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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하나이다
나의 눈이 나의 주님을 심히 보기 원함이여 / 내가 낮에도 밤에도 주를 부릅니다
내가 언제라야 주님께 돌아가며 / 또 다시 그 품에 안길 수 있으랴
내가 주님을 느끼지 못할 때 나는 마치 죽은 듯 하며 / 나의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나이다
내가 언제라야 주님께 돌아가며 / 또다시 그 품에 안길 수 있으랴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하나이다
복음성가 ‘갈망’의 가사입니다.
‘갈망’의 뜻을 국어사전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바라듯이 간절히 바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있고,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갈망을 이루면, 세상천하를 모두 얻은 것처럼 기쁘게 살아가지만, 그 갈망을 이루지 못하면 주변 상황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그의 마음은 끝도 보이지 않는 벼랑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삶 속에서의 갈망도, 그리움도,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의 육체는 서서히 알 수 없는 깊은 병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도 아무리 신앙이 좋고, 열심이 뛰어나더라도 그의 생활 속에서, 그의 마음 속에 갈망이, 그리움이, 소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심령에 깊은 병이 생기는 데, 여기에 하나를 더하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에도 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시골 교회에 믿음이 아주 좋다고 소문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1년 52주 주일 성수를 온전히 하고 십일조를 비롯해서 헌금도 열심히 하고 각 부서에서 열심히 봉사도 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의 남편이 암으로 선고를 받고 몇 달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그 집사님은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윤즉, “내가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이었는데, 어째서 내 남편이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냐?”며 불평을 늘어놓더니, 얼마 후 절에 다닌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오늘의 믿음이 내일의 믿음이 아니며, 지금의 믿음이 잠시 후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요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모곡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님을 향한 소망,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활이 풍요로워서인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서인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불확실한 믿음 때문인지, 하나님을 믿는 다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모곡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렇게 간절한 사모함이 없다면,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이 없이는 하나님도 그 분의 은혜를 베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시107: 9절을 보시면,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분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 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우는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죠? 그렇듯, 하나님도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하게, 간절하게 사모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룻이라는 이방여인이 자신의 고국을 등지고, 시모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룻은 시모를 제외하면,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지역에 와서 살아갑니다. 이 여인이 이곳으로 올 때의 마음은 1: 16 - 17에 잘 나타납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맹세가 있겠나? 싶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룻이기에, 베들레헴에 와서 정착하는 가운데 생계유지를 위해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지역을 탐방 했겠습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도우시면, 나는 죽는다는 배수진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이 보아스의 밭이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룻은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 보아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성군인 다윗의 증조모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룻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변함없이, 간절히 사모하는 주의 백성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간절한 사모곡이 있기를 바랍니다.
13절을 보시면,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룻은 지금 타국에 와서 막막한 생계유지에 나섰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만난,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움으로, 생계문제를 해결하던 중, 보아스를 만나자, 그에게 요청을 합니다. 룻은 자신의 필요를 보아스가 채워줄 것으로 믿고, 보아스에게 자신의 필요를 간절히 요청한 것입니다. 눅 18: 1 - 8을 보시면,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에게 끝까지 요청하는 한 여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재판관도 이 여인의 계속되는 간청을 결국에는 들어주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러한 믿음인데, 과연 세상종말 때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가 있겠느냐?고 믿음을 재차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입니다.
예전에 뵈었던 집사님 한 분은 임대 아파트에서 월세로 계셨습니다.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사시는 분인데, 아파트로 오실 때는 자녀들이 어려서 좁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성장해서 고교를 졸업하니까 이제는 너무 좁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사할 여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매일 예배당에 오셔서 한 시간씩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계속 그렇게 기도하시기에, “그렇게 기도하시면, 무릎도 아프고 힘드니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세요”라고 하자, “의자에서 편히 앉아 기도하면 기도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의자에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지만, 그것이 더 불편해서 통로에 방석을 깔고 기도하는 것이니까, 괜찮아요”라며 기도하신 것이, 약 1년을 변함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정한 시간에 올라와서 기도한다는 이것은,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참 어렵습니다. 그 시간에 별별 상황이 다 일어납니다. 평소에는 텅 비던 시간도 기도를 작정하거나, 성경읽기를 작정하거나 금식을 하거나하면 어째 그렇게 바쁜 시간으로 바뀌던지 작정을 이룰 수 없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이 분은 끊임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 분의 기도하는 모습은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와도 같았습니다. 소리도 없이 숨을 죽이듯 조용하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년쯤되었을 때, 빌라를 싸게 매입해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직장도 바뀌어서 삶의 형편이 훨씬 좋아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왕하 18장을 보시면, 앗수르의 장수 랍사게가 쳐들어와서 히스기야 왕을 위협합니다. 이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는 것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랍사게가 보낸 편지를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 그 편지를 펴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또, 단 6장에 보면,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와서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알고, 다니엘을 시기하던 자들이 공모하여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 넣게 합니다.
히스기야왕이 당한 상황이나, 다니엘이 당한 상황이나 사람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상황을 만든 자들에게 굴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렘 33: 2의 말씀처럼 일을 하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밤 사이에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치셨고,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사자굴 속에 있는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습니다. 이렇게 일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소망을 위해서, 갈망을 위해서 열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속해서 일하시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믿음의 기도는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으로 끌여들여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일하시도록 통촉하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는 그냥 계실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게으르지 않고, 기도에 쉬지 않고, 기도에 인색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함을 들어주시되, 넘치도록 주십니다.
14절을 보시면, 룻은 보아스의 식사 자리에 동참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불리 먹은 룻은 열심으로 보리이삭을 주었습니다. 보아스의 지시에 의해 일꾼들이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흘렸습니다. 17절을 보시면, 룻이 보리이삭줍기를 통해 주은 양이, 한 에바쯤 된다고 합니다. 한 에바는 약 40리터정도입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요청한 것은, 그의 밭에서 추수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룻은 자신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9절을 보시면, 보아스가 룻에게 편리를 제공하자, 10절에서 룻은 보아스에게 엎드려서 보아스의 은혜 베품에 대해 감사해 합니다. 그리고, 좀 전에 본 13절에서 룻은 또다시 보아스에게 은혜입기를 원합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요청하는 은혜가 무엇일까요? 4장에서 나오는 결혼일까요? 그건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룻이 원하는 은혜는 보아스의 밭에서 자신과 시모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에게 룻이 요구한 생계유지는 물론이고, 보아스의 식사자리에까지 동참하게 했습니다. 룻은 이삭을 줍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주인의 식사자리에까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줍기를 마치고, 귀가할 때 보리이삭을 한 에바씩이나 주어서 갔습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넘치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영광의 식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주님의 잔치 자리에 초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마 15: 32 - 38을 보시면, 예수님께 말씀 듣는 것이 좋아서 3일이나 따라다니던 무리들에게 식탁을 차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떡 일곱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사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어린 아이까지 모두가 배 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여러분! 이 영광의 자리, 이 기적의 현장, 천국의 식탁에 참석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일단 민생고부터 해결하자, 아니면, 자신에게 발생한 다른 일부터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익, 자신들의 편리를 먼저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를 사모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여지는 보아스라는 사람을 통하여, 본문은 광야에서 커다란 식탁, 모든 사람들이 와서 배불리 먹고도 남기는 충분한 식탁을 베푸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요청하는 것보다 더 크고 풍성하게 주십니다.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듯이 풍성하게 줍니다.
세계 기독교 실업인협회 CBMC의 회원인 릭 복스는 자신의 친구 래리가 겪은 일에 대해 이렇게 간증을 하였습니다.
나의 친구 래리가 하는 사업은 과거 여러 해 동안 지속된 경제적 혼란으로 인하여 파탄에 이른 산업이었습니다. 2009년 12월 초에 그 회사의 전망은 그 해에 어림잡아 4만 불의 손실을 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좌절감에 빠지고 의기소침한 나머지, 래리는 경영 팀을 소집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 했습니다. 그 팀의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동의하였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일은 모두 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그들의 낙관적인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지혜, 인도, 그리고 공급하심을 구하여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래리는 하나님께 세밀하게, 경건하게, 점잖게 조용히 기도드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그리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소리내어 하였습니다. “주님, 1불 – 올해 저희가 최소한 1불의 이익이라도 내게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에 래리와 그의 팀은, 결산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공급하여 주신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그 달을 마감하면서 결산을 하고 보니, 최종 실적은 21,000불의 이익을 내었습니다. 래리가 소박하게 요청한 1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렘 33: 2에서 말씀하신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께서 래리와 그의 경영팀의 간구를 들으시고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신 28: 1 - 6을 보시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나는 물론이고, 내게 속한 그릇까지도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넘치게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지 못하며,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많은 일들 즉, 하나님의 능력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갖고 있습니까? 혹시, 그러한 일들, 그러한 능력들이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를테면,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든가, 부활이라든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일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예전에 어떤 분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처럼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면서 바나나보트 같은 튜브를 2개 만들어 스키를 신 듯 발에 착용하고는 양 쪽 손에 노 역할을 하는 스틱을 가지고 한강 위를 걸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부활, 물 위를 걸으심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전혀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사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물 위를 걸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 그의 백성, 그 분께 부르짖는 자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무궁무진한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사모곡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약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전 15: 19을 보시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대한 사모곡이 우리의 생활 속에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진 분을 곁에 두고도 믿지 못한다면, 그 분의 능력을 끌어서 사용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불쌍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원하기는, 하나님께선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되, 넘치게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마음에, 생각에, 손과 발에 각각 각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간절히 사모하여 그 은혜를 받는 비결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도가,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하는 것이라면, 간구는 말그대로 우리의 간절함을 담아서 하나님께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기도라도 ‘간구’가 가지는 의미는 더 강합니다. 잠 8: 17을 보시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합니다. 마음에 두는 연인이 생기면, 일상 생활 속에서, 꿈 속에서 조차 그 연인을 생각하듯, 그리고 그를 만나기를 즐거워하듯,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 우리의 그리움, 우리의 사모곡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 중에도, 운전을 하는 중에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에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아뢰는 것입니다.
사 55: 6을 보시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였고, 시 46: 1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하였으며, 잠 8: 17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날마다 그리워함으로,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며, 우리를 등진 하나님이 아니시며, 우리의 간구, 우리의 소망을 듣기를 즐거워하시고, 또 그것을 이루고자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활 속에서 찾고, 만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간절하게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