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려야 피는 꽃
병실 복도에서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니 가냘픈 나뭇가지가 삭풍에 떨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떠는 것이 아니고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것은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예삿일이 아닙니다. 떡 버티고 서있는 반 아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밑둥은 꿈쩍도 않는데 끝에 있는 가냘픈 가지들만 살랑살랑 움직입니다. 1월 달의 나목이 밑둥은 잘 훈련된 천하장사의 허벅지처럼 떡 버티고 서 있는데도 나무 끝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처럼 야들야들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아~ 저 현상이 바로 생존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릅니다. 어린 가지가 흔들리지 않으면 나뭇가지는 꺾어질 것이고 가지가 꺾어지면 이듬해 나뭇잎이 자라지 못하여 탄소동화작용을 하지 못하는 나무는 죽고 말 것입니다. 저렇게 흔들려야 나무는 생명을 연장합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늘 보아왔던 자연의 순리입니다. 오늘 새삼스레 나뭇가지 흔들림이 마음을 쓸쓸하게 하고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여기가 바로 환자들이 입원하는 병원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이 병원은 요양병원입니다. 몸을 추스르지 못하는 노인환자들이 대부분 이 병원의 주요 환자입니다. 독실에는 주로 말기 암 환자나 치료가 불가능한 중환자들이 입원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한 두 달이 지나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인 실에는 경증 치매환자나 혼자서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노인 환자,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큰 병은 없으나 집에서 돌보기는 어려운 노인들이 집에서 드는 간병비로 입원비를 대체하며 가족들에 의하여 이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또 어떤 노인들은 집에서 혼자 멀뚱멀뚱 있기 보다는 대화상대가 있는 요양병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100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요양병원 풍경입니다.
이 병원은 김포시 운양동에 소재한 보리수요양병원입니다. 강화로 가는 대로변에 세워진 이 병원은 지하 1층 자상 4층의 현대식 건물로 2015년 9월에 개원하여 깨끗하고 정갈합니다. 건물 밖으로 한강과 일산시도시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150병상 규모의 이 병원은 고찰로 유명한 용화사(주지 지관스님)에서 세웠습니다. 절과 함께 붙어 있어서 심리적으로 명상과 수행을 함께 할 수 있는 힐링요양병원으로 창문 앞이 확 트여 심리적으로도 매우 시원합니다. 양방과 한방으로 협진하는 이 병원에는 의사 3명과 간호사 20명이 근무하고 있어 일반병원과 별 차이가 업습니다. 도심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노인 복지 요양병원입니다.
이 병원에는 93세의 양 아버님과 87세의 양 어머님이 함께 입원하고 계십니다. 어머님은 20여년 전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집에서 간병인의 도움 속에 치료를 해오셨습니다. 이미 생각하고 행동하는 기능은 상실한 지 오래여서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받아내며 식사도 반찬까지 모두 갈아서 겨우 죽으로 연명하고 계십니다. 생명만 유지하고 몸과 마음은 식물화된지 오랩니다. 아버님은 당뇨가 조절되지 않아 저혈당시 생명의 위험을 느낄 만큼 적극적인 투약과 간호가 필요하여 어머님과 함께 한 입원실에서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벌써 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시지 7개월째입니다. 두 분이 함께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하시기 때문에 간병인 하나를 두고 12평의 특실을 사용합니다. 처음 입원 하실 때는 누구나 그러듯이 “너희들이 나를 이곳에 가둬두려고 하지?”하고 의심하시던 아버님도 이제는 진작 올걸 그랬다며 오히려 고마워하십니다. 입원비가 많이 들어서 그렇지 우리 가족들도 대체로 만족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입원비는 아버님께서 모두 부담하시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걱정을 더는 게 천만다행입니다. 그래도 매주 한 차례 방문할 때마다 이용할 차가 없어서 어머니께서 잡수실 고기와 생선을 믹셔로 간 영양식, 그리고 아버지 입맛에 맞는 별식과 과일 등을 준비해 가지고 전철과 버스, 또는 택시를 번갈아 이용해서 병원까지 가는 일은 여간 번거러운 일이 아닙니다. 운전대를 놓은 지 5년이 넘기 때문에 움직일 때는 늘 교통수단 때문에 애를 먹습니다.
요새는 아버지께서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지셔서 섬망증세를 보이기까지 하여 혹 치매로 진행될까봐 걱정을 많이 합니다. 앞방의 1인실에 중환자가 입원했다가 한 달도 안 되어 퇴원한 것을 아시고 나서는 아버님의 낙심이 크신가 봅니다. 그 분이 방을 비웠다는 것은 세상을 하직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린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살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부러지는 경우는 나무에게는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부러지지 않기 위하여 바람이 불면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튼실한 나무도 폭풍이 몰아치면 가지가 부러지거나 뿌리 채 뽑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대나무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댓잎소리를 냅니다. 코스모스도 밀도 수수도 바람이 불면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입니다.
호수도 흔들려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만약 바람이 불어도 잔물결이 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림이지 실물이 아닙니다. 호수는 늘 그렇게 흔들리면서 사람의 마음을 포용합니다. 그래서 호수도 인간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동물은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하거나 약한 동식물을 잡아먹지만 식물은 뿌리로 물과 잎으로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커 갑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생존을 위해 흔들리거나 움직인다는 것은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시인 정지용은 ‘호수’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감을 밖에“
사랑은 그리움입니다. 보고 싶은 그리움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워낙 거대하고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를 품으려 눈을 감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순간이지만 죽은 후에는 무한한 우주로 향합니다. 사후 세계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겁이 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신에게 의지하려고 합니다. 스피노자는 “현명한 사람은 오직 삶에 대한 생각뿐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성직자들이나 가능하지 보통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의 순간에는 죽음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죽는 그 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흔들림이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사유의 눈을 감아버리는 수밖에 죽음을 극복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현상을 보며 그 흔들리는 움직임이 생명을 위한 반사작용이라는 것을 지나칠 경우가 많습니다.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도 생물이 왜 움직이는지 그 동기를 눈여겨보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지나칩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립니다.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들이, 산 둔덕이나 물가에서 온 몸을 휘어 버티는 억새나 갈대들이, 15미터나 되는 대나무들이, 바다에 뜬 돗단배들이 모두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연의 섭리인 바람과 맞서 싸우면서 한 편으로는 그 바람에 순응하면서 타협합니다.. .
나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생존의 법칙, 자연의 법칙을 삶의 큰 원리라도 발견한 듯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병원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원리가 꼭 흔들리는 꽃이나 나뭇가지처럼 일정한 적응과 순응의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유체 속에 있는 물체는 그 물체가 밀어낸 유체의 무게와 같은 부력을 받는다’는 원리를 목욕을 하다가 깨달은 알키메데스는 벌거벗은 채로 ‘알았다’를 외치며 탕 밖으로 뛰어나와 알키메데스의 원리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나도 오늘 갑자기 ‘흔들려야 꽃이 피고 흔들려야 생물이 살수 있다는 오묘한 깨달음’을 발견했습니다. 아마도 이곳이 곧 생명을 거두어 가는 요양병원이라는 특수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삶이며 흔들리지 않는 것은 죽음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깨달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나 붓다의 깨달음도 바로 이렇게 사유를 깊이 생각하다 보니 오묘한 진리를 잉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늘 무언가에 의지하려 합니다.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하느님’을 찾습니다. 절대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절대자의 뜻에 자신을 맡겨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그게 종교요 신앙입니다.
생노병사는 그 과정마다 흔들림으로써 생명을 연장하게 되는 것이며 그 흔들림에 화답하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동물이 배고픔을 느끼는 것, 환자가 약을 먹는 것, 식물이 동화작용을 하는 것, 직장에 나가 돈을 버는 것, 아이들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것, 가족끼리 화목해야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사회가 서로 도와야 산다는 것, 국가 간에 교류해야 한다는 것, 이 모두는 신의 섭리입니다. 흔들려야 살아가고, 흔들려야 사회가 성장하고, 흔들려야 국가가 발전하며, 흔들려야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필자도 나이가 80입니다. 100세 세대를 살게 해 준 의술, 섭생, 환경개선 등에 감사하면서도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공연히 마음이 언짢아집니다. 이곳에 입원한 환자들의 일부분(대분이 노인들이기 때문에)은 머지않아 세상을 하직할 길지 않은 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경우든 죽음에 이르는 길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환자분들이 오랫동안 흔들리며 오랜 기간 삶을 유지하기를 기도해 봅니다. 꽃은 흔들려야 피는 법이니까요.(2017.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