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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경향들
전형적 관점의 임나일본부설은 여러 각도의 반론에 의해 폐기되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반론들은 임나 문제를 혐오해서 단순히 피하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설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우선 가야사의 관점에서 보면 대외관계적 연구의 일환이지만, 국내 학자들의 연구 중에서 왜의 임나지배설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연구 성과가 있다. 즉 千寬宇는「왜의 임나 지배」가 아닌「백제의 가야 지배」라는 시각으로 가야사의 복원을 시도하였으며,註 675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변한은 원래 북방 요동에 있었는데 그 때부터 진한에 대하여 부용적인 지위에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에는 남하하여 황해도 방면에 있었다. 그 후 기원 전후한 시기에 변한은 죽령·조령의 북방에서 진한과 함께「古之辰國」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가 기원후 2세기 중엽에 다시 남하하여 김해지역으로 정착하였다.
둘째로 3세기 초에 구야국은 급격히 약화되는데, 이는 구야국 지배층의 주력이 일본으로 빠져나간 것을 반영하는 듯하다. 가야의 首露下降神話와 일본의 天孫降臨神話가 비슷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일본서기≫神功紀 49년조로 보아 백제의 근초고왕은 재위 24년(369)에 군사를 보내 낙동강 방면과 전남 해안 방면을 확보하였으며, 이 때 安羅(함안)·卓淳(대구)·加羅(고령) 등의 가야제국은 백제권에 편입되었다.
넷째로<광개토왕릉비>庚子年條의 기사는 400년에 고구려·신라의 연합군이 백제와 그 부용인 가야제국 및 원병인 왜의 연합세력과 낙동강 방면에서 충돌한 것을 전하는 자료이다.
다섯째로≪일본서기≫應神紀·雄略紀·顯宗紀의 기사로 보아, 5세기의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낙동강 중·상류지역으로 진출한 시기에 가야 지배를 위해 김천 방면에 설치한 派遣軍司令部였다. 이것이≪일본서기≫편찬과정 중에 紀氏 일족과 같은 백제계 왜인들에 의하여 왜의 것으로 변조된 것이다.
여섯째로 계체기 전반부의 기사로 보아, 6세기 초에 백제 무령왕은 哆唎(의성군 다인)·己汶(김천시 개령)·帶沙(달성군 다사) 등의 낙동강 중·상류지역을 다시 점령하여, 가야 북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당시 가야의 중심세력은 고령의 대가야였다.
일곱째로 계체기 후반부의 기사로 보아, 법흥왕 14년(527) 이전에 신라가 김해의 남가라를 함락시키자, 백제도 낙동강 하류 방면으로 진출을 기도하여 聖王 9년(531)에 진주 방면에 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여덟째로 흠명기의 기사로 보아, 540년대 이후의 임나일본부는 함안 방면의 백제 군사령부로서, 이는 백제의 주도하에 가야의 제세력을 모아 對신라 방위전선을 모색하였으나, 562년에 신라의 공격에 의해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백제 군사령부가 모두 최후를 맞았다.
이 연구 결과는 일본 학자들과 같이≪일본서기≫를 주요 사료로 채택하였으면서도 왜에 의한 임나경영설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 하며, 문헌사료의 종합만으로 가야의 前期 중심을 김해로 보고 後期 중심을 고령으로 구분하여 본 것은 매우 중요한 업적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러나 4세기 중엽 이후 6세기 중엽까지의 기간에 걸쳐 가야가 백제 군사령부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고 추정한 점은 가야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 출토 상황과 어긋난다. 또한 사료적 신빙성이 의문시되는≪삼국사기≫초기 기록과≪일본서기≫웅략기 이전의 기록들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가설을 세운 점은 해당 논거에 대한 한계성이 아닐까 하며, 기존설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긴 하나 卓淳國의 지명 비정 등에도 문제점이 남는다.
金鉉球는 6∼7세기 백제·야마토 사이의 외교관계의 특징을 용병관계로 파악하여, 한 단계 진전된 연구결과를 보여 주었다.註 676 그 연구에서 임나관계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4세기 후반 近肖古王·近仇首王代 이후로 백제는 임나·신라의 국경 분쟁지대인 久禮山 근처에「任那日本縣邑」이라는 직할령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곳을 통할하는 지배기구가「임나일본부」였다. 또한 6세기 전반 백제는 야마토국으로부터 용병을 받아 그 직할령에 배치하고, 郡令·城主로서 印岐彌·許勢臣 등의 日系 백제관료를 파견하여 그들을 지휘케 하였다고 보았다.
이 가설은 크게 보아 천관우의 연구 결과와 비슷하나 사료적 신빙성이 어느 정도 인정되는 흠명기의 기록만을 이용하여 도달한 결론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특히 백제 성왕이 야마토로부터 용병 성격의 군사를 요청했으며, 실지로 550년대 이후 소규모의 왜병이 백제군에 편성되어 활약했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흠명기 소재 기사에 나타난 백제 聖王의 언급 중에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라고 있는 것은 4세기 후반 당시 백제·가야 사이의 교역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는 될지언정 상하관계나 직할령 설치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임나일본부는 백제로부터 명령을 받거나 백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反百濟的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므로, 그에 소속된 일본 계통 관인을 백제의 군령·성주와 동일시할 수 없다.
한편 이른바「임나 경영」의 성격에 대하여 왜국이나 백제가 가야지역을 어떤 형태로든 군사 정벌하여 지배하였다는 임나지배설과 달리 외부세력에 의한 군사 정벌이나 지배를 상정하지 않는 견해의 하나로서 井上秀雄의「僞倭說」이 있다. 그는≪일본서기≫의 원전 사료를 추출해 내어 분석하는 방법론을 써서 좀더 객관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
井上說에 의하면 임나일본부는 야마토국의 出先機關 내지 남한 경영의 거점이 아니고, 이른바「일본부의 군현」을 통치하는 기관이었다고 하였다. 또한「일본부의 군현」이란 왜인으로 칭하는 임나의 지방호족이 통치하는 군현으로서 신라·백제와의 접촉지대에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임나제국 방위의 역할을 맡아 임나집사의 외교권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하였다. 게다가<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왜군의 대다수는 왜로부터의 渡來 有無에 관계없이 왜인을 칭하는 것이 정치적·군사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임나 제국의 지방호족들의 세력이었고,≪일본서기≫에 인용된≪百濟記≫에 보이는「大倭 木滿致」는 왜인을 사칭한 자였다는 것이다.註 677
이 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임나일본부는 자신의 지배군현을 가지고 있던 임나 제국의 독립소국의 하나이되, 그들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왜인을 사칭했다는 것이므로,「임나일본부」는 곧「僞倭의 임나소국」이라는 설이다. 또한 그의 주장 가운데에는 남한지방에 어느 정도의 왜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임나일본부가 야마토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으나, 그 안에는 吉備·的·河內·爲哥(伊賀=三重縣) 등과 같이 일본 중앙·지방의 호족명을 자칭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모두「위왜」로 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고, 거기에는 일본열도의 각지에서 온「任那 거주 왜인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 학자의 연구 결과 중에서 왜의 임나지배를 부인한 최초의 것으로서 주목된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는 일면의 진실이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 제국의 연맹세력이 백제·신라 등의 외부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서 현지에 들어와 살고 있던 왜인 집단을 앞장세워 정치적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가 임나의 한 독립소국이었다고 할 때, 그 중심지는 안라왕이 통치하던 안라국에 있고 그 군현은 신라·백제와의 경계지대에 따로 떨어져 있던 국가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井上은 같은 책에서「일본부의 군현」은 야마토국이 임나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해외에 있는 백제·신라의 분쟁지대에 설치한 직할령적인 존재이고, 일본부 관료 중에서 일본부경과 일본부집사, 파견장군 등은 일본에서 파견된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 논리는 임나일본부가 야마토국의 출장기관이 아니라는 자신의 기본 논지와 서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일본서기≫의 사료 처리면에서 면밀한 태도를 보여, 뒤의 연구자들에게 여러 모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임나 경영」의 성격에 대하여 외부 세력에 의한 군사 정벌이나 지배를 상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견해로서 임나와 왜 사이의 외교나 교역의 측면을 중시하는「外交交易說」이 있다.
외교교역설 중에서도 우선 임나와 왜 사이의 상업적 교역을 중시한 설들이 있는데, 일찍이 이병도는 소위 임나일본부의 訓은「야마토노미코토모찌」로서 倭宰의 뜻이요 宰는 사신의 뜻이라 하고 나서,「임나부」는 후세의 倭館 관리와 같은 것으로서 본시 왜국이 加羅 諸國과의 무역관계를 위하여 설치한 公的 商館인데, 후에 가야 제국이 신라의 압력에 못이겨 왜인의 원조를 구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다소 그 역할의 중심이 되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註 678 이 견해는 1930년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착상이고 지금도 다시 검토해 볼만 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하겠는데, 아쉽게도 본인의 말대로「힌트」만 제시하였을 뿐 사료상의 구체적인 검증이나 추론과정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그 후 吉田晶은 왜국을 위주로 한 교역관계에 주목하여 임나 문제에 대한 기본 성격을 추구하였다. 즉 4세기 이래로 가야지역은 왜의 각지 세력들에 대한 鐵素材 및 생산기술의 공급지였는데, 차츰 기나이(畿內)세력이 일본열도에서 국가 형성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자, 그들은 가야 제국연맹이 유지하고 있던 회의체에 자기측의 관료를 참여시켜 보다 많은 선진문물을 기나이측에 독점적으로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므로, 그들이 파견한 관료로 구성된 임나일본부는 가야에 대한 통치기관이나 군정기관이 아니라 교역기관이었다는 것이다.註 679 吉田은 이병도의 견해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또한 李根雨는 6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일본열도 내부상황에 대하여 吉田說을 받아들이면서도 임나일본부는 5세기 이전의 九州 왜왕조와 관련이 있는 문물 수용의 통로였던 것이고, 6세기 초 이후에야 국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야마토세력과는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고 보았다.註 680
서로 간에 약간의 차이점은 있으나 교역기관설은 임나 문제의 본질을 가야와 왜 사이의 교역, 특히 왜에 의한 가야문물의 수입 문제에 관련지어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관점은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임나일본부」는 기본적으로 백제·가야와 왜 사이의 교역기관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되, 그 설치 시기와 주체는 가야사의 전개과정과 연관시켜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반면에 이병도에 의해 이미 제기되었던 견해의 일부이기도 하나, 請田正幸은 임나일본부의 訓을 검토하여 이를 왜가 가야 제국과의 외교 교섭을 위해 임시로 파견한 使臣團으로 보았고,註 681 李貞姬·李永植은 이를 적극 지지하였으며,註 682 鬼頭淸明은 請田說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야마토 정권과 별개의 정치 주체로서의 倭로부터 파견된 관인들의 殘存形態였다고 파악하였다.註 683 또한 奧田尙은 임나일본부가 가야와 왜 사이의 외교기관이기는 하되 그 설치 주체가 임나 제국이었다고 하였고,註 684 延敏洙는 이를 안라로 고정시켰으며,註 685 金泰植은 첫 설치 주체를 백제로 보되 이것이 중간에 안라의 주도로 변질되었다고 보았다.註 686
결국 외교기관설은 임나문제의 본질을 가야와 백제·신라·왜 사이의 정치적인 외교 문제에 관련지어 이해한 것이다. 국제간의 관계이니까 상호간에 사신단이 일시 파견될 수도 있고, 그들이 머무는 곳을 공식적인 기관으로 조성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외국인들이라고 해도 한 지역에 오래 살다보면 그 지역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일본서기≫欽明紀의 자료에 즉응하여 볼 때, 안라가 일본부를 장악한 540년경부터 550년경까지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안라의 외무관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앞의 외교교역설 중에서 鬼頭淸明과 李根雨의 견해는 임나 문제에서 외교 교역의 측면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으나 일본 내부의 상황에 대한 이해에 공통점이 있다. 즉 그들은 6세기 이전 일본열도의 주도세력이 야마토세력 이외의 어느 왜, 그 중에서도 九州의 倭이고, 임나일본부는 그 왜와 가야와의 사이에 있었던 기관이라고 하였는데, 이 지적은 매우 주목된다.≪일본서기≫흠명기에 나오는 안라의 임나일본부가 5세기 이전부터의 것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그러한 대세 파악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며, 만일 그 지적이 사실이라면 이른바 임나 경영의 문제는 원천적으로 다시 검토될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임나 문제의 성격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일본고대사 자체의 모호성 때문에 더욱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이다.
한편 가야사만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지역과 일본고대사를 거시적으로 연결짓는 연구들이 있다.
江上波夫는 일본고고학의 성과들을 종합하여 한일관계사에 응용함으로써, 거시적인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을 발표하였다.註 687 즉 동북아시아 계통의 기마민족이 변한에 와서 한동안 남한을 지배하다가 변한의 辰王 자손이 4세기 초에 일본 북구주로 건너가 倭韓연합왕조를 건국하고 崇神天皇이 되었으며, 5세기 초에는 그의 자손인 應神天皇이 북구주에서 기나이로 진출하여 야마토국을 창시한 후 일본열도를 통합하고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다가 7세기 중엽 이후 손을 뗐다는 것이다.
북한의 金錫亨은≪일본서기≫와 일본고고학 자료들을 가지고 일본열도내에서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 고대한일관계사 영역을 개척하여서 이른바「分國說」을 내놓았다.註 688 그에 따르면 4∼5세기의 일본 고분문화는 백제·가야 등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졌고 그 주체세력들은 모두 한국 계통 소국 즉 분국이었으며,≪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한반도 관계기사는 일본열도 내부의 한국 계통 소국들 사이의 일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들은 고고학적 문화 전파의 방향을 올바로 제시하여 일본고대사 자체 및 임나일본부설의 취약성을 입증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일본학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기마민족설은 이른바「왜한연합왕조」라는 개념을 통하여 결과적으로는 남한경영설을 연장시킨 양면성이 있으며, 분국설은≪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사료들을 이용할 때 거의 모든 사료를 무리하게 일본열도에서의 사실로 억측함으로써 오히려 한반도내의 가야사를 포기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들은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 속에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