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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0:1-26) 지진대 위에서 놀자.
오늘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지진대 위에서 놀자>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지진대 위에서 놀자'
요즘 중국 쓰촨성의 지진으로 6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시에 사망한 보고를 접하게 됩니다. 지진을 한 번 생각해보면 지진이 우리의 현실과 먼 것이냐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그렇지 않아요.
영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삶 전체가 지진대 위에 놓여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지진대 위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안정육계를 갈망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정도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직장도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와 국가도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그렇고 하여간 관계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 단체 등이 다 안정권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변동이 없기를 바라고 급격한 변화가 경험되지 않기를 바라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없이 지진대 위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지진대 위에서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고 안정된 삶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진대 위에서 인생을 놀 수 있느냐는 마음을 가지고 지진대에서 거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1923년 이었습니다. 9월1일 일본 도쿄에 있는 도쿄제국호텔 신관 준공식을 하기 위해서
VIP 500명과 외교사절까지 모였습니다. 식을 진행하는 가운데 11시 58분 쯤 되어서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고 도쿄전체가 아수라장이 돼 버리고 맙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90,000명이 죽었습니다. 460,000채의 집들과 빌딩들이 몇 초 만에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쓰촨성은 10초 동안 흔들렸다고 합니다. 또 탕산지진 같은 것은 10초 안팎으로 흔들렸는데 240,000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백 년, 수천 년 내려오던 모든 인간의 노력이 몇 초에 깡그리 다 무너져 내려버리는 겁니다. 460,000채의 집과 빌딩들이 무너져 내렸는데 거짓말처럼 도쿄제국호텔에 신관은 조금도 손상이 없이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유가 프랭크 로이드 롸이트(Frank Lloyd Wright)라고 하는 세계 3대 건축가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분이 이 도쿄제국호텔을 설계할 때 참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지진대 위에 호텔을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겠습니까? 다가올지도 모르는 지진대를 생각하면서 지진이 다가왔을 때조차도, 이 호텔에 손상이 가능한 한 적게 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기존의 건축 공학상 쉽지가 않아요. 고민을 하던 끝에 언젠가도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마는, 일본사람들이 메밀국수를 먹는데 그것도 중국집 자장면처럼 배달을 했던 것 같아요. 그 메밀 판 몇 개를 층층이 쌓아 올린 것을 손으로 바쳐 들고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하는데 신호등도 있고 사람도 피해가야 되고 하니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높이 쌓은 메밀 판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배달부의 손 위에서 흔들리는데 무너지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착안을 하게 되는데 지진이 와서 땅이 흔들린다고 할지라도 이게 메밀 판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배달부의 몸이 흔들릴 때 메밀 판 자체가 같이 흔들려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고정되게 붙박이식으로 위치를 고집하게 되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흔들리니 몸 위에 있는 메밀 판도 같이 흔들릴 때 무너지지 않는 다는 것에 착안을 하게 되어서, 지진이 와서 땅이 흔들릴 때 같이 흔들릴 수 있는 구조로 쉽게 말하면 지진대 위에서 떠있는 듯 한 그런 느낌으로 건축을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진대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배달부의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손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프랭크 로이드 롸이트가 그런 설계를 했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고쳐야 됩니다. 지진대 속에 깊이깊이 이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요즘은 철근을 박습니다. 철근을 곳곳에 박아서 철근이 박혀 있는 곳 위에 고층건물을 짓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진대 위에서 놀듯이 살 수가 있으려면 지진대 위에서 떠야 됩니다. 떠 있어야 됩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참으로 그의 신앙적 고백들이 과연 현실이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하는데 어디가 쉴만한 물가입니까? 보세요. 압살롬이 모반을 일으켜서 피난을 갔었습니다. 피난 가는 중에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수동태적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그리고 돌아왔어요. 압살롬은 죽었습니다. 이제 왕권을 다시 회복해야 되는 단계가 되었는데 또 19:40-43절에서 유다지파와 나머지 10지파가 누가 왕과 더 친하냐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다 모반하던 자들이 돌아서서 갈등으로 집안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던 차에 유다사람들의 소리가 아주 컸다고 합니다. 겨우 10지파의 불만을 누르고 유다지파의 고집을 울며 겨자 먹기로 묵인하고 나라가 잠잠해질까하고 있는데, 20:1-2절에 또 베냐민지파의 세바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겨우 잠재워졌던 불만을 갖고 있었던 열지파가 또 세바 옆에 붙어서 온 이스라엘이 또 반란에 휩싸이고 말아버립니다.
자, 이때 압살롬의 모반에 가담해서 군대장관을 했던 아마사를 다윗이 용서하고 수용해서 군대장관으로 세워서 아마사에게 세바를 쫓아가서 이 반란을 진압하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3일 만에 아마사가 모병을 해서 병사들을 모집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비새에게 가서 아마사를 도우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명령을 받지 않은 요압이 아마사 뒤를 쫓아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읽은 대로 요압이 아마사와 사촌지간인데 요압이 아마사 앞에서 칼을 일부러 뚝 떨어뜨립니다. 아마 아마사가 요압을 경계했던 것 같아요. 요압이 아마사의 마음을 안심시키려고 칼을 아마사 앞에 쨍그랑하고 떨어뜨립니다. 떨어진 칼을 줍지 않고 와서 아마사의 수염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사를 할 때 포옹을 하고 볼에 입을 맞추고 합니다. 그럴 때 상대방의 수염을 이렇게 옆으로 비킵니다. 예의에서 어긋난 짓이 아니에요. 우리는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를 일컬어 할아버지 수염을 잡는다고 하는데 수염을 이렇게 비키면서 서로 안고 볼을 비빕니다. 그런데 요압이 수염을 비키는 게 아니라 아마사의 수염을 아예 잡아당겼습니다. 그리고 칼이 없다고 안심한 아마사를 요압이 숨겼던 칼을 꺼내서 찔러 죽입니다. 죽이고, 죽고, 모반이 일어나고 계속 됩니다.
도대체 다윗은 언제 한 번 마음 편할 날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사울 왕이 죽었지요. 그 다음에 사울 왕 밑에 있던 아브넬 신하가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다윗과 대적하고 나라를 반으로 갈라먹었어요. 그러다가 이스보셋과 아브넬과의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면서 아브넬이 다윗에게로 옵니다. 다윗에게로 온 아브넬을 다윗이 총애하자 요압이 가서 아브넬을 죽입니다. 그때 다윗이 내가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 이 요압의 힘을 어떻게 다룰 수가 없으니 '여호와는 이 악행하는 자에게 악함대로 갚아주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에게는 요압이 항상 부담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요압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왕권이라고 해봐야 좀 안정된 세월이 없어요. 한 40년 통치기간 중에 뭐가 이렇게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는지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나라를 갈라먹었지요. 그 다음에 아마사와 압살롬이 힘을 합쳐서 모반을 일으켜서 왕권을 빼앗았지요. 그 다음에 오늘 또 세바의 반역이 일어나지요. 유다와 이스라엘이 또 등을 갈라먹지요. 서로 갈등하지요. 결국 요압도 다윗의 늘그막에 다윗의 뜻에 반해서 아도니야와 힘을 합쳐서 또 반란을 일으키고 맙니다.
그런데 다윗이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는데 생거짓말 같아요. 뭐가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는데 뭔 율법을 묵상할 시간이나 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이게 다윗이에요. 피난을 갑니다. 반란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마음을 먹을라치면, 저는 아직도 소심하기 짝이 없어서 어떤 분이, 어떤 교인이나, 선교회에 나오시는 어떤 분들이, 지금은 없습니다마는 목회할 때 누가 나를 좀 싫어하는 것 같다면 마음이 걸려요. 신경이 많이 쓰여요. 그런데 왕의 자리에서 반란이 계속되고, 요압이라고 하는 장수는 끊임없이 다윗을 압박합니다. 결국 요압이 군대장관이 되어서 다윗이 총애하는 모든 사람을 다 죽여 버립니다. 이러는 가운데 나라 안이 시끌벅적 반란과 모반에 휩싸이고, 안에는 요압의 헤게모니(hegemony) 싸움을 위한 살인이 자행되고 있고 이러는 가운데,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여호와가 나를 인도한다는 노래를 하는 이유가 왕권자체를 안정육계에 뿌리박게 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다윗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아요. 흔들리는 배달부의 손에 있는 메밀 판처럼 같이 흔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지진대 위에 지진대와 같은 이 세상의 삶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안정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안정되게 허락하시잖아요? 안정되면 영혼이 썩어요. 이 세상의 삶이 안정되고 나면 영혼이 썩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안정됨이 지속되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을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허락하시는 사랑으로서의 지진, 그 지진들을 만나면서 계속 우리의 갈망은 안정육계를 찾아가는 것이에요. 안정되고, 안정되고, 안정되고...왜, 이 세상에서 안정될 날을 바랍니까?
이 세상은 포기하세요. 안정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우리의 안정됨은 하늘에 있는 것이고 하늘에 근거를 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안정되시니 내가 안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안정되어서 안정되어요? 자식이 공부를 꾸준히 잘 해서 안정됩니까? 남편이 돈을 꾸준히 잘 벌어서 안정됩니까? 우리의 안정됨의 근거는 하늘이 안정되어서 안정돼야지, 땅이 안정되어서 안정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땅이 안정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날마다 아침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안정자체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불안도 두려움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지만 이 세상에서의 안정도 죽어야 됩니다. 안정에 뿌리박고 배붙이면 안 됩니다. 그러면 큰일 납니다. 진짜 무너집니다. 기껏 다 쌓아놓았다가 90.000명이 죽고 240,000명이 죽는 지진이 한 번 일어나면 원폭 몇 개가 터진 것보다 더 한 것입니다. 단 10초 내외로 흔들린 겁니다. 3초, 4초, 7초 이렇게 흔들린 겁니다. 깡그리 사라집니다.
여러분! 제가 하는 말을 우습게 들으시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삼성도 LG도 SK도 안정되었다고 하는 것은 없어요. 한 방이면 끝납니다. 저는 그런 기억을 가져 본적도 없고 읽어 본적도 없습니다마는 성경이 예언합니다. 안정된 것은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정과 평강의 근거는 하늘입니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나는 안정된 겁니다. 하나님에게 좌절됨이 없으면 나는 안정된 것입니다. 나의 안정을 하늘에 둘 때 지진대 위에서 놀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지진대입니다. 지진대 위에 속해 있어요. 지진대 위에서 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지진대 위에 기둥을 계속 박고 철근을 박아놓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됩니다. 그 마음만 죽으면 이제 지진이 아무리 일어나도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아요. 아마 벌써 그런 효과를 보시는 분 있을 겁니다. 이진법복음을 받아들여서.
옛날 같았으면 내 마음이 벌써 불안과 불평과 두려움과 짜증과 이런 것으로 무너져 내린 지가 오래인 일을 거뜬하게 지나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벌써 하늘의 안정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지진대 위에서 놀고 있는 겁니다. 지진대 위에서 이 땅에서 안정을 추구할 때 무너짐이 아주 심하게 되지요. 이 땅에서는 뭐가 마무리되면 좋겠다라든지 뭐가 매듭지어지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지 말아요. 그냥 헤- 벌리고 사세요. 뭔가를 야무지게 매듭을 짓겠다고 하는 마음을 갖지 마시라고요. 필요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다'는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매듭을 지으실 것은 지으시고 세우실 것은 세우시고 하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지진대 위에서 삽니다. 지진대 위에서 안정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지진대 위에서 떠서 놀 생각을 하십시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오직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죽고 모든 안정되기를 바라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관계, 모든 일 관계, 가정, 사회, 모든 것에 대해서 죽고 이미 죽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살아있는 지진대 위에서 노는 은총적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그저 모든 방면에서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건강도 인간관계도 재정문제도 그러나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안정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들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늘의 안정에 뿌리를 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을 살 때 지진대 위에 떠서 놀듯이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만이 이 지진대 위에서 매듭지어야 할 것을 매듭지으시고 열매 맺을 것을 열매 맺어 가시면서 하나님만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다 내어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다윗의 다윗됨은 그가 하나님의 손에 다루심을 받아 광야에서의 복지를 이루었기 때문이지요.
땅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어도 오직 하나님만 관심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도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고 우리를 세우시는 물밑작업입니다.
다윗을 다윗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의 처소로 만들어 가시는 중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관심하도록!
이를 위해서 참담한 현실이 주어진다할지라도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다.
계속되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보는 것은 하늘을 사는 사람과 땅을 사는 사람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