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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 나타난 부활 사상
할렐루야!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부활에 대해서 서론적인 내용을 먼저 공부를 하고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부활 사상에 대해서 교수님들의 논문이나 강의를 통해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구약 전체를 조망하면서 부활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정리한 글을 찾게 하시고 또 읽게 되면서 우리는 쉽게 구약에 나타난 부활 사상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서 말씀하신 부활의 내용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 지혜와 평안과 그리고 시간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샬롬! 이제 부활의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구약에 나타난 부활 사상을 교수님의 논문과 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구약의 설명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부활에 대한 내용을 찾아내어야 하기에 앞선 교수님의 글로 같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두 분의 교수님의 글입니다. 한 자료는 제가 이곳에 글로 올릴 수가 없어서 파일로 그대로 올리니 파일을 클릭하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장영일 구약학 부교수님의 글을 보겠습니다. 자료는 아래 파일 속에 있습니다.
약 25페이지의 자료인데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자료는 이경실 교수님의 글입니다.
죽음이 하나님과 교제 중단시킬 수 없다"
구약의 성도, 창세기에서부터 '부활의 소망' 일관되게 갖고 있어
죽음 이기는 '구원의 예언' 시인과 선지자 통해 중심 메시지로 전달
이경실 교수
들어가는 말
흔히들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는 뚜렷한 교리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있다고 해도 후대의 본문 몇 구절뿐이고(욥 19:25-27; 단 12:2), 족장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오경과 같은 오래된 책에서는 더욱더 찾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활과 관련된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서 지지될 뿐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망의 실체가 ‘부활신앙’ 인 것처럼, 구약의 성도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소망을 품었으며, 부활신앙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핵심적 요소임을 밝히고자 한다.
부활의 필요성
창세기의 시작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 필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영생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는 ‘먹기에 좋은 나무’(창 2:9)가 있었다. 여기에서 ‘좋은’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먹기에 좋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맛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한 것처럼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완벽하게 하는 과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였으며, 인간의 창조는 죽도록 의도되지 않았으며 영생하도록 의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죄와 더불어 죽음이 왔다.
아담 자손의 계보(창 5:1-6:8)를 살펴보면, 이 간략한 계보에는 10명의 후손이 포함된다. 우리가 흥미를 가지는 노아 홍수 이전의 현저하게 장수한 사람들에 대한 "어떻게 그토록 오래 살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성경 본문에는 없다. 오히려 본문에는 그들의 죽음이 강조되어 있다.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생애가 “그리고 그는 죽었다”라는 말로 끝맺는 바, 이것은 죄에 따른 결과를 적절히 보여준다.
오직 여기에서 한 가지 예외가 주어진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즉, 에녹은 죽음의 저주 속에서 생명을 발견한 자의 본보기이다. 에녹을 통하여 죽음이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단어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며, 역설적으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동산 안에 생명나무로 돌아갈 수 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은 영생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모든 자들에게 모형이 되는 것이다.
족장들의 부활신앙
족장들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로 인식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열조에게로 돌아갔다”(창 25:8)라는 표현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다음 절에서 서술되는 막벨라 굴에 매장하는 행위와 명백히 구별되어 있다. 즉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구별하여 서술하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또한 열조에게로 간다는 것은 영혼의 미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땅 위의 ‘외국인과 나그네’로 여기며 생활하는 가운데 복된 약속의 미래적 성취를 소망했던 것이다.
족장들은 죽은 자들의 시체를 소중히 취급했는데 이것은 부활에 대한 일종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야곱과 요셉은 그들의 뼈를 약속의 땅에 장사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던 것이다(창 47:29-31; 50:25; 출 13:19).
신약의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린 믿음의 실체를 부활신앙으로 연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유대교의 랍비들 역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부활신앙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창 17:8)”라고 하신 말씀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롭고 특이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그들의 생애에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함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약속의 축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해야 된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랍비들의 해석 자체는 본질에서 벗어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긴 해도, 우리는 여기에서 족장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핵심이 부활신앙이었다는 하나의 증거를 유추할 수 있다.
랍비들의 해석 자체가 권위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오경인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왜 예수님은 부활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단 12:2)와 같은 본문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모호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는 출애굽기의 본문을 인용하셨을까? 사두개파의 신학은 바리새파보다 더욱 신인동성동형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몸의 부활과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를 부인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보수 성향은 구전법을 거부하고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고, 매일 같이 암송하던 본문에서 부활에 관한 내용을 유추해 내셨다. 출애굽기에 사용된 본문의 인칭대명사는 “나는 ~이다”라는 의미의 현재형이다. 즉 그들의 육신의 조상이었던 족장들은 막연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 현재도 하나님 앞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들이 영원한 삶뿐 아니라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속 즉 부활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도 믿지 않으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앞에 매일같이 앵무새처럼 신앙고백을 하였으니, 그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인과 선지자들의 부활신앙
이제 오경 이후의 성경인 시편과 선지서 등을 보게 되면 구약 성도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부활신앙의 소망을 더욱 알 수 있게 된다. 시편 16:8-11절에서 이에 대한 명백한 예를 볼 수 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2:24-31절에 예수님의 부활의 예언으로 인용되었다. 한 구절 더 찾아본다면, 시편 17:15절에서 시인은 악인의 외견상 나타나는 번영을 서술한 뒤에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여기에서 ‘깬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영혼이 부활체 안으로 옮겨지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델리취(Delitzsch)의 해석처럼 죽음의 잠에서 깬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시편의 시인들이 정형화하였던 구절은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시 73:23)”이다. 여기서도 시인은 단순히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바라보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원불멸하다는 교리 속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경의 말씀을 그들의 현실 역사에서 바르고 정확하게 적용하였던 선지자들 역시 부활신앙 안에서 신탁을 전하였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이 전하였던 중심 메시지는 파멸과 심판의 예견이다. 선지자들은 민족의 영적, 도덕적 죽음을 드러내었고 다가오는 심판의 파괴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끔찍한 이미지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에게서 부활에 대한 개념이 드러난다는 것은 모순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예언은 항상 그 자체로 끝을 맺지 않는다. 심판 선언 뒤에는 구원의 예언이 뒤따르게 되는데, 이와 같은 구원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생명의 이미지들을 사용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이 되는 구원의 예언은 부활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죄로 인해 개인과 공동체에 죽음이 닫치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 하여도, 최종적으로 구원이 죽음을 이기게 되는 예언은 부활신앙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호흡을 통하여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소생하는 것을 본 에스겔의 환상은 예언의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겔 37:1-14) 구원에 관한 예언들은 고향으로 귀환하는 사람들, 나무를 심는 것, 추수, 도시들이 건축되는 것과 같은 재생(Rebirth)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부활에 대한 신념을 나타낸다.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원형적인 전개는 선지서 전체에 흐르며, 슬픔에서 찬송으로, 노예로부터 자유함으로, 포로에서 귀환으로 바뀌는 주제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우리에게 모형론적으로 보여준다.
결 론
마지막으로 인용하는 구약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게 ‘부활’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간략한 개관을 통하여 창세로부터 등장하는 구약의 성도들이 가졌던 소망은 바로 부활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소망은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고,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 믿음은 어둡고 두려운 죽음의 사건이 성도가 누릴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를 결코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부활도 존재한다. 이러한 구약 전체의 가르침은 우리 주님께서 예리한 통찰력으로 요약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잘 정리를 하신 글입니다. 그리고 다른 두 분의 글을 더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부활 사상 /요 11:23-27| ** 요한복음 **
토토 박사 | 조회 44 |추천 0 | 2018.09.17. 10:58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보게 되면 구약과 신약을 잘 조화시키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신약의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세기에 마르키온(Marcion) 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다른 신이며 구약의 신은 물질의 세계만 창조한 신이고 신약의 신은 영계까지 창조한 신이기 때문에 구약의 신은 열등한 신이고 신약의 신은 우등한 신이다.”
19세기에도 이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이라는 사람은 구약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행습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신약만이 신앙과 행습의 기준이 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에는 악기가 많이 동원되어 예배를 드렸지만 그것은 구약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습이 될 수 없고 신약시대에는 악기를 썼다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예배드릴 때 악기를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캠벨 주의라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 구약과 신약은 다르거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구약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활에 관한 내용이 신약에만 있고 구약에는 없거나 있어도 희미하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의 목적은 구약성서에서도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대화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3)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이 대화는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이 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가 이 신앙을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그 당시에 구약성경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Ⅰ.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소망”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교회의 위대한 스승이 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당시에 최고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구약성서를 정통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이전에 배웠던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버렸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다 믿고 있었습니다. 단지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14-15절은 사도바울이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 24:14-15)
바울이 가진 소망이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가진 소망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데 소망의 내용은 언젠가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천년 정도의 간격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바울은 “a resurrection of both the righteous and the wicked.” 의인과 악인의 한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증거하다 지금 이렇게 재판장 앞에 서게 되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6-8절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행 26:6-8)
여러분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죽은 사람도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하게 하신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소망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2-23절에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계속 변론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 26:22-23)
여러분 선지자들과 모세라고 하면 구약성경 전체를 통칭해서 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통칭해서 증거하는 내용을 바울이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메시야가 올 것이다. 둘째, 메시야는 수난당할 것이다. 셋째, 메시야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 것이다.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바울이 우리에게 요약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약성서와 다른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행 28:20) 로마의 형제들을 불러 지금 이렇게 매인 바 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것은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소망인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고 성도들도 메시야의 뒤를 이어 부활하게 된다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3절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유대인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2-3)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고난받고 부활할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용한 성경은 신약성경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은 아직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증거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무엇이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지 않았으며 메시야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나사렛 예수님이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이시고 우리를 위해 수난당하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인 것입니다.
Ⅱ. 구약성서가 증거하는 부활신앙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증거한 것을 보면 구약성서가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짧은 시간에 다 증거하기 어려울 만큼 부활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부활을 다 공부하려면 날을 새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16:10)
다윗이 주의 거룩한 자는 썩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 30-31절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 시편 16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 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0-31) 다윗이 말하는 주의 거룩한 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 메시야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부활하실 것을 가리켜 예언한 것입니다.
시편 17편 13-15절은 메시야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믿는 성도들도 부활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3-15)
여러분 이 세상에는 세상으로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배부르고 자식들 많고 또 돈 많이 벌어 자식들에게 유산 남기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악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그런 악인들의 가르침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악인의 사상에서 건짐 받는 것은 무엇이냐? 다윗은 세상을 넘어서서 부활하여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뵙는 것을 소망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만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중에 부활하여 주의 얼굴을 뵙고 영생을 누리며 사는 소망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약성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 어느 책이냐고 물으면 보통 창세기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욥기라고 말합니다. 이 욥기에서도 부활의 소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욥 14:14)
욥은 자기 인생을 싸우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사는 동안 참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 놓이기를 기다리겠나이다.” “놓이기를”이라는 말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라는 뜻입니다. 욥은 부활을 가리켜 앞으로 다가올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싸우는 동안 욥은 자기 몸에 변화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부활을 기다린 것입니다.
욥기 19장 25-26절에도 그 기다림이 확신이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5-26)
우리말 성경에는 가죽이 썩으면 영혼이 나와서 하나님을 뵐 것이라는 의미로 기록된 것 같지만 이것은 정확한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 밖에서라고 번역된 말은 현재의 육체가 아닌 다른 육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영어성경에는 ‘out of the flesh’라고 되어 있지 않고 ‘in my flesh’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육체를 입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육체의 부활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부활의 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사 26:19) 사람이 죽으면 티끌로 갑니다. 어떤 분은 무덤에 매장되고 또 어떤 분은 화장되지만 둘 다 티끌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하면서 구약시대에 화장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장례는 매장을 해야 맞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화장을 하려고 해도 기계가 없어서 못했습니다. 또 구약시대에는 땅이 넓었기 때문에 매장으로 충분했고 화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도 매장당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보면 땅 위에 버려진 시신도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이 발전해서 화장도 하고 하는데 결국 티끌로 돌아가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티끌에 거하는 자들 보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면 모두 일어나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단 12:2) 여러분 우리 믿는 자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자도 부활합니다. 믿는 자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고 안 믿는 자의 부활은 사망의 부활이라 합니다. 안 믿는 자는 사망의 부활을 해서 지옥에서 고통받을 몸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티끌 가운데 거하다가 생명의 부활을 해서 천국에서 영생하며 하나님과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 모두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기독교는 나쁜 사람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Ⅲ.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이유
그런데 왜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이 말씀하셔도 사람들이 믿지 않느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합리주의(Rationalism) 때문입니다. 합리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부활이 자기의 이성에 맞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다 나왔지만 부활은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공부해봤자 얼마나 알겠습니까? 박사학위를 따도 자기 영역에 관해서만 조금 아는 것이지 뭘 얼마나 알겠습니까? 아주 작은 영역에서는 합리주의가 타당해도 큰 영역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보다 아래에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 위로 올라가 계시를 비판하게 되면 인간의 이성은 창녀와 같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합리주의 때문에 부활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무지(Ignorance)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에 존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게 된다는 것도 모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망의 부활을 해서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난 당하게 된다는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무관심(Indifference) 때문입니다. 무관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거나 말았거나 생명의 부활이 있거나 말거나 본인과는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넷째, 적대감(hostility)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반대편에 서서 적대감을 가집니다. 그 적대감 때문에 부활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육체는 시간이 흐르면 쇠약해집니다. 제가 처음 우리 교회에 왔을 때는 저보고 젊은 종이라고 부르시더니 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줍니다. 거울을 보면 머리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주변머리가 다 어디 갔냐는 생각도 듭니다. 이처럼 세월에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권사님들도 제가 처음 올 때는 다 처녀 같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확실한 예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기 있으신 분들은 예외 없이 모두 한 번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금세이고 또 하나는 내세입니다. 금세와 내세 이외에 다른 세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금세에서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까? 그런 유한한 소망이 무슨 소망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내세에 부활의 몸을 입고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성,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영광스러운 생명의 부활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첫 열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첫 열매이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서 큰 수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도 없고 죄 사함도 없고 영생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앞에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여행 온 것인데 조금 배고프다고 너무 좌절하지 마시고 조금 괴롭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조금 어려운 일이 있다고 우울증에 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으로 약속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고 소망찬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시 너무나 멋지신 설교입니다. 마지막 분의 글인데 외국 분의 글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다"
(I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by George Eldon Ladd)
- 조지 래드 저, 이 진영 역, 생명의 말씀사
<목차>
1. 서론
2. 신앙과 역사
3.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
<4. 구약에서의 부활 사상>
5. 유대교에서의 부활 사상
6. 메시아와 부활
7. 복음서의 신빙성
8. 복음서의 증거
9. 바울의 증거
10. 부활에 대한 "역사적"설명
11. 부활의 중요성
제4장 구약에서의 부활 사상
구약성경이 부활 신앙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부활에 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소망을 언급한 구절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구약의 부활 사상을 예수님께 적용시키지 않았을까?
구약에 나타나 있는 "소망"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구약에 나타난 인간에 대한 개념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인간관은 헬라의 인간관과 완전히 대조가 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헬라에서 가장 영향을 끼치고 있던 인간관은 플라톤 학파의 인간관이었다. 이 플라톤 학파의 인간관은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플라톤의 인간관은 인간은 몸(body)과 혼(soul) 둘로 이루어졌다는 이원론(二元論)이다. 혼은 실제적이고 영원하며 본체적(本體的) 세계에 속해있는 것으로, 몸은 가시적이고 일시적이며 현상적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1). 몸은 나중에 영지주의자(Gnostic)들이 생각한 것처럼 사실상 악하지는 않으나, 마음과 혼이 성장하는 데에는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현자(賢者)는 혼이 아무런 손상 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자기 몸을 제어하고 훈련시키는 사람을 뜻했다. 플라톤 학파의 인간관에 따르면, 혼은 불멸하며, “구원”은 혼이 임종 시에 몸을 벗어나 영원한 세계 속에 귀의함으로써 현상계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글 중에서 문맥에 상관없이 그 구절만 떼어 놓고 보면, 이원론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구절이 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일견 이 구절은 플라톤 학파의 이원론과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을 전후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영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궁극적으로 이 세계 속으로 들어와 이 세계를 변형시킬 하나님의 세계를 뜻한다(2). 여기에는 몸의 부활 사상도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몸의 구원과 영혼의 구원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영혼만의 구원은 생각지도 않은 것이다. 구원은 모든 피조물들이 구속함을 받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까지 구속되는 것을 뜻한다(롬 8:21-23). 바울의 인간관은 구약의 인간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구약에서 보는 인간의 "혼" (nephesh, 네프헤쉬)은 주로 생기(vitality), 생명을 말하는 바, 결코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영" (spirit)은 무엇보다도 생명체들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들어 주시는(시 33:6, 104:29,30) 하나님의 영(ruach, 루아취), 그의 입기운, 그의 능력을 뜻한다(사 31:3, 40:7). 하나님의 영은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을 창조하신다(슥 12:1). 그러나 구약은 인간의 혼이나 영이 사후에도 존속하는 인간의 영원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을 즉 그의 호흡을 취하여 가실 때 인간에게는 죽음이 임하는 것이다(시 104:29: 전 12:7). 그리고 그의 혼, 즉 그의 네프헤쉬는 죽을 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민 23:10을 문자적으로 보면, "나의 혼으로 하여금 의인의 죽음을 죽게 하소서"라는 뜻이고, 사 16:30은 "나의 혼으로 하여금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게 하소서"를 뜻한다). 다른 곳에 보면, 혼(nephesh)은 음부(스올,sheol)로 떠난다고 기록되어 있다(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참조, 시 30:3, 94:17). 어떤 곳을 보면, 네프헤쉬는 사실상 인칭 대명사로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에서 혼이 사후에도 계속 존재하며 불멸한다는 사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요약컨대 구약성경의 인간관은, 인간은 육신으로 둘러싸인 혼이 아니라 생기가 들어 있는 몸이라는 것이다(3). 구약성경에서 "생명"이란 이 세상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육신적 존재를 말한다(신 30:15-20). 죽음은 생명의 끝을 말하는 것이지, 실존(존재)의 중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그림자"가 되어 스올(음부)에 거한다(잠 9:18; 사 14:9, 26:19). "그림자"는 인간의 혼이나 영이 아니다. 그림자는 인간 자체이거나 오히려 그 인간을 복제한 창백한 인간이다. 그림자는 사람에게서 생기와 에너지가 떠나간 상태로, 생존 시 모습의 그림자인 것이다. 스올이 나쁜 것은 그곳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기 때문이다(시 6:5, 88:10-12, 115:17).
그러나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꼭 끊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진실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며, 그 교제를 향유하고 있다면 죽음도 그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땅의 주이시며 동시에 음부의 주이시기도 하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이러한 확신 하에서 시편 기자들은 사후 세계를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이 기다리는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 그 묘사 중 하나를 들어 보자.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9-11).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를 죽는 데서 보존하실 것이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 중에는 위험이라든가 병 같은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안에는 자신의 이생과 내생을 위한 축복이 예비되어 있으며, 자기는 음부에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과 소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4)” “시편 16편의 초점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의 지속 여부이다. 시편 기자는 이 교제가 끊이지 않은 왜 영원히 계속되리라 예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어떻게 해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 교제가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것을 알기 때문에 교제가 단절될 것이라는 우려로 괴로워하지는 않는다(5)”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사후의 생명은 인간이 본래 타고나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어서 계속될 수도 있고 끊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시편 49:15를 보자.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최근 한 주석가는 주석하기를 이 시편 기자는 에녹과 엘리야가 승천한 것 같이 자기도 승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15절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6). 그렇지만 이 구절은 시편 16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일단 사람들이 죽으면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과 하나님을 모독하던 사람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생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받을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실 음부의 손이 여호와와 그의 백성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게 할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7)."
이상과 동일한 사상이 시편 73: 24에도 나타나 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 구절은 해석상 약간 난해하지만, 다음의 로울리(Rowley) 의 주석이 타당한 것 같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으며,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받아들이심으로 자기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이생과 내생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리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8)
이상의 몇 구절에서 우리는 의인의 사후 축복에 대한 소망을 엿볼 수 있다. 그 소망은 사람 속에 불멸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이 사실을 주목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시편 기자들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중 어떤 부분-예컨대 혼이나 영-이 죽음 후에도 계속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한 내생이 어떤 것이라는 데에 대하여 일체 언급이 없다. 시편 기자들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죽음도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헬라인의 견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죽음에 의해서도 단절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9)
구약성경을 보면, 점차적으로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나타난다. 우리는 죽음이 인간 실존의 종국인 것만은 아니라는 히브리인의 믿음을 에녹과 엘리야가 육신으로 승천했다는 기사에서 엿볼 수가 있다. 게다가 구약에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살린 기사도 기록되어 있다(왕상 17:17-24; 왕하 4:31-37, 13:21). 그렇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특수한 경우로서, 특수한 사건들만을 가지고 부활에 대하여 일반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 구약의 예언서를 살펴보자. 이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몇 구절을 소개해 보겠다. 우선 호세아 6:1-2를 보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개인적인 부활을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구절은 민족의 회복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를 떠나 배신하자 그들을 벌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돌아와 치료함을 받으라는 간절하고도 충직한 권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들을 다시 사랑하사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 주시고,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상을 우리는 에스겔 37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스겔 37장에는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이 마른 뼈들은 서로 연락되고 살이 붙고 생기를 회복해 큰 군대를 이룬다. 에스겔이 본 이 환상은 개인적인 부활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민족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다(겔 37:11-13). 그렇지만 마른 뼈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이상(異象)은 육체의 부활 사상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의심할 여지없이, 에스겔이 제시한 상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 사이에는 죽은 자들이 생명을 회복하는, 육적 부활 문제가 제기되었다”(10)
이사야 25-26장은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사야 25:8을 보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왕국이 지상에 건설되고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모으사 그 율법에 약속된 축복들을 향유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세에 대한 예언 가운데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예언은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이 말씀 중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약속은 부활의 약속이 아니라 단지 죽음을 폐한다는 약속일뿐이다.
그러나 이사야 26:19에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이 구절은 전반적인 부활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듯하다.(11)
의인뿐만 아니라 불의한 자를 포함한 모든 자의 부활이 다니엘 12:2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이 구절은 “일반적인” 부활(12), 즉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많은 사람이라고 한 본문에 비추어 볼 때 그 부활은 전 인류의 부활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부활일 수도 있다(13). 의인은 "영생"으로 부활한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의인이 영생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히브리인들은 "만세(萬歲)의 생명", 즉 영원 미래로 이어지는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믿었다. 신약 시대에 "영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장차 올 세계의 생명"(The life of the Age to Come)을 뜻하였다(막 10:30을 보라). 다니엘서에서 이 구절은 분명히 육체 부활을 가리킨다. 로울리는 "육체 부활이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육적(physical) 생명으로, 육체 부활을 한 사람의 생명과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의 생명은 대동소이하다,(14) 고 생각 하였다. 육체 부활이란 육체, 또는 "육적인"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진다. 이 단어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신체를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의 몸은 죽음에 의해서 제한을 받지만, 부활체는 이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부활과 내생에 대한 개념을 고찰해 보았다.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개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약은 인간의 영혼(Soul)을 불멸하는 부분으로 보지 않고 있다. 한편,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일단 음부의 음침한 곳에 머문다. 이러한 사상을 갖고 있던 유대인 속에는 점차 죽음조차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갈라놓을 수가 없다는 확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진일보하여 마침내 말세에는 죽음이 폐해지고 몸이 부활하리라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상은 구약의 인간관에서 비롯된 부활 신앙의 변천 과정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건대, 인간은 생기가 불어 넣어진 몸이라는 생각, 또 죽음을 정복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진일보하여 말세에는 육체가 부활하리라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믿음은 어디까지나 종말론적이다. 그 부활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부활이다.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는 부활 신앙의 발원을 설명하는 데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고찰할 필요가 있다. 주의 날에 일어날 부활을 믿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앞서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구약은 메시아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하였는가? 구약은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언하였는가? 구약의 약속을 살펴봄으로 신약에 나타난 부활 신앙의 발원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방금 우리가 제기한 질문들은 꼭 해결돼야만 한다. 예수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바울도 말하기를, 부활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앞에서 던진 질문 다음으로 우리가 답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구약 후기 (post-Old Testament time)에 부활 개념은 어떻게 변천(變遷) 하였는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아마도 그 당시 유대교가 지니고 있던 부활 개념은 부활 신앙의 발원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앞서가시는 분들의 글의 통해서 조금 어렵고 길기도 하지만 부활의 사상이 구약의 전반에 녹아 있음을 확인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분의 글에 구약은 영혼의 불멸에 대해서 설명을 못한다고 했는데 아래의 구절은 영혼이 몸의 즉 육의 사망 후에도 죽지 않고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의 창조와 사람의 창조의 차이는 동물과 사람 공히 흙으로 빚어져서 만들어졌지만 사람은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 다릅니다. 이 생기와 영혼은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 믿으지고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여전히 천국에서 살아있음을 그것을 보시고 또 그분들의 경배를 받은 예수님께서 증거를 하셨으니 영이 육의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고 죽지 않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죽은 영혼이 악인이나 의인이냐를 가리지 않고 부활해서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마태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계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행 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구약의 부활 사상에 대해서 이스라엘 국가의 부활과 개인의 부활에 대해서 길게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을 통해서 부활에 대한 말씀이 곳곳에 존재하며 갑자기 예수님께서 오셔서 처음으로 부활을 설명한 것은 아님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개념은 신약과 구약 모두를 통해서 확실하게 설명이 되고 또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있던 내용임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으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을 살리셨다고 했는데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죽은 존재가 된 우리, 반드시 죽을 몸이 된 우리를 그분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은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그 사실을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이 구원의 의미 속에 영생을 얻게 하는 의미도 있다고 보는데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한 벌과 반대가 되는 개념으로서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산다는 의미와 함께 또 마지막 때 죽은 사람들의 육체가 부활을 하는데 의인의 신령한 몸의 부활을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선 구원에 대한 부분도 먼저 잘 이해가 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제 자료 중에 구원의 파노라마에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를 부탁을 드립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저도 배우면서 하고 있고 위의 내용을 두세 번 읽어도 아직 모든 내용이 다 파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어렵습니다. 기도를 부탁을 드립니다.
구원, 부활, 영생의 개념도 이렇게 깊이 잘 연구하고 생각을 해 보아야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참으로 늘 성경을 읽고서 묵상하고 그렇게 일생을 살지 않으며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으니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삶을 중히 여기고 늘 그렇게 살도록 애를 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예언에 대해서 또 같이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같이 자료도 찾으시고 연구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고 위로도 쉬지 않고 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