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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갈바 황제
(재위: 서기68년 6월 18일 ~ 69년 1월 15일)
<네로의 죽음이 로마인에게 제기한 문제>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요구하는 세 가지 조건.
정당성과 권위와 역량.
원로원이 갈바를 황제로 승인하고 근위병들도 갈바의 즉위를 환영하고 있어 정당성은 확보.
갈바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지 않았으니까 "권위"는 없었다.
"역량"은 갈바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 서기 68년 초 여름, 군단이 갈바를 황제로 옹립
서기60년 네로가 갈바를 에스파냐 동북부의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으로 임명.
67년 네로가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를 그리스로 불러 자살을 명령. 후임으로 무키아누스를 임명.
68년 갈리아 총독 빈덱스 네로에 반대하여 봉기.
빈덱스 갈바 지지를 선언. 루시타니아 속주의 오토도 갈바 지지를 선언.
원로원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 근위대가 갈바를 황제에 추대하기로 결의.
6월 9일 네로 자결. 향년 30세.
<민심장악책>
- 68년 가을 갈바, 오토와 함께 로마에 입성
- 로마 황제가 해야 할 일인 병사들에 대한 보너스지급을 갈바는 하지 않았다.
<협력자 인선>
- 갈바 심복인 비니우스를 이듬해의 동료 집정관으로 지명.
69년 1월 1일 갈바와 비니우스가 집정관에 취임.
-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루푸스가 갈바에게 해임되어 로마로 소환됨. 후임은 플라쿠스.
-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는 비텔리우스가 임명되어 갈바에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지다.
- 69년 1월 1일 라인 방위선의 게르마니아 군단이 마인츠에서 갈바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
- 1월 2일 개르마니아 군단은 "제일인자" 인선을 원로원에 맡기기로 한 전날의 결의를 철회.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
<갈바 살해>
- 69년 1월 상순 갈바가 피소를 후계자로 지명.
- 1월 15일 오토의 명령으로 갈바가 암살되고 비니우스와 피소도 살해됨.
- 오토, 근위대장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되고 원로원도 승인.
제2부 오토 황제
(재위:서기 69년 1월15일~4월15일)
베스파니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와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의 충성 서약을 갈지에게 전달하기 위해 로마로 출발.
티투스,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갈바의 죽음과 오토의 즉위, 비텔리우스의 봉기를 알고 오토를 지지하는 사절을 로마로 보낸 뒤 자신은 오리엔트로 귀환.
<인간 오토>
- 네로의 절친한 친구
네로가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에 반해 오토에게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오토가 거절.
네로가 오토에게 전직 법무관 자격을 주어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 로마에서 쫓아냄
- 오토, 게르마니아 군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비텔리우스에게 공동황제를 제의, 거절당함.
<"라인 군단" 대 "도나우 군단">
- 도나우 방위선의 7개 군단은 오토 지지를 선언
<무력 충돌을 향하여>
- 비텔리우스파 게르마니아 군단의 10만 대군이 3군으로 나뉘어 남하하기 시작.
카이키나, 발렌스, 비텔리우스가 각 군을 지휘.
- 오토 황제 카이키나를 맞아 싸우기 위해 1만3천 병력을 보냄.
자신은 포 강 남쪽의 요충인 피아첸차를 지킴.
- 카이키나 포 강 북쪽의 요충인 크레모나에 입성.
<포 강을 사이에 두고>
- 카이키나와 발렌스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남프랑스에서 발렌스와 싸운 오토파 1개 군단 궤멸.
- 오토 진영, 포 강 북쪽에서 카이키나 부대를 포위하지만 공략 실패.
- 카이키나와 발렌스의 합류를 허용.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
- 서기 69년 4월 15일 비텔리우스 진영이 오토 진영을 격파
<오토의 자살>
- 오토 자결. 향년 37세
- 4월 16일 원로원, 비텔리우스의 "제1인자" 취임을 승인.
제3부 비텔리우스 황제
(재위: 서기69년 4월 16일 ~ 69년 12월 20일)
<패자에 대한 처우>
- 비텔리우스, 오토파 백인대장을 처형하고, 병사들에게 크레모나의 원형 경기장 건설을 명령.
- 5월 15일, 새 황제 비텔리우스가 북이탈리아에 도착.
오토파 근위병을 모두 해고하고 "라인 군단" 병사들을 기용.
오토파 군단병들에게는 원래 근무지로 귀환하라고 명령.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
- 시리아 속주 총독 무키아누스는 "도나우 군단"의 추대를 거절하고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
무키아누스는 내전을 종식 시키고 제국을 재건하려면 건전한 상식인이 적합하다고 판단.
같은 생각을 가진 또 다른 한 사람이 로마적인 유대인인 알렉산드로스였다.
<이집트 장관 알렉산드로스>
-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
"유대의 플라톤" 필로의 동생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이다.
서기 46년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발탁으로 유대 장관으로 발탁 됨.
- 코르불로가 네로 황제의 명을 받아 자살을 한 뒤 무키아누스가 시리아 총독이 됨.
동시에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 장관이 됨.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자칭하다>
- 6월말 베스파시아누스와 무키아누스 및 알렉산드로스가 베이루트에서 회담.
세 사람은 병사의 무기 및 군자금 확보를 추진.
파르티아와의 우호 관계도 재확인.
제국 동방의 모든 군단과 동맹국이 비텔리우스에 대한 반대를 표명.
- 무키아누스는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떠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서 대기.
알렉산드로스는 유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유대로 가는 티투스와 동행.
- 7월 초순 이집트와 유대 및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
소아시아 속주의 주둔군도 가담.
동맹국 왕들도 베스파시아누스의 즉위에 찬성의 뜻을 표명.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 5월 24일 비텔리우스는 크레모나에 도착, 베드리아쿰 전쟁터 시찰.
- 7월 18일 비텔리우스 무장한 6만명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
<제국의 동방에서는>
- 70년 봄에 재개 하기로 한 예루살렘 공략을 조기 해결하기 위해 1개 군단으 추가 배치.
- 무키아누스는 시리아 주둔군 4개 군단 중 2개 군단만 데리고 서쪽으로 향함.
- 그러나 가는 도중에 "도나우 군단" 7군단이 무카이누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이끄는 바타비족이 라인 강 일대의 게르만족과 합세 로마에 반기를 일으킴.
키빌리스 라인 함대를 접수.
<"도나우 군단">
- 9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 지지를 선언.
무키아누스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서쪽으로 진군.
- 도나우 군단의 이동을 틈타 다키아족이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영토를 침입.
무키아누스가 격퇴. 서쪽으로 향하는 속도가 늦어졌슴.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
- 10월 24일 비텔리우스파의 "라인 군단"과 베스파시우스파의 "도나우 군단"이 격돌.
"유프라테스 군단"은 아직 달마티아에 머물고 있었음.
"라인 군단"에서는 비텔리우스는 수도에 남고, 발렌스는 병에 걸려 있어 카이키나 혼자 병력을 이끌고 북상.
카이키나는 라벤나에서 비텔리우스에 반대하여 일어나도록 "라인군단"을 설득했지만 실패하고 투옥됨(나중에 베스파시아누스파에 으해 석방).
- 발렌스, 남프랑스에서 비텔리우스 진영의 재편을 시도함.
베스파시아누스파 갈리아인에게 붙잡힘.(나중에 처형됨)
- 혼전을 거친 결과 복수심에 불타는 "도나우 군단"이 승리.
"라인 군단"이 도망쳐 들어간 크레모나 시내는 폐허로 변함.
- 비텔리우스의 병사들, 로마로 달아남.
- 프리무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이 포 강을 건너 수도 로마로 진군.
<비텔리우스 살해>
- 12월 15일 "도나우 군단"의 로마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북상한 비텔리우스파 병사들 항복.
- 12월 16일 비텔리우스 퇴위할 뜻을 밝힘.
- 12월 19일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이 비텔리우스파가 던진 횃불로 불탐.
- 12월 20일 로마 시가전. 포로 로마노에서 비텔리우스 피살. 향년 51세.
- 12월 21일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가 실질적으로 시작되다.
- 12월 하순 무키아누스, 로마에 입성
비텔리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테라치나에서 로마군에 패하여 처형당함.
베스파니아 황제법 성립.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비텔리우스의 죽음으로 전쟁 상태는 끝났지만 그것이 곧 평화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자끼리는 승부가 끝났지만 대초원의 다른 곳에서는 무질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오른팔인 무키아누스의 과제가 되었다.
<속주병 반란>
- 로마인들은 네델란드인의 선조를 바타비족이라고 불렀다.
-서기 69년 당시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8천 명으로 구성된 바타비족 부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 이 율리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로마인들끼리 싸우고 있는 틈을 타 로마에 반기를 듬.
<율리우스 키빌리스>
- 서가 69년 4월 15일에 일어난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승리한 뒤 보조병들은 주둔지로 돌아옴.
- 라인 강 연안에 도착한 여름에 율리우스 기빌리스가 이끄는 바타비족 부대가 반란을 일으킴.
- 베스파시아누스파로 자칭을 하여 수비하던 보조부대원들을 흡수.
한편 라인 강 동쪽의 브룩테리족과 텡테리 족을 포섭하고 서쪽의 네르비족과 퉁그리족을 유혹, 진압에 나선 보조부대원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공격당하는 로마군>
- 키빌리스, 로마 군단기지인 베테라(크산텐)를 공격.
키빌리스는 사절을 보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충성맹세를 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를 하자 공격을 개시.
- 저지 게르마니아의 사령관 비텔리우스아 티탈리아로 가버림.
고지 게르마니아의 사령관인 플라쿠스가 책임을 맡아야 했다.
플라쿠스 휘하의 군단장들 중에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음.
크산텐 지원군 편성은 지연되었고 지휘도 젊은 보쿨라에게 맡기게 됨.
-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의 5개 군단이 베수파시아누스 지지를 선언.
- "라인 군단", 비텔리우스 진영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지다.
병사들은 지휘관들이 비텔리우스가 지기를 바라고 있옸다고 의심을 품고 사령관 플라쿠스를 살해. 보쿨라는 노예로 변장하고 탈출.
-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이 마인츠의 군단 기지를 습격했지만 격퇴 당함.
키빌리스의 속셈이 들어나 로마군의 규율이 다시 회복되고 보쿨라가 선두지휘를 함.
<갈리아 제국>
- 키빌리스, 게르만족 및 게르만계 갈리아인 지도자들과 쾰른에서 화담을 염.
"갈리아 제국" 창설을 결의.
- 보쿨라, 포위된 크산텐을 구하러 가지만 노이스에서 피살.
트레베리족 지도자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의 부하들이 보조병 틈에 숨었다가 보쿨라를 습격.
<로마 역사상 최초의 치욕>
- 노이스 기지의 군단병, 키빌리스의 강요로 "갈리아 제국"에 충성을 맹세.
- 크산텐과 마인츠의 군단병들도 투항함.
라인 강 연안의 모든 군단기지가 반란군 손에 넘어감.
<반격이 시작되다>
- 서기 70년 1월 1일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제일인자"로 승인.
- 무키아누스 "갈리아 제국"을 진압하기 위하여 9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
지휘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캘리아리스와 갈루스애개 맡김.
- 갈리아계 갈리아인 "갈리아 제국"에 불참하기로 결의.
- 로마군이 이탈리아, 에스파냐, 브리타니아의 세 방향에서 라인 강을 향해 진격을 개시.
- 캘리아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트레베리족의 본거지 트리어를 공략.
<승리와 관용>
- 승리한 병사들은 캘리아리스에게 트리어라는 도시 자체를 없애 버리자고 주장.
캘리아리스는 로마인끼리의 내전의 종식을 선언.
갈리아 제국에 충성맹세를 했던 병사들에게 과거 행적에 대해 없었던 일로 한다고 함.
트레베리족과 랑고네스족의 유력자들에게 "갈리아 제국"을 떠나 로마인에게 돌아오게 설득.
- 게르만계 갈리아인이 친 로마로 돌아섬.
- "갈리아 제국"에는 게르만족만 남음.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와 율리우스 투토르 전사.
율리우스 기빌리스의 아내와 누이는 로마군의 포로가 됨.
궁지에 몰린 바타비족 지도자 키빌리스는 켈리아리스에게 회담을 요청.
바타비족은 종전과 같이 로마의 동맹부족으로 존속.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처형 당하지 않고 종적만 사라짐.
- 70년 가을 반란이 끝나고 "갈리아 제국"은 붕괴됨.
<"라인 군단" 재편성>
- 7개 군단 중 4개 군단을 해체 재편성을 함.
- 보조 부대의 지휘관을 부족 유력자가 아닌 로마인이나 다른 부족 출신으로 바꿈.
- 제국 서방에서는 관용정책으로 일과한 로마인이 제국 동방에서는 정반대로 대처함.
<유대 문제>
- 유대 민족의 특수성
(1) 그들의 거주지인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특수성
(2) 유대 민족이 대단히 우수한 민족임.
(3) 고대 그리스인에 비견될만한 이산 경향을 가지고 있음.
(4) 유대인은 다른 민족을 지배해 본 적이 없다.
(5) 유대인과 종교의 관계.(신권정치)
- 로마인들의 유대 민족에 대한 대처
(1) 헬레니즘 시대에 피지배자 였던 유대인을 지배자였던 그리스인과 동등한 지위로 인정.
(2) 그리스인, 유대인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조정자 역할에만 충실함.
(3) 유대인이 주장하는 구들의 특수성을 인정.
- 예루살렘에 신권정치를 수립하려는 정통 유대교도와의 갈등은 없어지지 않음.
신권정치 수립만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로마는 세습 왕권을 확립시키려 함.
- 네로 황제 시대의 유대 장관들의 악정이 원인이 되어 반란이 일어남.
서기 52년 부터 66년 사이에 유대 장관을 지낸 펠릭스, 페스투스, 알비누스, 플로루스.
<반란>
- 서기 66년 6월
유대 정관 플로투스가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한 것이 발단이 되어 폭동이 일어남.
- 플로투스 강제 진압을 결행.
- 유대 급진파 , 로마 수비대를 학살.
- 마사다 요새, 급진파의 손에 넘어감.
- 가을까지 반로마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로 확산.
- 각지에서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대립이 격화.
- 11월,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 공략에 실패.
철수하다가 유대군에 참패.
- 네로, 유대 반란 진압 책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임명.
<유대인 요세푸스>
- [유대 전쟁기]의 작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서기 37년생. 아버지는 제사장 계급, 어머니는 유대 왕가와 혈통관계에 있음.
- 서기 64년 유대인 석방 탄원 사절단의 최연소 단원으로 로마 방문.
유대인 배우의 소개로 포파이아 황후를 만나 탄원.
로마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데리고 돌아감.
- 66년 가을 귀국하자마자 요세푸스는 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 최전방으로 보내짐.
<유대 전쟁>
- 67년 5월, 베스파시아누스 진군을 개시.
- 7월 요타파타 함락.
요세푸스는 달아나다 한 동굴로 들어감.
먼저 피신해 있던 40명의 장로들을 만남.
로마에 항복을 하자며 장로들을 설득했으나 실패하고 차례대로 자살을 함.
요세푸스는 마지막 한 사람이 남자 다시 한번 설득을 하여 로마에 항복.
- 요세푸스는 로마군 사령관 면담을 요청.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만남.
<예언>
-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티투스와 친구가됨.
"네로의 뒤를 이을 사람은 당신과 당신 자손이고, 이 예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저를 당신 곁에 붙잡아 두어야 합니다."
- 69년 7월 유대 전쟁에 티투스와 동행, 동포들의 항복을 설득.
- 70년 9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로마에 개선했을 때에도 티투스와 동행.
-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 자리가 확실해 졌을 때 요세푸스에게 자신의 씨족 이름을 줌.
그후 요세푸스의 이름은 요새푸스 플라비우스가 되었다.
<전쟁 중단>
- 네로의 죽음으로 유대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로마군은 휴전 상태에 들어감.
<전쟁 재개>
- 서기 70년 봄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벽 앞에 포진하여 예루살렘 공방전 시작.
<예루살렘 함락>
- 서기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신전이 불타다.
- 서기 70년 9월 26일 예루살렘 함락.
- 서기 73년 봄 마사다 요새 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