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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2013.5.19.) 이승희 목사
하나님의 임재와 가정의 회복
창세기 3:1~8 주일낮예배
지난 몇 주간 매스컴을 달군 최대 화두는 단연 ‘사과(謝過)’이다. 먹는 사과가 아닌 대국민 사과이다. 포스코임원의 비행기에서 난동, 남양유업 팀장의 욕설, 그리고 청와대 윤대변인의 성추행에 따른 사과문이 연이어 쏟아졌다. 하지만 사과를 통해 사고를 수습하기보다 일을 더 악화시키는 사고를 쳤다. 사건이 터지면 일단 경황이 없게 된다. ‘호떡집에 불난 상황’이다. 정신이 혼미해지만 판단력이 흐려진다. 누구에게 사과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된다. 두 회사는 사건의 피해자인 승무원과 대리점주인에 대한 사과가 빠졌다. 윤창준 전 대변인 역시 1차 사과 대상이 빗나갔다. 동포여학생이나 그 부모님이 아닌 국민과 대통령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사고를 친 아담과 하와는 사과로 생각되는 선악과를 먹고도 사과를 잊었다. 오늘의 청문회에 두 사람이 섰다면 초지일관 ‘모르겠다’, ‘내 탓이 아니다’라고 둘러댔을 것이다. 회개나 사과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로 책임전가에 여념이 없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라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하는 듯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고 에덴동산을 찾아왔다. 죄로 말미암아 세상이 어둡게 되고 마귀의 세상의 되었음을 알았다. 비록 두 사람이 에덴동산에 있지만 더 이상 머물게 할 수 없기에 퇴고 명령을 발부하기 위해 찾아 왔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건수습 방법에 탁월한 것을 몇 가지 발견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방문 일정을 가만히 검색해 보자.
첫째, 사고 당일이다. 두 사람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던 그 날, 그날은 자신들과 함께 장차 모든 인류에게 잊혀지지 않을 대형사고가 터지는 끔찍한 날이다. 하나님은 사고가 터진 당일에 두 사람을 찾아 오셨다. 하나님의 강림이요, 임재이다. 하늘에 보좌를 정하시고 통치하시던 하나님이 땅의 통치자가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 즉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당일에 찾아오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사고치는 도중에 온 것이 아니요, 사고를 치기 전도 아니요, 치고 나자 곧장 찾아오신 것이 아닌 듯싶다. 만약 우리 하나님이 사고칠 때마다 교통사고 현장에 사고 수습하는 견인차가 어떻게 알았는지 수십 대가 달려드는 것처럼 달려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소 지체하듯 하면서 한 가정을 심판하되 회복하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죽고 난 뒤 나흘 뒤에 찾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 오르게 한다.
둘째, 동산에 임재하다. 하나님이 다이렉트로 범죄한 두 사람에게 위엄있게 현현하지 않으셨을까? 마치 동산을 배회하는 듯이 등장하신 까닭이 무엇일까? 마치 하나님을 잊고 사는 두 사람에게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며, 그들이 비록 범죄하였을지라도 관심을 갖고 있으며 찾아 오시는 분이심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함일까? 분명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고, 어디에 웅크리고 있는 지 조차 아셨지만 곧장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뜸을 들이며 등장하신다. 밤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을 때 처음에는 모르척 하고 해변에서 설교하셨고, 넌지시 베드로의 고깃배를 빌려 강대상을 삼아 말씀하시다가 나중에는 만선의 기적을 행한 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받게 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끝까지 하나님께 사과를 하거나 회개하는 기색어 없었다는 것을 볼 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게 한다.
2. 바람 불 때냐 서늘할 때냐?
하나님이 오실 때의 분위기를 개역개정판에서는 ‘바람이 불 때’이다. 이전 개역판에서는 ‘서늘할 때’로 번역을 하였다. 공동번역은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새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은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 히브리어직역 구약성경에서는 ‘그날 바람 부는 때에’라고 번역하고 있다. 확대성경(Amplified Bible), NIV, KJV, NASB에서는 “in the cool of the day”, 즉 날이 서늘할 때이다. 여기서 개역판이냐 개정판이냐 이냐 하는 두 갈래에 서게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서늘한 까닭은 바람이 불어서 그렇고, 바람이 부니 서늘하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설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할 것은 분위기가 뭔가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하나님의 등장이냐 아니면 기후가 차가워지는 늦은 오후를 연상하면서 몸이 움추르지기 쉬운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는가 하는 두 가지 해석의 차이를 보게 된다. 먼저 개역판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개역개정판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첫째, 서늘할 때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방문하였을 때 날씨를 정확하게 저자는 기록하고자 하는가? 다소 쌀쌀할 때 찾아오셨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사고를 쳤을 때는 날이 밝았을 뿐만 아니라 따뜻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제 저녁이 되면서 기후마저 차가워지면서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았던 두 부부가 마냥 움추려지는 시간에 찾아 왔다고 연결할 수 있다. 어둑컴컴해지려고 하면 부모님은 밖에서 노는 애들을 찾아오듯이 범죄하고 죽음에 떨고 있는 두 사람을 찾아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추울 때 빛되신 하나님이 강림하신 것이다.
둘째, ‘바람이 불 때’ 하나님이 강림하신 것이다. 여기서 기후 변화에 맞쳐 하나님이 등장하신 것인가? 아니면 헬리콥터가 이착륙할 때 거센 바람이 불듯이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크고 강한 바람’이 불었는가?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이 강림할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가 들렸다(행 2:2).
제 8b 절 하나님의 강림과 소리
1. 하나님의 임재와 소리
범죄한 두 사람은 동산을 워킹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체를 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yhil|a> hw:hy_ l/q)를 들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지만 형체는 볼 수 없었다(신 4:12). 하나님의 임재하실 때 이처럼 백보이스가 항상 수반된다. 하나님의 등장에서는 반드시 소리가 있다는 것은 모세오경(Pentateuch)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신명기(Deuteronomy)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소리는 그냥 들릴락말락하는 모기소리가 아니라 천둥소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볼려고 해도 볼 수 없기에 분명 그 소리는 컸을 것이다.
아담이 들은 소리를 히브리어로 ‘콜’(l/q)이라고 하는 데, 하나님의 '콜'은 하나님의 임재(강림, 도래)을 알리는 사인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 임재한 것을 알게 하는 소리가 얼마나 크고 웅장하였으면 두려워 떨었다. 이것이 죄인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다. 구약성경에서 우르렁거리는 천둥소리로 묘사한다. 천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상징한다. 즉 천둥이 심판을 초래하며 두려움과 복종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출 9:23, 29, 참조: 시 29장). 반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인간의 '콜'은 딸랑 거리는 방울 소리이다(출 28:35).
2. 소리에 대한 삼중의미
아담은 분명히 에덴동산에 강림하실 뿐만 아니라 동산을 거닐고 계시는, 어쩌면 자신들을 찾아 오고 있으면서 소리를 발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여기서 ‘듣는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샤마’([m'v;)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두 번에 걸쳐 소리를 들었다. 8절에서 에덴동산에 운행하는 하나님의 소리를 그냥 들었고(건성으로 듣다, here), 17절에서 아내의 소리는 경청을 하여 들었기에(listen to) 그 소리를 따라 하나님의 소리를 거부하였다. 아담은 아내의 소리를 들을 때는 귀담아 들었고, 하나님의 소리, 즉 명령은 거부하거나 흘러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듣는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샤마’([m'v;)에는 일반적으로 ‘듣다’는 의미도 있지만, ‘경청하다’와 ‘순종하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순종하는' 영어 표현인 ‘obedient’는 ‘순종하는’는 뜻과 함께 ‘말 잘 듣는’ 의미가 함께 있다. 순종하다는 영어 표현인 ‘obey’는 ‘듣는다’는 뜻의 라틴어 단어 'audire' 역시 히브리어 샤마의 이중의미에 근거하고 있다. 순종을 잘 한다는 것은 곧 상대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다는 뜻이다. 아담은 동산을 거니시면서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을 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여자의 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아담은 아내의 소리에는 경청할 뿐만 아니라 즉각적으로 들은 바를 순종하는 것으로 소리에 반응하였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소리는 언제 들었느냐는 식으로 잊어버렸고 불순종하였다. 심지어 강림하여 소리를 발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피해 거부하는 요나와 같이 더 적극적으로 멀리하는 불순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순종의 반대는 소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그러하고 사울왕이나 가룟 유다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소리를 거부하다 나중에는 불순종의 길을 걷게 되고, 죄의 삯(봉급, salary)으로 죽음을 받게 된다.
아담은 아내의 소리를 들을 때는 무슨 말을 하는 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귀담아 들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눈이 밝아진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내용이 분명했다. 사람은 자신이 듣고자 하는 소리는 잘 듣는다. 하지만 아담은 천상천하에 인간이란 달랑 혼자 있을 때 들은 하나님의 소리에 대해서는 셔터를 내려 버렸다. 하늘에서 땅에 찾아오셔서 말씀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즉 말씀에 대해서 등을 돌려 버린다.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건만 그들은 그냥 몸을 숨기는 것으로 소리를 거부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일종의 반역이다.
3. 어리석은 사람 vs 귀머거리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Henri Nouwen의 책 ‘모든 것을 새롭게’를 읽으면서 ‘어리석은 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안팎으로 너무나 많고 큰 소음공해에 시달리면서 정작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시큰둥하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해 버리는 리모컨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리모컨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기에 TV이든 인터넷이든 자기의 마음에 안 들면 금방 채널을 돌려버린다. 영적 귀머거리가 되어 버려 있다. 지난 주 설교자를 통해 목사님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문을 나서면서 아니 돌아서면서 잊어버린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몇 분의 시간조차 할애하지 못한다.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길 원하시는지,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전혀 묻지도 알지도 못하고 마치 자신이 전지전능한 내비게이션이라도 된 듯이 돌진한다. 탕자의 삶이 되고 만다. ‘어리석다’라는 영어 ‘absurd’에는 ‘귀머거리’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 ‘surdus’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멀리하는 데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믿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영적 귀머거리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소리를 거부하고 마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는 에덴동산에 방문하여 동산을 거닐고 있는 하나님의 소리까지 애써 외면하고 등을 돌리는 어리석은 자, 영적 귀머거리가 되어 하는 짓이 모든 어리석은 짓만 골라하게 된다. 부끄럽다는 것이 외적인 아닌데 겉만 가리는 것도 어리석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다고 생각조차 어리석고, 나무 뒤에 숨어면 하나님이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반응도 어리석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을 빼면 하나님이 곧이 들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
제 8c 절 동산을 거니시는 창조주
1.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접근할 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요한복음 1장을 열면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자기 땅과 자기 백성에 찾아 왔을 때 어둠에 속한 그들이 자신들의 창조주가 되고 왕이신 성육하신 하나님을 푸대접하였고 영접하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땅이요, 그 가운데 가장 신경을 써서 만든 하나님의 형상이 대리인 아담이 대형사고를 쳤을 때 시쳇말로 난감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이 곧장 아담과 하와에게 달려가지 않고 에덴동산을 배회하듯 거니신 것은 마치 백주에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두고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앉아 알 수 없는 글을 쓰신 것을 떠 오르게 한다. 하나님이 고민하느라 아담의 집 앞에서 서성거렸을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땅의 통치자인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영적 반란을 일으켜 죄의 종이 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의 마음이 터질 듯이 아파 마음을 추스린다고 심호흡을 크게 하시느라고 대문에서 뜸을 들리시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인격’(person)은 라틴어로 ‘persona’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뜻은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actor’s mask)를 뜻한다. persona에서 ‘personate’(역을 맡아 연기하다, ~으로 분장하다)가 나왔는데 본래의 뜻은 분장을 하고 ‘소리를 통과시키다’라는 뜻이다. 비록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지만 소리를 발하는 것을 가르쳐 연기하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이 주신 대본을 갖고 연기하는 연기자요 대리인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즉 소리를 대행하는 자다. 그렇다고 꼭두각시처럼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존엄한 존재이다.
2. 하나님 vs 세종대왕
하나님은 범죄현장에 경찰처럼 즉각 들이닥치지 않으셨다. 예령을 걸었다. 아담이 벗은 몸을 가리고 숨었을 때 나무 곁으로 다가왔다. 하나님의 창조 초반부에 상상할 수 없는 대형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찾아 오신 하나님의 골몰하시는 모습이 역력하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처럼 하나님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고를 어떻게 해결하시는 지를 보게 한다. 잠시 세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세종이 왕이 되고 초반부부터 패륜, 뇌물, 성추문 등 크고 작은 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그는 우선 일련의 사태를 자신의 부도덕으로 돌렸다. 그리고 상엄하관의 원칙을 따라 재위 6년에 박대통령의 윤 대변인처럼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지신사(知申事) 조서로의 성추행에 대해서는 유배로 마무리한다.
재위 10년 때 김화의 살부(殺父) 사건에 대해서는 허조의 조언대로 처벌수위를 높여 집행하자는 안건을 거부하고 변계량의 의견을 따라 부모에게 효도한 사례 등 100여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와 훌륭한 사례를 그림을 곁들여 제작한 삼강행실도를 전국에 배포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즉결처형으로 처단하지 않으셨다. 재판을 생략하고 사형을 언도하지 않았다. 죄인을 찾아가고, 사고경위에 대한 자초지종을 듣고자 한다. 그리고 심판을 하지만 구원을 약속하신다. 첫 하나님의 강림은 이처럼 심판과 함께 구원을 약속하였다면 마지막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재림은 마지막 심판과 구원의 완성을 가져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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