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발 공장 문을 닫다] 하지만 부산의 신발 산업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과 같은 저생산성의 운명을 맞게 되어 뚜렷한 하락세를 나타냈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1980년대 후반기에 노동 운동과 임금 인상 압력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삼화, 진양, 태화, 동양 등 대규모 회사들이 도산했고,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국제상사도 생산 라인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92년 정부에서 발표한 ‘신발 산업 합리화’ 조치는 부산의 신발 산업을 정리의 대상으로 인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탈(脫) 부산 러시를 이룬 부산 신발은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로 생산 기지를 대거 이전했다. 이로써 부산 신발은 30여 년간의 세계 1위의 명성을 뒤로 하고 중국 등 후발국에 그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다. 부산 신발의 몰락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부산신발은 나이키 등의 하청 업체로서 주문 생산만 할 줄 알았지 세계적인 브랜드화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대형 신발 회사들이 프로스펙스, 르까프 등 독자 브랜드를 가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브랜드들이 물량을 대폭 줄이거나 아예 동남아 등지로 하청 업체를 교체해 버린 것이었다. 부산 지역의 5대 신발 공장에 다니는 인원만 하더라도 5~6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는데, 5대 업체가 한꺼번에 줄도산하면서 상황이 한순간에 급변했다. 노동자들이 연일 시위하며 공장의 폐업을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윤자와 친구들이 일하고 있던 동양고무에서의 노동 쟁의는 노동자 대투쟁 때보다 공장이 폐업을 결정한 이후에 더 많이 발생했다. 하지만 공장 문을 닫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공장이 폐업을 결정하자 누구는 운전을 배우러 다닌다 하고, 누구는 가게를 차린다 하며 다들 제 살길 찾아 나섰다. 그러는 사이에도 한쪽에서는 폐업을 막고자 연일 시위를 했다. 특히 폐업 결정 얼마 전에 작업반장이 되었던 박현숙는 노조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결국 동양고무 공장은 문을 닫았다. 1970년대 말부터 폐업을 할 때까지 줄곧 동양고무에서 일했던 조윤자는 공장이 폐업할 때 회사로부터 퇴직금과 약간의 위로금을 받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작은 규모의 다른 신발 공장에 취업을 했다. 한윤희의 남편은 그때 운전을 배워 택시를 몰았다.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반면 조윤자와 마찬가지로 박현숙의 남편도 몸이 아파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박현숙 역시도 돈을 벌기 위해 또 다른 신발 공장에 들어갔다. 조윤자와 함께 일하던 여공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래도 한윤희와 박현숙은 지금까지 서로 연락하며 절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태광과 세원 등의 2세대 신발 업체가 동남아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부산에는 성호실업, 트바스 등 이른바 3세대 신발 업체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소위 OEM 체제를 벗어나 르까프와 프로스펙스처럼 트렉스타, 비트로 등의 독자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출현시켜 새로운 중흥기를 모색하고 있는데, 일반 운동화 주문 생산보다는 등산화, 테니스화, 사이클화 등을 자체 개발하여 특수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5대 업체가 도산하고 태광과 세원 등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1990년대 이후 부산에는 중소 규모의 신발 업체들만 남게 되었다. 주로 사상 공단 감전동 일대에 중소형 신발 공장이 많았다. 조윤자와 친구들은 1992년 무렵 당감동에 위치한 삼원사라는 신발 공장에서 일했다. 르까프, 휠라 등의 브랜드를 주문 생산하는 종업원 150명 정도의 소규모 공장이었는데 제법 잘 돌아갔다. 그런데 큰 공장은 생산 라인에서 정해진 한 가지 작업만 하면 됐지만 작은 공장은 여러 가지 작업을 모두 소화해야 했다. 그래서 동양고무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작업 강도가 세졌음에도 오히려 급여는 더 작았다. 그 때문에 큰 공장에 비해 이직률이 높았다. 조윤자도 여러 번 회사를 옮겼다. 조윤자와 한윤희는 이제 환갑이 다 된 나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신발 공장에 나가 일을 한다. 자식들이 모두 장성해서 결혼을 했고, 이제는 내 집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별로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은 일하는 것이 집에서 그냥 쉬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지금 다니는 공장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페이스, 콜○ 등의 아웃 도어 브랜드를 생산하고 있다. 공장에는 동남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법 있지만 인력난이 매우 심하다. 아마도 조윤자와 한윤희가 부산 신발의 마지막 세대가 될 듯하다. 지금 그녀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만 봐도 대부분이 50~60대의 할머니 노동자들이다. 박현숙는 얼마 전에 오랫동안 준비한 자신의 신발 가게를 개업했다. 그녀도 작년까지 계속해서 신발 공장에 다니면서 일했다. 요즘은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 아니면 잘 팔리지 않지만 박현숙는 중간 도매를 거치지 않고 공장에서 바로 신발을 떼어 오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삼는다. 물론 중국에서 생산된 초저가 신발도 취급을 한다. 당연히 품질이 형편없다. 친구들과 만난 박현숙는 일회용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신발을 만들어 팔 생각을 하냐며, 우리가 만들었던 신발의 품질은 정말 세계 최고라 자부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조윤자와 한윤희도 옆에서 맞장구치며 거든다. 사십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들이 만든 신발은 과연 몇 켤레나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