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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27) - 라오디게아 교회의 편지
본 문 : 계시록3 : 14 - 22
계3:14-2절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치면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일곱 편지는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일곱 편지는 앞선 편지들을 통해 사탄이 교회 시대를 통해 교회를 어떻게 미혹할 것인가에 대한 충고와 조언이 담겨 있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버린 이파리만 무성한 행위(바른 복음에 근거한, 은혜로 말미암은 자발적이요 자연적인 성도로서의 행위가 아닌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행위)가 교회를 엉토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은 환난과 핍박과 궁핍으로 교회를 좌절시키고 낙담시키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환난과 핍박과 궁핍에 굴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을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음으로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 같은 잘못된 교리와 교훈을 교회로 스며들게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하게 만든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고 그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좇다보면 언제든지 그러한 잘못된 교리에 현혹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이 교회를 이세벨의 가르침인 우상 숭배나 신비주의, 기복주의 같은 엉터리 교리로 미혹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보하면서 사탄은 교회에게 하나님과 관계없는 많은 일을 하게 만들고, 사람도 많이 모아주고, 물질도 풍성하게 공급해서, 그 자체에 만족하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로 만들려고 우는 사자처럼 교회를 미혹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빌라델베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은 가난과 궁핍과 초라함으로 교회를 낙담시키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으로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소망을 바라보며 이겨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여기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전체 요한계시록의 요약입니다. 그 내용을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기술해 가면서 영광스러운 결론을 맺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업이 발달해 있었고 아주 유명한 의술학교와 의료시설이 있었던 도시입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에서 북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에는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 폴리스’라는 도시가 있었고, 남쪽으로는 10마일 떨어진 곳에는 차가운 생수로 유명한 ‘골로새’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펀지를 보낼 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읽게 하라고 당부할 정도로 아주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는 식수가 형편이 없었습니다. 석회처럼 보이는 진흙이 물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웃 도시인 ‘히에라 폴리스’의 온천물과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를 수로로 통해 끌어다가 사용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긴 거리를 오면서 미지근해 졌다고 합니다. 그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토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이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의 이해에 아주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14절을 보겠습니다.
계3:14절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ןאָ:ἀμἧν)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확실하고 참되다’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65장으로 가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65:16을 찾습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이 이사야서 65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할 것이며 그 중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읽은 16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를 히브리어로 보면, ‘이트바렉 벨로헤 아멘’(ןאָ י י)입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아멘의 하나님으로 복을 빌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도 ‘잇솨바 베로헤 아멘’(ןאָ י י)입니다. ‘아멘 하나님으로 맹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멘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 ‘아멘의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가 읽은 16절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내시리라는 언약을 하셨으므로 복을 구하는 자들은 ‘아멘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맹세를 하는 자들도 ‘아멘 하나님’께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멘 하나님’에 들어있는 내용은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언약을 이루실 것인가? 계속해서 17절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십시다.
사65:17-18절을 펴십시오. “보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그 언약의 하나님, 아멘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실 것이냐 하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에서 주님을 ‘아멘이시요’라고 묘사한 것은 그 새 하늘과 새 땅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새 마음을 창조하시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진짜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새 창조 사역을 완성시키시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멘이시오’ 다음에 ‘충성되고 참된 증인(마르튀스:μάρτυς)’이라고 붙여놓은 것입니다.
이 ‘아멘’(ןאָ)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70인역(LXX: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최초의 헬라어번역서)에서 헬라어로 ‘피스토스’(πισός:신실한,충실한,충성된) 혹은 ‘알레띠노스’(ἀληθήνός:참된,진실한)의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그래서 ‘아멘이시오’ 바로 다음에 나오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라는 말은 ‘아멘’이라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를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분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합니다.
여기서 ‘근본’이라고 번역된 ‘하르케’(ἁρχὴ)라는 말은 ‘시작’ 혹은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를 곡해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여호와증인)이 있습니다.
거기서 쓰인 단어 ‘하르케’는 수동형 명사가 아닙니다. 능동형 명사입니다. 예수님께 ‘피조물 중에 시작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역동적으로 창조의 사역을 하시는 창조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이 아닙니다.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을 ‘창조의 근본 - 하르케 테스 크티세오스(ἁρχὴ τἦς κτίσεως)’라고 묘사한 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절대적인 탁월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창조의 시작이십니다.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창조의 원인이십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주와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던 그 장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죄인들의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새 창조를 하실 것임을 예고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의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언약을 확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창조를 시작하시고 6일 만에 마치시고 일곱 번째 날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시작된 그 새 창조의 사역이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날까요? 실패할까요? 실패할 수가 없지요. 그분은 이미 충성되고 참된 증인(마르튀스,martyr)으로 오셨다가 가셨기 때문이지요.
그뿐 아니라 창세기의 창조 때 보증으로 서 계셨던 성령께서 똑같이 보증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나오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보면 이 교회에 보내시는 편지의 내용은 새 하늘과 새 땅과 그 안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들의 창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계3:14절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된 줄 믿고 이제 다음 구절로 넘어갑니다.
계3:15-16절로 갑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 구절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구절입니다. ‘차가울 거면 확실하게 차든지 더울 거면 확실하게 뜨겁든지 해야지 미지근하게 믿지는 말라’ 그러니까 ‘믿으려면 확실하게 열심히 믿고 안 믿을 거면 확실하게 그만두라’는 말로들 많이 이해하고 계시지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미지근하게 믿는 사람보다 차갑던 사람이 돌아서면 더 확실하게 돌아 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정말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을까요? 문맥을 잘 보시면 찬 것이나 더운 것이나 둘 다 다 좋은 것입니다. 단지 미지근하지만 말라는 것입니다.
히에라 폴리스의 온천수와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를 수로를 통해 대다 먹던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그 말뜻을 금방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럼 미지근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가 차든지 뜨겁든지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을 미지근하다고 말씀하시는 근거가 17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계3:17절을 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을 부자라 했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게 미지근한 신앙의 근거가 되느냐? 여기에 ‘부자라 부요하여’에 쓰인 단어 ‘페플루테카’(πεπλούτηκα:become rich;to be rich)는 직설법 완료시제입니다. ‘나는 부자인데 나를 부요하게 만든 것은 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자기의 힘으로 부자가 되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로 가서 부연 설명을 해 드리지요.
호12:8절을 찾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소득)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의 성숙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종교행위를 자랑하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경제적이며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모든 결과들을 마치 자기 것 인양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호2:8절을 읽고 가겠습니다. “바로 내가 그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며, 또 내가 그에게 은과 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 금과 은으로 바알의 우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호13:5-6절을 봅니다. “나는 저 광야에서, 그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먹이고 살렸다 그들을 잘 먹였더니 먹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를수록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나를 잊었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이스라엘)이 배부르고 등 따스우니까 하나님을 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을 잊었나요? 에브라임은 하나님께 계속 예배를 드렸고 순교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든지 왕성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풍성하고 부요한 행위를 만들어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놓치고 ‘내가 순교했고 내가 열심히 종교행위를 했고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헌금했다’하는 것을 ‘하나님을 잊었다, 미지근한 신앙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러한 자들이 실상은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풍성한 열심과 노력과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는데 주님은 그것을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암8:11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부요와 하나님의 복을 아주 교묘하게 흉내를 냅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안전감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모두 돈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돈은 편리함을 줍니다. 온 세상이 그 돈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닝이나 티코를 타고 호텔을 가면 안내원이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 사람취급 받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벤스 500을 타고 앞에 가면 안내원들의 태도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돈은 그렇게 우리에게 편리함과 안전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은근히 자기가 뭔가 다른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진짜 영적인 부요와 안전을 놓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그 언약 때문에 기쁘고 안전감을 느끼고 부요함을 느껴야 하는 자들입니다. 말씀 때문이 아닌 나의 환경과 나의 열심으로 맺은 결과물을 보며 안전감과 부요함을 느끼는 자들을 주님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작고 더러움을 더욱 더 발견하게 되어서 ‘하나님 혹시 저 가짜 아닙니까?’ 이런 반응이 나올지언정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거든, 난 진짜 잘하고 있어. 신앙적인 면이나 사 생활이나 난 참으로 부요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이 아무리 많고, 우리를 통해 맺혀지는 열매가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는 부요한 사람이라고 자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이러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우리를 낙심케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적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점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추악한 모습이 빛이신 그분 앞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들에게 이런 처방을 주십니다.
계3:18절을 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첫째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흰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발라 분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미지근하고 가난한 신앙이 아닌 뜨겁든지 차든지 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이 무엇인지 한 번 보겠습니다. 먼저 세 가지(금, 흰옷, 안약)를 사라고 하셨는데 누구로부터 사야한다는 것입니까?
‘내게서 ... 사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에게서 사라고 하십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에게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부자라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실상은 너희가 가난한 자들이니 내게 금을 사서 부요해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금은 그냥 금이 아니라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그럼 불로 연단한 금이 무엇인지 한 번 볼까요?
말3:1-3절을 찾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주가 홀연히 임할 것인데 그 주님은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이 임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3절에는 주님께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만드시기 위해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로 연단을 하십니다. 그들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슥13:9절을 보면,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하신다구요? 시험하신답니다. 은같이 연단하고 금같이 시험하신답니다.
벧전1:6-7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왜 주어지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해서 연단하신다는 것입니다.
호2:6절을 엽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음하고 부끄러운 곳으로 가는 길을 가시로 막고 담을 쌓아 못 가게 막아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고난과 환난으로 보일 수가 있는 것이죠.
그것이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그런데 그 불로 연단한 금은 주님으로부터 사야합니다. 그럼 그 시험과 고난은 바로 주님이 겪으신 주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배반당하고, 모함을 받고,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오해를 받고, 원수를 사랑하고’ 하는 주님의 고난이 바로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그 불로 연단한 금이 없는 자들이 가난한 신앙을 가진 자,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불로 금을 제련할 때 2,000도가 넘는 불로 제련한다고 합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이지요.
하나님 백성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져 가기 위해서 반드시 그 불로 연단되어지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쁜 성품, 우리가 가진 악한 습관들, 버릇들 모두 불로 태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변하기 어려운 존재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변화 산 사건을 보면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마1:2절을 펴십시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같이 희어졌더라”
변화 산상에서 주님의 옷이 심히 희어졌습니다. 변화 산 사건은 주님께서 낙심해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 그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사건입니다.
마16:2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
바로 이 말씀을 하시고 변화 산 사건이 그 뒤에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화 산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 영광스러운 부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벌거벗었다’라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리가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그 십자가의 삶이 양광스러운 부활로 가는 길임을 깨달아 참된 부요의 삶을 살라는 충고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하십니다. 안약으로 유명했던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갔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사야하는 안약은 뭘까요?
예수께서 안약에 되셔서 소경을 고쳐주시는 사건에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요9:1-7절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빛이신 주님께서 오셔서 흑암에 갇혀있는 죄인들을 부르셔서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안약이 되셔서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뭡니까? 창조입니다. 예수께서 안약이 되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창세기 1장, 2장의 창조 사건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던져져있는 죄인들에게 빛이 찾아오셔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시는 새 창조를 예고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새 창조의 사역,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미지근한 신앙이요 눈 먼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서도 이렇게 곤고하고,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신앙인들은 없습니까? 찔리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렇지만 안심하십시오. 이렇게 호되게 꾸중을 하시면서도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3:19절을 봅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렇게 야단치시고 책망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사랑하신답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 하신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뭡니까? 미움인가요? 아니요 무관심입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왜 책망하고 징계합니까? 다 사랑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책망과 징계가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19절 후반부에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끌고 가실 것이므로 이제 그만 항복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좇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오거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는 비록 많은 책망을 들었지만 이렇게 그 가운데 샘솟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서 간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시면, 계3: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구절을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 많이 쓰이고 있는데요, 문을 여세요. 그러면 주님이 들어가십니다.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럽니다. 정말 우리가 문을 열면 주님이 들어오십니까?
구원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시고 여러분이 문을 열어서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사실 이 분문의 말씀은 결코 불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의 잘못에 대한 책망과 회개를 통한 신앙의 회복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눅12:35-40절을 여십시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깨어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라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많은 책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지금 누가복음 12장 35절 이하도 바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문은 누구네 집 문입니까? 우리 집 문이 아니라 주님의 집의 문입니다. 36절에 보시면 ‘너희는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권적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3장 20절을 다시 보시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라고 되어 있지요.
이 본문은 ‘에안’(ἐάν)이라는 헬라어로 시작되는데 영어의 ‘if'절입니다. 이 단어에 ’듣고, 열면‘이 다 걸리는 것입니다. 곧 if anyone hears my voice and opens the door입니다.
그러니까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은 두 동작이 아니라 하나의 동작입니다. 듣는 사람은 열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문을 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열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주님의 교회의 성도로써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문을 열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맞아들이고 우리는 그의 종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전히 내 삶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문을 열지 않는 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정말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문은 주님께 활짝 열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자는 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과 주님께서 함께 식사를 나누시겠다고 하십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하고나 한 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요나단의아들 므비보셋을 대우해 주며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으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함께 먹는다는 것이 그러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문을 연 자들은 우리 주님과 그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주님께 산, 불로 연단한 금이 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산 흰옷을 입고 계십니까? 주님으로부터 산 안약으로 여러분의 눈이 밝아져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기쁘게 따라 갑니다.
그 길이 만사형통의 길이 아니고 세상적인 부요의 길도 아니고 눈부시게 화려한 황금 길이 아닐지라도 주님이 가자하면 가는 사람들이 진짜 부요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기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혀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계3:21절을 보겠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심한 책망만 받은 교회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와 복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는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가능하고 연약하여 책망만 받아 마땅한 자들이지만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시고 책망하시며 장계하시며 결국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열심을 읽을 수 있는 편지입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우리 신앙의 성패가 우리의 열심과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열심히 우리를 끌고 가시기에 우리는 안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실력과 여러분의 소유로 여러분의 안전의 근거로 삼지 마시고, 하나임의 열심히 여러분의 안전과 행복의 근거를 삼으십시오.
끝으로, 이 말씀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임을 뜻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