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9월 8일 돈암동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에서 열린 '제7회 힐데가르트의 날' 기념미사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행한 강론이다. 강 주교는 미사 이후 강론 전문 초고를 재차 다듬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보내주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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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일 주교 ⓒ한상봉 기자 |
베네딕토 16세 교종은 2012년 5월 10일에 빙엔의 힐데가르트를 공식적인 ‘성녀’로 선포하고, 10월 7일 제13차 세계 주교시노드 개막미사 때 그에게 ‘교회박사’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현대의 교회에서 성녀 힐데가르트의 삶과 가르침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상기시켜 주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는 힐데가르트가 자신의 여성성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힐데가르트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일찍이 갖지 못한 특별한 여성적이고 통합적인 시각과 접근을 통해, 계시 전체에 대한 아주 고유한 그녀만의 독자적인 인식과 이해를 정립하였다고 제시하였다. 성녀는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생명의 고리, 연결망을 직관적으로 파악했고, 이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여성이 교회 역사 속에서 특별한 공헌을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여성의 고유한 위상과 존엄을 일찍이 드러낸 선각자요 예언자였다.
빙엔의 힐데가르트는 1098년에 독일 중부 베르미스하임(Bermersheim)이란 곳에서 태어나 117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유아기부터 항상 병약한 체질로 많은 시간을 병상에서 보냈다. 8세 나이에 준 수도자적인 생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허락을 받고, 우다(Uda)라는 과부에게 위탁되어 인간적, 영성적 교육과 양성을 받으며 봉헌된 삶을 살았고, 이어서 유타(Jutta)라는 베네딕도회 수녀에게 맡겨지고 정식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유타 수녀 사후 힐데가르트는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녀의 존재가 많은 이에게 알려지며 차츰 이 수녀원의 문을 두드리는 젊은 여성들이 증가했다. 이에 힐데가르트 수녀는 디지보덴베르크(Disibodenburg)의 남자 수도원에서 분리 독립하여 빙엔(Bingen)이라는 곳에 새로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여성 수도자들이 독자적인 수도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들의 장상을 선출하고 독립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교회 역사상 처음이었다.
힐데가르트는 그곳에서 42세 때 큰 환시를 보았고, 신앙 · 성서에 대한 새로운 깨우침을 얻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망설이고 주저했으나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환시를 통해서 깨달은 진리를 기록하고 동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수도자, 성직자들에게 큰 신학적 가르침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환시가 망상이나 스스로 지어낸 상상이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폴마르(Volmar)라는 수사를 영성지도자로 모시고 지혜로운 여러 스승에게 지도를 받았다. 당시에 유럽 전역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던 베르나르도(클레르보) 성인에게도 지도를 받았고 성인은 힐데가르트를 격려했다.
성녀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꿰뚫어보는 대단히 통합적인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통찰은 이성보다는 직관으로 사물을 꿰뚫어보는 여성적 · 통합적 인식 능력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모든 피조물의―생명체나 무생명체나― “내적 본질”을 보았다. 돌 속에서도 보았고, 동식물 속에서도 보았으며, 인간 속에서도 보았다. 그들 모두는 하나 같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하느님과 사람과 동물, 식물, 모든 피조물이 생명의 거미줄로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고 엮여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이 지휘하시는 환희와 희열의 심포니라고 노래하였다. 땅을 해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창조물을 잘못 사용하면 하느님은 창조물이 인간을 벌하도록 허락하실는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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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기자 |
성녀는 어릴 때부터 병 속에 살았기 때문에 질병에 관심이 많았다. 성녀는 사람의 영과 육이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통찰하고 육체의 구조와 질병의 관계를 풀이하고, 풀과 나무, 동물, 돌 등을 이용한 자연치유법에 대하여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힐데가르트는 신비로운 환상을 통하여 인간의 병뿐 아니라 다른 피조물의 애통한 탄식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우리 하느님께서 태초에 우리들을 위해 정해 놓으신 그 길을 우리는 끝까지 걸어갈 수 없어. 인간들이 악행을 저질러 우리들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야. 마치 물레 안에 던져 마구 돌려서 거꾸로 뒤집어 버리듯이 말이야. 아, 우리에게는 이미 페스트처럼 악취가 풍겨나고 있어. 애타게 완전한 정의를 기다려 보지만 끝내 아무 소용이 없어. …”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 사람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올 그때까지, 그들에게 시련을 주리라. … 공기는 너무도 오염되어 사람들은 숨을 들이쉬기 위해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을) 녹색(으로 생기 있게 만드는) 생명력도 인간의 눈먼 영혼이 저질러내는 광란, 하느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저지르는 그 포악한 광란에 의해 시들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들의 쾌락만 쫓으며 외쳐댄다. ‘당신의 하느님이 어디 있어? 우리가 한 번도 보지도 못한 그 하느님 말이야.’ 그들에게 나는 대답하노라. ‘너희들이 씨를 뿌리면 내가 비를 뿌려 그 씨가 움터 나오는 것을 볼 때 … 그때 너희들은 나를 밤낮으로 보고 있지 않느냐?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를 향해 나아가는데 … 아, 인간만이 반역을 하고 있구나.’” (책임감 있는 인간, 133)
성녀 힐데가르트의 이런 신비하고 통합적인 통찰과 가르침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성녀가 던진 메시지의 의미와 맥락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우리는 그녀가 살았던 그 시대의 사회와 교회의 배경과 현상을 폭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녀가 태어난 1098년부터 1179년은 어떤 시대였을까?
유럽의 12세기는 유럽 대륙 전체가 소위 중세의 암흑을 뚫고 새로운 시대로 재탄생하는 르네상스적 변혁기를 겪고 있었다.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체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하는 격동기였다.
유럽 대륙은 로마 제국 이후 오랜 세월동안 교회와 세속의 제국이 일종의 긴장과 경쟁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들은 세상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교회를 자기 세력권 하에 두고 좌지우지하려 했다. 황제가 주교 임명권도 가지고 있었고, 교회 내부 성직자 임면에 관여하였다. 그러다보니 성직자들이 권력가의 심복 노릇이나 하게 되고, 심지어는 성직을 매매하는 일도 생겼다. 교회 안팎으로 온갖 비리와 부정이 난무하고 있었다.
교회는 이러한 세속의 권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독자적인 권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고 박해도 받았다. 이러한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교회는 교회대로 황제의 권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세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다스림을 받는 치외법권적인 위상을 확보하려 하였고, 나중에는 교회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를 소유하고 백성을 실정법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세속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충돌하며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여러분은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이 기억나시는가? 11세기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독일 지역 출신의 하인리히 4세 임금과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대결에서 빚어진 사건이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본래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자였으나 1050년 레오 9세 교황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가서 ‘사제의 결혼, 성직 매매, 세속 권력자가 성직 품을 주는 문제’ 등 교회 내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런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실행 가능한 일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레오 9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자마자 1075년에 훈령을 발표하고 교황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 수장임을 공식화하면서, 왕도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교회에 종속되고 복종의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며, 속인들이 성직자의 서임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다. 이에 1076년 하인리히 왕은 그레고리오 교황의 일방적인 선언에 분개하고, 제국의 주교들을 선동하여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폐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그 대응책으로 즉시 하인리히를 파문하였다. 그러자 독일 쪽의 제후들 중에 하인리히 임금의 지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이들이 그레고리오 교황 편에 서서 하인리히 4세가 1년 내에 교황의 파문 처분을 용서받지 않으면 자신들이 비신자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새로운 왕을 뽑겠다고 선언하였다. 적지 않은 제후들이 이 움직임에 가담하자 하인리히 왕은 어쩔 수 없이 그해 말 로마로 여행을 떠나 교황에게 사죄를 청하려고 하였다.
그때 교황은 교황대로 독일로 여행하기 위해 로마를 떠나 있었고 결과적으로 중간 지점인 ‘카노사’라는 곳에서 교황에게 1077년 1월 26일부터 사흘 동안 성문 앞에서 참회복을 입고 면담을 기다린 끝에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하여 파문 처분을 취소 받았다. 그러나 이런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성녀 힐데가르트가 탄생하고 산 것은 이런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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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기자 |
또 한 가지 우리가 고려에 넣어야 할 시대적 배경은 십자군 전쟁이다. 힐데가르트 성녀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095년부터 서구 사회에는 십자군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071년 터키인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니, 성지를 순례하러 갔던 서구의 순례객들이 여러 가지로 방해를 받고 어려움에 처한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에 전달되었다. 또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적의 공격을 받고 서방 세계에 절박한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교회 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산인 팔레스티나의 성지를 이교도들에게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이로써 유럽 전역에서 십자군이라는 큰 종교적 집단운동이 시작되었다.
1차 십자군 전쟁이 1096년에서 1099년까지 4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서방측은 일단 전쟁에 승리하여 예루살렘 인근에 그리스도교 왕국들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귀국하고 나자 이슬람에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 세력을 회복하였고 성지는 이슬람 세력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서방측은 두 번째로 십자군 전쟁을 감행하고 1147년부터 1149년까지 전투를 계속했지만, 이 전쟁은 처절한 패배였다. 그리고 이 십자군이 출동하면서 십자가를 달고 출전한 군사들이 독일 중부 지역에서 유대인들 8천 명을 죽이고, 예루살렘에서는 7만 명을 무차별 학살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런 비극은 서방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십자군 운동에 회의를 갖게 하였다.
이렇게 살펴보면 성녀 힐데가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교회가 세속의 왕국과 경쟁하며 갈등을 빚고, 교회가 세상과 너무 깊숙이 연결되어 있어 세속의 권력과 부가 교회 내에도 넘치게 흘러들어와 자연히 부패와 비리의 악취가 진동했던 시대다. 교회가 내부로부터 이렇게 곪고 병들어 가니 사람들은 교회 교도권을 불신하고 그 가르침에 반대하여 다른 교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카타리파와 알비파 같은 이단들이 종기처럼 자라기 시작하였다. 이단은 초창기 교회 때부터 있기는 하였으나 교부들은 이단에 대해 구체적인 징벌형을 가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다. 12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이단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기보다는 갈수록 엄격한 종교재판으로 단호한 대응에 나섰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극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부에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쇄신과 개혁의 물결이 힘차게 일기 시작했고, 교회의 행정과 영성과 전례가 재정비되며 교회 건축과 교회 음악, 교회 미술에도 새바람이 불어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를 꽃피웠던 새 시대이기도 하였다. 유럽의 고딕식 건축양식의 대성당들이 세워진 것도 이 시대였다.
그러나 교회와 세상의 유착은 대단히 뿌리기 깊어 그렇게 쉽게 정화되거나 쇄신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힐데가르트 같은 예언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성녀는 당시의 세상과 교회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비우시고 세상 가장 낮은 곳에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강생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녀에게는 세상이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바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하지만 성녀는 현실 속에서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 모두가 현세적 가치에 매몰되어 깊이 우려할 상황에 처해 있다고 경고하였다. 모두 개인주의와 욕심에 빠져있어 복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세상을 올바로 개혁해 나가기 위해 수도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며, 교회가 쇄신되려면 외적으로 교회의 조직이나 행정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혼의 회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녀는 에우제니오 3세 교종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사들은 개처럼 이빨 드러내고 물어뜯으려고 으르렁대거나 닭처럼 바보같이 한밤중에 꼬꼬댁거리는 위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힐데가르트 성녀는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고 독일과 스위스 각처의 수도원과 교회를 순회하며 성직자들의 부패를 고발하고 교회가 회심하여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침없이 외쳤다. 무조건적인 순명이나 그리스도를 내세우는 독재보다는 정의를 앞세우는 일이 교회와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교황은 트리어에서 열리고 있던 시노드에서 힐데가르드트가 환시에서 계시 받은 텍스트를 공개석상에서 낭독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독일의 예언자라고 불렸다.
세속적인 탐욕이 난무하여 혼돈과 개혁이 뒤엉킨 시대에 예언자로 살며 소리를 높였던 힐데가르트를 교회학자로 받드는 우리는 오늘 이 현대를 살며 그녀에게서 어떤 영감과 가르침을 나누어 받아야할까? 탐욕 가득한 무한경쟁으로 끊임없이 이웃을 짓밟고 올라서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바라보면 성녀 힐데가르트는 뭐라고 하실까?
성녀 힐데가르트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제왕들과 성직자들의 갈등, 땅을 차지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갈등으로 많은 이들이 폭력과 고통에 시달리는 세상에서 모두를 다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생명력 안에 치유하고 감싸 안는 어머니 같은 여성적 지도력을 시도하며 하느님이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모두를 초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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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기자 |
지금 이석기 의원을 비롯하여 통합진보당 사람들이 국가를 뒤집어엎으려는 내란 음모의 혐의로 구속되고 북한을 추종하는 반국가사범으로 내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착잡하다. 이들의 언동을 보면 30년 전에 NL 계열 학생운동을 하던 그 정신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의 현실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그들 자신이 만든 정신적인 감옥으로부터 해방되고 깨어나도록 함께 고민하고 설득하고 치유해야 할 대상이지, 단순히 국가보안법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 반국가사범으로 처단하고 사회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이들이 살아온 생의 여정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한시적이고 편향적인 법 조항만으로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상처와 고뇌에 가득 찬 우리의 현대사가 배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국가보안법의 논리로만 단죄한다면 단죄하는 사람도 결국 그들과 똑같은 수준에서 정반대의 극단적인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 일은 온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다고 거듭 반복하신 하느님의 뜻에는 너무 어긋나는 일이다.
요즘 다시 4대강 문제가 언론에 보도된다. 16개 보가 댐이 되어 물을 고이게 하여 물도 죽이고, 땅도 죽이고, 거기 살던 물고기도, 식물들도 죽인다. 탐욕스런 사람들이 이 나라 산하를 송두리째 멍들게 하고 창조주께서 선물해주신 자연과 생태계를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하고 있다. 이제야 검찰이 공사 가격 담합했던 건설업체를 조사한다고 한다. 반대하던 많은 사람의 우려와 걱정이 그대로 입증되고 있다. 이렇게 망가지고 파괴된 물과 땅과 물고기와 온갖 식물들에 대해 도대체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후쿠시마에선 계속 방사능 오염수가 지하로 스며들고 바다로 흘러들어간다고 난리고 이제 와서 우리 정부는 일본 수산물 수입금지한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한다. 원전은 경제적이고 녹색 에너지라고 외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가? 그러면서 송전탑 만들기 위해 조상 대대로 땅을 붙여먹고 살던 농민들 몰아내고 이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그들은 어디 가서 뭐하고 살라는 말인가? 빼앗긴 그들의 인생에 누가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인가? 불량품 투성이로 만들어 놓고 끊임없이 고장 나고 방사능 누출사고 일으키는 원전인데, 전기 부족하니 원전 더 늘려야 한다는 사람들은 무슨 자격으로 이들에게서,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서 두 발 딛고 살 땅을 빼앗으려 하는가?
2010년 말~2011년 초 구제역 확산으로 소 15만 마리, 돼지 332만 마리 등 가축 총 350만 마리가 살처분되었다. 당시 산채로 묻힌 돼지의 울음소리가 이튿날 아침까지 흙을 뚫고나와 지상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어떤 작가는 ‘우리는 천벌을 받을 거야!’라고 속삭이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김혜순이란 시인은 ‘피어라 돼지’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제는 우리도 창조주께서 우리와 공존하라고 만들어 주신 생명의 고리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 될 값진 보물인지 깨달을 때가 오지 않았는가? 이제 다른 피조물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피조물들도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 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울음소리 가득한 밤!”
이 울음소리를 듣고 힐데가르트는 뭐라고 하실까?
강우일 주교 (베드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제주교구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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