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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1-16
세 가지 종류의 근심 / 은혜목회정보
인도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쥐 한 마리를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이 쥐가 두려워서인지 이리 보고 저리 살피고, 영 안정을 잃은 채 발발 떨고만 있습니다. 하도 불상해서 쥐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발발 떠는 거냐?" 쥐는 대답합니다. "저 고양이 때문입니다." "그래? 그럼 내가 그것을 면하게 해주마"하고 그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고양이가 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잠시도 평안하지를 못합니다.
"너 왜 또 벌벌 떠느냐?" "아, 개 때문입니다. 개가 언제 또 나를 찾아와 물어 버릴는지 몰라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벌벌 떱니다. "왜 그러느냐?" 호랑이 때문입니다. 그저 눈만 감으면 호랑이 꿈을 꾸고 눈뜨면 호랑이가 찾아오는 거 같고, 그래서 잠시도 나는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호랑이가 되어서도 녀석은 여전히 벌벌 떱니다. "또 왜 그러느냐?" "포수 때문입니다. 사냥하는 포수가 불쑥 나타나 나를 쏠 것만 같아서 ..." 그렇습니다! 마술사는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해 보아도 네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끝내게 할 수가 없구나, 별 수없이 너는 다시 쥐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서 도로 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안정과 평안, 그것이 외적조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보세요. 걱정하는 사람은 항상 걱정합니다. 그런가 하면 평안한 사람은 어떤 일에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과 불안은 외적인 환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설화입니다.
보세요! 사람들에게 "만성질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성적으로 병이 있어서 오래오래 치료되지를 않고 낫는 듯하면 또 아프고 낫는 듯하면 또 아프고.... 그런데 이런 만성질환의 90%가 그 원인을 보면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안정이 없어서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약물로 고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라도 그 마음에 진실한 안정을 얻을 때에만 치료될 수 있는 병이라고 합니다. 의사들이 하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할 문제올시다.
사람은 누구나 근심이 있습니다. 즉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업에 대한 근심, 직장에 대한 근심, 건강, 재물에 대한 근심, 인간관계에서 오는 근심 등 우리 주변에서 갖가지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머리로는 먹는 것, 입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분명 먹기 위해서 사느냐, 또는 좋은 것 가자지는 것과 입는 것이 인생의 목표냐고 물으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러한 것에 관심의 전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집에서 사느냐, 어떤 상표의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신분과 위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계에 이르면 필연코 따르는 결과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염려요, 근심입니다.
물질과 쾌락과 세상을 추구하다보면 근심과 걱정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은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되고 신앙의 방학이 시작되며 불신앙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교회에 안 나가면 벌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돈 버느라고 교회에 안나가 보았지만 벌도 안받고 장사도 잘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 사업을 잘해서 돈 벌은 후에 교회에 잘 나가겠습니다. 지금은 주일날 사업상 술도 먹어야하고 골프도 쳐야하고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하나님 섬기는 것은 잠깐 쉬고 돈 많이 벌은 다음에 그것으로 헌금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자기를 변명하며 위장하게 됩니다. 신앙도 돈만 가지면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정적인 매를 맞게 됩니다. 그때는 울어도 소용없고, 애써도 소용없고, 사람을 찾아 다녀도 소용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괜찮다고, 아닙니다. 진노를 쌓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예측하지 못한 채 미련한 인생들이 계속해서 세상 쾌락과 물질의 염려 속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후7: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즉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근심으로 아주 귀한 근심입니다. 이런 근심은 걱정할 것 없는 근심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 근심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딤전6: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요 재물에 유혹에 받으면 믿음에서 떠나고 만다"고 말씀합니다. 즉 재물로 인한 근심은 백해무익한 근심이라는 뜻입니다.
마19:22절에 보면 부자청년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고후7:11절에 보면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은 죄와 허물을 회개할 뿐만 아니라 좀 더 주님의 일에 열심을 갖게 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하고 악을 미워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을 배반했던 두 제자 있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받은 은30인 세상 재물로 근심하다가 결국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는 근심한 나머지 눈물로 회개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쓰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한 왕상 21장은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을 놓고 근심하는 세 가지 종류의 근심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첫째, 아합의 근심입니다.
아합의 근심은 탐욕으로 인한 근심이었습니다. 아합은 궁전 가까이 있는 나봇의 포도원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멋진 왕궁에 포도원으로 꾸민 정원은 그야말로 금상첨화라고 말입니다. 말 타면 경마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이 인생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모든 계획을 다 세워 놓고는 나봇을 불러서 점잖게 그 땅을 팔든지, 아니면 다른 땅과 바꾸든지 할 것을 종용합니다.
사실 말이 제안이지 실상은 협박이었습니다. 아합왕은 이 시골뜨기 농사꾼 나봇을 겁주고 그래서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이 목소리만 높여도 벌벌 떨며 허락할 줄 알았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것 우린 알아야 합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해서도 안되지만 함부로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각자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영혼과 그 사람만의 귀한 인격과 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실로 크게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자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몹시 불쾌합니다. 근심하고 답답하고 속이 상하고 아주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저가 거절을 하다니" 노발대발합니다. 이제 왕은 왕궁에 돌아와 아이들이 투정하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밥도 먹지 않고 근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합왕이 왕의 권한이나 막강 권력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뺏으면 될 터인데 왜 이렇게 근심했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합왕은 이스라엘의 전통과 규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토지는 팔 수도 없고, 살수도 없다는 법입니다. 그러나 부득불 팔아야할 때는 가장 가까운 형제부터 시작해서 친족에 한해서 팔 수 있고 또한 살수가 있는 법입니다.
이제 왕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는 소식을 왕후 이세벨이 들었습니다.
「 세상에 일국의 군왕이 일개 농부의 포도원 하난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는 것은 왕후에게도 치욕이 되는 겁니다.」
실상 이세벨의 친정 나라인 두로의 왕권은 절대 왕권이기 때문에 포도원 하나쯤 뺏는 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았습니다.이제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한 간교한 작업에 돌입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패한 권력 앞에는 엄청난 부정과 힘없는 국민들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거기에 도장을 찍어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의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사건을 조작하여 나봇을 죽이라는 내용입니다.
그 조작 내용은 백성들을 모아 놓고 그 가운데 나봇을 높이 앉혀 놓고 깡패 두 사람을 증인으로 채택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증거케 하고 돌로 쳐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의 장로와 귀인들이 충실히 그 지시대로 행하여 나봇을 돌로 쳐죽였습니
다. 사법권을 가졌던 장로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잘 알면서도 권력에 아부하여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창4: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동생을 돌로 쳐죽인 가인을 향하여 "네 아우의 핏소리가 당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이 따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했으면 반드시 핏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마땅히 바른 판단과 올바른 행함으로 성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혜롭게 공의롭게 지도해야할 장로들과 귀인들이 모두 권력의 시녀가 되어 무고한 생명을 빼앗고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 피값을 어떻게 받았겠습니까?
결국 아합왕 한사람의 재물에 대한 지나친 근심은 무고한 농부의 생명을 빼앗은 비극을 가져왔고 그 가정의 몰락은 물론이고 자신의 왕권과 삶 자체의 몰락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재물에 관한 신앙은, 보물은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고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염려는 독과 같습니다. 독은 서서히 퍼지고 결국은 꼼짝 못하게 되고 죽고 맙니다. 재물에 대한 염려 역시 마약과도 같습니다.
잠언12:25절에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불신앙 때문에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가까이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어떤 환경에서도 염려하지 않게 되고, 죄악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요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둘째, 나봇의 근심입니다.
나봇의 근심은 재산과 신앙사이의 근심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합왕의 제의는 일개 농부에 불과한 나봇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밭을 왕이 쓰시겠다니 이 얼마나 영광인가, 더군다나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포도원과 바꾸자고 하였고, 아니면 원한다면 값은 넉넉하게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또한 이것이 인연이 되어 왕과 가까워진다면 출세 길도 열릴 것이 아닌가, 이런 기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거절했다가는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그러니 말이 난김에 기분 좋게 건네준다면 내 앞길이 환하게 열릴 것이 아닌가, 「요즈음 영악한 사람들은 열에 열 사람 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나봇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겁도 없이 말입니다.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허락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가나안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얻은 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지 그 땅을 관리하고 사용하도록 허락된 일종의 소작농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법이 있습니다.신26:2절 "첫 소산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신14:22-23절 "소산물 중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레25:4절 "칠 년마다 땅을 쉬게 하라 하셨으며"
레25:23-28절 "땅을 팔거나 살 수 없고 샀다해도 희년에는 돌려 주라 토지는 영원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하였으며
민36:7절 "유산의 매매나 교환을 금지하였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잘 지키면 이 땅에서 잘 되고 오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때문에 나봇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과 왕의 명령사이에서 근심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즉, 왕의 신임을 받고 재산이 많아지는 것보다 하나님이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더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적어도 나봇은 왕과 이세벨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나봇은 하나님이 주신 분깃에 만족하고 그 분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나봇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일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서 근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봇은 세상 근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근심을 선택하기로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눈물겨운 선택이었습니다. 신앙을 위해 생명까지 버릴 각오하는 탁월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윗은 시16:5-6절에 서 노래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분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 사업, 직장, 내 고통과 아픔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삶과 신앙의 분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분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습니까?
창25:3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기업을 소홀히 여긴 나머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분깃을 에서는 팔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가서 울고불고 야단을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자기 것 버리고 다른 것 얻으면 나은 줄 알았던 사람들, 자신에게 속한 것 모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을 잊어버렸던 사람들의 종말을 보세요. 비참, 그 자체입니다. 자기 분깃을 지키다가 죽은 나봇을 우리는 순교자라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분깃을 지키는 것이 바로 순교적 삶인 것입니다.
셋째, 엘리야의 근심입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과 아합왕
과 이세벨에 대한 두려움의 사이에 근심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이때 엘리야의 상황은 갈멜산에서 거짓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하고 나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모든 것에서 승리한줄 알았는데 이세벨의 박해가 더 심해집니다.
이세벨의 눈에 보이기만 하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야단입니다. 놀란 엘리야가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할 정도로 두려움 속에 있었을 때입니다. 이후에 한번도 아합을 만난 일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들이 무서워 피해있는 엘리야는 참으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찾아가서 빌고 사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근심 끝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하고 아합왕을 찾아갔습니다.
왕상21:20절에 보면 아합이 말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이토록 잔뜩 벼르고 있던 아합에게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의 말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토해냅니다. “내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 개들이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공중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정말 무서운 경고입니다.
「누가 감히 왕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이렇게 나오기까지 엘리야가 얼마나 고민했겠습니까? 그가 왜 자신의 생명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의 뜻밖에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경고를 듣고 옷을 찢고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여 굵은 베에 누우며 행동도 천천히 하며 철저히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그러자 왕상21: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고 하십니다.
그의 철저한 회개 때문에 당장의 진노를 피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후 몇 년이 지나 아합은 전쟁터에 나가서 화살에 맞아 전사를 하고 말았고, 그 시체를 사마리아에 장사하고 그의 시체를 실었던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을 때 개들이 그 피를 핥았더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왕후 이세벨은 예후의 반란 때에 내시 두 사람에 의하여 창문 아래 로 던져 죽임을 당하였고, 그 시체를 개들이 와서 뜯어먹어서 남은 것은 두골, 발, 손바닥뿐이었다고 왕하9:34-3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후의 반란 때에 아합의 아들 요람도 예후의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시체를 나봇의 포도원에 던져 나봇의 피를 갚게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왕하10:11절에 보면 아합시대에 아첨하던 귀인, 가까운 친구, 제사장까지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다 이루셨다고" 왕하10:10절에 예후가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헛된 근심의 말로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근심하고 계십니까? 재물 때문에 근심하지 맙시다. 탐욕 때문에 근심하지 맙시다. 「거룩한 것을 위해 근심합시다. 영적 근심을 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모든 분깃을 생명을 걸고 지킵시다.」거룩한 직분을 거룩하게 보존합시다. 제직의 직분, 교사, 성가대, 하나님의 자녀의 직분, 부모, 남편, 아내의 자리 굳게 신앙인 답게 지킵시다.
계18:13절을 보면 말세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팔다가 나중에는 영혼까지 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영혼까지 팔아서 세상의 것을 얻어서 무엇을 하려 합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데 방해되는 온갖 세상 근심을 잘라 버립시다. 십일조 생활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재물에 대한 근심을 버립시다. 탐욕의 눈이 어두웠던 아합왕의 근심을 물리칩시다.
성도는 나봇처럼, 엘리야처럼, 당장 눈앞에 큰 이익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적 분깃을 지키기 위해 근심합시다. 비록 분노의 칼날에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분깃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해 근심하며, 기도하며, 신앙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