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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한참을 우연에 대한 얘기만 연거푸 몇 번을 반복하더니 이내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침묵을 한다.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더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오빠, 걱정 마요. 최우연에 대한 실망은 이미 한지 한참 전이니까요. 괜찮아요. 조심히 집에 들어가시기나 해요."
"아, 그럼, 그럼. 당연하지. 우연이 이 자식한테 잘해주란... 뭐 그런 말이다."
"그것두요... 최우연이 나한테만 잘하면 되요."
"그럼, 끊는다."
날이 한참 밝았는데도 날 깨우지 않는 아줌마. 더구나 집안은 너무도 조용하기 그지없고, 귓가에는 다이얼로 넘어가는 안내음성이 벌써 몇 번을 반복된 건지 떠들고. 왠지 외톨이가 되어버린 듯 불안감이 앞서서 거실로 요란스럽게 달려 나왔다. 너무도 편안한 분위기에서 신문을 보고 계시는 대왕님, 그리고 주방에서 요리를 즐기시는 듯 함박웃음이 가득하신 아주머니.
"아줌마, 왜 안 깨우셨어요?"
"어? 아가씨가 오늘 쉬는 날이라고 안 깨워도 된다면서요."
"네? 제가 그랬어요?"
"어머. 그럼 오늘 출근하는 날이에요? 어제 술 취해 들어오더니, 기억을 못하나 봐요."
"자, 잠시 만요.”
핸드폰 연락처를 한참 뒤적거리다가 제일 먼저 있는 직원에게 전화를 한다는 게 김이송이었다. 평소 같으면 금방이라도 받았을 듯한데, 오늘은 왠지 뜸을 드리는 듯 전화를 받지 않는 김이송.
"여, 보세... 요."
"김이송!!!"
"이 꼭두새벽에 무슨 일이에요, 안자요?"
"오늘 가게 쉬는 날이냐?"
"어이구,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예요? 완전... 끊어요. 아!!! 누나!!!"
갑자기 잠이 확 깨버린 듯한 김이송의 우렁찬 목소리에 전화를 끊으려던 난 잠시 멈칫했다. 핸드폰 밖으로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신문을 보시던 대왕님도 날 보고 계시고, 옆에 있던 아주머니도 요리를 하다 마시고 날 힐끔 보신다. 왠지 전화를 피해 받아야 하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1층 화장실로 씻으러 가는 듯 수건을 챙겨 들어왔다.
"누나!!!! 오늘 쉬는 날이잖아요."
"음, 그러냐?"
"하긴... 몰랐으니까 전화를 하셨겠죠?!"
"꼬지 말고, 얘기해라."
"우리 오늘 만나요!!!"
"넌 무슨 쉬는 날이 내가 의무적으로 널 만나야 되는 날인 것 마냥 말한다."
"당연하죠!! 누나 쉬는 날은 내 자유대로 움직여야 되요."
"왜 그래야 하는 거냐. 난 이제 오늘이 쉬는 날인 걸 알았으니 더 자련다."
"아아!!!! 누나!!!! 안 돼요!!! 오늘 산소공원에서 3시까지 만나요."
"그때 일어나는 거 봐서."
"무조건 일어나요!!! 알죠? 난 약속하면 찾아가는 거."
"미치겠네. 몰라, 끊어."
괜히 짜증을 내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실인 즉슨, 오늘은 러브엔젤 휴업 날이고, 그래서 일주일에 꼭 쉬어야만 하는 날인데. 그런 날만 귀신같이 챙겨서 날 데리고 어딜 가려는 김이송이 너무 야속했다. 내가 싫다해도, 약속해버리면 막무가내로 날 데리러 오는 김이송을 잘 알기에 더 짜증이 앞섰나보다. 이런 내 태도를 보면 김이송은 참 속도 좋지. 이런 누나랑 뭘 재밌다고, 쉬는 날마다 놀려고 하는 건지.
"아가씨, 이왕 일어난 김에 아침 한술 뜨고 더 자요."
"못자요. 밥이나 먹을래요."
"왜요? 쉬는 날이라면서요."
"그럴 일이 생겨버렸어요."
대왕님과 마주앉아 함께하는 아침식사 참 오랜만이었다. 가족과 함께 라는 기분이 이런 거였는데, 난 약 20년이 넘게 그런 기분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밥을 먹고, TV를 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를 훌쩍 넘어 버렸고, 금세 준비하고 이송을 만나러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바빠진 듯 허둥대자 대왕님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의 동선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영아, 무슨 일이야. 금방 전까지도 아무 일 없는 듯 TV만 보더니."
"응! 그래서 늦었어. 아, 이러다 늦으면 김이송 또 집까지 쳐들어올 텐데."
"김이송? 아, 그때, 네 생일이니 어쩌고 하면서 데리고 갔던 어린놈?"
"응. 맨날 지 멋대로 약속잡고, 늦으면 나한테 난리난리 치는 애야."
"그래서, 그 놈 만나러 가려고?"
"그런 셈이지 뭐."
"우리 딸, 인기 많네. 저번에 왔던 그 우연이랑 총각도 그렇고, 어린 김이송이란 놈도 그렇고."
"그런 거 아니야. 갔다 올게. 아빠, 갔다 올게요 아줌마."
"네, 다녀오세요."
"일찍 들어와라."
"가봐야 알아요."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짤막한 정원을 걸어 나가 대문 앞에 서자, 김이송의 오토바이가 도착해 시동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헬멧을 벗고, 대문에 다가서는 김이송을 향해 초인종을 누르지 않게 하려고 소리를 쳤다.
"김이송!! 나왔어, 나왔어. 누르지 마."
"누나!!!!"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가움에 대문에 착 달라붙어서 틈새로 날 확인하는 김이송. 오늘따라 유난히 날 반기는 김이송이 싫지는 않았다. 대문을 열자, 빼꼼 얼굴을 내밀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날 반기며 서 있는 김이송. 급하게 나오느라 그다지 차려입지도 못했다. 물론, 남자친구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니 차려입을 이윤 특히나 더 없었지만. 그래도 예의상이란 게 있으니까 조금 걸리긴 했다.
"누나!!! 왜 그때, 그 치마 안 입어요?"
"뭐?"
"아, 왜 그 노란 개나리꽃 빛나는 샤방샤방한 치마 있잖아요."
"그때는 네가 잘 차려입으라 했으니까 그런 거지, 오늘은 예정에 없던 일이잖아."
"치... 우연형님 만나는 날은 잘 차려입는 날이고, 나 만나는 날은 예정에 없던 일처럼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이거에요?"
"야, 김이송... 너 요즘 들어 쫌 이상하다. 왜 그래, 내 남자친구인 것 마냥."
"네?"
흠칫 놀라는 듯 갑자기 동그래진 눈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김이송.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헬멧을 쓰고 뒷자리에 올라탔다. 말없이 시동을 걸더니 출발하는 김이송. 유난히 오늘 김이송의 감정기복이 심한 것 같기도 하고, 자꾸만 신경 쓰였다. 얼마 달리지 않아 산소공원에 도착했고, 이송이 오토바이를 파킹시키더니 쓰고 있던 헬멧을 벗고, 내 헬멧도 자상하게 벗겨준다. 처음으로 김이송의 행동에 가슴이 떨렸다. 김이송도 결국 어린 남자애만은 아니었다는 걸 실감케 하는 기분이었다.
"누나!!"
"어?"
"왜 그러고 서있어요. 가요."
"어. 야, 김이송."
"왜요?"
"너도... 남자구나?"
"왜요? 나, 남자로 보여요?"
"임마. 누가 나한테 남자로 보인 댔냐? 완전 어린 꼬맹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네... 뭐 그런 말이지."
"치, 누나!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그래."
조금 떨어진 곳에 아이스크림 장사가 풍선과 솜사탕을 함께 팔고 있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오는 김이송.
"빠르다."
"하하... 아무한테나 안보여주는 재주에요."
"뭐?"
"아니에요."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그런지 마냥 신이 난 듯 보이는 김이송. 그런 밝은 김이송 덕에 나도 덩달아 가슴이 마구 설레었다. 쉬는 날 남자친구 없는 비애가 이런 것이던가... 직장동료와 함께 보내는 쉬는 날이라.
"누나."
"응?"
방방거리고 뛰어다니던 김이송이 갑자기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급 진지해지는 분위기를 어찌할 바 모르며 주변사람을 의식하는 내가 서 있었다. 한참 뛰고 놀아 그런지 숨이 차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김이송말을 띄엄띄엄 듣고 있었다.
"이리와 봐요."
"왜. 갑자기 너 이러니까 적응 안 되잖아."
"앉아요."
"너 진지하니까 이상해."
"누나... 부담 갖지 말고 들어요. 누나 옆에... 내가 있으면 안 돼요?"
김이송의 말이 무슨 뜻인지 순간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되물으려는 기세를 보였지만. 김이송 표정을 보고, 그래선 안 되겠단 마음이 들었다. 괜히 무심코 던지는 말에 김이송에게 상처를 줄까봐.
"김이송……."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그 말……."
"그래요! 나, 누나 처음부터 나한테 여자였어요."
"뭐...?!"
"누나……."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부르는 김이송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런 김이송을 마주하고 서 있는 나 역시도 양손을 깍지 껴잡고는 불편한 듯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김이송과 나의 어색함을 깨트리듯 씩씩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꼬맹아!! 방방!!"
날 보던 김이송의 눈빛이 곱질 못했고, 그런 김이송이 내내 마음에 걸려 최우연의 갑작스런 등장이 반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멀찌감치에서 우릴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최우연을 의식하면서 김이송이 어서 대답해 달라는 눈짓을 보이고 있다.
"김이송, 난 어린앤 싫다."
".............!!"
"뭐야, 분위기 왜 이래?"
"형님.”
금방이라도 폭탄선언을 해버릴 듯한 김이송의 눈빛에서 겁을 먹어버렸다. 괜히 죄를 지어버린 듯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하고, 그렇게 김이송의 눈치만 보며 서 있어야 했다. 영문도 모르는 최우연은 김이송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도 모른 채 너무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 했다.
"저기...!!"
김이송의 말이 뱉어지기 전에 선수 쳐서 상황을 모면해야겠단 생각에 먼저 말이 뱉어지긴 했는데, 이런 날 동시에 바라보는 너무 다른 얼굴의 두 사람.
"뭐, 방방."
"........."
"그러니까, 있잖아……."
"형님. 나영누나 저한테 여자였어요."
"어?"
"그런데 나영누나한테 전 고작 어린놈일 뿐이라네요. 같은 남잔데, 형님은 되고, 제가 안 되는 유일한 이유가 나이 때문이란 게, 솔직히 납득은 안 되지만, 이해가 가질 않지만... 그냥 받아들여지네요."
"꼬맹아, 뭔 소리냐? 방방, 무슨 말이야?"
깊은 한숨만 몰아 쉴 뿐이었다. 김이송을 대신해서 해명하는 것도,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최선의 대답을 하는 것도. 모두 위선이고, 변명이 될 뿐이어서 아무런 말도 잇질 못했다. 그렇게 김이송은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홀연히 자리를 떠 버렸다. 최우연은 그제야 어떤 상황이었고, 그래서 김이송과 내가... 또 최우연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 건지 감지한 듯 했다.
"방방. 가자."
"응?"
울적해져버린 내 기분을 풀어주기라도 할 기세로 내 손목을 잡아끄는 최우연. 괜스레 가슴 한편이 추워지는 느낌이었다. 김이송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동안 함께 해온 시간과 정이 있는 건데, 쉽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순 없을 테니까. 막상 내일 출근할 일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최우연... 미안."
"뭐?"
"그냥, 괜히 그러네……."
"됐어. 지금부터 그 얘기 다신 꺼내지 않기다."
"어?"
"가자고."
본의 아니게 김이송과 놀려고 나왔던 하루를 최우연과 함께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하면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최우연은 꼭 이럴 때 내 옆에 있어서 더 추한 꼴을 보여도 창피하지 않게 만든다. 내가 힘들 때, 우울할 때... 꼭 그럴 때 내 옆엔 최우연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내 옆에 최우연은 울며 노래하는 날 그저 바라보며 탬버린을 흔들어주고 있다. 출근 날... 김이송을 볼 낯이 없었다. 어제 그러고 홀연히 가버려서 어색한 마음을 들게 한건 김이송인데. 괜히 내가 그런 것 마냥 마음이 편하질 못했다.
"강나영."
"어?!!"
"뭘 그렇게 놀래.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줄래?"
"그, 그래."
주방 쪽으로 들어오다 보면 작게 공간을 활용한 직원 테이블이 있다. 언젠가 진주희란 사람이 찾아왔을 때도 아마 이곳에서 얘기를 했었던 그곳. 이서윤의 얼굴빛이 좋질 않다. 날 잡아끌고, 이곳까지 데려와 앉히면서 얘기를 들어달라는 거 보면, 분명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는 남자친구 얘기 말고는 없는데.
"나, 헤어질까?"
"뭐? 갑자기 왜?"
"힘들다. 전에 너랑 살 때는 그럴 때마다 너랑 노래방한번 갔다 오면 금방 괜찮아지고, 해결방법을 찾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질 못하잖아. 어쩌면... 너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너랑도 전처럼 가깝진 못한 기분이구."
"야, 이서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같이 살지만 않을 뿐이지, 우린 언제나 하나야~"
양손에 깍지를 끼고는 오버스러운 행동과 표정을 해보이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내 행동이 우스웠는지 진지함을 금세 잃은 듯 헛웃음을 뱉는 이서윤.
"그래, 너랑 얘기하면 기분이 좀 풀릴 줄 알았어."
"거봐. 절대! 절대! 우린 멀어지지 않았다우."
"그냥... 매번 걜 만나러 가는 것도 나고, 뭘 해도... 내가 항상 걔한테 맞추는 것 같고. 이럴 바에야 헤어지고 새 사람 만나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다 싶기도 하고... 그러네."
"야!! 됐다. 지금 너 권태기온다고 네 편 들어달라는 거야? 왜! 그 지방 놈이 뭐라 하디? 너무 멀다고 생각 좀 다시 해보쟤?"
"아니, 꼭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네가 걔한테 얼마나 정성이었는데, 그 놈이 너 뻥 차버리면... 내가 그놈 학교 가서 폭탄설치하고 올게. 걱정마라 친구!!"
그제야 웃음을 되찾은 듯 무의미한 미소를 띤다. 그런 이서윤을 보는 내 마음 한편에서는 어제 있었던 김이송의 발언이 계속 메아리치듯 반복해서 떠올랐다. 내가 불편해 할까봐서인지 오늘은 내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고, 스쿠터에서 맴돌다 주문 들어오면 배달가고를 반복한다.
"근데, 오늘 김이송이 이상하드라?"
"어, 어...?!"
"뭘 그렇게 놀래. 김이송 말이야. 홀 안으로 한 번도 안 들어오잖아. 밖에서만 맴돌고."
"그, 그러게."
"뭐야... 너랑 김이송이랑 싸웠어?"
"어? 싸우긴.... 강나영인 평화주의자인거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도 아는 사실인데 무슨……."
"근데 너 왜 그렇게 불편한 얼굴로 김이송 얘기에 반응하는 건데."
"사실, 김이송이 어제 나한테 특별한 감정이라고 얘기했었거든. 난 어리단 이유로 거절 아닌 거절을 했고."
"뭐?!! 근데.. 그런 일로 상처받고 할 김이송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불편해 할까봐 생각해서 저러는 것 같아. 최우연도 안됐고, 김이송도 안됐고... 둘의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입장에서, 솔직히 나 어떻게 해야 진짜 똑똑한 결정인건지 모르겠다."
스쿠터에 걸터앉아서 멍 때리고 있는 김이송을 한참 바라보다, 날 보던 이서윤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간다. 퇴근시간이 되서 각자의 위치해서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퇴근준비를 하는데 낯익은 얼굴이 가게 밖에서 기다리는 듯했다. 가게 식구들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데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김이송보다 조금 가까이 다가와 서서 나에게 아는 체를 하는 여자. 도도한 눈매와 입술로 차갑게 웃으며 날 반기듯 인사를 건네는 여자. 가게식구들은 그 여자의 인상에 한 발짝 물러서듯 내 뒤에 서서 숙덕인다. 그 여자에 대해 잘 아는 이서윤과 김이송은 수틀리게 굴면 도와주려는 듯 틈을 노리고 있었고.
"나영씨, 우리 어디 가서 얘기 좀 할래요?"
"그래요……."
'야,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걱정 마. 그럼, 나 먼저 갈게.'
'어.'
'잘 가요…….'
괜스레 슬프게 전해지는 김이송의 인사. 그들을 뒤로하고, 근처에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마주하고 자리를 앉았다. 여전히 이기적이게 예쁘장한 외모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 여자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다. 단지, 내 마음과 내 표정만 달라졌을 뿐.
"하실 말씀이란 게....?"
"윤환선배... 방황하는 거 잡아줄 사람 나영씨 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그 얘기라면 이미 오래전에 끝난 거 아니었나요?"
"나영씨...!"
"언제까지 이렇게 저 찾아와서 매번 좋지 않은 감정으로 끝난 윤환선생님 얘기하실 건데요?"
"나영씨, 그렇게 까진 안 봤는데.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가보네요. 그 부모에 그 자식……."
"말이 좀 심하신 듯 하네요."
"내가 뭐 틀린 말 했나요?"
"뭘 잘 모르고 그러시는 것 같은데요. 바람피워서 이혼하고 재가한 내 부모라는 여자도 잘못이지만, 그 여자가 누구와 눈 맞아서 가버린 건줄 알고 그런 말씀 하시는 건가요?"
"그거야, 내 알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시겠지요. 항상 말씀하실 때 보면 자기 입장에서, 자기 판단으로만 받아들이고, 떠드시는 것 같으니까요. 그 여자가 눈 맞은 사람. 바로 윤환선생님 아버지에요. 듣자하기엔 학창시절에 풋풋한 감정이 남아있었고, 우연히 알게 되서 감정이 다시 싹터서 이 지경까지 왔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잘 모르시고 멀쩡한 사람 마구 찔러대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부모랑 자식이 어쩌고 하시는데, 그러는 주희언니는... 부모가 매우 비열하신가 보네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물, 불 안 가리고. 그 사람의 아픈 치부까지 들춰내서 들쑤시는 거 보면."
당황했는지 내 폭탄발언에 한마디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나가버리는 진주희. 결국 모든 걸 말해버리면 속이 후련해져버릴 일을. 뭐한다고 그 사람 입장 생각해서 지금껏 꾹꾹 담고 있었던 건지. 그래, 진작 이렇게 말해버릴걸 그랬어. 이렇게 속이 시원해지는걸... 한시름 던 듯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최우연과 함께 다니던 버릇 때문에 이제 집에 오는 길, 절대 교통수단에 의지하지 않게 돼 버렸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더라도. 걸어오는 게 습관이 돼 버렸다. 집과 가까워질 무렵, 대문 앞에 익숙한 스쿠터와 한 남자의 모습.
"누나."
"김이송."
"많이 늦었네요."
"걸어오느라고."
"여자 혼자 위험하게 밤늦게 걸어 다니지 말아요."
"걱정마라. 나이는 그냥 먹냐."
"그 놈의 나이타령……."
"뭐?"
"누나, 이 말 하려고 기다렸어요. 남자로 누나 곁에 안 되면, 동생으로 누나 옆에서 지켜줄 수 있게만 해줘요. 더 많이 바라지도 않을게요."
"김이송……."
김이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이라면 매몰차게 대하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김이송이 어떤 상황이고, 어떤 배경인지 잘 알고,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게 뭔지도 잘 아는데. 함부로 막 대해버릴 수가 없었다. 이유 모르게 뛰고 있는 내 가슴에 손을 조심스레 얹으며 김이송을 바라봤다. 눈물을 글썽이며 간절히 부탁하는 듯한 표정의 김이송.
'네가 그러면, 내가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잖아, 김이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