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와 베트남 여행 2008년 8월 22일부터 27일까지
*고풍이 짙은 킴보디아 앙코르 왓트
2008년 8월 22일 새벽 4시 전용버스로 광주역에서 출발하여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버스가 서해안고속도로로 접어들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길 교통사고가 목격되기도 한 안 좋은 날씨였다. 인천공항에서 10시 50분에 베트남의 호치민으로 출발 하는 비행기 편을 이용하여 약 5시간의 비행으로 호치민에 갔다. 출발할 때 날씨는 안 좋았으나 비행기가 하늘에 오르니 날씨가 나쁜 것과는 상관없었다. 호치민에 가까워지면서는 하늘에 펼쳐진 구름이 장관이었다. 하얀 뭉게구름이 각가지 형상을 이루며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구름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산천, 바다, 섬들도 아름답게 보였다. 호치민시는 이번 우리여행에 경유지였다. 따라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것으로만 구경했다. 옛 이름이 사이공으로 월남 전쟁 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전체적으로 아파트 같은 것도 없고 큰 건물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법 큰 도시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공항도 허술하지만 국제공항이었다. 공항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고 두 시간 정도 머물렀다가 캄보디아의 씨엠 립(Siem Reap)으로 갔다. 한 시간정도의 비행이었다.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에는 한국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빈자리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행 중에 여자들은 누워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는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고 만석이었다. 유명관광지로 가는 실감이 났다. 한국과 캄보디아, 베트남은 두 시간의 시차다. 캄보디아에 도착시간이 한국시간으로 오후 6시 반이었지만 현지 시간은 4시 반이었다. 두 시간의 이익을 얻은 셈이다.
도착 후 가이드를 만나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첫날의 일정은 비행기만 타고 호텔까지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캄보디아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왕이 있는 왕국이고 수상이 행정부의 수반으로 실권자이며, 인구는 2,500만, 면적은 181,850평방킬로미터로 남한면적의 1.7배, 빈부의 격차가 심한나라이며 소승불교의 나라라고 했다. 시간이 많아 잠을 충분히 잤다.
다음날인 23일 아침기상시간은 6시 30분이었다. 한국시간으로는 8시 30분이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일행의 모습에는 피곤함이 전혀 없고 모두 생기가 있었다. 유명관광지에서의 기대가 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날씨가 무더웠다.
먼저 앙코르 왓트에 갔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앙코르는 뱀의 왕국이라는 뜻이고 왓트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뱀의 왕국사원에 간 것이다. 사원의 둘레에는 길이 5.6km, 폭 200m인 해자호수가 있고 다리를 건너 사원으로 가게 되어 있다. 서에서 동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다리라고 했다. 사원의 길이는 1.5km, 폭이 1.9km라고 한다. 부근 도로공사의 90%를 일본이 해 주었고 대신 이 나라의 자원을 많이 가져간다고 했다. 입구에 뱀들로 된 커다란 돌로 만든 형상이 있다. 원래는 힌두교사원이었는데 불교사원으로 바뀐 것이라 한다. 사원으로 가는 길 좌우에 도서관이라고 한 쌍둥이 건물이 있다. 사원에 들어가는 문도 왕, 귀족, 평민에 따라 다르고, 3층으로 된 사원의 1층은 미물의 세계, 2층은 사람의 세계, 3층은 신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급경사 계단을 오르는 3층은 보수공사관계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우리는 주로 2층을 보았다. 커다란 돌덩어리를 쌓아 놓은 것 같은 사원의 복도 길이가 100m넘는 것들이 이곳저곳으로 뻗어 있고 복도의 벽에는 각종 벽화가 조각되어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90%이상이 문맹인 시대에 그림으로 가르쳐주는 방법으로 조각된 것들이라고 한다. 사원에 사용된 모든 돌은 182km 떨어진 수농골짜기에서 운반해온 것들이라고 한다. 313년부터 350년 사이에 시아바르망(?)왕에 의해 건축된 사원이다. 가이드는 중간 중간의 벽화를 보면서 역사적 사실들을 열심히 설명해 준다. 주로 전쟁이야기이고, 왕권쟁탈전 이야기이고, 천상의 세계와 지옥의 세계 이야기들이다. 선명치도 않은 칙칙한 벽화에다가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들이고, 날씨는 무덥고 땀이 온 몸에서 줄줄 흐르고 있으니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그만하고 가자느니, 말 하지 않겠으니 그만하라느니, 아예 듣지도 않고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 먼저 앞에 가서 그늘에서 쉬고 있는 사람 등 눈치 봐 가면서 안 좋은 모습들이 많았다. 7,8명 정도가 그런대로 들어주고 있었다. 가이드는 상관하지 않고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인지 옷이 땀에 다 젖었는데도 계속 설명을 해 주었다. 설명은 듣지 않아도 가이드 옆에 가서 부채질을 해주는 사람, 파라솔을 씌워주는 아줌마도 있었다. 이동하다가 큰 나무그늘에서 가이드가 근처가게에서 야자수열매를 사 주었다. 두 사람당 1개씩 먹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먹어보고 싶은 것이었기에 나는 감사히 먹었다. 별로 맛은 없었다. 약간의 단맛도 있었지만 메키한 것 때문인지 조금씩 맛만 보고 거의 먹지 않았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가서 더 못 사게 하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이 손에 거는 팔찌 같은 것을 가지고 사달라고 몰려오기에 야자수를 먹으라고 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먹지 않았다. 앙코르 왓트에는 비슷한 모양의 돌로 된 건물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부속건물들인지 모르나.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모양은 모두 같았다. 3층으로 된 돌 건축물들이다.
벽화를 하나하나 이어가면서 이야기를 엮어 가면 전쟁소설 몇 권 쯤은 쉽게 만들어질 것 같았다. 훌륭한 예술작품이란 보면서 많은 생각,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앙코르 왓트의 벽화들도 모두 훌륭한 예술작품들일 것 같은데 무더운 날씨 탓인지, 무식한 탓인지 우리는 그 가치를 다 알지 못하고 만 것 같은 생각이다. 시커먼 독뎅이만 몽땅 쌓아 놓았구먼, 보는 것이 맨 독뎅이 뿐이여, 그런데 이런 것들을 어떻꾸럼 다 만들었을까?, 징허게 많네, 가도 가도 끝도 없네, 더운 날씨에 사람 많이 죽었겠구만 등등 말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앙코르 왓트를 돌아보고 다음목적지인, 타프롬 사원으로 갔다. 또 사원인가 싶어 흥미가 없었으나 그곳은 나무를 보러 가는 곳이었고 신기한 나무가 많았다. 쓰뿡나무, 불교에서는 반야나무라고 한 것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사원을 건축하기 위해 나무를 잘라야 하는데 나무들의 뿌리가 돌 위로 계속 뻗어가서 그대로 놓아둔 것이라 한다. 5-600년 정도 된 나무들이 그 지역에서는 별로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무들은 크고 울창했으며 돌담이나 건물 벽에 길게 각가지 모양을 하며 뻗어 있는 뿌리들이 장관이었다. 사진들을 많이 찍는 것 같았다. 사원은 어떤 왕이 자기 어머니가 불량하다는 평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변명으로 처음에 흰색으로 건축했는데 색이 발해서 지금의 돌 색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다음으로 크메르왕국의 마지막도시라는 앙코르톰으로 이동했다. 평민들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남문으로 들어갔다. 입구 도로 왼쪽에 선신, 오른 쪽에 악신의 돌상들이 50개씩 도열 해 있다. 모습을 비교 해 보았으나 내 눈에는 선신이나 악신의 모습이 모두 비슷했다. 앙코르톰은 길이와 폭이 3km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 바이욘 사원이 있다, 그 외에도 바프욘사원, 코끼리테라스, 레퍼왕테라스 등이 있었으나 일행들이 모두 지쳐있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돌아보아야했다. 사원들은 앙코르 왓트와 같이 3층으로 되어 있고, 다행이 벽화가 많지 않아 설명이 많이 필요 없었고 건물의 뼈대만 남은 돌기둥들이 각가지 모양으로 많이 있어서 기둥사이를 돌아다니며 여러 모습들을 보았다.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 샤워를 한 후 안마를 받으러 갔다. 기본 1시간에 옵션으로 1시간을 더해서 두 시간의 안마를 받았다. 하루의 피로를 모두 푸는 것 같았다.
저녁식사는 캄보디아의 민속춤을 추는 압사라(천사라는 뜻)민속 쇼를 보면서 뷔페식사를 했고, 저녁에는 망고를 비롯한 현지과일 맛도 볼 수가 있었다. 호텔에 수영장이 있기에 마침 수영복도 준비해 간 것이 있어서 잠시 수영을 즐기기도 했다.
3일째인 24일 일요일의 관광은 호수가에서부터 시작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인공호수로 제일 크다는 바라이호수에 갔다. 시내를 통과해 가는데 집집마다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집에 다섯 가지 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열매도 먹지만 뱀이 접근 못하도록 바나나 나무를 심는다. 바나나 냄새를 뱀이 싫어한다고 한다. 벌레 같은 것에 물리면 응급처치로 쓸 수 있는, 일종의 상비약제로 뽕나무, 잡 벌레 등을 예방해서 농사에 도움을 주는 고무나무, 열매 줄기 잎 등 버릴 것이 없는 생활에 필요한 야자나무, 여성에게 필요하고 오일을 채취하는 팜나무를 많이 심는다는 것이다.
바라이호수는 폭이 2.5km, 길이가 8km인 호수라 한다. 배를 태워주려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갔는데 호수가의 유원지 같은 곳에 가서 메추리와 개구리 구운 것을 사주며 맛보라고 했다. 너무나 불결하고 허술한 천막에서 각가지 생선이며 귀뚜라미, 개구리, 메추리 같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특이한 요리들을 즉석에서 구어 팔고 있었다. 가이드가 사 준거라 해서 맛은 보았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냄새는 안 좋으나 부드러운 과일을 맛보게도 했다. 부드럽고 맛도 괜찮아 한 조각 먹었는데 그 여운이 상당히 오래갔다.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다. 배를 태워주려나 기대했는데 호수에 배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저분한 유원지의 구경이었다.
다음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자연호수로 가장 크다는 톤레삼 호수에 갔다. 씨엠 립은 조그만한 도시로 시내에는 제대로 된 특이한 모습의 주택들이 있고 가게들이 있다. 그런데 시외로 나가 보이기 시작한 집들이 이상했다. 나무기둥 몇 개 세워놓고 기둥 중간쯤에 사각형의 바닥에 빙 들러 가마니 같은 것을 막아놓은 집들이 도로변에 즐비했다. 호수 위에 수상 가옥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가난한, 너무나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모습이었다. 톤레삼 호수에서는 유람선을 탔다. 물속에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숲 사이로 뱃길이 있다. 숲길을 빠져 나가니 멀리 수평선이 보인다. 바다도 아닌 호수에 수평선이다. 호수 끝까지 가려면 우리가 탄 배로 12시간을 가야된다고 한다. 고속으로 가는 배도 6시간이상 걸린다고 한다. 과연 큰 호수임을 알 수 있었다. 물속에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것도 신기하고, 많은 사람들이 물위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는 신기한 모습이다. 물위에 학교가 있고 교회도 있었다. 배에 물건을 싣고 다니는 장사도 있다. 식당도 있고 카페도 있다. 규모가 큰 한 카페에 올라 음료수를 사 먹으면서 잠시 구경을 했다. 기념품가게가 있고, 고기를 잡아 가두어놓은 곳에는 많은 고기가 있다. 많은 악어를 넣어 놓은 곳도 있었다.
시내에서 호수까지 가는 2차선 포장도로는 김혜자도로라고 했다. 탈렌트 김혜자씨가 사비로 도로를 만들어준 것이라 했다. 일본사람들이 만들어준 도로나 건물은 많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이라 한다.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 김혜자씨가 큰일을 한 것이다.
다음에 새로운 사원이라는 뜻을 가진 왓트마이에 갔다. 350개의 해골을 넣어둔 탑이 있었다. 절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굴한 해골들이라고 한다. 150여개는 승려들, 100여개는 부유층 사람들의 해골이라는 것이다. 크메르루즈(캄보디아 빨갱이라는 뜻)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람들이다. 해골탑 옆에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는 사진들을 전시해 놓은 게시판이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문들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사진들이다. 프놈펜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옮겨서 전시해 놓은 것이라 한다. 프놈펜까지는 거리가 멀어 못가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작은 킬링필드 왓트마이라 했다. 캄보디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공산당에 의한 무지막지한 살상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지금은 왕이 있지만 상징적이고 수상이 행정부 수반인 민주국가라 한다.
캄보디아는 너무나 못사는 후진국이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거지가 손을 벌리고, 어린아이들, 너무나 어린아이들이 별 필요도 없는 장난감 같은 울긋불긋한 팔찌 같은 것을 들고 1달라를 외치며 달라붙었다. 물이 귀한 나라라고는 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씻어 본적이 없을 것 같은 몸이며 옷을 입고 있다. 그럼에도 사는 모습은 불만이 별로 없다고 한다. 못 살아도 생활에 만족하며 산다는 것이다. 생활만족도 조사에서 세계에서 방글라대시가 1위이고 캄보디아는 3위였는데 지금은 11위라고 한다. 산유국이지만 정유기술이 없어 원유를 수출하고 정유된 기름을 다시 수입하기 때문에 기름값도 비싸다고 한다. 거리에는 오토바이가 많고 오토바이가 끌고 가는 수레가 택시 역할을 한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여 잘 사는 사람은 굉장히 잘살기 때문에 거리에 고급차도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교민은 일만 여명 거주하는데, 선교사가 3,000여명,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2,000여명이라고 한다.
캄보디아 관광을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오후 7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로 베트남의 하노이로 갔다. 두 시간 정도를 날아가 밤 9시가 넘어 하노이에 도착했고, 곧 버스로 바꾸어 타고 하롱베이를 향해 갔다. 3시간이 더 걸리는 하롱베이까지 가는 길에는 비가 많이 왔다.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잠자리에 들면서 시계를 보니 밤 12시 40분이었다.
*자연의 극치 하롱베이(Ha Long Bay), 그리고 영웅의 흔적 하노이
여행 4일째인 8월 25일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창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산으로 둘러싸인 바다가 호수처럼 넓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웠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 먼저 찍었다. 그리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자연의 관광에 대한 기대가 되었다.
아침 9시경 유람선에 올라 5시간 동안의 선상관광이 시작되었다. 하롱베이는 바다임에도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300여개의 섬이 바람막이가 되기에 소금냄새가 없고, 파도가 없으며, 작은 고기가 없어서 갈매기가 없다.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보며 중국 장가계에 있는 보봉호가 생각났다. 보봉호를 확대해 놓은 것 같았다. 물론 산의 오밀조밀함은 장가계만 못했지만 봉우리들이 깨끗하게 죽죽 솟아 있는 모습들이 아름다웠다. 바다이지만 섬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커다란 호수 같았다. 섬들은 무인도이지만 나무들이 많았고 고르게 뻗어 내린 절벽들이 청초했다. 섬 가까이를 배가 돌아다닌다. 석회암동굴이 있는 섬에 내려서 동굴 안에 들어가 보았다. 동굴 입구에 커다란 그림이 있고 그 밑에 영어로 Vote for Ha Long Bay to be one of 7 natural wonders of the world.라는 글이 있었다. 전날 비가 와서 동굴 안은 축축했고 위에서 물이 많이 떨어져 비가 오는 것 같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물이 고일 수가 없기 때문에 물기가 없다고 했다. 가이드는 동굴안의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용의 모습, 사자, 개, 코끼리,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 물소, 세종대왕, 로미오와 줄리엣, 등등 설명을 계속했다. 다시 배에 올라 유람을 계속하다가 띠톱섬이라는 섬에 올라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아마 주변경관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섬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인 것 같았다. 오르는데 15분정도 걸렸지만 더운 날씨에 돌계단으로 되어 있는 급경사 길을 올랐기에 땀이 많이 났다. 점심은 선상에서 유명하다는 다금바리회를 곁들인 식사였다. 옵션으로 3만원을 별도로 부담했다. 술이 곁들이고 과일도 있었다. 일행들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선상에서 춤을 추며 즐기기도 했다.
선상유람을 끝내고 호텔에 가서 샤워를 한 후 발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여행 중에 마사지를 받는 것도 좋았다. 젊은이들이 최대한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안쓰럽기도 했다. 저녁식사 후에는 야시장구경을 했다. 넓은 시장에 사람이 없었다. 우리 일행만 잠시 둘러보았다. 물건 값을 물으면 계산기에다가 표시를 해 보였다. 사지 않으려하면 얼마면 사겠느냐고 묻는다. 5달라 불러놓고 3달라하자고 하면 그대로 팔았다. 10달라 해 놓고 5달라에 흥정하면 그대로 주었다. 흥정하는 방법이 재미있게 보였다.
호텔에 돌아와 집으로 전화를 했다. 캄보디아에서는 1분에 1달라였는데 베트남에서는 2달라를 주어야 했다. 베트남이 더 잘 사는 나라이기에 물가가 더 비싼 것을 알 수 있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어린꼬마들이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라고 귀찮케 했는데, 베트남에서는 성인들이 진주목걸이를 손에 많이 감고 다니면서 사라고 했지만 귀찮케 하지는 않았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생활이 차이가 상당히 많겠다는 짐작이 되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인 8월 26일은 하노이 관광이다. 아침 7시 30분 호텔을 출발하여 하노이를 향해가다가 잠시 하롱베이 재래시장에 들렸다. 모든 물건은 그날 아침에 가지고 와서 그날 소모시킨다고 했다. 냉장고가 없다고 한다. 그런대도 자외선이 강해서 세균을 죽이기 때문에 고기 같은 것이 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후조건이 파리모기 같은 해충도 없다고 한다. 시장 안은 냄새나고 지저분했지만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장이 열리기에 아침을 여는 나라라고 가이드가 표현을 했다.
중간에 곰 농장에 들렸다. 커다란 곰들이 많이 있었다. 곰 한 마리를 마취시켜가지고 초음파로 내장을 보면서 웅담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 눈으로 보고 가짜가 아님을 확인하고 웅담을 사라는 것이었다. 별로 살 생각을 않으니까 반 강제적으로 사라고 한다. 채취해 놓은 것을 모두 소비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 앞에서 한 것이므로 우리가 다 사가야 된다는 식이었다. 나는 중간에 나와 버렸지만 강요에 못 이겨 상당수가 사 가지고 온 것 같았다. 동남아여행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일들이 예외가 아니었다. 여행 내내 가이드들의 쇼핑 강요행위는 근절이 안 되는 듯하다. 조건이 안 좋은 해외에 나가 있는 가이드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르나, 우리나라 가이드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도로변에는 벼가 자라는 논이 많았다. 3모작까지 한다고 한다. 쌀 생산이 태국 다음으로 세계 2위라고 한다. 밭은 없었다. 산간지역에 가야 밭이 있다고 한다. 논 가운데 가끔씩 가족묘가 있는 것이 보인다. 묘가 논에 있는 것이다. 습도가 많아 잘 썩지 않기 때문에 논에 묘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집은 모두 앞이 길을 향해 지어져 있다. 방 한 칸 정도의 좁은 건물이 2,3층으로 되어 있다. 지반이 약해서 집들이 모두 붙어있고 골목이 거의 없다. 집안에는 습도와 벌레들 때문에 모두 침대와 식탁을 사용한다고 한다. 하노이에 가까워지면서는 산도 없다. 길은 계속 평지였다. 고개 길이 없다. 베트남도 국토의79%가 산인데 모두 서쪽에 치우쳐 있다고 한다. 가는 길 도중에 휴게소가 있었다. 휴게소에 커다란 마트가 있었다. 한국인이 베트남 사람과 합작으로 세운 마트라 했다. 각가지 물건들이 있었고 종업원들이 모두 한국말을 잘했다. 한국인 종업원도 많았다. 한국의 어느 마트 같았다. 베트남은 도자기산업이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자기를 많이 수입해 간다고 한다. 지하자원도 많이 있지만 전쟁이 많아서 제대로 개발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데 최대기업은 우리나라의 금호그룹이라고 했다. 금호건설을 비롯해서 호텔, 타이어 등 여러 분야에서 진출해 있다고 한다. 베트남 대학생들의 취직선호기업도 금호가 1위라고 한다. 그만큼 대우가 좋고 전망도 밝다는 것이다. 금호가 우리 고장의 연고기업이기에 듣기에 흐뭇했다.
하노이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호치민 광장에 갔다. 호치민 시신을 미이라로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 있고, 100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을 때 쓰인 건물로 주석부, 호치민의 관저, 초라한 집무실, 호치민 박물관, 한 기둥 사원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둘러보았다. 숲 속에 건물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날씨가 더워 그늘로 다녀도 힘들었다. 가이드도 건성건성 했다.
호치민은 20여 년간 세계 모든 지도자들이 닮고 싶은 사람 1위에 있다고 한다. 나라와 백성들과 결혼했다고 하면서 독신으로 살았고, 친인척은 하노이 사방 100km이내에는 살수도 없고, 출입시에도 허가를 받게 했다고 한다. 유언으로 화장할 것과 장례식에서 돈을 받지 말고 조문객에게는 묘목을 한그루씩 나누어 주며, 자신의 동상을 만들거나 교과서에 싣거나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유언과 달리 시신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고 동상도 있고 박물관도 있으며 여러 가지로 그를 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지도력은 54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베트남을 단결시켰고,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침략자 일본을 물리쳤고, 유명한 월남 전쟁에서 미국을 이겨냈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가 베트남이다. 듣기만 해도 훌륭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하노이는 면적이 서울의 1.5배이나 인구는 400만 정도이다. 신시가지에 아파트가 많이 있고 지금도 계속 건축 중임을 보았다. 시내에 커다란 홍강이 흐르고 있다. 3조원에 달하는 홍강 개발 사업을 서울시가 맡았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한강을 그 개발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호치민 광장을 나와 라텍스 판매소에 쇼핑을 위해 들렸다가 마지막관광지인 수상인형극을 보러 갔다. 아마 하노이의 번화가를 지나간 것 같았다. 오토바이가 거리에 많다는 것을 보고 왔지만 그렇게 많은 오토바이 물결은 우리 일행을 놀라게 했다. 자동차도 많이 있지만 도로의 공간을 오토바이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차창 밖에 펼쳐진 오토바이 행렬을 보고 버스 안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개미떼들 장보러 간 것 같다는 등 어메, 오메 하면서 야단들이다. 신호등에 걸린 오토바이 행렬이 늘어선 것들도 장관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고 야단들이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오토바이 행렬을 한참 구경하다가 수상인형극장으로 들어갔다. 인형극은 조그만한 연못을 만들어 놓고 물위에서 사람, 용, 오리, 물고기 모양 등의 인형들이 나와 각가지 묘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린이를 위한 것 같았다.
인형극을 마지막으로 보고 늦은 저녁식사를 한 후 귀국을 위해 하노이공항으로 이동했다. 현지시간 11시25분,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밤 1시 2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 편으로 약 4시간 을 날아오니 27일 아침 5시가 약간 지나 인천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잠을 설치고 왔지만 마중 나온 버스에 올라 귀가하는 버스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잠을 자자고 해도 서로 가장 재미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음악에 맟춰 춤을 추기도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니 낮 1시가 약간 못된 시간이었다. 하노이에서 광주 집까지 1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참 좋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홋가이도(북해도) 3박 4일 여행기 2010년 7월 1일 - 4일
*7월 1일 목요일 - 첫째 날
2010년 7월 1일 목요일에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 홋가이도 여행길에 올랐다. 아침 5시 10분에 수원에서 출발하는 버스로 인천공항으로 갔다. 1시간이 소요되었다. 안개가 끼인 아침이었지만 인천대교를 지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여행 중에 인천대교에서 공항행 버스 사고로 12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인천공항에서 9시에 출발하여 일본 아사히가와로 가는 아시아나 전세기에 올랐다. 동행하게 된 매부와 누나 덕택에 좌석이 비지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어서 편한 좌석에 앉아 가게 되었다. 돌아 올 때도 그랬다.
약 2시간 반 정도 지나 아사히가와 공항에 도착했다. 국제선 공항이 아니고 국제선은 전세기만 왕래할 수 있는 조그만한 공항이었다. 공항 통과에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함께 여행하게 되는 29명을 비로서 만났다. 8쌍의 부부들과 13명의 여자들이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일본 전문 가이드가 출발에서 돌아 올 때까지 함께하며 일행을 안내해 주었다.
일본 공항에서부터 비가 내렸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우산을 필요로 했다.
홋가이도는 일본에서 여름이면 가장 좋은 관광지로 무덥지 않고 공기가 깨끗한 대자연이 좋으며 휴양지로 각광 받는 곳이라 했다. 외국인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라고 한다. 공항에 천천히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의 시야에는 반듯반듯 잘 정리된 들판이 질서정연하고 깨끗하게 보였다. 지상에서 버스로 달리면서 바라보이는 들판 역시 심어진 농작물들이 모두 반듯반듯 줄이 맞춰져 있고 흐트러진 곳은 단 한군데도 눈에 띠지 안했다. 일본인들의 성격을 짐작케 했다.
북해도는 우리나라 남한에서 강원도를 뺀 만큼의 넓은 면적에 인구는 600만 정도로 적은 수가 사는 곳이라 한다. 북해도의 중심지인 삿포로 인구가 200만이라 하니 다른 지역에서는 사람 구경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북해도를 다니면서 구경하기 어려운 것, 네 가지가 있는데 사람, 십자가, 무덤, 한국자동차라고 가이드가 말하기도 했다. 4일 동안 다니면서 정말로 십자가 구경을 못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일본인은 모두 지옥의 자식들이 되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랑의 하나님이 전부 다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겠는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더 기독교인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지 않는가? 다원론적인 구원론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일본에는 유교가 정착되지 않아서 우리와 윤리도덕에 차이가 있다고도 한다. 노인 지정 자리에는 젊은이들이 절대로 앉지 않지만 지정자리가 아니면 노인에게 자리 양보 같은 것이 없다고 한다. 사촌끼리 연애하는 것도 보통이라고 한다. 유교사상에 젖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것도 많을 것 같다.
우리는 먼저 비에이 언덕길을 가면서 넓은 푸른 초원을 많이 보았다. 가족나무, CF에 등장한 나무 등 이름이 붙은 나무 몇 개를 지나치면서 보았다. 일본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무근처에서 사진들을 찍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맨 먼저 버스에서 내린 곳은 후라노에 있는 팜 도미타(FARM TOMITA)라는 라벤더 농장이었다. 보라색의 라벤더 꽃이 많은 농장으로 라벤더 향수를 제조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농장이라고 했다. 라벤더 외에도 사루비아 등 여러 가지 꽃들이 잘 정리된 꽃밭에 많이 있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많이 돌아 볼 수가 없었지만 우리나라의 어느 허브농장을 연상케 했고 유명한만 큼 규모가 큰 것 같지는 안했다.
농장 구경을 마치고 약 3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노보리베츠 온천지역을 향해 달렸다. 넒은 푸른 들판에 이어서 산악지대를 지나갔다. 우리나라의 강원도가 연상되었다. 어쩌면 강원도를 크게 확장해 놓은 지역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 대부분 2차선 도로를 달리다가 4차선의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우리와는 대조가 되는 초라한 휴게소에서 쉬는 시간도 있었다. 자동차가 드물게 지나가고 도로변에는 잡초만 있을 뿐 우리같이 꽃길을 조성한 것 같은 곳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넓은 들에 많은 작물이 심겨져 있지만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 없다. 거의 자연농사 그대로인 것 같았다. 아파트도 없었다. 공장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넓은 땅에 소수가 사는 지역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청정지역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모두 가졌고 그 상태를 잘 유지하는 것 같았다. 북해도는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다. 눈이 오면 도로가 어디인지 분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도로를 알려주는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 막대기를 도로 위, 양 쪽에 계속 비치하고 있다. 좌우의 화살표 막대기가 도로의 폭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먼 거리를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일본과 북해도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북해도에서 많이 생산되는 작물은 감자, 옥수수, 오이, 가지, 아스파라가스, 담배 등이고 과일은 메론이 유명하며, 라벤더 때문에 보라색이 대표색이라 한다. 원래는 탄광지역이었으나 1868년 명치유신 때부터 죄수와 징용되어 온 조선인들을 동원해서 개발을 시작했기에 그 역사가 짧은 편이라 한다. 북해도의 원주민으로 아이노족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멸되고 현재 5,000여명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북해도의 지명은 아이노족의 언어로 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북해도는 동해와 태평양, 그리고 오호츠크해의 삼면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해산물도 풍성하다고 한다. 북해도에서 먹을거리는 게, 맥주, 라면, 아이스크림 치즈 등의 유제품이 좋다고 한다. 초코렛 등 과자도 맛이 좋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절대로 먹을거리를 가지고 나쁜 짓은 아니 하기에 모든 식품은 믿고 먹으면 된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특징은 아프기 전에 대비를 잘 하는 점이라 한다. 아파서 병원에 가져다 줄 돈을 아프기 전에 예방으로 사용하기에 음식을 좋은 것으로 섭취하고 깨끗하게 생산하며 식품이 상품화되기까지에는 여러 단계의 검사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은 국물문화이지만 일본은 건더기 문화로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민족으로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병원수가 많지 않은 것을 눈여겨보라고 한다.
섬나라의 기질은 대륙적인 기질과도 많이 다르다고 한다. 착하고 정이 많으며 축소지향형 기질이라고 한다.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것을 가까이 보며, 거리에는 소형차가 많고 질서를 중요시 한다. 같은 색 같은 모양의 제복을 많이 착용하고, 같이 음식을 먹고도 와리깡(각자 계산)을 한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을 여행가서 좋은 것 먹고 자신을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쓴다고 한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일이 없고 남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녀들은 모두 독립시킨다고 한다. 한국이 가족이기주의인데 비해 일본은 철저하게 개인주의 사회라 한다. 관광지에서 깃발을 앞세우고 다니는 것도 일본인들이다. 대표적인 섬 기질은 실리주의, 실용주의라 한다.
노보리베츠 입구에는 도깨비가 커다란 방망이로 마을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는 여자를 염라대왕이 낳게 해 주었더니 여자가 염라대왕 만나기를 소원하므로 일 년에 한번 도깨비가 되어 나타나 주었다는 전설과 함께 도깨비가 노보리베츠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노보리베츠는 조그만한 온천마을이다. 우리나라의 부곡온천의 초창기 모습이 연상되었다. 호텔위주의 마을이다. 온천장이 있는 호텔에 들어서니 유황냄새가 가득하다. 우선 방 배정을 받아 짐을 풀고 뷔페식 식사를 한 후 마을길을 산책했다. 도깨비 불꽃축제가 15분간 있다고 해서 나갔는데 늦게 나가서 위치를 찾지 못해 못 보고 건물 사이에 커다란 염라대왕상이 있고 시간에 맞춰 지옥심판 장면이 연출되는 것을 구경했다. 얼굴과 양손이 움직이며 무섭게 심판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거리에는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이 많았고 서양인은 눈에 띠지 않았다. 산책에서 돌아와 커다란 온천탕에 가서 온천욕을 즐겼다. 유황온천인 탓으로 물이 흐렸다. 온천탕은 24시간 개방이어서 저녁과 새벽에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일본체험의 한 방법으로 호텔방에 비치된 일본 옷 유까다를 입어 보았다. 유까다 차림으로 식당, 거리 산책, 온천탕 출입을 하는 것이 편리하고 좋았다. 내의를 안 입어도 되고 몸 전체를 감싸는 두루마기 같은 옷을 허리에 끈만 묶으면 되는 간단한 옷이어서 입고 벗고 하기도 쉽고 편리했다. 호텔마다 방에 비치해 놓아서 저녁시간에 많이 활용했다.
*7월 2일 금요일 - 둘째 날
아침 일찍 온천욕을 하고 식사 후 9시 호텔을 출발 했다. 바쁘지 않게 움직였다. 휴양지이기에 천천히 쉬면서 둘러보는 여행이라고 했다. 첫째 날만 장거리 이동을 했고 둘째 날부터는 장거리 이동이 없으므로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간 곳은 호텔에서 도보로 가까운 곳에 있는 지옥계곡에 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계곡은 노란색 회색 푸른색 하얀색 등 여러 가지 색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계곡이었다. 七色富山이라는 표말이 산 중턱에 있었다. 계곡에 나무 길이 만들어져 관광에 도움을 주었고 온천수가 부글부글 끓으며 솟고 있는 모습을 비롯해서 간헐천과 열탕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유황냄새 때문에 지옥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았다. 여기에서 흐르는 온천수를 그대로 받아 온천탕의 물로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에 지다이무라라고 하는 민속촌에 갔다. 넓은 부지에 일본풍의 목조건물과 각종 테마관들이 있는 곳이다. 기생쇼와 닌자쇼(첩자놀이를 하는 것으로 무술시범이 볼만하다.)를 보았다. 일본어를 모르기에 모든 이벤트를 다 볼 수는 없었다. 고풍스러운 집에 옛 생활 모습과 사용한 도구들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우로란으로 이동하여 지구의 맨 끝이라는 에토모반도의 등대가 있는 곳에 갔다. 높은 지역인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온통 안개가 자욱하여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 있을 것 같은 등대도 보이지 않고 넓은 태평양 바다가 앞에 펼쳐진다는 곳인데 바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구의 끝을 밟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했다. 소개 된 그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되었고, 높이 메달아 놓은 종을 쳐 보고 오는 재미 정도였다. 부부가 함께 종을 치면 금슬이 더욱 좋아진다고 해서 부부들이 모두 줄을 같이 잡고 종을 쳐 본 것이다.
다음에 도야로 이동하여 쇼와신잔(昭和新山)에 갔다. 1943년에 보리밭이던 곳에 화산활동으로 지반이 솟아올라 만들어진 산으로 나무가 전혀 없고 지금도 화산활동이 계속되어 한쪽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오고 있는 산이다. 화산이 폭발하지 않고 지반을 밀고 오르다가 멈춘 상태라 하며 세계에서 유일한 산이라 한다. 맨 처음 그곳에 살던 우체국장이 땅이 조금씩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정부에 보고 하였으나 정부에서 반응이 없으므로 자신이 그 주변의 땅을 모두 매입하면서 날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화산일지를 기록한 것이 지금은 비전문가가 기록한 화산일지인데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고, 산이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어 있고 주변은 국립공원이 되어 유명 관광지가 된 곳에서 그 후손들은 조상 덕에 그 일대의 땅에서 집을 짓고 장사 등을 하며 잘 산다고 한다. 해발 402m의 별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변이 평지이기에 우뚝 솟은 모습이 뚜렷하고 신비감을 주었다. 지금도 활동 중인 화산이라고 하는데 산 아래에서 사람들은 장사를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모습은 어쩌면 평화스럽기도 했다. 사람 사는 곳에 위험이 없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 같기도 한다.
도야호수는 매우 컸다. 호수 안에 4개의 큰 섬이 있다. 한 섬에는 산림박물관이 있어 유람선에서 내려 구경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우리는 내리지 않았다. 중세 고성을 본떠 만들었다는 유람선을 처음 보았을 때는 바닷가에 있는 건물인줄 알았다. 커다란 유람선에 올라 50여분 호수를 떠다니며 글자 그대로 유람 했다. 주변의 산들은 평범했다. 베트남에 갔을 때 보았던 하롱베이가 생각났다. 300여개의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가 호수 같았고 거기에 산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5시간 동안 유람선을 타고 구경하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야호수는 50여분도 다소 지루했다. 안개가 옅게 끼인데다가 볼만한 경치가 없었다. 크다는 것 외에는 별로였다. 바다가 가까워서 갈매기들이 날아와 유람선을 따라다니며 먹을 것을 받아먹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유람선에서 내리면서 양손에 목발을 짚은 사람,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서 관광의 묘미를 즐기는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유람선에서 내려 도야니시야마라는 화산 분화구에 갔다. 오늘의 마지막 산책코스였다. 2000년 3월에 형성된 화산지대라 하며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고 있으며, 화산이 폭발한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화산으로 망가진 집과 나무들을 보았다. 수학여행 온 일본고교생들이 열심히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과 달걀을 돌에 구워 팔면서 약수를 준비해서 관광객들에게 나누어 주는 친절한 사람도 보았다. 상술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먼 곳에서 길어온 좋은 약수라 했다. 물론 아이스크림과 달걀을 사 먹게 된 것은 당연했다.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들어가서 방 배정을 받고 기분이 좋았다. 방 앞창에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환상적이라 할 만큼 좋았다. 베트남의 하롱베이에서 1박할 때 호텔방과 같았다. 저녁식사를 한 후 호수가로 산책하면서 호수 가에서 펼쳐지는 불꽃 쑈를 보았다. 호텔들이 연합해서 펼치는 이밴트라 했다. 산책에서 돌아와 온천욕을 즐겼다. 역시나 유명한 온천이었다. 남탕 탈의실에 들어가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여자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남탕에 여자 청소부는 처음 본 것이다. 후에 일본에서는 보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텔 맨 위 9층에 온천탕이 있었다. 온천탕에도 앞창에 호수가 보였다. 호수 옆에 호텔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기에 경치가 모두 같을 것 같았다.
*7월 3-4일 - 셋째 날과 넷째 날
새벽에 일어나 온천탕에 갔더니 전날과 달리 남탕과 여탕이 바뀌어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독특한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시설도 달랐다. 한 곳은 바위를 이용해서 자연의 형태를 이루었고 또 한 곳은 평범한 목욕탕 시설이었다. 바꾸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테산 후키다시 공원이라는 곳에 갔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약수가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약수 얻으러 간다고 했다. 화산과 관련된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땅에서 솟아오르는 물에 좋은 성분이 많아 일본의 명수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물을 받기 좋게 시설이 되어 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병에 담아 왔다.
오타루 지역으로 이동했다. 오타루에 가까워지면서 처음으로 들에 비닐하우스가 많이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오타루는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전성기에는 많은 물류창고가 지어지고 많은 배들이 왕래했었는데 시대의 변화로 지금은 쓸모없게 된 창고들을 헐어버리지 않고 외모는 그대로 두고 내부를 개조해서 식당 등 여러모로 활용하고 있어서 고풍스런 건물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 좋은 관광자료가 되어 있는 곳이다.
먼저 오타루 운하를 보았다. 전성기에 바다를 메꾸어 만들었다는 운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시내였다. 거기에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고 주변의 옛 창고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운하의 산책로에서 나와 유리제품 가계들이 있는 거리에 갔다. 10만 여점의 유리와 크리스탈 제품들이 가계들에 진열되어 마음대로 드나들며 구경하고 쇼핑도 할 수 있는 거리였다. 전시관과 공방이 함께 있어서 유리공예 하는 과정도 볼 수 있는 곳이다. 거리에는 관광객들로 가득하고 상점마다 사람들이 많았다. 오르골전시장이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았다.
오타루에서 버스로 5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삿포로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이다. 삿포로에서는 맨 먼저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맥주박물관에 갔다. 삿포로에 맨 처음 맥주공장이 만들어질 때부터의 역사와 맥주의 제조과정의 변천사가 있는 곳이었다. 맥주 시음도 하게 했고 맥주와 관련된 제품을 팔기도 했다.
삿포로는 홋가이도의 중심도시로 200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이다. 북해도를 개발하기 시작할 때 허허 벌판에 붉은 벽돌로 처음 도청부터 지었다는 구 도청 청사가 또한 관광지였다. 지금은 역사자료가 전시되고 경내를 공원으로 조성해서 아담하고 예쁜 건물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삿포로는 계획도시로 개발되어 도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반듯해서 주소 찾기에 아주 쉽다고 한다. 아주 높은 건물은 없고 10층 이하의 건물들이 주류였다.
삿포로 시가지를 남북으로 나누는 경계선상에 오오도리(大通) 공원이 있다. 분수와 잔디 꽃밭이 잘 만들어져 있고 4계절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여름에는 맥주축제가 열리고 있어서 사람들과 먹을거리 장사가 많았으며 마이크를 들고 호객행위들을 하기에 시끄러웠다. 거리의 악사와 무슨 쇼 같은 것을 하는 것도 보였고, 잔디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공원의 동쪽 끝에 147m의 텔레비전 탑이 높이 있어서 공원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삿포로에서의 저녁식사는 게를 많이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대게를 제한 없이 먹을 수 있어서 대게 튀김과 게찜을 많이 먹었다. 숙박하게 된 호텔이 중심가인 스스키노거리에 있어서 저녁식사 후에 번화가 산책을 해 보았다. 삿포로의 유명하다는 라면골목에 가서 라면도 사 먹었다.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거리에는 각종 호객행위가 많고 머리에 무스를 발랐는지 주볏주볏 세운 머리를 한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띠었다.
마지막 날은 일본 관광공사에서 경영한다는 쇼핑센타에 가서 쇼핑을 하고, 삿포로에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아사히가와로 다시 가서 오후 1시 10분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전세기로 귀국 길에 올랐다. 오후 4시 반경 인천공항에 도착하므로 무사히 여행을 끝냈다.
여행은 즐겁다.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고,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문화에 접하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보며 일류호텔의 편안한 잠자리에서 쉬게 된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유명한 온천에서 이틀을 보낸 것이 좋았다.
인생전체가 나그네 길이고 여행일진데, 여행의 즐거움을 아는 것은 곧 인생의 즐거움을 아는 것이 아닐까? 여행의 기회는 또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