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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를 있게 한 소통과 힐링의 시
사람이 떠나면 허물어지는 집을 보라
사람이 떠나면 너도 허물어진다
허물어지기 전에 사람을 들여라
- ‘관계’ 전문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공자가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라고 한 불혹을 한참 넘겼음에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인생의 가장 큰 위기를 맞아 수렁으로 헤매고 있을 때 친구가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시를 한번 써보는 게 어때?”
“내 인생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시를 쓸 수 있겠니?”
“그러니까 더 시를 써야지? 너 윤동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학창시절엔 윤동주 시를 줄줄이 외고 다녔지. 그럼 뭐하나? 다 지나간 이야긴걸.”
“그러니까 더 시를 써봐야지. 윤동주는 인생을 잘 살아서 시를 썼냐? 자신의 삶 앞에 놓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를 쓴 거지. 생각해 봐. 윤동주는 스물아홉에 죽었어. 지금 너는 그보다 15년을 더 살았어. 연륜으로 봐도 시를 쓰면 더 많은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거 아냐?”
친구의 말은 그동안 먹고 사느라 잊고 있던,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문학소년의 감성을 흔들어 깨웠다. 수렁에서 헤매느라 불면으로 시달리는 밤마다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 졸업 후 접어두었던 시작노트를 꺼내들었다. 어차피 불면으로 지새울 바에야 뭐라도 해봐야 살겠다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불면의 밤을 달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었다.
금방 스쳐가는 것들이 한둘인가
그러니 순간순간 소중히 챙겨야지
가는 것은 잡으려 말고
순간순간 인연 맺는 이들로부터
환하게 피어오르는
바로 이 순간의 행복을
- ‘봄꽃들’ 전문
어느덧 15년 전의 이야기다. 그동안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시집 『아버지 어머니 그리움 사랑』을 발간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제 4시집을 발간하고 있다. 아울러 『소통과 힐링의 시창작교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진솔한 시들을 접하며 ‘소통과 힐링의 시’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
“행복해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행복한 시를 쓰니까 더 행복한 일들이 생기더라.”
‘소통과 힐링의 시’가 지향하는 바대로 대중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시보다 먼저 자신을 힐링하며 가까운 이들과 소통을 위한 시를 쓰며 일상에서 행복을 구가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소통과 힐링의 시’로 함께 하기까지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꼭 15년 전이다. 상처(喪妻) 후 골방에만 있다가 모처럼 용기를 내서 초등학교 동문회를 나갔는데 “아내가 그렇게 됐는데 밤에 잠자리는 어떻게 하냐?”는 말을 듣고 ‘다시는 여기에 와서는 안 될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관계를 끊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는 것만 같아서 골방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생계 유지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기에 출판사 일거리가 들어왔다. 아동용 독서논술 교재를 만들기 시작했고, 아동용 세계 명작을 집필하는데 매달리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9개월 정도를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세계 명작과 작가들의 삶을 접하면서 세상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이겨낸 위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골방으로만 숨어들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출판 일거리가 끊어지면서 생계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용기를 내서 다시 세상에 나와야 했다.
모 고등학교에 ‘논구술 특강’ 자리가 생겼고, 때를 맞춰 지역 신문에서 ‘학생들을 위한 논구술 특강 칼럼 연재’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지역신문 특성상 원고료는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대신 지역에 내 이름과 학원을 알릴 수 있게 해준다고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무엇이든 생계를 위해 다시 출발해야 했기에 지역에 내가 하는 일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쓴 글을 모아서 책을 발간하겠다는 꿈이 있었기에 동기부여는 충분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쓰는 칼럼이지만 1년을 쓰면 최소한 50편은 모이니까 2년 정도 쓴 것을 모으면 책을 낼 수 있으니 어떻게든 마감만은 지키자는 각오로 시작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편을 써놓고 나면 어느새 일주일이 금방 돌아왔다. 한두 달 지나면서는 원고 마감 날짜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마감만은 지키자는 각오로 꾸역꾸역 써내려갔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가만 있어 봐. 어차피 글은 마감 전인 화요일 저녁에 썼고 지금까지 마감을 지키지 못한 적은 없잖아. 그런데 왜 왜 일주일 동안 마감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지.’
원고를 보내고 난 후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마감만 생각하면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다. 그때부터 비록 화요일 저녁은 밤을 새우더라도 다른 날은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글쓰기 근육이 단련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 무렵에 이천, 구리, 춘천 등에서 독서논술지도사 자격과정 전문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지역신문에 ‘창의적인 독서지도법’이란 새로운 주제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 정도 마감을 지키며 글을 썼고, 그 원고를 모아 『한 권을 읽어도 백 권을 읽은 것처럼』이라는 책을 발간해서 독서논술지도사 자격과정 교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후에 『일독백서 기적의 독서법』으로 재발간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에 지역 신문에서 일정 정도 원고료를 줄 테니 일주일에 두 편의 원고를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매주 사설을 추가로 쓰기로 했다. 그동안 써온 칼럼은 내가 마음대로 주제를 정해서 쓰기에 일주일 안에 언제든지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사설은 시사성이 있어야 한다면 마감 전날인 화요일 오후에 주제가 주어졌기에 화요일은 사설을 쓰느라 밤을 새우는 날이었다.
이것 역시 처음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수요일 10시에 강의가 있어서 어떻게든 아침 7시 안에는 써야 하는데,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원고료를 받는 일이라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마감을 지키려고 기를 썼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정말 신비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글이 써지지 않아 주제만 잡고 낑낑대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꿈에서 깼을 때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얼른 일어나 원고를 완성해서 마감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 불후의 명작을 남긴 위인들이 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거구나!’
그때 눈에 들어온 책이 황농문 교수의 『몰입』이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몰입을 하면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후 인간의 두뇌에 대한 연구자료와 책들을 많이 접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품절이 되었지만 그 당시 (사)한국강사협회에 동기로 만난 가정의학과의사 이동환의 『로봇의 마음을 훔친 로봇』이라는 책이 마음에 꽂혔다.
프랑의 의사 르네는 상자 안에 로봇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고 한 구석에 알에서 막 깨어난 병아리를 놓고 실험을 했다. 병아리가 없을 때는 마음대로 움직이던 로봇이 병아리를 갖다 놓으면 병아리 쪽으로 움직임이 쏠리는 현상을 반복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에서 르네는 병아리와 같은 조류는 알에서 막 깨어났을 때 움직이는 물체를 어미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고, 병아리가 간절히 어미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로봇이 그 쪽으로 움직임이 쏠리는 것이라는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아울러 병아리처럼 아주 작은 뇌파로도 무생물체인 로봇을 움직이는데, 그보다 훨씬 크고 발달한 인간의 뇌파로 무엇인들 못하겠냐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이 무렵에 교육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시크릿』이라는 책과 같은 맥락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일부터 시작하지만, 인류를 이끌어온 상위 1%의 위인들은 일하기 전에 먼저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하고자 하는 일을 그려서 그 일을 불러오는 뇌파의 힘을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포츠 선수들이 이미지트레이닝을 통해 성과를 내는 것으로도 증명되고 있었다.
꿈에서 글을 쓰는 경험을 한 후로 나는 우리의 뇌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생생히 그리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발휘한다는 주장을 믿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심리상담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 공부를 통해 누구도 원하지 않는 불행으로 이끌어가는 무의식의 작용과 그 무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내면의 상처, 즉 트라우마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우기 시작했다.
트라우마는 혼자서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의식으로 작용하면서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만드는 큰 상처로 자리잡을 수 있지만, 용기 내어서 꺼내놓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다 겪는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함께 하는 이들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용기 내어서 잘 표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글쓰기 치유’의 이론적 배경이다. 그 당시 접한 많은 ‘글쓰기 치유’에 관한 책들이 누구에게 말 못한 이야기를 글쓰기로 풀어내다 보면 치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때 젊은 어머니들을 상대로 독서논술지도사 자격과정 전임강사로 활동하고 있어서 심리상담 기법을 ‘글쓰기 치유’와 접목해서 내면의 상처를 표현하는 글쓰기를 시도했다.
여린 가슴으로
하나둘
얼굴을 내밀었다
피보다 진하게 꼭꼭
감싸안기만 했던
망울망울
- ‘글쓰기’ 중에서
처음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횟수가 거듭되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글쓰기 치유’를 위해서는 상처를 구체적으로 써야 하는데, 그렇게 쓴 글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뜻하지 않는 사람이 읽게 될 때 더 큰 상처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때까지 보았던 ‘글쓰기 치유’에 관한 책들이 현장실습보다 이론에 치우쳤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자칫 글쓰기 치유가 더 큰 상처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얼른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때 본격적으로 시를 쓰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현재 시인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최소한 3만 명이 넘는데, 대다수의 시인들이 자신이 쓰는 시가 표절이거나 아류작인 줄도 모르고, 유명 시인들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동료나 다른 이의 작품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하긴 그건 나부터도 그랬다. 워낙 많은 문학잡지를 접하다 보니 대충 훑어보고 아는 사람의 작품이나 잠시 눈길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험을 하다 보니 시를 쓰고 발표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예전에는 시가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쓰였거나, 가까운 이들과 소통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유리왕의 ‘황조가’가 그랬고, 월명사의 ‘제망매가’가 그랬고,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가 그랬고, 황진이와 서경덕의 시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 유리왕의 ‘황조가’ 전문
여기에 유명 시인의 표절이나 아류작이 아닌 세상에 누구도 쓰지 않은 나만의 시를 쓰려면 나만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글쓰기 치유와 접목이 되었고, 나만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풀어내다 보니 자연스레 힐링의 효과도 얻고, 그렇게 쓴 시가 독창성을 인정받아 다른 이들에게도 더 감동을 준다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칠순을 넘긴 어머니는 뇌졸중 초기상태로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아버지는 10여년 전에 집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도 못한 채 멀리 떠나 보낸 상황이었다.
논밭일 팔십 평생
살 태우고
뼈 삭혀 오신
어머니
앙상한 몸매
쪼그라든 주름
약으로 병원으로
의지하지만
약 한 봉지 드시더라도
짐이 될 수 없다며
자식부터
챙기시는
강단진 세월
애오라지
자식 걱정
한 번 부담마저
떨구려는
가없는 사랑
- ‘어머니’ 전문
그때 어머니에 대한 시가 담긴 잡지를 시골집에 갖다 놓았는데 어머니가 그 시를 읽으시고는 은근히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 마음 아냐?”
지금도 어머니가 잡지를 보시고 슬그머니 다가와서 손을 꼭 잡으며 건넸던 말이 귀에 생생하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위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홀로 된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와 소통하기 위해서 어머니에 대한 시를 의도적으로 더 쓰기 시작했다.
유명시인이 아닌 경우에는 독자가 지인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 중에 가족은 누구보다 내가 쓴 시의 가장 관심을 갖고 보는 이들이다. 그것을 잘 알았기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딸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시집은 무조건 1차 독자인 가족을 위한 시들로 채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2년 가량 쓴 시를 모아서 발간한 것인 첫시집 『아버지 어머니 그리움 사랑』이다. 이태 후에 어머니는 모든 기억을 내려놓으신 채 요양병원에 가셨다가 자식들에게 임종도 보여주시지 않으시고 먼 길을 떠나셨다. 어머니에게 좋은 선물을 해드렸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첫시집 발간을 시작으로 ‘시창작교실’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좋은 경험이 쌓여갔다. ‘시창작교실’은 일반 글쓰기와 달리 비유와 상징을 통해 돌려서 표현하는 장점이 있었다. ‘글쓰기 치유’는 상처를 구체적으로 써야 해서 뜻하지 않은 사람이 봤을 때 더 큰 상처로 돌아오는 경우가 생겨서 그만두었지만, ‘시창작교실’은 구체적인 내용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 동병상련, 인지상정의 정을 불러일으켜 공감해 주는 사람이 많아 ‘글쓰기 치유’의 단점을 줄여주었다.
그때부터 첫시집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시를 창작하는 교재로 활용했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해 주었다. 젊은 어머니들을 상대로 했을 때는 아이들을 상대로 소통하는 시를 쓰도록 유도한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내용을 시로 쓰고 나면 그 시를 본 아이들이 엄마의 마음을 받아들여 교육적 효과가 좋았다고 증언하는 어머니들이 많았다. 어떤 분은 주말 부부로 아이 교육 때문에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남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시로 써서 카톡으로 보내주었더니 남편이 좋아해서 문제를 잘 해결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그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기적의 글쓰기교실』을 발간해서 2013년 문체부 우수선정도서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또한 그 무렵에 늦게 한글을 배우시고 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어르신들을 상대로 ‘시창작교실’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6.25전쟁, 산업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살아있는 역사이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분들만의 독창적인 시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 지게를 만들어 파셨네. 산림간수가 “콩밥 드시고 싶으세요 하길래, 내가 언니에게 “콩밥이 뭐야 물으니 “할아버지 잡아간다는 소리야”라고 했네. 그때 할아버지는 “잡아 가, 애비 없는 새끼들을 키워준다면 내가 어딘들 못 가겠냐?”
- 이상목 어르신의 ‘눈물로 쓰는 이야기’ 전문
“이 시를 쓰면서 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밤새워 쓴 시를 부끄럽다며 내놓지 못하고 꼬깃꼬깃 손에 쥐고 있다가 겨우 펼쳐주며 힘겹게 말씀하시던 어르신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래서 혹시 옛 상처를 잘못 건드린 것은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을 수밖에 었다.
“지금은 괜찮으신 거예요?”
“밤새워 울고 났더니 가슴에 응어리가 녹아내린 것처럼 시원하더군. 그래서 부끄럽지만 또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고.”
어르신들이 눈물로 써내려간 시들을 4년 동안이나 간직하고 있다가 더 이상 늦췄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엮어서 발간한 것이 『민초 어르신들의 노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내게는 이제 두 딸이 전부였다. 그때부터는 두 딸과 소통하는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시들을 모아 첫시집 이후 4년만에 『아버지로 산다는 것』을 발간했다.
웃어야 할 이유를 알겠다
왜라고 왜 그러냐고
말할 필요 없다는 것도
전부가 있기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든든한
의지가 있기에
세상 포근히
웃어야
웃어야 할
이유를 알겠다
- ‘아버지로 산다는 것’ 전문
아빠가 학원일을 하느라 저녁에도 집을 비우느라 거의 혼자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내야 했던 큰딸과 그것이 싫어 초등학교 4학년 말부터 축구를 한다며 합숙소로 들어간 작은딸에게 아빠로서 소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열심히 하는데 잘 하려고 하는데 그만 두랄까 봐 힘들어 하면 당장 그만 두랄까 봐 눈치 보며 울지도 못하고 먹먹한 가슴 달래는 아이야 울어라 맘껏 울어라 슬럼프 슬럼프인 거야 전부를 걸어 본 적 없기에 한 번도 슬럼프 겪어 본 적 없는 아빠는 말로 즐겨라 즐겨라 토닥토닥 할 수밖에 없는 짧은 지식이 너무 아프다
울어라 맘껏 울어라 아이야 지금은 지금은 슬럼프인 거야
- ‘슬럼프 슬럼프인 거야’ 전문
여자축구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발목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던 작은딸이 아빠의 시집을 보고 “아빠, 시집 보고 한참 울었잖아”라는 말과 함께 시집을 본 친구들이 “니네 아빠 대단하다”라고 했다는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같은 시기에 방과 후 학교에 초청을 받아 ‘시창작교실 특강’을 했고, 그곳에서 아이들에게도 ‘소통과 힐링의 시’가 통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전단지 알바로
내 자신이
돈을 번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할머니
신발
고맙다
다 컸구나
눈물 적시는
할머니 말씀에
짠해지는
내 마음
- 중2의 ‘첫월급’ 전문
바로 그 해에 ‘소통과 힐링의 시창작교실’이 인터넷 포털 다음(daum)의 스토리펀딩에 채택이 되었고, 290만 원 가량의 펀딩을 받아 초보 중에 왕초보를 위한 『소통과 힐링의 시창작교실』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소통과 힐링의 시창작교실’ 강좌를 늘려나갔다.
그러다 보니 점차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첫시집과 두 번째 시집이 가족을 일차독자로 생각하고 발간했다면, 세 번째 시집인 『하늘이 바다가 푸른 이유는』은 현장에서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까지 내 시를 관심있게 봐줄 일차독자로 상정해서 ‘소통과 힐링’을 주제로 발간한 것이다.
하늘이 바다가 푸른 이유는
하늘 아래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을 들여다 보니 사람마다
누구나 시퍼런 멍을 품고 살기에
그 시퍼런 멍을 풀어주려고
그 시퍼런 멍에 제각각 흘린 눈물을 풀어
위로 뜬 것은 하늘로 색칠을 하고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바다로 쏟아 부었기 때문인 거야
- ‘하늘이 바다가 푸른 이유는’ 중에서
그동안 25차례에 걸쳐 발간된 ‘소통과 힐링의 시’ 중에 석당 윤석구 시인의 『늙어가는 길』은 유튜브에서 고은하 낭송가를 통해 백세시대를 대표하는 낭송 노인시로 자리잡아 큰 인기를 얻고 있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잠깐 낭송되는 것이 방송되면서 더욱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 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 윤석구의 ‘늙어가는 길’ 중에서
이에 용기를 내서 네 번째 시집 『예쁘고 예쁜 작은 꽃들 피었다』의 일차독자는 출판이안에서 ‘소통과 힐링의 시’로 시집을 발간한 시인들과 그들의 독자들까지 확대해서 발간했음을 밝힌다.
“시를 쓰다 보니 행복한 일이 많이 생기네. 무엇보다 먼저 내가 행복하고, 시를 본 가족들이 행복해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시를 쓸 때는 힘이 들지만 행복하니까 자꾸 쓰게 되네.”
그동안 함께 하는 이들이 들려주는 생생한 경험담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소통과 힐링의 시’로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본다. 독자님들의 행복을 자양분으로 ‘소통과 힐링의 시’는 더욱 든든히 뿌리를 내려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발밑을 챙겨보라고 작은 꽃 피었다
발바닥부터 웃어보라고 작은 꽃 피었다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나를 받치는 발바닥을 챙겨야
발바닥부터 웃어야
온세상이 웃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예쁘고 예쁜 작은 꽃들 피었다
- ‘작은 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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