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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연구 논문 연재 8 :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 작법론>
연암 산문의 명문장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의 번역문
오덕렬
(산문의 시 시인ㆍ산문의 시 평론가)
[대본]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연경에서 열하로 갈 때 창평으로 길을 잡으면 서북쪽으로 해서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고, 밀운으로 길을 잡으면 동북쪽으로 해서 고북구로 나온다. 고북구로부터 장성을 따라 동쪽으로 산해관까지가 700리고, 서쪽으로 거용관까지가 280리다. 고북구는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위치한다. 험하기로는 고북구만한 요새가 없다. 이곳은 몽고가 드나드는 목구멍에 해당하므로 겹겹의 관문을 만들어 험준한 요새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나벽(裸碧)의 ≪지유(識遺)≫에 이르기를, “연경 북쪽 800리 밖에 거용관이 있고, 거용관 동쪽 200리 밖에는 호북구(虎北口)가 있는데 호북구가 바로 고북구다”라고 했다.
당나라 초기부터 고북구라고 불러서 중원 사람들은 장성 밖을 모두 구외라 부른다. 구외는 해왕, 곧 오랑캐 추장의 본거지였다. ≪금사(金史)≫를 상고해 보면, “그 나라 말로 유알령(留斡嶺)이라고 부르는 곳이 바로 고북구다”라고 하였다. 대개 장성을 빙 둘러서 ‘구(口)’라고 일컫는 데가 백여 곳을 헤아린다. 산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와 깊은 계곡이 아가리처럼 벌리고 있다. 물에 부딪혀 구멍이라도 뚫리면 성을 쌓을 수 없기 때문에 정장(亭障)을 설치했다. 명나라 홍무 연간에 그곳을 지키기 위해 정장 1천 호를 두어 다섯 겹으로 닫아걸었다.
무령산을 따라 배를 타고 광형하를 건너 밤에 고북구를 빠져 나왔다. 때는 바야흐로 야삼경, 겹겹의 관문을 나와 장성 아래 말을 세웠다. 높이를 헤아려 보니 십여 장이나 된다, 붓과 벼루를 꺼낸 뒤 술을 부어 먹을 갈았다. 장성을 어루만지면서 벽 한 귀퉁이에 이렇게 썼다.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야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노라.”
그러고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 한낱 서생일 뿐이로구나.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야 비로소 장성 밖을 나가게 되다니.”
옛날 몽염 장군은 “내가 임조로부터 일어나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았으니 종종 지맥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는데, 지금 장성을 보니 산을 파내고 골짜기를 메웠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아, 슬프다! 여기는 예로부터 수많은 전쟁이 벌어진 곳이다. 후당(後唐)의 장종이 유수광을 잡자 별장 유광준이 고북구에서 이겼고, 거란의 태종이 산의 남쪽을 취하려고 먼저 고북구로 내려왔었다. 여진이 요나라를 멸망시킬 때 회윤이 요나라 군사를 대파한 곳도 바로 여기였으며, 연경을 취할 때 포현이 송나라 군사를 패퇴시킨 곳도 바로 여기였으며, 원나라 문종이 즉위하자 당기세가 군사를 주둔시킨 곳도 여기였으며, 산돈이 상도 군사를 추격한 곳도 여기였다.
그런가 하면, 몽고의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쳐들어올 때 원나라 태자는 이 관문을 탈출하여 흥송(興松)으로 달아났다. 명나라 가정 연간(1522∼1566)에 엄답이 수도 북경을 침범할 때도 모두 이 관문을 경유하였다. 성 아래는 길길이 날뛰며 싸우던 전쟁터건만 지금은 온 천하가 전쟁을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히려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수많은 골짜기들이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때마침 상현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 한다. 그 빛이 싸늘하게 벼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놓은 칼날 같았다. 마침내 달이 고개 너머로 떨어지자,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듯했다.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은 관문 안쪽으로 반쯤 꽂혔다.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도 함께 운다. 짐승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버려놓은 듯하고, 두 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 하늘 저편에서 학 울음소리가 대여섯 차례 들려온다. 맑게 울리는 것이 마치 피리 소리가 길게 퍼지는 듯한데 더러는 이것을 거위 소리라고도 했다.
(고미숙ㆍ길진숙ㆍ김풍기: ≪열하일기≫下(북드라망, 2018.)
|작법공부|
≪열하일기≫는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떠나, 같은 해 10월 27일 돌아온 장장 만 5개월 동안의 기행문이다. 26편으로 구성된 이 ≪열하일기≫의 편명은 1편이 ‘도강록(渡江錄)’이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가 실려 있는 제5편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이다. ‘막북행정록’은 8월 5일부터 8월 9일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연경에서 열하에 도달하기까지의 체험들을 적었다. <야출고북구기>는 글제가 말해주 듯 기(記)로 한문수필이다. 번역하면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 정도가 될 것이다. 잠시 성 안에서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 한다. 성 밑에서 사방을 둘러본다. 물을 얻을 수 없어 술을 부어 별빛 아래서 먹을 간다. 북쪽 관문 고북구(古北口)를 지나다 솟구치는 감회를 누를 길이 없어, 따로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를 썼다. 때는 1780년 8월 7일이니,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의 삼일째 되는 날로 지금으로부터 240년 전, 연암의 나이 44세 때였다.
박지원의 호 연암(燕巖)은 ‘제비바위’라는 뜻으로 개성에서 30여 리 떨어진 두메산골이다. 연암이 젊은 시절 8도를 유람하던 중 친구 백동수의 안내로 발견하게 된 곳이다. 연암은 이곳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연암이 이곳에 본격적으로 터를 잡게 된 것은 40대에 접어들면서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벗들의 권유로 연암협으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동북부의 요새인 ‘고북구’를 통과하는 장면은 ≪열하일기≫의 하일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다. 그때의 경험을 글로 옮긴 것이 바로 ‘오천 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 일컬어지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이다.(고미숙)
≪열하일기≫는 여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는 ‘편년체’ 방식이다. 그러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는 여정과는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쓰여진 ‘기사체’의 글이다. 전호에 연재된 <일야구도하기>도 기사체로 <야출고북구기>와 같은 날 쓴 글이다. 우리는 연암 산문의 대표작 <일야구도하기>와 연암 산문의 명문장 <야출고북구기>가 같은 체험에서 태어났다는 데 주목해야 하겠다. 연경에 도착한 사행단은 졸지에 열하로 오라는 건륭 황제의 분부를 받는다. 그리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 무박 나흘 동안 먹지도 제대로 못하며 겪은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쓰라린 체험은 명작을 낳는 고향인 모양이다. 연경까지의 기행문은 많으나 이번처럼 열하까지의 걸음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이다. 8월 8일의 기록을 보자.
열하까지 오는 나흘 밤낮 동안 한 번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하인들이 가다가 발을 멈추면 모두 서서 존다.
불후의 기문(奇文) ≪열하일기≫에 이렇게 한문 문학 양식의 하나인 기記형식 취하여 기행문의 중간 중간에 사건이나 경험에 대한 자초지종을 기록하고 있음을 본다. ‘막북행정록’에만 해도 <야출고북구기>, <일야구도하기> 말고도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가 실려 있다.
이제 연암 산문의 명문장으로 평가 받는 <야출고북구기>를 살펴보자. 우선 글의 갈래는 고전 수필로 한문수필이요, 기행수필이다. 글의 성격은 체험적, 사색적, 묘사적이다. 소재는 ‘고북구를 밤에 거닐어 본 체험’이 되겠다. 이 소재를 작품 속에서 제재로 삼아 거기서 주제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수필(창작에세이)의 형식이다. 제재에서 이끌어낸 주제는 무엇일까?
다시 또 한 고개를 올랐다. 초승달은 이미 졌는데, 시냇물 소리는 더욱 요란히 들려온다. 어지러운 봉우리는 음침하기 그지없어, 언덕마다 범이 튀어나올 듯 구석마다 도적이 숨어 있는 듯하다. 때로 긴 바람이 우수수 불어와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쓸어준다. 솟구치는 감회를 누를 길 없어, 따로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를 썼다.
인용문의 ‘솟구치는 감회를 누를 길 없어,’ 이 글을 썼으니 주제는 ‘고북구를 밤에 거닐며 느낀 감회’가 되지 않겠는가. 구성은 크게 본문인 <야출고북구기>와 <후지(後識)>로 되어 있다. 본문과 ‘후지’는 별도로 떼어서 다루어도 좋겠으므로 ‘후지’는 다음 호에 다루려 한다. 구성은 현대문학 이론의 플롯론의 단계인 ‘발단-전개, 위기·절정-대단원’으로 나누었다.
단 계 | 부터∼ 까지 | 소주제 | |
발단(起) | “처음 ∼ 호북구가 바로 고북구라고 했다.” | ○ 고북구의 위치 | |
전개(承) 1 | “당나라 초기부터 고북구라 불러서∼ 정장 1천 호를 두어 다섯 겹으로 닫아걸었다. | ○ 고북구의 내력 | |
전개(承) 2 | “무령산을 따라 배를 타고 광형하를 건너 ∼ 비로소 장성 밖을 나가게 되다니.” | ○ 고북구를 빠져나와 | |
위기·절정(轉) 1 | “옛날 몽염 장군은 “내가 임조로부터 일어나∼산돈이 상도 군사를 추격한 곳도 여기였다.” | ○ 수많은 전쟁이 벌어진 곳 | |
위기·절정(轉) 2 | “그런가 하면, 몽고의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쳐들어올 때 ∼ 수많은 골짜기 들이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 ○ 쓸쓸하고 적막함 | |
대단원 (結) | “때마침 상현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 ∼ 끝” | ○ 감회 |
이상의 작품 분석을 종합해 보면 <夜出古北口記>는 현대 문학에세이에 해당된다. 대단원의 서정성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방불케 하고 있다. 고북구(古北口)는 호북구(虎北口)라 일컬을 정도로 무서운 곳인데도 말이다. 박지원은 겹겹의 관문을 뚫고 호북구를 빠져나와 술로 먹을 갈아, 장성을 어루만지면서 벽 한 귀퉁이에 이렇게 썼다.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야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노라.
≪열하일기≫는 당시 우리나라 선비들 사이에 선풍과 같은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썩은 옛 것에 염증을 느끼며, 새것을 원하던 신진들은 지대한 감격으로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대다수 완고한 학자들에게는 지대한 물의의 대상이 되었다. 위의 인용문의 ‘건륭 45년’이 빌미가 되어 반대파들은 ‘노호지고(虜號之藁)라 공격했다. ‘되놈의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조선 국왕도 청나라에 바치는 ‘표문(表文)’에 건륭을 썼던 것이다.
어쨌든 천고의 기문이요, 세계 최고의 여행기로 평가 받는 ≪열하일기≫가, 그 당시 말썽도 많았으며, 하마터면 불에 타 전해지지 못할 위기도 맞았었다. 이런 ‘아찔한 순간’들이 이뿐이겠는가?
삼종 형 박명원이 건륭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개인 수행비서 자격으로 연암을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이 선택이 없었다면 ≪열하일기≫는 없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양을 출발하여 연경에 도착 했을 때, 피곤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분부를 받았다.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정사가 이렇게 충고한다.
“자네가 만 리 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온 건 천하를 널리 구경하고자 함이거늘, 대체 뭘 망설이는가. 만일 돌아간 뒤에 친구들이 열하가 어떻던가 하고 물어오면 뭐라 대답할 텐가. 게다가 열하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인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냥 놓칠 셈인가.”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열하일기≫는 또한 없다. 충고를 받아들였어도 열하까지 잠을 자지 않고도 갈 수 있는 연암의 체력이 고맙기 그지없다. 또 문체반정 때 사라졌다면 ≪열하일기≫는 없었을 것 아닌가.
우리나라는 갑오경장(1894)을 계기로 오랜 봉건 시대를 마감하고 근대시민 사회로 전환하게 되었다. 문학예술도 고전문학 시대에서 서구 현대문예사조에 의한 창조적 예술 활동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이를 현대미술, 현대음악, 현대무용 등의 이름으로 부르고, 문학도 <현대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이관희)
그런데 우리에게는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 수필론이 없다. 선배 수필을 했던 분들이 ≪용재수필(容齋隨筆)≫의 ‘隨筆’을 ‘붓 가는 대로’라 하여 수필론쯤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지난 한 세기 이상 수필 발전을 저해하고 말았다. ≪용재수필(容齋隨筆)≫은 중국 남송 때 사람인 홍매(洪邁,1123-1202)의 저서명이다. 그 서문을 보자.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그때그때 혹 뜻한 바가 있으면 앞뒤의 차례를 가려 챙길 것도 없이 바로바로 메모하여 놓은 것이기 때문에 ‘수필’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予習懶, 讀書不多, 意志所之, 隋卽紀錄, 因其後先, 無復詮次, 故目之曰隨筆). (최승범: 《수필문학》(형설출판사,1975). PP. 15-16.)
인용문의 ‘앞뒤의 차례를 가려 챙길 것도 없이 바로바로 메모하여 놓은 것이기 때문에 ‘수필’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의 어디에 수필론이 있기나 하는가. ‘수필’이라는 말만 따왔어야 했다. 아니 그것도 ≪열하일기≫의 <일신수필(馹汛隨筆)>에서 따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아픔 속에서도 우리 수필(에세이)은 자생적 진화 과정을 거쳐 ≪산문의 詩(창작문예수필·창작에세이)≫에까지 이르렀다. ‘산문(에세이)의 창작적 변화’ 현상은 찰스 램의 <꿈속의 아이들>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두고 백철 교수는 순문학적 수필(에세이)이라 했다. 조연현 교수는 ‘수필(에세이)’은 창작적 변화를 용인하는 일반 산문의 대표적 양식이라 했다. 또 공정호 교수는 ‘20세기에 들어와 informal 에세이는 서정시를 방불케 진화했다’고 진단했다. 윤오영 수필가는 ‘찰스 램의 등장으로 수필도 문학 장르의 하나로’ 되었다고 보았다. 하루빨리 <산문(에세이)>의 창작적 진화> 현상을 종합 정리한 연구물이 나오기를 희망한다.
우리 시단에서 산문의 시를 찾아보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나 서정주 시집 ≪질마재 神話≫의 제1부에 실린 36편이 그 본보기다. ≪산문의 詩≫의 구체적 내용은 별도로 소개하기로 한다.
<참고 문헌>
고미숙ㆍ길진숙ㆍ김풍기: ≪열하일기≫上ㆍ下(북드라망, 2018.)
문덕수: ≪오늘의 詩作法≫(시문학사, 1992.)
문정 외20인: ≪나에게서 섬 냄새가 난다≫(비유, 2019.)
서정주: ≪질마재 神話≫(일지사, 1978.)
이관희: ≪散文의 詩≫ 33호ㆍ35호(비유, 2019.)
이관희: ≪형상과 개념≫ (비유, 2010.)
장덕순: ≪한국수필문학사≫(박이정. 1995.)
전진권: ≪한국고전수필선≫(범우사, 2005.)
조성원: ≪조선의 꽃-열하일기≫( 해드림출판사, 1016.)
조연현: ≪개고 문학개론≫(정음사, 1973.)
한국고전연구회: ≪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지하철 문고, 1980.)
한용운: ≪님의 침묵≫(왕문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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