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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 13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약 2: 13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장차 그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면 우리도 남을 긍휼을 여겨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는 지옥 형벌을 모면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가지고 대해야 할 것이다.
1]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본 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
* 마 18: 23-35 -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긍휼'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는 자비심으로 본 절에서는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비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긍휼을 행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
* 마 5: 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게 된다.
* 마 6: 2-4 -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그러기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며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기보다는 멸시하고, 도리어 부유한 자에게 관대한 자는 결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
2]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표시이다(Johnson).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삶 속에서 나타난 긍휼을 통하여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게 된다.
* 요일 4: 17 -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가난한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심판대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심판도 그 긍휼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원문에는 본 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장차 그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에게도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의 공의의 심판을 이기고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웃에 대해,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3] 사람의 차별
진정한 경건이 자기를 말씀으로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당시 교회의 사람 차별문제를 자세한 예를 들어 교훈하고(2: 1-7), 이어서 차별하지 말아야 할 근거를 말씀한다(2: 8-13).
(1) 외모로 차별하지 말라. (2: 1-7)
1절이 이 문단의 중심 구절이고, 다른 부분은 이 구절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복음적 근거입니다.
당연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이 있는 자를 이 세상의 영광스런 자로 알고 선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상 재물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믿고 살아가는 자인데, 세상의 재물 정도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삼으면 안 됩니다.
2-3절은 예를 설명하고, 4절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서로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을 하나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세상적 기준대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4절에 “구별하다”는 말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말로 1장 6절의 “의심하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결국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하나님과 물질에게 봉사하는 두 개의 모임으로 구별된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이렇게 돈으로 판단하여 구별시키는 것은 악한 것이며 율법에 저촉되어 정죄를 받는 것이다(9절).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는데, “너희는 가난한 자를 괄시한다”고 고발하고 있다.
심지어 부자는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느냐고 고발한다. 그렇게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부자들은 성도들에게도 해를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7절에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한다”는 말은, 성도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성도에게 역사 하시는 은혜를 경홀히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부자들의 횡포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토록 심각한 것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결단코 성도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다.
(2)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벌을 받는다. (2: 8-13).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두 가지 근거에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①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그 법에 의하여 정죄를 받는다.(8-12절).
8절의 “최고의 법”은 ‘왕의 법’을 말한다. 이웃 사랑의 법이 최고의 법, 곧 ‘왕의 법’인데,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그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통일되어 있기에 어떤 하나를 범하면 전체를 범한 것이므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율법을 어긴 것이고, 그 정죄를 면치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② 복음의 정신에 비춰 보아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벌을 받는다. (12-13절).
12절의 “자유의 율법”은 1장 25절의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말한다. 새로운 표준인 자유의 율법으로 즉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의 근본 취지인 사랑과 의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은혜의 새 계명이다. 새로운 계명으로도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긍휼 없는 행위는 벌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도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성경은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말하면서,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4] 사랑이 왕의 법이다. : 김정남 목사
< 법 중에서 최고의 법 >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법 중에서 최고의 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주는 본문입니다. 과연 무엇이 최고의 법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야고보는 이 말씀을 최고의 법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메시지는 “네 몸을 사랑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둘째 메시지는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입니다.이웃 사랑을 위해서 왜 자기 사랑이 필요할까요?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상담하러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실력 있는 심리학자나 유명한 카운슬러를 찾아가는 것보다 먼저 필요한 일은 사랑을 알고,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자기의 구원 문제, 가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에게 찾아가면 위로는 받을 수 있으나 참 사랑은 알지 못하고 진정한 문제 해결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랑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범주에는 남편, 자녀, 친척이 다 포함됩니다. 그러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포괄하는 사랑의 법이 왕의 법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법 이상의 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주일성수를 한다고 주일에 물건 사지 않는 것, 식당에 가지 않는 것, 목욕탕에 가지 않는 것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러나 그런 법보다 더욱 지켜야 할 법은 사랑의 법, 용서의 법입니다. 미움과 질투와 분노와 한은 마음속에 그대로 지닌 채 주일에 물건 사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겉모습의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남이 물건을 사고 식당에 간다고 비판하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왕의 법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왕이 지켜야 할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벧전 2:9)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왕의 법은 바로 ‘내가 지켜야 할 법’입니다.
< 평민 의식을 버리지 마십시오 >
우리는 인간관계를 할 때 항상 겸손한 사랑을 앞세워 해야 합니다. 신앙이 깊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남에게 가르치는 말은 잘 하지만 자기에게는 잘 못하는 모습입니다. 왜 그런 모습이 생기는 것일까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를 높이 보거나 달리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가르치는 말이 아예 입에 붙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말이 아예 입에 붙은 분들과 대화를 하면 말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결국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장이 말단 직원에게 잘못을 훈계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잘못한 것에 한해서 그 잘못을 분명히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면 못써!”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사람의 인격을 건드리면 그 충고는 절대적으로 무효가 됩니다. 흔히 말하듯이 앉는 의자가 다르다고 인간 자체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자리가 높아진 때문이지 인간성이 더 훌륭하고, 인격이 더 높아진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오늘날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지위가 높다고 양반 노릇 하는 태도는 절대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민의식, 평등의식, 일반의식이 먼저 있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왕은 평민의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우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33년간 민정을 시찰하시고, 몸으로 사랑의 삶을 직접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음까지 체험하신 우리 주님의 위대한 평민의식을 항상 기억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축복의 자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 축복의 순간에 “평민의식”과 “성육신의 삶”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지만, 동시에 사람을 향해서는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왕의 법은 위대한 평민의식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 율법의 최종 단계는 사랑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그것은 어떤 죄보다도 큰 죄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른 법을 잘 지켜도 이웃 사랑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 말씀은 사람에게 흔히 있기 쉬운 공로설을 부인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죄를 10가지 지었어도 의를 11가지 행하면 벌을 면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로설입니다. 그러나 그 공로설은 자세히 보면 옳지 않은 이론입니다.
그 이론은 기독교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의 법에서도 통하지 않는 이론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평생 수고해도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지난날 나라를 위해서 수고 많이 했다는 사실로 현재의 죄를 봐 주지는 않습니다. 정상참작과 공로를 참작할 수는 있지만 죄는 죄대로 엄하게 심판합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공로설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통하지 않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대우 한 것 한 가지만 가지고서도 그는 의인일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가 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난한 자를 천대하면 그 사람의 미래는 점차 헐벗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를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천사로 생각하고 섬겨주면 그것처럼 복된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와 구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말씀을 음미해 보십시오. 그 말씀이 너무 추상같은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한번 그 말씀을 이런 식으로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하나를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된다”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위해서 고민하고 있는 그 한 가지 일에서 정말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지키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여러분이 고민하는 그 하나부터 하나님 원리대로 지켜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장 실제적인 비결입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법을 지켜야 온전한 자유를 누린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한 차원 더 나아가면 율법주의자의 율법은 사랑과 자유가 결여된 것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율법이 아닙니다. 형벌이 두려워 지키는 율법은 이미 율법의 참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율법의 의미는 심판을 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와 관련된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그래서 율법의 최종 단계, 가장 가치 있는 단계는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율법은 우리에게 있어서 형벌과 심판이 연상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유가 연상되고, 행복이 연상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왕의 법을 바탕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힘써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복을 가꾸어 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기본이다.
그것은 구원 신앙이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우리의 의가 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진심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외적 조건들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사람을 그의 외적 조건들로 판단하여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자들을 배려하고 도와야 한다.
셋째,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켜야 한다.
인간관계의 모든 법들은 이 법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이 사랑의 법을 따라 살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할 것이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우리는 자유의 법을 믿어 구원받은 자답게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복음은 자유의 법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이다. 우리는 복음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