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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속파에겐 구원 없다>의 줄거리:
예수님의 칭찬이 주어진 두 경우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백부장의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놀라게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만, 실속 없음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실속차리는 한 믿음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속파에겐 구원이 없습니다.
실속파에겐 구원 없다
(눅7:1-10)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실속파에겐 구원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목회를 할 때 가끔 교회 나오는 청년들이나 교인의 자녀분들이 추천서를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로 목회를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모든 가정의 자녀들을 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맨 처음에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참 난감했습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고 그 아이들에 대해서 실제로 내가 느낀 바가 평소에 없었는데 이거 어떻게 추천서를 써야 하나?
그런데 그 자녀들에게는 추천서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다 생각을 바꾼 것이, 그들이 추천서 하나를 받는 것을 대비해서 나와 일부러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또 제가 교회를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모든 가정의 모든 자녀에게 추천서를 언제든 쓸 만큼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그래서 제가 제 마음을 달래면서 한 방법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갖고 오라고 해서 그것을 보고, 또 그들의 부모님이나 담당교역자들에게 물어보고 해서 추천서를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에세이를 하나 읽었는데, 이와 같은 고민에 빠진 대학교 학과장님의 글이었습니다.
이 교수님이 쓴 에세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학생이 와서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수님께서 저와 마찬가지로 네 소개서나 경력사항들을 적은 서류를 꺼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서류는 가져왔는데 아무 자기소개에 관한 내용이 없고 추천서 양식을 들이밀면서 하는 말이 ‘그냥 교수님은 이 추천서에다 도장만 찍어주시면 됩니다.’ 하더랍니다.
이 학생을 돌려보내고 나서 씁쓸한 마음을 가지고 쓴 에세이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어떻게 도장만 찍어달라고 얘기를 합니까?
어떻게 이렇게 당돌할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학과장 교수님을 뭐로 보기에 이렇게 당돌하게 자기 필요만을 들이댈 수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자기 필요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 자기 필요만을 채우기 위하여 행동하는 사람, 우리는 이 사람들을 실속파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정말 극단적인 실속파요, 기형적인 실속파가 되었습니다.
추천서에 도장만 찍어주면 추천의 내용은 자기가 쓰겠다는 얘깁니다.
보통은 내 필요를 따라 움직이게 되지만, 그러나 내 필요만을 생각하고 움직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필요를 적정선에서 고려하고 맞춰줍니다.
이걸 바로 협상이라고 그래요.
회사에 취직하려고 합니다, 나는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내 필요를 따라서 일자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내 필요만을 충족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회사로서는 회사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면이 있는가를 봅니다.
그래서 직장을 원하는 나의 필요와 기능을 원하는 회사의 필요가 맞아떨어질 때 나는 취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내 필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드물지요.
부모님의 경우, 뭐 부모님이라고 다 그렇습니까?
속내를 살펴보면 부모님도 다 자기 필요 때문에 그렇지요.
자식이 성공하면 자식만 좋습니까?
내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동창회에 가서 큰소리로 떠들며 자랑합니까?
그 자랑 한 마디가 하고 싶어서 애들을 3년 동안, 5년 동안 닦달을 하는 것 아닙니까?
한번 따져보세요, ‘공부하라, 공부하라’ 하는 것도 그 자랑이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타인의 필요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자, 믿음이 뭡니까?
예수님 바라보기입니다.
예수님 보는 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나의 ‘선행과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할 때보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것이 결코 간단하고 쉽지 않은 이유는 바라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봅니까?
대부분은 추천서 내밀면서 ‘도장만 찍어주세요!’ 하는 학생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요즘 많은 교회가 예배시간 중에 헌금을 하지 않고 헌금함을 예배당 입구에 놓아둡니다.
그러면 예배하러 들어가면서 헌금을 넣게 되는데, 제가 짓궂게도 잠깐 3, 4분 멈추고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 시간에 헌금함에 헌금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안 넣어요, 정말 너무 많은 사람이 헌금을 넣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출석하는 교회가 큰 교회니까, 뭐 조그만 교회에 나가면 목사님이 관심을 보이시니까 제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큰 교회를 나가는데, 너무 많은 교인이 예배를 드리러 오는데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놀랄 정도에요.
그리고 큰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고 살짝 빠져나가게 됩니다.
극단적인 실속파의 경향을 띠게 됩니다.
여기서 조금 나아가서 교회가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교인은 어떤 교인입니까?
협상을 합니다, 교회라는 조직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봉사요, 충성이요, 섬김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봉사하고 충성하고 섬기면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복을 쏟아부어주실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내 필요만을 채우는 실속파, 두 번째 단계는 내 실속만 아니라 타자의 실속도 고려하는 믿음의 상태, 1단계 2단계 믿음의 실속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전혀 나 자신의 필요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
교회 충성, 교회 봉사는 곧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내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을 보는 사람, 내 필요와 교회의 필요를 적당히 협상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나의 필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예수님을 보는 사람.
그런데 맨 마지막 단계로 예수님을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백부장에게 예수님께서 놀라시면서 칭찬하신 이 ‘큰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백부장의 예수님 바라보기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에요.
예수님을 바라볼 때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그 동안 만나셨던 모든 선민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십니다.
모든 사람은 1단계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내게 필요한 것, ‘추천서에 도장만 찍어주세요, 추천서의 내용은 내가 채우겠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고 있고 내 인생에 대해서 필요를 느끼는 것도 내가 느끼면 됩니다, 단지 예수님은 내가 느끼는 필요를 채워주세요, 도장만 찍어주세요!’라고 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
2단계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내가 쫓아다니고 있으니까, 집이고 직업이고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다니고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내게 앞으로 이러이러한 것들을 주실 거야!’
내 필요와 예수님의 필요를 적당히 협상하면서 쫓아다니고 있는 사람.
그 모든 사람, 예외 없이 1단계와 2단계에 다 속하고 있는데, 그 1단계와 2단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한 사람이 바로 이방인 백부장이라는 겁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에서 예수님은 놀라시는 겁니다.
전혀 자기의 필요를 따라 예수님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따라 예수님을 보지 않게 되니까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아, 놀라운 일이에요.
이 백부장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다 죽어가는 자기의 종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낫게 되어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이 백부장이 파악하게 됩니다.
내 필요를 따라 보지 않고 있으니까 예수님 자신을 파악을 하는 것이에요.
백부장이면 크게 따져서 백부장 위에 대대장이 있습니다.
100인 부대의 장이 백부장이고 이 100인 부대가 여섯이면 대대가 됩니다.
그리고 600명 대대가 열 개가 모이면 군단이 되고 군단장이 있습니다.
군단들이 모여서 로마군대를 형성할 때 군대 총사령관이 있을 것이고, 총사령관 위에는 원로원이 있을 수 있고 집정관이 있을 수 있고, 마지막으로 황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부장이라고 하는 것은 황제하고는 만날 수도 없습니다.
대대장에게 말하면 되는 것이고, 대대장도 황제를 못 만나고, 대대장은 군단장에게, 군단장은 빌라도 같은 총독한테 말하면 될 것이고, 총독은 원로원에, 그리고 황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말씀만으로도 나을 수 있겠다는 이것도 백부장 자기의 경험 속에서 나온 얘기에요.
황제가 로마에서 명령을 하면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자기가 그 황제의 명을 수행해야 됩니다.
어떤 액션을 취하기 위해서 황제가 팔레스타인까지 와야 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바로 예수님을 이렇게 황제와 자기, 로마제국시대의 모든 권세와 권력의 출발점이었던 황제와 자기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어떻게 이방인인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영계에 또 하나의 명령체계가 있는데 그 명령체계의 정점으로 나 자신을 파악할 수가 있었느냐?’
이 사람에게 말씀도 주어진 바 없고 계시도 주어진 바 없는데, 말씀과 계시가 산더미처럼 주어져 있는 선민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파악함에 있어서 전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이방인인 백부장이 파악할 수가 있었느냐?
놀라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백부장이 이렇게 예수님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장로들을 보낸 것도, 이 백부장은 자기가 직접 예수님께 갈 수가 없는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이건 자기 존재에 대한 파악도 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느끼는 바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장로를 대신 보냅니다.
그런데 그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우리 민족을 사랑했고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식민지 지배국의 군인이 식민지의 백성을 사랑할 필요 없어요,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회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회당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필요한 것이에요.
가버나움 지역에서 성전은 멀리 떨어져 있고 회당이 있어야 종교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 사람들에게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식민지 나라 백성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랑하는 종’이라고 했지만 이 사람이 사랑하는 거지, 종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당시 종이라는 것은 물건과 같아서 죽으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통해서 예수님께 부탁을 해서 이 종을 구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그런 건지 후천적으로 교육을 받아 그런 것인지 어떤 계기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 백부장의 행동의 모티브는 항상 다른 사람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필요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파악이 되었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이것을 주님은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큰 믿음이라는 것은 가장 바른 믿음에 가장 가까웠다는 얘깁니다.
어느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이렇게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사람을 왜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가? 하고 놀라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믿음은 예수님 바라보기, 하나님 바라보기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내 필요로부터 빠져나와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필요를 따지고 내 필요를 이루려는 실속파의 입장으로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결국 사도들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변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전혀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보고, 따지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필요로부터 빠져나오지 않는 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내 필요의 안경을 쓰고 있는 한 예수님은 결국은 내가 부리는 종이 됩니다.
여러분,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고 우리가 말씀을 나눴습니다.
또 하나 다른 측면에서의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내 필요를 내가 느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내가 느끼는 것이 바로 원죄의 열매라는 거예요.
원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이 세상의 삶을 위한 나 자신의 필요를 느낄 필요가 없게끔 태어났습니다.
그 말씀이 어떻게 표현됩니까?
에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인가를 느끼게 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뒤부터였다는 거예요, 무엇이 내게 필요한 것인가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다음에 광야로 보내신 뒤에 어차피 물을 주실 거예요, 말려 죽이실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목이 말라 죽을 지경으로까지 이끄십니다.
어차피 주실 물을 좀 더 일찍 주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셨을까요?
그리고 어차피 고기를 주실 것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불평하도록 만들어놓고서야 고기를 주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육체를 갖고 살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필요를 느끼는 그 습성의 뿌리 자체를 없애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려고 하신 겁니다.
그렇게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어도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느끼지 말라는 거예요.
그걸 왜 내가 느끼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준비해놓고 계시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 필요를, 내가 느끼는 습성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내 필요를 따라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잖아요?
이게 아이러니에요,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찾게 되었는데 참 놀랍게도 그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못 봅니다.
내가 느끼는 나의 필요를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한, 아무리 예수님과 하나님을 불러도 진짜 그분들의 모습을 못 본다는 겁니다.
진짜 그분들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그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거기서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마음이 묶여버려서 예수님을 찾지만 예수님을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십니다.
그냥 예수님을 보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 필요에 의해서 자유롭게 예수님을 볼 수가 없어요.
꼭 필요를 따라서 예수님을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위해서 하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고, 그 예수님과 함께 연합해서 죽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는 자가 아니고서는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을 보는 이 죄적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에요.
불가능하다는 얘깁니다.
오직 십자가에 있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하면서 내 필요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내가 느끼는 필요에 대해서 죽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편에 계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에, 내 필요로부터 해방되어서 보게 될 때에 이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게끔 되어 있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몸을 통해 느끼는 필요를 내가 느끼면서 그 필요를 내가 채우려는 실속파의 입장에 있는 한 믿음이 성립하지 않고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 필요를 내가 느끼는 것이 죄악이기 때문에.
이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서 내 필요는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져 버리고 한번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백부장이 보듯이 온전히 볼 수 있는 예수님이 놀라시는 그러한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필요를 느끼는 나의 감각 자체가 죽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오직 내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느끼시는 필요에 따라 움직여 갈 수 있는 하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