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적인 즐거움
전도서 2 : 1 - 11
지난 시간까지 전도서 1장을 통해서 이 세상의 헛된 면을 총괄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솔로몬이 쓴 이 전도서는 관념적으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실제 그의 생활 체험을 통해서 배운 그리고 느낀 진리이기 때문에 생생한 느낌이 듭니다.
지금까지는 솔로몬이 지식과 지혜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과 원로 정객들과의 교제, 재사나 용사, 가인(佳人)과의 궁중 교재를 통해서 즐거움을 누려 보려한 흔적이 보입니다. 물론 잠시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의 체험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시험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즐거움이 어떤 것인가 그것이 무엇인가 하여 찾아본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솔로몬은 세상적으로 말해도 차원 높은 고귀한 지적인 즐거움에서부터 아주 차원 낮은 감각적 즐거움으로 그 단계를 크게 낮추었습니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육신적인 말초신경 자극적인 쾌락의 추구로 떨어져 보았습니다. 그래서 흔히 세상에서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가장 즐겁다고 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려 하였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근심도 많으며 진지한 사람들은 우울한 것을 발견하고 나는 내 심중에 말하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는 즐겁게 하겠다. 나는 그것이 네게 만족을 줄지 안줄지 시험해 보겠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낙을 누리라, 조금도 거리끼지 말고 마음껏 즐겨보라. 염려는 다 던져 버리고 즐거워야겠다고 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흔히 인간을 animal, rationale즉 이성을 가진 동물 혹은 animal risible 즉 웃을 줄 아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영혼에게 편히 하여 먹고 마시라‘고 말하거나 ’네 마음껏 즐기라‘하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가 그와 같습니다. 농터의 농사가 잘되어 수확이 많아졌습니다. 전에 있던 창고 가지고는 곡식을 다 쌓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인은 “내가 이렇게 하겠다”생각했습니다. 창고를 더 짓고 그 많은 곡식을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이르기를 “내 영혼아 여러 해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았으니 너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라.” 이것이 보통 인간입니다.
돈이 많아지면 내가 이 많은 돈을 가지고 어떻게 좀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할 수 있는대로 다 해봅니다. 내가 이 많은 돈으로 어떻게 사회를 위하여 봉사할까?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혹시 좀 한다면 그렇게 해서 내 이름을 좀 낼 수 있을까 합니다. 모두가 자기 본위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이것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의 즐거움의 극치는 육신적인 환락입니다. 이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심령에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육신의 환락이란 이 세상에서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진통제 약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육신의 환락을 통한 큰 웃음도 결국은 한숨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일찍이 우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이사야 55장 1-2절)
본문 2절에는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사실 육신의 향락에 빠져 방종하는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미친 것입니다. 환락에 빠진 사람들은 인간의 진지성을 망각하고 사람이 사는 것을 놀음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환락에 빠진 사람치고 육신 생활이나 정신 생활에 건전성을 기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 3절에 뭐랬어요?
“내 마음에 내가 궁구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또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지혜로 지식으로 만족을 누리지 못한 솔로몬은 자기의 취향을 즐겁게 해주리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시험의 대상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궁리하여 자신을 술에 맡기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고량진미와 좋은 술에 자신을 내맡겼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술에게 끌려 당기려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술마시는 일은 처음에는 교제상 억지로 권에 못이겨 마시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몸을 억지로 술에 그리고 술과 함께 끌어당깁니다. 솔로몬의 이 표현이 보통 술을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저는 어느 기회에 술을 잘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가 또는 실감나는 표현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독한 술을 마시는 경우 처음에는 그냥 마실 수가 없어(너무 뜨거우니까) 얼음을 잔에 넣어서 마시면 찬 맛에 처음 몇 잔을 마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취하게 되고 취하게 되면 찬 것 더운 것 분간할 수 없이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독한 술도 얼음 없이 곧바로 쭉쭉 쉬지도 않고, 숨도 안 쉬고 들여 마신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입이 마비가 되니까 속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되는지 상관하지 않고 들여 마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속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 뿐인가요? 요리집에서 술을 마실 때는 여자 남자 여럿이 둘러앉아 마시는데 어떤 때는 술잔이 돌아가는데 받기 힘들어서 한번 넘기는 사람은 옷을 한 가지씩 벗는 내기를 한대요. 그래서 한가지 두가지 벗고 어떤 때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 못하는 척하고 벗고 그래서 한 참 절정에 다다르게 되면 범죄하기 전의 에덴동산처럼 된다고 합니다. 술이라는 게 이런 거예요. 취하는 게 아니라 미치는 거예요.
솔로몬은 이러한 시험을 꾀하였으나 이것 역시 인간 중심에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하는 헛된 것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술이란 조롱꾼이요, 사기꾼입니다. 조금만 더하고는 그만 둬야지 그만 둬야지 하면서 결국은 술에 빠지고 맙니다. 술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 것을 깨달은 솔로몬은 사치스러운 향락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굉장한 수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수입으로 사업을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본문4절 이하에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하였습니다.
그는 점점 부자가 되었고 세상 것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8절 하반 절부터 보면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에 보면 “솔로몬 왕은 후비가 7백인이요 빈장이 3백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고백한대로 “그가 얼마나 창성했던지 그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땅 위의 무수한 즐거움 가운데서도 죄상의 즐거움을 다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든지 그의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였으며, 무엇이든지 그 마음에 원하는 것은 막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나의 수고로 말미암은 분복이라”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향락에 빠져 사는 사람의 인생 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이나, 사업이나, 재간이나, 권세나, 지식이나,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줄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아까운 것없이 쓰면서도 사회를 위해서 쓰자 하면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의 십분지 일 아니 백분지 일을 써도 아까워합니다.
청지기의 사명이 전혀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하면 정말 만족합니까?
본문 11절을 보세요!
“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게 참 기쁨이 없습니까? 참 기쁨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참된 힘이 됩니다. 세상의 것으로 물론 일시적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아편 주사와 같아서 약 기운이 있는 잠시 동안은 마비가 되기 때문에 잊어버리는 것 같지만 그 후에는 더욱 심각한 고통 속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면 참 기쁨, 우리에게 힘이 되는 기쁨,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시편 100편을 보세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기쁨으로 부를지어다.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여기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03편에 보면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영원히 우리의 범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죄의 형벌을 면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쁨입니까!
우리 찬송가에도 있듯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한 그대로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목자로써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기쁨을 맛봅니다. 예수님 품 안에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도 요한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예수님 발 앞에서 말씀 듣는 마리아의 기쁨을 맛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기쁨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이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 기쁨은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은 내적인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육감(감각)적 기쁨입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자랑,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의 기쁨은 영적인 기쁨입니다. 생명의 기쁨, 양심의 기쁨, 진리의 기쁨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참 기쁨입니다.
여러분! 어떤 기쁨을 원하십니까? 세상 기쁨, 육신의 즐거움을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기쁨, 심령의 즐거움을 원하십니까? 오늘 저녁 우리 마음 속에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내 마음속에 기쁨이 있어야 노래가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만족이 있어야 기쁨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을 때 더러운 죄악이 침노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이 참 기쁨을 우리 하나 하나가 다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