의 불 신앙의 차이입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다윗의 길을 가야 합니다. 다윗의 길을 가려면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번에도 다윗이 지은 시편을 봤는데 오늘은 시편 142편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그의 믿음이 이렇게 피력됩니다. 표제가 다윗이 굴에 있었을 때 지었던 노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42:1-5입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 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 도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다윗이 이런 행동과 말을 믿음으로 펼쳐내기까지 그는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 날개 그늘 아래에 숨어서 여호와의 긍휼을 구하고, 자신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토로하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부르짖는 간구로 하나님이 나의 분깃임을 신뢰하며 기다렸던 기도의 흔적을 지녔습니다. 그런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정적을 제거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기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런 믿음과 이런 은혜로 연결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