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9일 19시~21시.
<작가의 삶>
이봉구(李鳳九. 1916년 1월 16일 ~ 1983년 1월 29일)
경기도 안성 출생. 안성보통학교 졸업. 1932년 중동학교 중퇴. 낙향해서 농촌계몽운동 펼침.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에서 수학함. 1938년 귀국하여 오장환 · 김광균 · 서정주 등과 시인부락, 풍림, 자오선 동인 활동. 1939년부터 명동 생활 시작. 서점을 경영하다가 1943년 《매일신보》에 입사. 광복 후 《서울신문》(1945), 《태양신문》(1949), 《한성일보》(1950), 《경향신문》(1950), 《연합신문》(1954), 《평화신문》(1956), 《자유신문》(1957) 등에서 근무. 1966년 제15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
1934년 3월 『중앙』에 단편 「출발」 발표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1935년 『조선문학』에 「광풍객(狂風客)」 · 「아편(阿片)」, 1937년 『풍림(風林)』에 「밤차」(風林, 1937) 발표.
광복 뒤 「도정(道程)」(『신문예』, 1945. 창간호), 「부라운과 시계」(『신세대』, 1948), 「언덕」(『백민』, 1948), 「명동의 엘레지」(『백민』, 1949), 「고국단장」(『신천지』, 1955), 「풍토」(『문학예술』, 1956), 「모래무지」(『현대문학』, 1956), 「여수(旅愁)」(『서울신문』, 1956.11∼12), 「광대」(『현대문학』, 1957), 「사자(死者의 서(書)」(『사상계』, 1958), 「선소리」(『자유문학』, 1958), 「만가」(『사조』, 1958), 「잡초」(『현대문학』, 1959), 「명동 20년」(『조선일보』, 1965.8.1.∼1965.11.25.), 「안성 장날」(『현대문학』, 1966), 「조선의 마음」(『신동아』, 1966), 「북청 가는 날」(『현대문학』, 1968), 「고독한 까마귀」(『현대문학』, 1969), 「묘지송」(『현대문학』, 1969), 「허허벌판」(『월간문학』, 1969), 「탈춤」(『월간문학』, 1970), 「고향」(『여성동아』, 1971), 「뿌리 없는 풀」(『현대문학』, 1972), 「노아 노아」(『월간문학』, 1972) 발표.
박인환 시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인환 애사」(『한국일보』, 1956), 「시인 박인환」(『희망』, 1956), 「세월이 가면, 고 박인환의 시비를 세우고」(『조선일보』, 1956) 등 발표.
소설집으로 『명동 이십년』(1966), 『명동』(1967), 『도정』(1972),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1978), 『명동 비 내리다』(1978) 등.
작품 세계는 신변적 경험이나 문단 교류에 얽힌 일화를 소재로 한 사소설(私小說) 성격. 작품 배경은 명동의 다방, 술집 등. 작중의 인물은 실명(實名) 문인과 예술인들. 명동에서 생활하고 명동을 작품으로 그려내어 ‘명동 백작’으로 불림.
<작품 해설>
「선소리」(『자유문학』, 1958. 3)
이봉구 소설가를 흔히 ‘명동백작’이라고 일컫는다. 그 이유의 한 가지는 날마다 명동에서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 술을 마셨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추태를 보이지 않고 늘 깨끗하고 단아했다. 명동백작으로 불린 또 다른 이유는 명동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 따라 명동 20년』 『명동 비내리다』 『명동, 세월 따라 바람 따라』 『명동, 그리운 사람들』 『명동』 『명동 백작』 등 명동과 관계된 저작들이 많다다. 대한민국 작가 중에서 명동을 가장 사랑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선소리」에도 명동이 나온다. 작품의 화자는 이봉구 자신인데, 어느 날 망우리에 있는 박인환 시인의 무덤에 갔다가 선소리꾼을 만나 망우리 어귀에 있는 주막집에서 술을 나눈다. 술을 마신 뒤 선소리꾼이 졸음이 온다고 한잠 자고 가자고 하면서 이왕이면 화자의 친구(박인환) 무덤에 가서 자자고 한다. 그래서 갔는데, 무덤의 떼가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본 선소리꾼은 박인환의 설움을 달래준다고 선소리를 하며 무덤을 다져준다. 그 일로 두 사람은 가까워져, 화자는 선소리꾼의 집에 함께 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선소리꾼은 황해도 봉산이 고향인 이산가족으로 고향 친구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화자는 서울에 오게 되면 꼭 들려달라며 명동의 다방 이름을 적어주었다. 선소리꾼은 화자에게 자기의 죽음 징조를 이야기하며 망우리에 다시 와 달라고 부탁한다. 어느 초여름, 명동에 있던 화자에게 인편으로 마지막으로 선소리를 할 것이니 망우리로 와달라는 선소리꾼의 연락을 받는다. 화자는 선소리꾼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입은 때 낀 유록 조끼가 떠올라 대신할 갑사 유록 조끼와 당목 중의 적삼을 지어서 가지고 간다. 선소리꾼은 갑사 조끼를 보고 진정 고마워한다. 무역회사 사장의 아들이 선영의 묘지가 북에 있어 일단 망우리에 모셨다가 나중에 이장할 것으로 생각하며 무덤을 쓰는 일을 선소리꾼에게 맡긴 것이었다. 선소리꾼은 갑사 조끼를 입고 간장을 녹이는 선소리를 한다. 그리고 상가의 일행들이 돌아가고 망우리 주변 사람들과 화자만 남은 시간에 선소리꾼은 숨을 거둔다. 나 죽거든 갑사 조끼도 한데 묻어 달라는 유언과 함께.
명동을 사랑했던 이봉구는 1974년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명동에 나오지 못하고 수유리 자택에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83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이봉구가 명동에 나오지 못하는 시기는 문화 예술인들의 안식처이자 주요 활동 무대였던 명동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리는 때였다. 예술문화의 상징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금융 회사 등 거대한 자본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장소 해설>
□ 2호선 전철역 을지로입구 6번 출구에서 집결.
□ 명동 거리 진입 후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 주점 터 답사. 이봉구 소설가의 단골집. 많은 문화예술가들이 모여든 막걸릿집.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 이진섭 작곡으로 이곳에서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림.
□ 명동예술극장. 이회영 · 이시영 등 6형제 독립운동가 집터. 고산 윤선도 집터. 명동성당 답사.
□ 명동문화공원에서 명동의 역사 살펴봄.
□ 아시아미디어타워 502호에서 이봉구와 명동시대 강의(걸어오는 길에 평화방송국, 영락교회, 백병원, 명보극장, 충무공 이순신 집터 등을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