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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황 그레고리오1세(Papa Gregorius)
540년:이탈리아 동고트 로마에서 로마귀족의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부친,고르디아누스와 모친 실비아 사이에서 출생(동생1명이 있으나 전해지는바 없슴)
573년:로마시장(Praefectus urbi)
574년:성 안드레 수도원 수도사 생활
578년:콘스탄티노폴리스 특사
579~585년:로마교황 사절
586년:성 안드레 수도원 원장, 교황청 교황비서역
590년09월03일~604년03월12일:64대 로마교황, 대교황(Gregorius Magnus), "하나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을 교황의 공식명칭으로 사용
그레고리오선교:잉글랜드 앵글로색슨족선교, 네덜란드 선교, 독일 선교 등 각국 선교사 파견
597년:잉글랜드에 선교사 파견
수도생활을 체험한 최초의 교황, 라틴교부의 마지막 교부, 교회학자, 기독교 전례의 아버지
저서:욥기주해(Magna Moralia,591), 사목규범(Liber Regula Pastoralis,591), 이탈리아 수사들의 대화록2권, 성 베네딕토의 생애2권(Dialogues), 4대복음서강론(Homilae xl in Evangelia,593), 아가서강론(Expositio in Canticis Canticorum), 열왕기 상권 주해(In Librum primum regum expositio),그레고리오의 서신854편
604년03월12일:선종
604년:성인으로 시성
(1) 그레고리오(Sanctus Greogorius Magnus)의 생애와 신앙
그레고리오는 주후 540년 동로마 동고트 첼리오 언덕의 대저택(Villa suburbana)에서 로마귀족의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부친,고르디아누스와 모친 실비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은 "파수하다", "지키다"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로 그는 고조부인 교황 펠릭스 3세에 이어 두번째로 선출됨으로서 카톨릭의 명문가문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의 격변기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두살 되던 해인 542년, 동로마제국에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이탈리에 까지 전염됨으로서 국가적으로 기근과 공포가 만연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3분의 1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정치 사회적인 혼란까지 가중되어 국민적 충격이 매우 컸던 시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 540년대의 이탈리아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고트족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으나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로마제국의 영토로 복속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살았던 그레고리오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부친의 정계은퇴로 시칠리아와 로마를 오가는 등 554년 로마가 평화를 회복까지 까지 정치적 격변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고등교육을 수학하였으며 문법, 변증법, 수사학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라틴어 전문가로서 라틴문학, 자연과학, 역사, 수학, 음악과 제국법에 능통함으로서 인문사회과학을 비롯된 예술의 영역까지 그는 천재적인 학문적 소양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소양과 부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570년에는 로마의 재정과 방어,보급과 행정 등을 주관하는 로마시장(로마지사,Praefectus urbi)의 지위에 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로마와 게르만계, 동방과 서방, 그리고 고대와 중세의 경계선에 위치한 인물로 평가 받음으로서 중세교회사의 출발점에 관련한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하였습니다
유년시절 그레고리오는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실비아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특히, 부친인 고르디아누스가 사망한 후로는 첼리오 언덕에 위치한 자신의 대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축하여 성 안드레아 사도를 기념하는 수도원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수도 생활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수사가 된 그레고리오는 관상생활과 관상기도에 심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쉼"이란 의미로 관상 또는 높은 차원의 묵상은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것과 같은 고요함으로 마음까지 침묵에 이르는 상태로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의 수도사관은 "우리 창조주만을 바라보며 열정적으로 집중하여 추구하는 것"이라고 전할 만큼 묵상과 성경공부에 힘을 쏟았는데 특별히 그 가운데서 라틴교부들의 문헌과 고행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수도사 시절, 그와 함께 수양중이던 수도사가 임종을 앞두고 생전에 금화 3개를 훔친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레고리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그 수도사의 임종을 고독사로 마감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정죄함으로서 죄에 대한 경종을 울리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레고리오는 연옥에 있을 수사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의 보속을 모두 갚아 천국에 갈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서른대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연옥은 기독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은 단계의 상태로 천국에 이르지 못하여 죽음에 이른자들에 일정기간 동안 치리를 받는 것으로 카돌릭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있으나 기독교에선 이단사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후 교황 펠라지오 2세는 그레고리오를 부제(기독교의 성직자 또는 안수집사)로 서품하고 이탈리아 북부교구들의 갈등해결의 책임자로 맡겼고, 578년에는 롬바르드족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원조를 요청하기 위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절단에 임명하였습니다 이듬해인 579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교황사절로 임명하는 등 교황청으로부터 신임을 받으며 활동하였으나 펠라지오 2세가 지시한 목표들 가운데 어느 것 한가지도 뚜럿하게 달성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인맥을 확대해 나가는 한 편, 도시지역의 상류층과 귀족 여성들로 부터도 많은 지지를 받으면서 그들의 영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하여 나갔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에우티키우스와 유명한 논쟁을 벌여 승리하였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부활한 이후에도 여전히 손으로 직접 만질수 있는 상태의 존재가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시 이 논쟁은 티베리우스 2세가 에우티키우스의 이론서들을 불태우라는 지시가 있기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후 그레고리오는 그가 설립한 성 안드레 수도원의 원장으로 돌아갔으나 590년 로마 전역에 퍼진 전염병으로 인하여 펠라지오 2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의 후임자로 만장일치 추대되면서 590년 9월3일 제 64대 교황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가 수도원의 원장으로 되돌아 간것은 세상의 여러가지 송사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고, 또한 교황이 되면 교황직의 업무 중압감으로 인하여 관상기도와 성경묵상의 생활에 지장을 초래 할 것을 우려하여 기피한 사유도 있었으나 오히려 이러한 순수한 모습이 그를 만장일치로 추대하게 하는 근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황에 취임한 그레고리오는 전염병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로마시민들을 위로하고 성 베드로대성전에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영묘에 이르는 행로를 이어가며 3일간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례의 기도가 마칠때즘 미가엘 천사가 나타나 하드리아누스의 묘위에서 칼을 들고 맴도는 환상을 그레고리오가 본 후 전염병이 종료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레고리오 1세는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미가엘 청동천사상을 세워 후대에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는 당시 서방지역에 위치한 주교들의 출신성분이 모두 지역의 대지주 가문에서 나와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교황 젤라시오 1세부터 관습적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급기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스스로를 "세계 총대주교"라 칭하여 카톨릭의 지배구조를 이원화 하려하였습니다 이에 그레고리오 1세는 칙서를 통하여 교황을 "하나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함으로서 교황권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확고히 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좌는 모든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전체 교회의 관심과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위임되어 있으므로 따라서 교황은 신앙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각 주교는 지역의 사목권을 유지하지만 교황의 권한 위임으로 예속되어 있으며 총대주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세의 교황권은 교회를 물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봉사와 섬김의 직분으로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는 교황의 공식적인 칭호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시내 광장 노예시장에서 잉글랜드에서 잡혀온 포로들이 매매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북유럽지역의 비기독교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 복음화에 주력하였는데 이것을 그레고리오 선교라고 칭하였습니다 597년, 그레고리오 1세는 잉글랜드에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켄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와 동료 수사 40명은 잉글랜드 교회의 창시자들이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복음화가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켄터베리 교구를 수좌교구로 2개의 대교구와 12교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레고리오 1세는 네덜란드와 독일에도 선교사를 파송하여 이 지역의 국가에 기독교가 정착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의 선교전략은 토착신앙을 제거하고 미신과 우상숭배를 타파함으로서 토착민의 정신적 원리의 근본을 해결하는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앞세웠습니다 즉, 그들이 믿는 토테미즘과 미신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어떤 것을 주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논쟁함으로서 젊은 세대들에게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세는 이전에 없었던 성당내 조각상과 성화 등과 같은 예술품을 신앙에 도움이 되고 성경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이유로 지지하고 도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후대 성당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근거가 되었으며, 그레고리오 1세의 칙령을 기초로 많은 조각상과 그림들이 성당내에 게시되기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 경배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미사의 많은 요소를 수정하거나 추가하는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 미사전문"이 끝난 후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빵나눔" 예식을 거행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미사에 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로마 미사 전문"에는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Hanc igitur)라는 구절을 첨부하고, 미사 시작시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Christe eleison),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를 각각 세번씩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개혁된 성사 예식들을 ‘그레고리오 성사’(Sacrementaria Gregorian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들의 전례 양식과 축일, 전례력이 각각 변경되어 수많은 기도문들이 만들어 졌고 "로마 미사전문"과 본기도와 감사송도 여러가지 내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중세의 교황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중세 영성의 출발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는 라틴교부의 마지막 교부라고도 불리워 지고 있으며, 대교황이라는 칭호와 함께 선종 이후에는 즉시 성인으로 시성될 만큼 국민적 존경과 존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의 많은 교황들보다 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 저서를 통하여 "기독교 전례의 아버지"라고 불리워 지고 있습니다
(2) 성례론(聖禮, Sacrament)
성례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세례와 성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모세가 결례(레위기14:1,9)를 행한 바가 있고, 신약성경에서도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요한복음1:33)를 준 사례가 있으나 예수님의 세례는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마태복음28:19)를 주라고 명함으로서 이전의 세례와는 개념이 다른 차원의 세례가 주어졌습니다 성찬예식도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하루전날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을 속제의 희생물로 드릴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신 예식이었습니다(마태복음26:26~29)
그러나 그레고리오의 성례의식은 기독교의 세례와 같은 의미의 "영세"(성세성사, 聖洗聖事,Baptism)와 성찬예식과 의미가 같은 "성체성사"(聖體聖事,Eucharist)외에도 5가지가 추가 되었습니다 즉, 세례를 베푼 후에 그것을 다시 확인하는 성례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론이 교리화한 "견진성사"(堅振聖事,Confirmiiation)와 사제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도가 범한 죄를 사제의 권위로 사해주는 "고해성사(고백성사,告白聖事,Penance)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여간의 혼인과 관련된 예식으로 "결혼성사"(혼인성사,婚姻聖事,Matrimony)라고 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네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결혼은 반드시 남여간에 이루어져야만 하며, 둘째, 남여 모두 결혼전 순결한 관계가 되어야 하며, 셋째, 남여가 모두 신앙인이어야 하며, 넷째 이 성사는 사제 앞에서 거행되어야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교회의 사제로 성사와 미사집전, 교회봉사직 임명과 관련된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 교회의 모든 직무는 거룩하므로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예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신품성사"(神品聖事,Ordination)로 성례를 드립니다 그리고 임종을 앞두고 있는 성도에게 모든 죄에 대하여 회개와 신앙을 확인하는 것으로 "병자성사"(종부성사,終傅聖事,anointing of the sick)가 행하여 짐으로 일생동안 7번의 성례가 주어집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성례론을 시행함에 있어서 모든 신앙의 행위를 말씀보다 예식 위주의 사제주의 경향에 치우침으로 말미암아 연옥설을 받아 들이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연옥은 경미한 죄는 심판대 앞에 서기전에 연옥의 불로 정화하고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터무니 없는 이론에 심취됨으로서 중세기독교 사상에 많은 공헌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갈리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