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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재벌가 친자와 하나님양자 확인>의 줄거리:
재벌가 친자와 하나님 양자 확인
(롬9:1~13)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재벌가 친자와 하나님의 양자 확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재벌가의 친자 확인과 하나님의 양자 확인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양자됨의 내막을 한 번 오늘 우리가 살펴봅니다.
1996년에 책이 하나 출간이 됩니다, ‘나비야 청산 가자더니’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저자인 김 송자 씨는 여자입니다,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으로 사시던 분이 자서전을 쓰신 거예요.
‘나비야 청산 가자더니’
1960년부터 80년대까지, 우리나라에 요정문화라는 것이 아주 잘 되어 가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막후정치의 산실이라고 하는 곳이지요, 요정.
대한민국 우리나라의 정치로 말하면, 1공화국부터 3공화국 정도까지의 시기에 3대 요정이 있었는데 삼청각, 대원각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운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청운각에 기생으로 있던 김 송자 씨가 38살이나 연상인 재벌가의 근친 중 한 사람의 애첩이 됩니다.
삼성 이 병철 씨의 형님이세요, 책에 나와 있는 얘기니까.
삼성을 세운 창업주 이 병철, 고인이 되신 이 병철 씨의 형님이신 분이 이 김 송자 씨의 남편으로 자녀를 셋이나 낳고 그냥 애첩으로서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돌아가십니다.
남편이 돌아가시면서, 삼성 이 재벌가에서 완전히 문 밖으로 김 송자 씨와 세 자녀를 쫓아 내버립니다.
그래서 월세 방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에요.
그래 살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 재벌가의 애첩과 그의 자녀들의 애환을 담은 책을, 자서전 형식을 통해서 출간한 것이 ‘나비야 청산 가자더니’라고 하는 책입니다.
자녀들의 미래와 명예를 좀 보장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그러한 자녀들을 위한 목적으로 김 송자 씨가 용기를 내서 이 자서전을 쓴 것이지요.
재벌가의 친자 확인 문제가 종종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세상이 다 알도록 시끌벅적하게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재벌가는 자녀로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애첩들의 자녀들은 재벌가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럼 왜 인정을 하지 않으려 하고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까?
재벌가의 친자로 확인이 될 경우에 막대한 유산이 분배될 수 있는 그런 권리를 갖게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또 재벌가의 기존의 자녀들은, 생전 얼굴도 모르던 아버지의 첩의 자식들에게 정말 피 같은 재산들이 다 분배 되는 것, 이걸 원치 않게 되는 게 당연하지요.
그래서 이 재벌가의 숨겨진 아들, 딸들의 이야기가 TV에서 방영되는 수많은 드라마의 단골메뉴로 등장을 합니다.
재미있잖아요?
재미있고, 재벌가의 친자로 확인이 된다는 것, 아 요거~ 은근히 부럽기까지 해요.
월세 방 살며 엄마가 쉬쉬해 가지고 자기 자식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엄마가 죽기 전에 ‘얘야 너는 아무개 재벌가의 창업주의 아들이란다.’
아! 이게 건달처럼 정말 놈팡이처럼 살다가 재벌가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친자 확인이 되고 그래서 재벌가의 친자로서 재산을 분배 받게 된다.
이거 뭐 행운 아니겠습니까?
자! 이러한 재벌가의 친자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하나님의 양자됨과를 한 번 비교해 봅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면, 친자이신 예수님께서 누리고 계시는 모든 특권을 다~ 누릴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주어지게 됩니다.
굉장한 거예요.
대한민국 땅에 있는 일개의 재벌의 친자 정도가 아니라, 조물주의 양자가 되는 겁니다.
조물주의 양자가 되고 창조주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그 조물주 되시고 창조주 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친자이신 주님께서, 천국에서 누리고 계시는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삶을 수 있게 되는 신분이 된다는 걸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가의 친자로 확인이 되기 위하여 애쓰는 애첩들의 진실함이, 애첩의 자녀들의 진실함이, 그 절박함이, 그 간절함이 우리에게 없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간절함이라는 것은, 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고 얻고자 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간절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양자됨에 대해서 그렇게 재벌가의 친자 확인에 임하는 애첩들의 자녀들의 간절함이라는 것이 우리에겐 없다 이겁니다.
왜 그럴까요?
재벌가의 친자로 확인 될 때에 주어지는 메리트처럼 피부에 닿게 느껴지는 메리트가 없기 때문일까요?
그럼 왜 피부에 닿는 메리트가 하나님의 양자됨에는 느껴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다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다 신앙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라는 겁니다.
몇 십 억, 몇 백 억의 재산이 내게 주어지는 것이 손에 닿는 엄청난 메리트 아닙니까?
그걸 꿈꾸다 보면, 도저히 내가 재벌가 총수의 창업주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이렇게 모른 채로 간과된 채로 넘어갈 수가 없지요.
반드시 친자 확인을 받아 내야 되는 거지요.
근데 이러한 양자, 하나님의 양자됨의 확인이 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서 일어나지 않고,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간절함이라는 것은, 고작 해봐야 재벌가의 친자 확인을 받아서 얻게 될 재산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그러한 물질들 때문에, 이 세상의 형통들 때문에 간절함이 다 소모되어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자, 이것이 어떻게 돼서 도대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이야기 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양자됨을 확인하기만 하면 끝날 인생인데.
조물주의 양자가 되면, 이 인생에 대해서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냥 끝나면 되는 거예요.
스펙 기르려고 할 거 없어요.
모든 문제 전에 하나님의 양자됨이 확인되는 상황이 되면 된다 이겁니다.
본문 1~ 5절까지를 우리는 바울의 동족사랑의 마음이 표현된 것으로 주로 이해를 합니다.
거기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안 한다’
근데 그게 뭐냐 하면, 큰 근심이 있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다 구원받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민족에 대한 사도바울의 사랑으로 이해한다면 온전한 이해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본문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본문이 아니에요.
여전히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주석들을 보면, 8장까지를 1장부터 8장까지를 믿음에 관한 이야기로 보고, 그 다음 9장부터 11장까지는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봅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 가고 있는데, 오늘의 본문은 왜 민족에 대한 이런 간절한, 애절한 마음이 표현 되었느냐 하면, 그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도바울의 동족이 믿음을 안 갖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로서는 되게 이상한 겁니다.
그래 지금 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때는, 우리가 앞부분에서 로마서를 시작할 때 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마는, 3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섯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고, 그리고 성령님께서 계속 사도바울에게 뭐라고 말씀을 해 주시냐 하면, ‘예루살렘에 방문하게 되면 네가 유대인에 의해서 결박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3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 고린도에서, 겨울 3개월 동안 이 돼서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쓴 것인데, 3차 전도여행 동안에 경험한 이 사도 바울의 경험 속에서는, 사도바울의 우선적이고 대부분 선교지에서 일어났던 모든 대적들이 거의가 다 유대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3차 전도여행을 결산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으면서 로마서를 쓰고 있는데, 지금까지 8장까지 얘기됐던 바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사람이 미치도록 좋은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왜 선민인 유대인들이 안 받아들이나 하는 이것이 사도 바울 마음에는 숙제가 돼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마음의 숙제를 로마서를 통해서 풀어내는 겁니다.
그 숙제를 풀어낼 때, 믿음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또한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선택.
얼마나 열심히 살았습니까? 바리새인으로서.
근데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바리새인으로서 규율을 지켜가면서 열심히 살아도 구원이 이르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이제는 그런 열심이 아니라도 믿음을 가지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복음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기가 막힌 일들이 일어나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이 다 현실이 되는데, 이상하게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지를 않는 겁니다.
이 사실을 놓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유대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박해했다고 해서, 내가 앞으로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 동족에 대한 어떤 원망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왜냐 하면 선택이, 선민이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일부만 선택이 된다고 하는 이 얘기를 해야만 되니까, 이 얘기를 할 때 내가 민족에 대한 반감, 나를 핍박했다는 것 때문에 내가 개인적인, 주관적인 감정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여전히 민족을 사랑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민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라,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지금 이런 민족에 대한 자기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이토록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좋은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보세요.
우리가 어저께 말한 게 뭐에요?
절대강자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절대강자입니까?
외아들을 주셨어요, 나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나에게 주신 거예요.
외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걸 다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라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이 계시는 동안에 하나님 옆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이 지구에 있는 것들은, 줘봐야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 없어질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이 세상의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살게 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니까 지구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 천국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성령님의 기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내 마음에 현실로 느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어지는 거예요, 실제로.
믿음 안에서, 소망 안에서 현실로 느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을 갖게 될 때, 이 세상의 어떠한 기준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떠한 평가로부터도, 물론 죄로부터도 근본적인 구원을 결정하는 죄 사함의 문제와 연관돼서 어떠한 정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으로부터도 절대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왕과 총독 앞에서도 ‘나처럼 되세요!’라고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니까, 박 근혜 대통령 앞에서도,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님 앞에서도, 이 건희 씨 앞에서도 우리가, ‘나처럼 되세요’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어떠한 현실이 주어지더라도, 설령 순교의 현장이 될지라도 스테반의 순교 현장에서처럼 수많은 초대교인의 순교 현장에서처럼 평강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을 안 가져요.
왜 안 갖느냐는 얘기를, 아브라함과 리브가가 임신한 이야기, 이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도 바울이 풀어내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좋은 믿음을 안 갖는 이유는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여덟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근데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지마는, 실제로 선민으로서 불린 사람들은 이삭의 자손 밖에 없는데, 이 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이 태어나서 잘했기 때문에 잘 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 여덟 명의 아들 중에서 이스마엘이라든지 그 수많은 아들 중에서 오직 이삭만 택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거예요.
이삭이라는 인물이 태어날 텐데, 그 이삭을 통해서 뻗어나가는 혈통이 선민이라 불릴 것이고,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그리고 그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을 쌍둥이로 잉태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들이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누구는 예쁜 짓을 하고 누구는 몹쓸 짓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린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행동도 하기 이전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정하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거예요.
육체적인 혈통상 여덟 명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었지만, 언약의 자식인 이삭의 후손만이 선민으로 이스라엘로 불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똑같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이 선택되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왜 안 받아들이는가?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양자로 선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믿음을 안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충분히 납득이 가요.
오늘도 대한민국 안에 사천 만, 심지어 전 세계 60억 모든 인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육체의 현실 속에서, 육체의 차원 속에서 좀 더 잘 살아 보고자 눈이 시뻘개 가지고 온 마음을 다 진력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어떡하든지 눈에 보이는 상황을 좀 더 개선시키고, 귀에 들리고 있는 이 육체적인 차원의 이야기들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겁니다.
모든 마음의 관심이, 공중에 속해 있는 마음이 온통 이 육체가 속해있는 이 땅 위에 다 쏟아지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게 자연인이고 당연한 것이에요. 모든 인간이 그런 거예요.
근데 거기다 대고,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으라고 복음을 전해버립니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실감도 나지 않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하늘로부터 오는 만족과 기쁨과 행복만을 기다리라고 얘기합니다.
그것만을 소망하라고 얘기합니다.
나의 모든 기쁨과 행복은 거기서부터만 올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 얘기가, 미친 소리로 들리지 아니하고,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리지 아니하고, 그래 맞아! 라고 박수를 치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이거는 어느 인간이 잘나고 못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누가 배우고 못 배웠기 때문에 가능하고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심성이 곱기 때문에? 이거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니까? 이런 거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기질과 능력과 학벌과 집안과 배경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이 땅 위에서 아브라함의 여덟 자손 중에 한 자손만이 선민의 계열에 속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이 땅 차원 육체의 차원에서 그 어떤 것도 믿음을 갖게 되기 위한 이유가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오직, 이 세상에서 죽으라고 하는 정신 나간 소리와 같은 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땅이 있고 공중이 있고 그 위에 하늘이 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택하시고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세상에 대해 죽겠다는, 소원이라도 가질 수 있도록 나를 택해 주셨기 때문에 이 복음이라는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속에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정말 세상에 대해서 사랑할 만한 모든 것, 가질만한 모든 것, 갖고 싶어할만한 모든 것에 대해서 죽기를 원하고, 오직 마음이 하늘에 계시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다 들여지기를 소원하고 계십니까?
양자로 확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양자로 선택하셨다는 증거가 바로, 내 마음 속에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날마다 순간마다 세상에 대해 죽기를 원하는 소원이 생기고 있다는 것.
하여튼 우린 그렇게 못 살아요.
여전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했던 사도 바울의 말처럼, 이 사망의 몸에서 완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또 굉장한 일을 해야 해방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참고 기다릴지니라’ 어떤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기를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향해 살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이 기도를 드리면서 참고 기다리다 보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통하여, 실제로 천국이 제1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 상태가 되어 가면서, 양자로서의 모습이 점점 더 형성이 되어 가는 것이고, 그것이 이 세상 삶의 유일한 이유입니다.
돈 많이 벌고, 세상에 이름을 내고, 출세하고 이러는 것이 세상 사는 이유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양자로서 아들다운 모습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 세상 삶의 유일한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자, 양자로 확인 하실 수 있는 방법을 아셨습니까?
내가 지금 진심으로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고,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는 돈, 그렇게 좋다는 명예, 그렇게 좋다는 성공, 그렇게 좋다는 일류대학, 그 모~든 것에 대한 건강과 장수와 오복에 대한 모~든 바램이 다 죽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왜 죽기를 원해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쏟기 위해, 하나님께 다 드리기 위해서 그걸 원하고 계신다 그러면, 설령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을지라도 지금 현재 여러분은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그 마음이 아무에게나 생기는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를 양자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싶은 그런 소원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재벌가의 친자로 확인되기 위하여 정말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임하는 그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확인되어지는 일을 위하여, 진지하게 나를 돌아보며 복음에 대하여 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우리를 권면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날마다 죽으라는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가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양자됨의 복을 받았으니 빼앗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 저희가 다 하나님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 모든것이 다 그리스도인 복지의 땅, 가나안에서 오늘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찬양을 주께 드리오며...
흐르는 세월 속에 그 깊으신 뜻 깨닫게 되고 그 영광이 들어나게 되리 할렐루야 이 주어진 은총을 그 누가 뺏아아 가리
생사간에 우리는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