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도 워싱톤 DC 지구촌 교회(워싱톤 제일한인침례교회)
침례교역사- pic
2018-03-11 13:26:40
다음도 정부 사찰이 가능해지고 카톡도 사들이고...
정권도 바꼈지만 뭔 농간인지 인터넷상의 모든 인포메이션들이 다 없어져 버렸다.
이제 더 이상 독재자들의 악행들은 인터넷에서 찾기 힘들고 인간검색?이라는 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친일군사독재자들은 자신의 아이들 학교 갈 때 쯤에는 입학시험 다 없에고
지들이 간음 할 때쯤에는 간통죄라는 걸 없에고...
첩질하기에는 너무 늙을 때 쯤에는 '미투'로 모두를 발가벗긴다.
궁민덜은 죽을동 살동 살고 잇다.
하여간, 기억이 아스라히 사라져 갈 쯤 되니 급한 마음에 기억들을 살려보지만 인터넷에 옛 기록과 주소록 조차도 찾기 힘들다.
미 수도 워싱톤DC 지역의 3대 침례교회에 대해 쓰려고 하지만 그 기록을 찾기 쉽지 않다.
한국 침례교단의 젊은 브레인이던 김광택, 한태경, 김용구, 김승학, 안병국, 필유일, 조효훈목사등은 1957-8년경 교단의 분렬의 중심에 있었다.
기존 동아기독교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안대벽목사부부를 중심으로한 포항파와 1950년 한국동란 직전에 들어온 미 남침례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대전파 인데,
1953년경 설립된 대전 침례교신학교와 인천 시은고등공민학교, 그리고 인천의 고아원 성애원을 근거로 선교사들 편인 젊은 브레인들은 대전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기존 안대벽목사를 중심으로 한 노인네?들은 포항에서 총회를 하였다 하여 그 명칭이 주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선교사의 든든한? 빽이 있는 젊은 피들은 필연적으로 미국으로 유학 또는 진출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들은 첫 남침례교 선교사 나요한(John Abernathy) 사가 부친을 인천 성애원 원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선교사와 친했지만, 우리는 포항파에 속해 있었다.
또한 젊은 브레인들은 반대 대전파의 주축들 이엇지만 한국동란 당시 우리 집에 피신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 집이 충무로? 아니면 회현동?? 서울수복후 상이군인들이 점거하여 되 찾지는 못했지만...ㅋㅋ
하여간, 한국의 조그마한 교단 이었던 침례교단의 인재들은 김광택박사같은 경우에는 당시 이화여전 출신의 안대벽목사 부인 이순도 여사와 영국 침례교 선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김용구 집사도 뭔 젊은 이들의 국제 대회에 참가 하기도 했다. 아마도 아주 어린 갓 20대의 나이들 이었을 것이다.
1963년경 교단의 영원한 총무 김용해 목사가 쓴 침례교단 역사 책을 보면 당시 총회나 회의 때 마다 이들이 유학가서 불참했다거나 소식이 없다라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ㅎㅎ
하여간, 이들이 유학이든 또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미국으로 이주 하게 되는데
안대벽, 박경배목사는 엘에이에 김장배, 이창송목사는 뉴욕에 그리고 훨씬 먼저 이주한 젊은 브레인들은 주로 미국의 서울 워싱톤 DC 지역에 정책을 했다.
조효훈 목사는 센프란시스코에 정착하여 목사님 교회는 서울대 출신들이 주축이 된 '제자훈련'의 본산지라 할수 있다.
한태경목사는 워싱톤 한인봉사센터(Silver Spring, MD)를 설립운영했고 김광택박사형제는 볼티모어의 메릴랜드 주립대학교수로 그리고 김용구, 신석태집사는 치공소로 성공했으며 김승학 목사는 Rockville 몽고메리 한인 침례교회를, 안병국목사는 1960년경 미주 최초의 한인 침례교회인 워싱톤 한인침례교회(1956년 창립, Silver Spring, MD) 초청으로 부임했고, 김현칠목사가 창립한 지구촌교회인 워싱톤 제일한인침례교회에는 이동원 목사가 1983년 8월 27일 2대 목사로 취임해 오게 되엇다.
그 찬란했던 규모와 역사를 뒤로 하고 락빌 몽고메리 한인 침례교회는 2018년 3월 현재 2015년경 교회분렬로 어려움을 겪다가 요즘 급성장하는 스페니쉬 교회와 전격 합동했는데 지역 한인회장의 공이였다고 하는 소식이 마지막인것 같다.
이 대형교회를 담임 발전 시킨 분이 김승학목사님인데 이제는 가물거르는 기억에 목사님이 사모님이 먼저 소천하고 새 장가를 드셨는데 믿지않는 분이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던것 같고 실 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은퇴를 하지 아니해도 될 나이였는데 교회를 그냥 사직한것으로 기억된다. 여러가지 권력욕심?이 없었던 목사님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일 수도 잇지만...
한국동란당시 침례교단은 거룩성을 유지 하기 위하여 이산 가족이나 상처한 목회자의 재혼을 금지 시켰던 적이 잇다.
오래전 이긴 하지만 이런 일들로 목사님은 교회를 사직 했을 수도 잇다.
하여간 재혼해서 지역을 떠났는지 어디서 재미있게? 사시는지 그 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이 락빌 몽고메리 한인침례교회와 김승학목사님에 대해 서는 3편에 더 쓰기로 하고...
오늘 지구촌교회 즉 워싱톤 제일한인침례교회에 대해서는 많은 인포메이션이 더 이상 없지만,
교회 사이트에 연역이 있어 남긴다.
1974. 11.10.본 교회는 미 침례교회 교단 본부의 성원과 창립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로 김현칠목사를 모시고 켄싱턴 침례교회에서
성인 101명과 어린이 35명, 총 136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일한인 침례교회 에서 창립 예배 드림
1975. 11.9. 현재 위치에 있는 교회 건물을 구입하고 워싱턴 한인교회
역사에 최초 자체 건물을 소유하고 입당
1980. 11.9. 새 성전을 완공하고 헌당예배와 창립 6주년 기념예배와
안수식 거행
1982. 8.2. 처음으로 지구촌 장학회를 설립함 (공용빈장학회)
1983. 1.23. 김현칠 목사부부를 남침례교단 국내 선교부 켈리포니아 선교
책임자로 파송
이 때 김현칠 목사님은 스스로 체험이 없었다고 고백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움과 그 솔찍함에 경탄하기도 했지만...
미국의 7대통령의 법률자문위원이었다는 고한실 박사의 기록에 보면 1970년 김현칠목사님께 침례도 받고 잊혀져 가는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제일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한지 1년만에 교회에 A씨와 쌈이 나서 목사님과 같이 나와서 장로교로 갔다가 안식일 교인이 되었다고 했다.
일제와 전쟁 후 미국에서 모두 최연소로 법률시험?에 합격한 기록을 갖고 계신 석학이지만 잘못 쓰신것 같다.
1980년 쯤을 잘 못 쓰신것 같은데 1980년도도 아니고 그 이후 일것이다.
하여간, 1981년도에 와서 김현칠 목사님이 떠난 것도 그리고 이동원 목사가 온것도 그리고 김만풍목사와 공동목회로 이름을 남기고 한국으로 간것도...
이동원 목사 부임 초기인가 한국의부흥사 최이식목사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한적도 있고 그 때만 해도 최이식목사가 늘씬했다.
신약을 하루에 한번씩 읽었다던 군대시절의 청년은 아니였지만...
최근 베뢰아 김기동목사의 글에는 그들이 그의 추종자 였다는데... 우리교단의 최고 부흥사 오관석목사도 자신을 인정한다고...
이를 내 쫗은 사람이 김충기목사님인것 같은데 세습문제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김충기목사님이 뚝심이 있었던 것 같다.
신약을 하루에 한번씩 읽었던 성령충만한 젊은이 최이식은 무엇을 바라고 무슨 부흥의 비법을 얻기 위해 베뢰아 학원?에 등록했던 것일까??
그 비법들이 신약에서는 찾지 못했단 말인가???
지나온 이야기를 쓰다가 이야기들은 비상한다.
하여간,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신약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 다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믿거나 말거나...
몇몇 석학들, 정말로 범상치 않은 인간들이 거의 확실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피력하고 자신들이 맞다고 확고하게 말하지만 이 모든 신념에는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법칙이 빠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