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7> 차차석
“연기법의 사회적 실천이 진정한 깨달음”
-깨달음의 본질과 인식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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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인도 바라나시 인근 사르나트 녹야원에 만들어진 초전법륜 형상. 이곳에서 부처님은 다섯제자에게 법을 설했다. |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장 심각하게 마주치는 고민 중의 하나가 깨달음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대부분 체득하기 어렵다고 느끼고 있으며, 선어록 역시 애매하고 난해하며 그 분량이 방대하다. 어디서 길을 찾아야 마땅할지 미로 속을 기웃거리는 방랑자와 같은 기분이 든다고들 말한다.
필자 역시 이상과 같은 고민 때문에 숱한 나날을 고민했다. 선지식을 찾아다니기도 했으며, 숱한 선어록을 독파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아주 소박했다. 그것의 열쇠는 초기불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부처님의 행적을 통해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불교적 깨달음의 모범답안이라 본다.
결론적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은 바로 연기법이었다. 세상은 단독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연기법을 깨닫고 연기의 법칙에 따라 사회를 이해시키고자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면서 외친 것은 우리들의 기존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연기법에 따른 삶을 살 수 없으며, 연기법과 이반된 삶은 결국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도 불안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세상은 혼자서 살 수 없다. 네가 존재하기 때문에 오늘 나의 존재가 확인된다. 네가 없다면 나의 존재, 나의 삶은 근간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대립과 갈등 속에서 희로애락을 연출하고 있다고 본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의 소중한 생명을 제약하려 들며, 남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승부를 다투다 상대를 저주하고 미워한다.
연기법은 왜 불교의 근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불변하는 본질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집착할 대상도 아니다. 고집할 대상도 없으며, 소유할 대상도 소유되는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불변의 실체를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상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그 변화의 흐름 속에 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르쳐 줄 뿐이다. 현재를 직시하고 가장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임을 일깨워 준다.
연기법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없고, 유리한 것도 없으며, 부귀공명도 없다.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허상이요 관념의 투영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는 자, 분명하게 인식하고 세상을 걸어가는 자에겐 어떠한 외로움도 있을 수 없다.
세상은 연기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한 채 자신들 스스로 만든 관념, 관습, 이데올로기, 습관, 취미 등에 지배를 받으며 세상을 재단하려고 한다. 모든 가치의 판단 기준을 연기법에 두지 않기 때문에 신분, 직업, 윤리, 계급 등의 질곡을 만든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에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시공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유동적인 성질의 것일 뿐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뒤 법열에 잠겨 전법을 망서린 이야기는 범천권청의 설화로 전하고 있다. 당신이 깨달은 법은 깊고 오묘하기에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며, 오히려 당신을 비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침묵에 잠기려 한다. 그렇지만 범천이 등장하여 부처님에게 전법을 권유한다.
〈사분율〉제32에서는 중생들이 연기법을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으로 견해의 차이, 근기의 차이, 욕망의 차이, 생활습관의 차이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면서 역시 전법이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 전법을 하는 것이 깨달은 자의 사회적 책무임을 범천은 강조한다(〈과거현재인과경〉제3).
나와 너 구별말고 끊임없이 육바라밀 수행 강조
부처님의 전도선언 따라 불국토 건설 동참해야
-진정한 깨달음의 시작은 행동
석가모니부처님이 연기법을 깨닫고 침묵으로 세상을 일관했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깨달은 자라고 평가할 수 없다. 세상의 어려움을 피해 조용히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던져 버리고 중생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그들의 미혹한 의식을 전환시키고자 히말라야 산을 내려오는 그 순간부터 진정한 깨달음은 시작된다.
대승불교에서도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문, 연각 보다 보살을 중시한다. 보살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현실에 참여한 불교적 수행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깨닫고도 현실을 외면하는 것, 자신의 사회적 책무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는 진정한 깨달음의 구현자라 말할 수 없다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진정한 깨달음이 행동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대소승의 가르침을 일관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히말라야 산을 내려오다 만난 우다야에게 “나는 바라나시로 가서 위없는 법을 전하고자 한다. 어두운 세상 속에 감로의 북을 울리리라” (〈오분율〉제15)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연기법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전환시키고,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선언이다.
진정한 깨달음이 사회적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전도선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따르는 제자들이 60여명에 이르자 그들 모두에게 각각 전법의 길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법의 목적이다. 그것은 불교도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편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 하늘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것”(〈잡아함경〉제39)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 목적이 그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대승불교는 전도선언에 나타난 정신을 재연한 것에 불과하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었기에 그 정신을 구현하는 방법이 달라졌던 것이다.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무집착의 6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한다. 나와 대상을 구별하지 말고 진심으로 6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보살의 도리라는 것이다. 〈유마경〉에선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보살 역시 병들었다”고 선언하며, 진정으로 불도에 통달하고자 하는 자는 번뇌란 진흙 속에서 불법을 꽃피워야 한다(불도품)고 말한다.
〈소품반야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몇 가지 들고 있다. 보살은 세간을 안온케 하고자 발심해야 하며, 세간을 안락케 하기 위해 발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간을 구제하기 위해 때로는 스승이 되고, 등불이 되어야 하며, 생사 속에서 각종의 고뇌를 제거하기 위해 법을 설해 중생들을 고뇌에서 나오게 한다고 말한다(〈대여품〉 제15).
그렇기에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몇 가지 경전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들은 모두 초기불교의 전도선언에 나타난 이상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며, 깨달음이 사회적 실천과 병행되어야 진정한 깨달음이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상의 실천을 위해
이상에서 필자는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선 깨달음의 대상은 연기법이며, 연기법을 인식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행동이라 보았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이란 인식과 실천의 병행을 말한다.
나아가 깨달음은 불국정토의 건설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과 하늘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는 데 깨달음의 궁극적 목적이 있으며, 그것이 대승불교에선 보살사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깨달음의 완성은 불국정토가 완성되는 날이라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는 깨달음에 대해 불경을 중심으로 필자의 견해를 살펴보았거니와 기실은 선불교의 고승대덕 역시 필자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들은 전도선언과 대승보살사상에 보다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중국이란 문화적 환경 속에서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파격이나 미치광이 놀음, 탈속함과 자아의식의 해체 등을 통해 해학적이면서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국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2076호/ 11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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