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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세우는 일
7: 1-7
지난 시간에는 6장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성은 다 건축했으나, 성 문짝을 달지 못한 때에 느헤미야가 개인적으로 받은 시험, 즉 느헤미야를 아무도 없는 오노 평지에 나오게해서 살해하려고 네 차례나 화해하려는 것 처럼 가장해서 사람을 보내었던 산발랏과 도비야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또 성벽 재건하는 일이 왕을 모반하여 느헤미야가 유대의 왕이 되려고 한다는 원수들의 중상모략도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느헤미야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스마야가 원수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느헤미야를 죄를 범하도록해서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도록하는 음흉한 미혹을 했는데, 느헤미야는 이 견디기 어려운 시험들을 다 이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맡은 일에 충성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이겼습니다.
많은 시험과 대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이제 느헤미야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성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원수들조차 성벽이 다 완공된 것을 알고는 낙담하였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방해할 수 없이 완전히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느헤미야에게는 또 한 가지 시험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원수의 방해도 없고, 성벽완공의 과업을 다 완수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께 계속 쓰임을 받느냐, 못 받느냐하는 시험이 남아있었습니다. 이 시험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교만입니다. 일이 다 되고 난 다음에도 그 영광을 누가 취하느냐 하는 것이 남아 있는 최종적인 시험입니다. 그러나 6장 끝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원수들이 드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고 있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그는 진정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며, 노여워하시는지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마귀의 미혹하는 시험이 어떤 것인가도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느헤미야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교만하여 자신을 높이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단4:30)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그 순간 느부갓네살은 미치광이가 되어 성 밖으로 쫓겨나서 여러 해를 짐승 같이 되어서 소처럼 풀을 먹고 지났습니다. 일곱 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총명을 회복 시켜주셔서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성공이라는 절정에 오르기까지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다가 일단 성취한 다음에는 마치 자신이 잘나서 그 성공을 혼자서 이룬 것 같은 착각에서 교만하여 버린 바 되는지...
또 아직 다 오르지도 않았는데, 중도에서 교만해서 떨어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 주의의 신앙을 철저히 가졌습니다.
1) 그는 일의 처음 시작했을 때에 아닥사스다왕이 관심을 가지고, 물었을 때에도 왕에게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묵도한 사람입니다.
2) 그 다음에 2:8에 왕이 허락했을 때에도, "내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한" 것을 밝힙니다.
3) 그 다음에 백성들에게 말할 때에도 2:18에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 우셨다고 합니다.
4) 또 원수들이 대적할 때에 2:20에도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 려니와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이 일을 하리라 했습니다.
5) 4:14에도 대적들이 일어났을 때에도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격려합니다.
그는 하나님 계심을 잊지 않았고, 철저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목표인 성벽 재건 이후에도 하나님께 유용한 존재로 남아 있어 더 크고 중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를 낮추고 떨어드려도 그 현실을 받아드렸습니다. 또 그를 어디까지 높여도 그는 하나님께 겸손하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은 이런 사람입니다. 아무리 낮추어도 감사함으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무리 높여도 그 현실에서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높이시고, 더 크게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실 때에 그 뜻을 모르고, 원망하는 사람 쓰시지 않습니다.
조금 은혜 주셔서 높아지면, 그만 거기서 자기 자랑하고, 높이는 사람,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십니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것을 알므로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직도 대적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비야는 계속해서 반대 운동을 합니다. 참으로 맨 마지막 장에서조차 도비야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노리는 원수는 항상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7장에서도 살필 수 있습니다.
성벽을 재건한 이후에 그가 제일 먼저한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데 있어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느헤미야가 사람을 세우는 것도 보면 그의 하나님 중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을 다스리는 지도자, 곧, 지금이면 시장, 군수, 구청장를을 세우는 것 보다 먼저 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그는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성 문지기를 세워서 성을 파수하도록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있었습니까? 이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오늘 교회에도 이 문지기가 필요합니다.
누가 이 교회의 문지기가 될 사람 없습니까?
찾아오는 불량한 사람, 불쌍한 거지를 쫓아내는 문지기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문지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원수 마귀, 세속주의, 이단의 사상, 인본주의를 막는 사람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또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서 문을 지킬 자를 말합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이 사람이 문지기입니다. 새벽마다 엎드려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문지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문지기입니다. 어려워도 이 말씀대로 현실의 삶을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문지기 입니다. 이 문지기가 없으면 교회는 잡것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펴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문지기요, 찬양하는 자요, 하나님을 섬기는데 수종드는 레위인들입니다.
그리고는 또 성전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 찬양드릴 성가대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돕는 레위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가 성벽을 재건하려했던 이유가 여기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에배드리는 일을 하여, 그분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가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느헤미야는 알았습니다. 그는 다른 것 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귀중성을 강조했습니다.
교회 안에 누가 가장 귀합니까?
예배가 중요하고, 교육, 행정이 필요합니다.
이런 문지기와 하나님을 섬기는데 수종드는 사람들이 먼저 세워졌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목회자들은 다 예배에 수종드는 사람들입니다. 성가대도, 당번들도, 다 예배에 수종드는 분들입니다.
다른 어떤 일 보다 주일예배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준비하는 일을 전도사님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이 일의 귀중성을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예배를 우리 모두가 드릴 것입니다.
토요일이 오전 근무만하는 반공일인 것은 청교도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토요일 부터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토요일에 주말이라고 더 바쁘고, 더 피곤해서 주일 새벽에는 못나오고, 온 종일 힘들어합니다. 주일 예배로 피곤하다 하지만, 실은 토요일 늦은 시간 까지 쓸데 없는 일 한다고 그런 것 아닙니까?
느헤미야는 어디서나 하나님 제일 주의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미국의 부강과 부흥은 청교도들의 하나님 중심이 신앙에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 어려운 형편에 자기 집 보다 교회 부터 짓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교횔르 세워도 제일 좋은 위치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집을 지었습니다. 그들의 거처하는 집 보다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 더 아름답고, 좋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수입의 10의 9조를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미국의 명문가에서는 첫 아들을 낳으면, 목회자로 바칠 것을 서원하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교는 처음에 다 신학교였습니다.
사무엘상 2:30에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의 중심을 다 아십니다.
느헤미야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 신일교회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중심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섬겨야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당이 황폐한데,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마음 편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낭비를 합시다. 막달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것 같이 아낌 없이 주를 섬기는 일에는 치우칠 만큼 주를 사랑하므로 드려야합니다.
2절에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다스릴 두 사람의 지도자를 세웁니다. 지도자를 세워서 협력을 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를 세웠습니다.
하나니는 동생인데 정실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정실로 동생이기 때문에 세웠다면 틀림없는 잘 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니가 이일을 맡기에 함당한 자라면 동생이라고 안된다는 것은 더 잘못입니다. 영적인 자격이 있을 때에 인척관계가 방해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정실은 잘못 이용하면 악이 됩니다. 그러나 정실을 빠로 이용할 때에 더 효과적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조심해야합니다.
하나냐를 선택했는데, 그를 기용한 이유는
첫째로, 충성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는 모습,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보고 하나냐를 기용하도록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충성된 행위를 보십니다.
우리가 맡은 일을 적은 능력이라도 있는 힘을 다 기울려 충성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보십니다.
인간의 능력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나님의 일의 귀중성을 깨달아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 또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 영적인 일을 맡기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사람을 세워야합니다.
어떤 사람을 세워야합니까?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충성을 다할 사람을 세워야합니다.
왜 이 교회 일은 세상의 지식이나, 세상의 어떤 구비한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해야합니다. 하나님께 받아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충성과 신앙입니다. 이런 일군을 가진 교회는 복될 것입니다. 이를 갖추셔야합니다.
김 대통령이 '인사가 만사'라는 철학을 가지고 나라를 맡았으나, 그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에게 발등에 도끼 찍히듯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국사보다 더 큽니다. 더 귀합니다. 더 거룩합니다. 더 영원합니다. 어떤 사람을 세워야합니까? 누가 이 일을 해야합니까?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중심을 배웁시다.
어떤 현실에서도 기도하며, 신실한 믿음을 지켰던 느헤미야, 교만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이 높아질 수 있는 때에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 느헤미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제일 우선으로 했던 느헤미야,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을 등용했던 느헤미야.
오늘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런 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하여 하나님께 끝까지 쓰임을 받을 자 있는지. 이 사람이 그 가정을 구원할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람 한 사람이 그 교회를 구원합니다.
이런 한 사람이 그 지역사회를 구원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 희망은 이 느헤미야 같은 인물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 한 사람을 찾습니다. .
우리 다 이 한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 제일 주의의 신앙이 그립습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