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직 공무원을 제대로 운영하기)
정무직 공무원은 국가공무원법상 선거로 취임하거나 그 임명에 국회 동의가 필요한 공무원, 그리고 고도의 정책결정 업무를 담당하거나 이러한 업무를 보조하는 공무원을 말한다. 선거로 취임하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통상 장·차관, 청장, 국회사무처 등의 처장 및 차장, 정부 주요 위원회의 위원장 및 위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리를 정무직으로 운영하는 것은 정치적 소신이 있고 집권세력과 정치적 판단을 같이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책결정을 담당케 하여 책임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무직에 임명되는 사람은 정치적 소신이 있기보다는 시키는 일을 잘할 것 같은 현직 관료나 관료 출신이 훨씬 많다. 특히 차관급 정무직의 경우 거의 대부분 관료가 바로 승진한다. 관료도 정치의식이 있겠지만 통상 그들이 더 중시하는 바는 누가 정권을 잡을지 감을 잘 잡고 거기에 줄을 대는 것이다. 즉 어떻게 해야 나라가 잘될까보다는 어떤 쪽에 줄을 서야 승진에 유리할지를 감지하는 것이 관료의 일반적인 정치의식이다.
이러한 관료를 정무직 공무원으로 대거 기용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정치권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나라를 끌고 갈 경륜이나 정책 개발보다는 정권획득을 위한 선거운동과 이를 위한 구호 만들기에 주력해왔다. 이런 운동과 구호에 능한 사람이 정치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머리는 빌려 쓰면 된다는 것이 정치인의 생각이다. 어느 정치집단이든 운 좋게 정권을 잡으면 정책의 개발과 집행은 대부분 관료를 통해 수행했다. 관료의 등에 업혀 나라를 끌고 가는 것은 어느 정부나 비슷했다. 어떻게 보면 정무직 공무원 중 관료 출신 비중이 클수록 그 정부는 무능하고 준비가 덜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정무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첫째, 정치권이 유능해져 우수한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정치지도자의 의지만 있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한국에는 기본적 자질과 정치의식을 갖춘 사람이 꽤 있기 때문에 이들이 조금만 준비되면 충분히 가능하다. 실무적으로 훈련이 다소 덜 되었더라도 정치의식과 소신을 갖춘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정치적 소신이 전혀 다른 관료를 앉히는 것보다 부작용이 적다. 정치적 소신이 다른 관료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길로 가거나, 디테일에서 완전히 상반된 정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예가 참여정부에서 정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멀쩡한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둘째, 정무직 공무원은 정치적 소신의 변화나 건강 등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한번 임명되면 정권과 임기를 같이해야 한다. 이것이 책임정치이고, 대다수 선진국에서도 그렇게 한다. 전문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기본적 자질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지식이 늘고 관료 장악력이 커진다. 관료 입장에서는 장·차관이 자주 바뀔수록 좋다. 승진기회가 생기는데다 업무를 잘 모르는 정치인이 장관으로 오면 재량권이 늘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언론을 이용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장관을 흔들고 자신에게 유리한 하마평이 실리게 한다. 이렇게 보면 장·차관의 임기가 짧은 정권일수록 관료에 휘둘린 정권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장·차관 등의 임기가 대통령 임기와 같은 5년이라면 관료는 자신의 승진이나 뒷자리를 위해 말을 잘 듣고 협조적으로 바뀐다. 일이년이라면 마음에 맞지 않는 장관을 피해 한직에서 잠시 쉬다가 장관이 바뀌면 재기할 수 있지만 사오년을 쉬면 그러기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는 관료가 장·차관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관료는 전문성을 가진 아주 우수한 집단이기 때문에 가능한 많이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지금처럼 과장, 국장, 실장, 차관보 같은 단계를 거쳐 위험부담 없이 바로 장·차관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장·차관이 되려는 관료는 국장급 전후로 전문성을 쌓은 다음 퇴직하여 정당, 시민단체, 연구소 등에서 경쟁력과 정치적 소신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관료가 영혼이 있는 관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장·차관 등 정무직 공무원에 많이 임명되면 관료 통제도 쉬워지고 정당이나 시민단체의 전문성과 정책역량도 높아지고, 한국경제도 좋아진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다.
장기적으로 정무직 공무원의 범위를 차관보, 실장, 외청의 차장 등으로 점진적으로 확대하면 관료개혁의 효과가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정무직 공무원을 지낸 사람이 지금처럼 주로 대형 로펌이나 기업 등에서 음성적인 로비를 하기보다 연구소나 시민단체 등에서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젊은 세대를 교육하는 데 열중하게 하는 분위기도 만들 필요가 있다.
(관피아 철폐와 새로운 대안 모색)
관료는 퇴직 후 산하 공기업, 관련 협회, 금융기관, 법무법인과 회계법인, 대학, 언론, 민간기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자리를 얻는다. 이것은 민관유착인 동시에 관료집단의 또 다른 정보력과 힘의 원천이 된다. 세월호참사 이후 이른바 관피아 철폐 움직임이 강하다. 관료들이 퇴직 후 관련 기관에 낙하산으로 내려가는 것은 확실히 금지해야 한다. 요즘은 관료가 가던 자리에 정치인이 간다고 해서‘정피아’란 말이 나오고 있다. 이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관료가 가는 것보다는 낫다. 관료가 감독 대상기관에 낙하산으로 가지 못하면 어찌 되었든 관리·감독이라도 좀 더 객관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매기가 있는 사람과 고령의 코미디언이 공기업의 사장이나 감사로 간 사례처럼 정치적 연이 있다고 아무나 가게 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기관장 등을 맡아야 하는데 관료 출신이 아니라면 누가 가게 될까? 아마 ‘마당발’로 불리는 정계, 관계, 언론계 등의 인맥 많은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마당발들은 술자리와 인맥, 로비력을 이용하여 민원해결, 예산확보 등으로 조직에 기여해 승진이나 출세가 빠르다. 개인이나 개별 조직의 입장에서는 마당발이 내는 이런 성과가 의미있고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이들은 다른 사람이나 조직으로 갈 것을 빼앗아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즉 제로썸 게임의 승자일 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국민경제를 키우지는 못한다. 마당발들은 이권을 따먹는 경제에서는 뛰어나겠지만 창조경제에서는 쓸모가 없다. 또한 이들이 섭외나 로비에 돈을 많이 쓰면 다른 사람도 그와 비슷하게 써야 하기 때문에 고비용 구조를 낳고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
통상 공기업, 협회 등의 기관장, 부기관장, 감사는 공모-추천-검증 과정을 거쳐 임명된다. 마당발은 인맥이 좋은데다 대필로 책을 내거나 칼럼을 쓰는 경우도 있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많아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들 중에서 전문성이나 업무지식은 거의 없고 인맥관리만 한 사람을 걸러낼 수 있어야 관피아 철폐의 효과가 제대로 난다. 이들이 관료 출신의 자리를 메우면 인맥과 로비를 우선하게 되어 관피아의 폐습이 계속된다. 여기에다 전문성 부족 탓에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 관료 출신이 차라리 나았다는 말이 바로 나온다.
끼리끼리 나눠 먹기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능력 없는 마당발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꼭 필요하다. 먼저 과도하게 부풀려진 공기업 기관장 등의 보수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대폭 낮추는 일이다. 이러면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있는 사람들의 발호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다음은 좀 생경할 수 있지만 가칭 ‘기관장 등 취임을 위한 국가자격시험’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유사한 제도가 군 장교들이 전역 후 예비군 지휘관이나 민간기관의 비상계획관으로 갈 때 배정순서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군에서는 이러한 시험제도의 시행 후 자리 배정의 투명성과 대상자의 수용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구체적 시행방안은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대략의 안은 다음과 같다. 응시자격은 기업(비정규직 포함), 공공기관, 농림어업, 자영업, 시민단체, 예술활동 등의 사회활동을 일정기간(15년 정도) 이상 한 사람으로서 학력이나 자격증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 시험과목은 한국사, 조직 및 인사관리, 일반상식, 전공(여러 분야 중 선택), 논술 정도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출제방식은 논술을 제외하고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수능처럼 5지선다형이 좋다. 시험 난이도는 아주 쉬워서는 안 되고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시험 관리는 수능이나 고시 수준으로 엄격하게 해 부정시비를 없앤다. 이 자격시험 적용 대상이 되는 기관은 정부 부처와 고도의 정책결정을 담당하는 일부 공공기관을 제외한 모든 공공기관과 공기업, 공공성이 있는 협회 등으로 한다. 민간부문은 자율에 맡기면 될 것이다. 적용 대상자는 기관장, 부기관장, 감사 정도로 한다. 그리고 적용 대상기관의 중요성에 따라 공모 대상자의 최저점수를 차등화할 수도 있다.
이 제도는 거부감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정피아 등이 가는 낙하산 인사의 자질시비를 줄이고 국민의 수용성을 조금은 높일 수 있다. 둘째, 정치적 연은 없지만 자격시험 성적이 아주 우수한 인재가 임명된다면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된다. 셋째, 외부에서 오는 기관장도 지금보다는 떳떳해져서 조직 장악력이 커지고 공공부문의 개혁도 쉬워진다. 넷째, 나라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술집 등에서 로비하고 인맥을 만들기보다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어 사회가 건전해지고 지식수준도 올라간다. 그밖에 행정고시 폐지 후 대안이 되는 시험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청년기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던 것을 40대 이후로 분산시켜 평생학습과 현장교육이 강화되는 장점도 찾을 수 있다. 이제도는 생경하기는 하겠지만 관피아 철폐 이후 한국사회의 투명성과 신뢰성이 높아지기 전까지는 꼭 필요하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의 정책역량 강화)
관료집단이 한국사회를 전횡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의 실력 부족에 있다. 정당은 표 얻기에, 시민단체는 구호와 운동에 주력하기 때문인지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개발할 인재와 능력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정권을 잡았을 때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출신은 점차 관료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관료가 국정을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른바 민주정부에서 더 심했던 것 같다.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당장 문제가 되지 않는 과제에 대해서도 장기간 자세한 부분까지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지만 생색은 나지 않는다.
여당이나 야당의 정책연구소, 시민단체의 각종 위원회, 조그만 민간연구소 등의 인적자원과 재원 활용구조를 생각하면, 이들은 훈수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국정을 끌고 가기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정책역량이 강화되어야 관료개혁이 가능하고 집권 후에 성공한 정권으로 남을 수 있다. 이 또한 어렵고 실질적인 대안이 많지 않지만 다음 세가지 방안이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첫째는 정치지도자나 시민단체를 이끄는 이들이 정책역량과 구체적 대안, 디테일 등의 중요성을 인식해 스스로 공부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제한된 인적·물적 자원도 이러한 분야에 조금씩 더 많이 투입될 수 있다.
둘째는 인재를 영입할 때 명망가보다는 실질적인 정책역량 보유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정당 등이 우선적으로 영입하는 대상은 정부기관이나 민간기업의 고위직이나 이름난 교수, 명사 등이다. 이들을 통해 조직의 세를 불리고 지명도 및 지지도를 높이려는 전략이겠지만 이들은 앞서 봤듯이 마당발인 경우가 많고 실무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된 사람이 대부분이다. 덕담을 해주고 아이디어는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개발할 능력은 거의 없다.
정부기관 등의 실무책임자 출신, 기업 출신 전문가 중에서 정책개발 능력이 있고 사회·정치의식을 갖춘 사람을 찾아 영입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직책, 호칭 등에서 충분한 대우를 해 초빙할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이러한 인재 영입을 위한 조직도 만들어야 한다. 한국정치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명망가 등으로 구성된 ‘그림자 내각’이 아니다. 각 정치세력의 비전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 정책대안이다.
셋째는 영입된 전문인력의 활동을 지원하고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들이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등의 젊은이들과 손잡고 정책개발과 현안에 대한 연구를 담당케 하는 것이다. 정책개발과 함께 젊은 세대의 실질적인 업무능력 개발도 기대할 수 있다. 강의를 통해 배우는 것보다 일을 하면서 배우는 바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육성된 인재가 가령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할 수 있다면 효과는 더 클 것이다. 이런 정도는 제1, 2당이나 대형 시민단체에서 뜻이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