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5098]王守仁(陽明)-泛海 (범해)
泛海 (범해)
王守仁(陽明: 1472년 ~ 1528년)
險夷原不滯胸中 (험이원불체흉중)
좋은 일도 험한 일도 지난 일 마음에 담아두지 않나니
何異浮雲過太空 (하이부운과태공)
뜬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네.
夜靜海濤三萬里 (야정해도삼만리)
고요한 밤바다에 이는 파도는 삼만리에 이르고
月明飛錫下天風 (월명비석하천풍)
밝은 달빛 아래 석장 휘두르며 하늘에서 내려오네.
險夷험이= 험하고 평탄함을 가리킨다. 이 구절의 대체적인 뜻은
험하거나 평탄한 처지 모두 가슴에 담아두지 않으니
마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原=근원 원.본자(本字)厡
不滯불체= 滯=막힐 체, 약자(略字)滞
胸中흉중= 마음속에 지닌 뜻을 말한다.
何異하이= 무엇이 다른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浮雲부운=뜬 구름. 過=지날 과.
太空태공= 아득히 높고 먼 하늘.
夜靜야정=고요한 밤.
海濤해도= 바다 위 풍랑.
三萬里삼만리= 3만 리.
月明월명=명월. 밝은 달.
飛錫비석=승려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말하는데
여기선 운유(雲遊)나 행각이란 뜻이다.
下天風하천풍= ‘하늘 바람이 내려옴(下天風)’을 어떤 사람은
정기(正氣)로 해석하는데 이렇게 해석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때 시인이 을 만난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의 큰 바람과 파도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왕수인(王守仁, 호는 양명(陽明), 1472~1528)이 쓴
'바다 위에 떠서(泛海, 범해)'라는 작품이다.
險夷原不滯胸中(험이원불체흉중)
何異浮雲過太空(하이부운과태공)
夜靜海濤三萬里(야정해도삼만리)
月明飛錫下天風(월명비석하천풍)
험하고 평탄한 것 따위 원래 가슴에 담아두지 않거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밤은 고요한데 바다의 파도는 삼만리에 이르고
달은 환한데 고리 쩔렁거리며 날릴듯한 지팡이는
하늘 바람 아래에 있네
호쾌한 기상을 담은 시원스런 시다.
중국이 대륙으로 된 곳인지라 바다여행을 담은 노래가 많지 않기에
드물게 보는 작품이다. 지금 배가 출렁거리고 있어서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인데,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셀프최면'을 걸고 있는 듯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내 본시 죽거나 살거나 별로 개의치 않거늘 뭘 이 정도의 파도에
겁을 낸단 말인가? 하는 기분의 두 구절을 뽑은 뒤,
눈앞 전후좌우로 펼쳐진 웅대한 풍경을 그려놓았다.
사방엔 뭍도 섬도 보이지 않는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 있고,
큰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데 지팡이(석장,錫杖)에 붙은
쇠고리가 쩔렁거릴 만큼 바람이 세차다.
왕수인(王守仁)
자-백안(伯安), 호-양명(陽明)
명나라 때의 사대부 사상가이자 교육가.
명필가 왕희지의 후예로 육상산의 학설을 발전시켜 이정 형제와
주자 계통의 성리학인 정주학(程朱學)에 대항했다.
육상산의 사상인 심학으로써 나라를 구하려 했고,
그를 맹자 이후 첫째가는 사람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조산아로 태어나 허약했던 까닭에 양생법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주자학에 심취했으나 신선술 공부를 하기도 했다.
훗날 주자의 이론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스스로 이론을 세워나갔으며,
양명학의 기초를 세웠다.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삶에 대한
어록과 편지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명대(1368~1661)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시인으로써 주관적인 관념론자로 불렸던 왕수인, 즉 왕양명은 그동안 국가의 지배적인 주자학을 대신하여 독자적인 유학사상을 세우고 발전 시켰습니다.
그가 갖고있는 중심 사상의 기본 원리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정좌법'(靜座法), '치량지'(致良知)입니다. 그의 사상을 통해 일관되게 흐러고있는 '물(物)의 이(理), 바로 우리들 마음이며, 우리의 마음 이외의 곳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라고 하는, 심즉리心卽理) 즉 주관적 관념론입니다.
그가 생각했던 지행합일은 지(知)와 행(行)이 모두 마음의 활용으로 하나라고 생각하는것인데, 주자가 주자학에서 지(知)에 중점을 두어 얘기했던 '선지후행'(先知後行)과는 대립되는 것입니다.
정좌법은 인욕을 버리고 천(天)의 이를 밝히는 방법으로서, 치량지(致良知)에 의해 실천적으로 결합 됩니다. 즉, 우리 마음의 양지(良知) 양심은 천리(天理)이고,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선과 악을 직각(直覺)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이 바로 양지로서 이에 의해 '지식을 넓히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致知格物)라는 실천도덕이 요구됩니다.
이렇게 선천적이고 직각적인 양지를 통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그의 도덕설은, 분명 주자학과는 또다른 측면에서 사회의 굳건한 지배적인 봉건 도덕의 한 측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뭏든 왕양명의 유명한 저작물과 제자와의 문답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기록되었고, 책으로도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상기 왕양명의 시 속에는, 정의감에서 왕에게 직언(直言)했다가 환관의 박해를 받았고 정말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가까스로 위험천만한 죽음의 상황에서 벗어나, 아직까지 두근거리는 놀란 가슴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쓰여진 시입니다. 당시 시인은 바다 위에서 매우 거친 풍랑을 만난 작은배의 운명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말 수행자같았던 그의 고단한 삶속에 다시 하늘이 내린 절대 절명의 매우 위험 천만한 시험적인 상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모든 어려움에 대해서 담담히 모두 받아들였고 몹시도 골치아픈 현실의 문제와 반드시 주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할 아주 번거로운 일이 세상에는 가득했지만, 낙담 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고,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정면으로 담담하게 마주하여 처리할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천하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였지만, 왕양명은 인생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담글질 되어갔고, 모든 일에는 반드시 하늘의 뜻 天意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고, 하늘이 정한것을 어찌 사람이 할수 있는가 하면서, 사람의 일생이 암암리에 배치 되어있고, 감개 무량한 나머지 이렇게 깨달음의 극치에서 터져 나오는 아주 좋은시를 지어 후세들에게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