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롭게 죽어 승리하는 것이 겁쟁이로 싸워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 낫다'
<故 김영옥 대령의 모습, 출처: MBC스페셜영웅 김영옥 대령>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국가최고무공훈장, 미국특별무공훈장 등 수많은 상의 수훈자. 미국 전투교본을 다시 쓰게 한 전설적 작전장교, 미군 역사 최초의 비(非)백인 야전대대장,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의 아들, 한반도 휴전선을 60km 올린 북상의 주역, 미국 최고 전쟁 영웅, 국경을 초월한 인도주의자, 여성·아동·빈민등 사회적 약자의 수호자. 그리고 아름다운 영웅. 그를 지칭하는 단어는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 김영옥. 이제부터 그가 왜 아름다운 영웅으로 불리는지 함께 알아가려합니다.
<MSN선정 미국 전쟁영웅 16인, 출처: MSN >
지난 2011년 5월30일 미국의 현충일(메모리얼 데이)을 맞아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명을 선정했는데요. 16명의 인물중에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MSN에 따르면 김 대령은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한국계 이민2세로 탁월한 군인이며, 이번에 선정된 전쟁영웅 가운데 유일한 소수계입니다.
MSN은 “김영옥은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예편했으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재 입대했고, 한국전쟁 당시 한국어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통역장교가 되는 대신 보병부대에 들어갔다”며 “여러 차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후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전투대대장이 됐다”고 김영옥 대령을 소개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이으로 선정된 김영옥 대령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2차 세계대전 참전, 살아있는 신화가 되다
김영옥 대령은 1919년 미국으로 망명한 독립 운동가였던 김순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미국 내 인종차별이 심했던 그때 그는 1943년 소위로 임관한 이후 2차 세계대전지인 이탈리아로 갔는데요. 이곳에서부터 그의 전설적 행보가 시작됩니다.
(이탈리아, 2차 세계대전 사진 첨부)
이탈리아에서 총공격 작전을 세우려던 미군에게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독일 탱크 사단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정보 없이 섣불리 공격했다간 탱크사단의 화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독일군 포로를 잡아 이 정보를 구하려 백방으로 노력 중이었는데요.
이 무렵 구스타프 라인에서의 뛰어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김영옥은 대대 정보 참모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김영옥 대령 자신이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서 적군을 생포해 오겠다는 작전 계획을 제출합니다.
대령의 작전은 적군의 경계를 뚫고 침투하여 독일군을 생포하는 작전이었는데요. 이 작전에 대한 많은 논란 끝에 '자살행위이지만 자원한다면 가도좋다' 는 허가를 받게됩니다. 즉, 군사적 측면에서는 성공 가능성이 전혀 없으나 그렇게 죽고 싶다면 한 번 해 봐라' 라는 의미였죠.
이 작전 계획을 듣고 자원한 아카호시 일병과 김영옥 대령은 일일이 손으로 지뢰를 제거하며 무인지대를 통화한 뒤 독일군을 생포하며 작전을 성공시킵니다. 김영옥 대령의 이 작전은 정말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이로 인해 연합부 진영이 뒤집어지고 이후 대령은 특별 무공 훈장을 받게 됩니다.
김영옥이 잡아온 포로를 심문해 독일 탱크 사단 위치를 확인한 연합군은 5월 23일 '버팔로 작전'으로 명명된 총 공격을 개시해서 포위망을 뚫고 6월 4일 로마를 해방시킵니다. 이와 함께 앞, 뒤로 전선이 형성된 독일군의 구스타프 라인도 무너지게 되었죠. 김영옥의 작전 성공으로 이탈리아 전선의 판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작전으로 이탈리아 정부는 전쟁 후 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김영옥 대령에게 수여하였는데요. 김영옥 대령은 이 상을 받은 유일한 한국인입니다.
<클라크 사령관과 김영옥, 출처: MBC스페셜영웅 김영옥 대령 >
미국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하다.
한국인으로 유럽 전선에서 훈장을 휩쓸었던 대령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 제대를 합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전쟁영웅, 사업가로 살고 있던 그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듣게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입대하여 6․25전쟁에 참전합니다.
김영옥은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6․25전쟁에서도 무적행진을 이어갑니다.대령의 뛰어난 전술은 수안산 전투에서도 큰 빛을 보게 됩니다. 북한강 부근에서의 전투에서 연대로부터 받은 공격 시작 시간은 오전 08시 30분이었지만 북한강 남쪽과 북쪽 모두 중공군이 있어 08시 30분에 총공격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60km를 넘게 우회 후 공격을 시도하면 병사들의 전투력이 저하되고, 야간 전투에 강한 중공군이 유리해지게 되었죠. 이런 상황을 인식한 대령은 적진 사이를 돌파하는 위험한 작전을 짜게됩니다. 작전이 성공하면서 수안산 전투는 또 하나의 승리로 기록되었고 중부 전선을 북으로 60km나 밀어 올리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오늘날 휴전선이 중부전선에서 북으로 불쑥 튀어나오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전투인 것이죠.
<1951년 31연대 1 대대장 김영옥 소령의 모습. 출처: MBC스페셜영웅 김영옥 대령 >
<중부전선에서 북으로 밀려 올라간 모양의 지금의 휴전선. 출처: 아름다운 영웅 >
김영옥은 한국군의 명장 채명신과도 깊은 전우애를 맺었는데요. 김영옥의 31연대 1대대 왼쪽에 자리를 잡은 것이 채명신이 연대장으로 있는 한국군이었습니다. 이렇게 맺어진 이들의 전우애는 12년 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호와 수도 방어 체계를 놓고 오랫동안 계속된 한·미 양국 간의 첨예한 외교적 마찰을 잠재우고 오늘날 청와대 경호와 서울 방어 체계의 모태가 되는 중요한 공헌으로 이어집니다.
영원한 인도주의자
잠시 한국을 떠났었던 김영옥 대령은 1963년 군사고문으로 우리나라를 다시 찾았습니다. 한국에서 다시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한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를 창설하며 한국 방어계획을 현대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이 경제개발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군사적 방패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옥 대령은 6·25전쟁에서 입은 중상의 후유증으로 큰 수술만 약 40차례 받았고, 1972년 대령으로 예편하였습니다. 대령은 전역 후 입양아·장애인·노인·청소년·빈민·가정폭력피해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2005년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묘지는 호놀룰루에 있는 미국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최고의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던 김영옥 대령을 기억하고자하는 움직임은 현재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초등학교 5학년1학기 국어교과서에 김영옥 대령의 이야기가 실리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기성세대가 세종대왕·이순신·안중근 등을 한국이 낳은 영웅으로 배우면서 자랐듯이 이제 한국의 학생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을 배우며 자라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미국에서는 최초로 한국인의 이름을 딴 ‘김영옥 중학교’도 생겼습니다.
<미국 LA의 김영옥 중학교와 로고 출처: MBC스페셜영웅 김영옥 대령 >
'알렉산더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 중령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마크 클락크 前 유엔군 총사령관
'미 보병학교 시절 한국계인 김영옥 대령 덕에 어깨가 으쓱했다'-채명신 前파월한국군 총사령관
“제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제 아들이 그 분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저자 한우성
중부전선을 형성에 큰 일조를 한 그에 대해 정작 우리는 잘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군인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그를 2014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故김영옥 대령의 진심어린 한 마디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 故김영옥 대령, 1919. 1~2005. 12
<故 김영옥 대령의 모습, 출처: 네이버 프로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