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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8:1-30) 거울보다 망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거울보다 망한다.> 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거움ㄹ보다 망한다'
거울을 봐야 합니다. 모습을 제대로 단정하게 하기 위해서 거울 봐야 합니다. 저도 이렇게 방송하기 전에 거울을 꼭 봅니다. 넥타이를 바로 맸는지 거울을 보고 나서도 또 모니터를 통해서 모습을 보면 제대로 안 돼 있어요. 그래서 확인을 해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거울을 보는 것은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이지요. 자기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그런데 요즘 많이 귀에 익은 이야기들 중에 하나가, 성형부작용으로 성형수술을 했던 부작용이 생활 속에서 압박을 가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자살하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몽고주름을 없애려고 했다가, 그 수술을 한 뒤로 다리가 저리고 혈압도 올라가고 그래서 야산에서 농약 먹고 죽은 여자이야기, 이런 얘기 인터넷 한 번 찾아보시면 너무나 많을 거예요. 그것도 다 강남에 있는, 압구정동에 있는 유명한 그런 성형전문 의사들에게 수술을 받고는 턱뼈를 깎았다가 그 부작용으로 죽고, 그 부작용이 외모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이 신경계통이라든지 이런 곳에 다양하게 나타나고, 홍콩에서도 배우들이 그렇게 또 자살했다는 얘기도 듣고, 또 쌍꺼풀 수술이 안 되어서 4수하고 대학을 들어간 어떤 아가씨 이야기, 어렸을 때부터 예쁘다는 애기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이제 4수 했다고 하는 그런 것이 열등감으로 작용을 해서, 그 열등감을 외모로 좀 덮어 보려고, 원래 예쁜 얼굴인데 거기다 쌍꺼풀까지 하면 더 예쁠 것 같아서 했다가 그 쌍꺼풀 수술이 잘 못되어서 또 그 아가씨도 야산에서 자살을 했다는 이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그러니까 거울 잘못 보다가 망하는 것이지요. 거울 잘못보다 망합니다.
찰스 콜리라고 하는 미국의 사회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만들어낸 용어 중에서 “거울에 비친 자아”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Looking glass self." 사회적인 자아 형성과정을 이야기 하면서 거울에 비친 자아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이냐? 거울을 실지 보고 있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따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보는 게 아니라 실지 거울인 진짜 거울이 무엇이냐? 그 유리로 만든 그 거울이, 거울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이 거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심리학자들은 가볍게 아니면 현상자체를 이야기하고 넘어갑니다마는, 이것이 영적으로 또 기독교 진리에 비추어서 생각할 때에 아주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내 모습,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결국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게 돼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사울을 우리가 넋 놓고 욕을 하게 됩니다마는, 사실 형편과 처지를 따져 생각해 보면 사울 같은 처지에서 사울처럼 되지 않을 사람 몇 사람 되겠습니까? 지금 내용은 이런 것이에요. 골리앗을 죽였어요. 갑자기 다윗이 온 이스라엘 나라 안에 스타가 돼 버립니다. 떠 버렸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조약돌 하나 가지고 그냥 온 이스라엘 군대가 꼼짝 달싹을 못하고 기가 죽어 있던 골리앗 앞에서, 여호와의 만군의 주 되심을 고백하고 조약돌을 물매에 먹여서 던졌는데 골리앗의 정수리에 돌이 맞았나 봅니다. 죽어 버립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누군가 해서 봤더니 어린 목동입니다. 그러니 더 유명해 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어린 목동이 골리앗을 죽였다더라.'
결국은 지금 이렇게 돼 가지고 18장 전체를 통해서 읽어 보시면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다윗이 사람들의 마음을 자꾸 얻습니다. 이제 스타가 되는 것이지요. 신하들의 마음을 얻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온 이스라엘이 다윗을 좋아하고 특별히 유다지파가 다윗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이제 왕으로 나가는 어떤 여정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지요. 왕의 자리까지로 도달하기 위한 시작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제 사울이 질투심이 생겨서 질투의 화신이 돼 버립니다. 우리가 9절 까지 읽었는데 그 이후에 읽어보면, 사울에게 다시 악신이 내려서 번민을 하게 되자, 이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탑니다.
수금을 탈 때 장면이 살벌해요. 손에 창을 들고 있다가 다윗에게 집어던지는데 뭐라고 마음속에 생각하며 집어던지는가 하면, 사울이 다윗의 몸을 뚫어서 벽에다 박겠다고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미워하겠어요? 이게 질투지요. 무서운 증오심이 생긴 것입니다. 창을 던져서 다윗의 몸을 벽에 박아버리겠다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울이 어떻게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요? 그리고 10년을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지금 오늘도 벌써 뒤에 읽어보시면 다윗을 죽이려고 블레셋과의 전쟁 한복판에 보낸다든지, 또 아니면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 백 개를 갖고 오면 내가 딸을 너에게 주겠다든지 이런 말을 하면서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은 이 과정을 통해서 사울은 자기 자신을 파괴해 가고 있는 것이지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파괴시켜가고 있는 과정에 들어서게 됩니다. 거울보다 망한 것이에요.
오늘 본문 7절에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서 사울과 다윗을 맞이할 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는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참, 이 상황을 접하게 되면 누구나 사울처럼 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이러한 상황에서 질투심이 생기는 마음가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누가 누가를, 누가 사울을 향하여 정말 돌을 던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래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울은 선택한 백성의 권 안에 있었던 사람이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1:1로 선택을 하셔서 왕으로 세운 사람이었으므로 사울은 이러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았던 사람이에요. 이런 극렬한 질투의 불에 불타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뭡니까? 앞에서도 봤지만 하나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진멸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아각 왕을 포로로 잡아 살려두고, 그리고 좋게 여겨지는 소와 양들을 다 남겨 둡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추궁하시자 대답한 말이 "백성들의 말을 두려워하여"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입을 통하여 버리겠다고 결정하신 것을 알려 줄 때도, "당신이 나를 버릴지라도 돌이키사 백성들과 장로들과 신하들 앞에서 나를 높이사 여호와께 예배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데도 여호와 하나님을 주목하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시기 위해서 못하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이게 여러분! 사울만 그래요? 왜 우리가 교회 와서 예배드립니까? 강남에 있는 S교회에 출석하시는 분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 교회 안에서 알고 있던 인맥들이 줄줄이 등용이 되고 있는 그런 과정들을 보면서 "그 교회 뜨겠다. 이미 떴다."라는 얘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나오면 사업이 잘 되고, 나오면 자식문제가 해결되고, 다 나를 높이기 위함으로
'나를 높이사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죽어버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갖겠다고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나를 높이사’라고 말합니다.
오늘 사울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사울이 책임을 면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는 것이 거울이 된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추구해 가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기준이 뭡니까? 다윗이 기준이 돼요. 9절에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 하였더라’
사람들이 다윗을 높이니까, 그 다윗이 기준이 되어서 그 다윗을 통하여 자기를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가 다윗처럼 될 수 없을 때는 그 기준을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높이지 않습니까? 그럼 사람들의 눈에 다윗이 기준이 돼 버립니다. 그 기준을 내가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이고 잘났다고 보이는 다윗을 없애버려야 마음이 편하게 됩니다.
이게 결국 백설 공주에 나오는 왕비의 증후군 아닙니까? 마법의 거울 앞에서 늘 얘기를 합니다.
"마법의 거울아, 마법의 거울아,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누구냐? / 왕비님이십니다. 그렇지."라고 거울에 비치는 자기를 확인하는 겁니다. 거기서 만족을 하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며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궁에 들어와서 마법의 거울에게 물어보자 이 왕비가 새엄마 아닙니까? 왕궁에 들어오자 물어보니 "왕궁에 살고 있는 백설 공주가 제일 예쁘다"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이때부터 그 거울이 갖고 있는 최고미인, 그 미인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망하고 말지요. 이 질투가 갖고 있는 힘은 결국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데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누구를 더 좋다고 하고 누구를 더 예쁘다고 말 할 때 그때 질투심이 생긴다는 것이고 그러다가 이 질투심이 생기면 결국은 망해요. 망하는 특징이 바로 이런 것이에요. 모든 가능성을 다 막아버립니다. 모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가능성을 다 막아버려요.
여러분! 사울 왕이 괜찮은 사람이에요. 용모준수하지요. 왕을 시킬 때 그 사람 마음이 겸손했지요.
아버지가 암나귀 잃어버려서 찾아오라고 했을 때 얼마나 사람이 성실합니까? 정말 고지식할 정도로 성실하게 암나귀를 찾으러 가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충직하고요. 잘 생겼고요. 겸손하고요. 괜찮은 사람이에요. 괜찮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 질투의 화신이 돼 버리자마자, 이런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에 앞서서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돼 가기 시작합니까? 사람들에게 비친 자기 모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자기의 거울로 삼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가를 볼 때 사람들의 평가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죽어가는 거예요. 이 질투가 첫 번째 뭐라고 했어요? 모든 창조적인 가능성을 다 막아 버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든 일상적인 에너지를 이 질투에 다 뺏겨 버립니다. 그러니까 암 같은 것이에요. 암세포 하나 생기면 주변 세포의 모든 양분을 다 빨아먹지 않습니까? 이 질투라는 게 이만큼 강렬한 겁니다.
‘그날 이후로 다윗을 주목 하니라.’
그쪽에다 모든 에너지를 다 활용해 버리는 겁니다. 다 투입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탈진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결국 타인을 파괴하려다 자기를 파괴해 버립니다. 결국은 자기를 죽이는 겁니다. 자살골입니다.
성형해서 자살하는 사람들, 결국 뭡니까? 사회가 갖고 있는 예쁘다고 하는 기준, 김태희를 봅니다. 김태희의 쌍꺼풀을 봅니다. 성형한 내 쌍꺼풀과 다른 겁니다. 계속해서 보다가 죽어버리는 겁니다.
백설 공주에서 나오는 그 왕비를 보세요. 백설 공주를 사냥꾼을 시켜서 숲에서 죽이라고 하는데 사냥꾼이 못 죽여요. 공주를 어떻게 죽이느냐 해서 그 백설 공주를 놓아 줍니다.그래서 이제 죽은 줄 알고 마법의 거울 앞에서 다시 물어 봅니다. 누가 제일 예쁘냐고 했더니 아직도 백설 공주가 예쁘다는 거예요. 살아있어요. 그래서 수소문해서 백설 공주가 살고 있는 일곱 난쟁이 집으로 찾아올 때 왕비가 어떻게 하고 옵니까? 그 왕궁의 밑에 있는 실험실에 들어가서 이상한 약을 만들어서 사과도 만들어 내고 사과에 독약을 집어넣고 백설 공주에게 먹이려고, 그리고 자기 자신은 쭈글쭈글 망태할멈으로 변장을 합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주름살투성이의 할멈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예뻐지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다가, 자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고 아름다움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살던 사람이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자기는 쭈그렁할멈의 모습을 자기 스스로 받아들여 버립니다. 그렇게 아름답기를 원하는 여자가. 이게 질투의 힘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추한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여요. 네가 안 되기만 한다면, 네가 못되기만 한다면, 내가 얼마든지 망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진짜 미친 짓이지요. 이게 질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 이런 어떤 요소가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어떨 때 그런 줄 아십니까? 바로 다른 사람 눈에 비친 나 자신을 찾으려고 할 때 그렇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를 보려고 할 때.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우열이 없어요. 다 다른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갈 때 다 다른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거울보다 망해요. 그래서 조심해야 되는데 오직 하나의 거울만 내 생활을 풍족하게 합니다. 생명이 풍성하게 해 주는 거울이 뭡니까? 하나님 눈에 비친 나를 찾는 겁니다. 하나님 눈에 비친 나를 찾으려고 할 때, 그 때 비로소 인생이 풀려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나, 이웃 아주머니에게 비친 나, 내 아이가 좋은 대학 들어간 아이의 엄마로서의 나, 이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사회적으로 어떤 단체의 장이 된 나, 그런 것을 찾으려고 했다가는 죽어요. 다 죽어요. 행복하게 사시려면, 하나님 눈에 비친 나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나가 어떤 모습입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 아닙니까?
그게 나거든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그것을 보는 겁니다. 거울 보는 횟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을 나의 모습으로 자꾸 확인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따라 나를 보면 어떻게 됩니까? 제일 먼저 보는 게 뭐예요?
‘아, 내가 지금 교만해졌구나. 내 모습이 원래 이건데, 이러한 나에게 허락하신 지금의 환경을 볼 때 과분하지 않은 게 없구나.’라고 여기서부터 행복이 나오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모습이 나라는 겁니다. 그 나를 찾을 때 우리가 무엇을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가 나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겠어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어디에 계세요? 내 옆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찾지 못하고 다른 모습을 찾아 헤매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하나님 못 만나지요. 그래서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나 자신, 죄인이니까요. 골수까지 죄가 묻혀 있으니까요.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 주님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게 합당한 모습 아닙니까? 내게 합당한 모습이지요.그 모습을 찾을 때 우리가 하나님아버지를 찾고 하나님아버지를 만나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미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이런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네 모습이 뭔 줄 아느냐?
‘대통령이 되어라. 과학자가 되어라. 연봉 최소 1억이 되는 자가 되어라.’라고 가르치지 마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이, 바로 네 모습이라는 것을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이들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을 갖게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대학을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말썽을 피우다가도 하나님을 만난 아이가 정신 차려서 5년 뒤, 10년 뒤라도 공부할 수 있어요. 그때 하나님이 시키시는 공부라서 그 아이들 박사 되고 뭐 되고 다 될 수 있습니다. 공부가 원이라면. 뭐든지 될 수 있어요. 그게 급한 게 아니에요. 요셉처럼 감옥에 갇혀 있다가도 총리도 될 수 있어요. 뭐는 안 되겠습니까? 어떤 아이가 양아치하다가도 남북을 통일시킬 수도 있어요. 그것이 왜 안 됩니까? 제가 헛소리 하는 것입니까? 과장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양아치하고 건달이던 아이가 남북통일 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아이는. 또 하나님이 안 하시면 안 하면 되는 것이지. 남북통일 내가 시켜야 돼요? 아니면 마는 것이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나를 잃지 않는 다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우리 가족이 그렇게 살도록 계속 도와주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 모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너 살고 나 사는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울보다 망합니다. 거울을 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기준을 따라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이 거울이 돼 버립니다. 그 속에서 다른 사람의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찾다가, 사울처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할 일은 나를 찾으면 하나님이 그 옆에 와 계십니다. 어떤 나?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나를 찾으세요. 주님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잃지 않고 그 모습을 합당하게 생각하세요. 그것이 분수에 맞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시고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너무너무 분명하고 뚜렷하게 ‘아, 내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알아보실 수 있고 행복한 하루가 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참으로 커다란 유혹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 사회가 갖고 있는 기준에 비추어 보는 나를 찾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눈에 비친 나 자신을 잃지 않고 내가 나를 바라보게 해 주심을 통해 내 옆에 와 계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역사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으로 배불러 행복하며 행복한 마음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