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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맡겨 둔 여장을 찾아 난양역으로 간다. 난양역에서 뤄양으로 가는 기차는 오후 3시 53분 출발 예정이었으나 10분 이상 지연되어 오후 4시 10분 경 난양을 출발한다. 우리 좌석 앞 중년 남자와 여자가 우리 여장을 보더니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이것 저것 한국에 대해 물어 보며 중국 이야기를 한다. 중년 남자는 츠비에서 이 기차를 타고 닝사후이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인촨(銀川)까지 가고 중년 여자 분은 뤄양까지 간다고 한다. 내가 30일간 삼국지 여행 중이라고 하니 자기 고향 츠비(赤壁)을 가 보았는가 물으며 시작한 여행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한국인인 내가 중국인인 자기들보다 많은 곳을 여행한 것에 대해 부러워한다. 내가 잘못 알아듣는 부분은 필담으로 이야기하고 내가 서툰 중국어로 이야기하면 또 필담이 이어진다. 중국어를 8개월 동안 배웠지만 성조가 틀리니 잘못 알아듣는 것 같다.
뤄양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두시간 반을 그 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후 7시 50분 기차는 뤄양역에 도착한다. 뤄양은 지난봄에 한 번 와 본 곳이라 전혀 낯설지 않다. 지난 봄 뤄양에서 이틀을 묵고 시안으로 간 일이 있다.
뤄양 역에 내려 중년 여자가 안내하는 숙소로 갔더니 외국인 숙박이 안 된단다. 역 옆에 있는 인화빈관 아주머니가 자기네 빈관으로 가자고 계속 따라 다니지만 보다 편안한 숙소에서 묵기 위해 거절하고 역 근처 숙소를 찾아보니 시설이 괜찮고 외국인 숙박이 가능한 곳은 하루 숙박에 500元 내외로 비싸다. 왜 중국은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통제하는 것일까? 이해가도저히 안된다. 중국 내 보안 문제라면 소수민족 테러 문제일 텐데, 외국인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 일까? 나 같은 배낭여행자들에겐 정말 숙소 잡는 일이 고역이다. 그리고 화가 난다. 여행 전 중국 숙소 문제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봤지만 외국인과 중국인을 차별한다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말이다. 한국인을 비롯해 외국인들에게 중국 자유여행을 추천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한 시간 반을 헤맨 끝에 역에서는 좀 멀지만 비교적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를 잡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간다.
아침을 먹고 내일 시안으로 갈 기차표를 예매한다. 오전 10시 23분 출발하는 기차로(1人/54.5元)이다. 큰 배낭을 내려놓고 작은 배낭만 메고 숙소 인근에서 56路 시내버스를 탄다. 오늘은 우선 작년에 이곳에 왔을 때 못 가본 바이마스(白馬寺)와 천자가육박물관(天子駕六博物館)을 보고 아내를 위해 관림(關林)을 돌아 볼 예정으로 8시 반경 숙소를 나선다.
숙소가 있는 沙廣路로터리에서 백마사까지는 약 19km로 시내버스로 한 시간 쯤 걸린다.(1人/1.5元)
▶ 백마사로 가는 첫 번째 석패방
▶ 매표소 앞 석패방
소림사에 본 것과 비슷한 형식의 일주문인데, 돌과 돌조각이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두개의 일주문 사이에 가게가 양쪽으로 즐비한데, 불상이나 기념품 그리고 낙양의 꽃이라 불리우는 목단꽃 조화등 불교관련 용품을 팔고 있다. 잘 정비 되어 있는 가게들 가운데, 술집이나 잡상인들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석패방엔 성교서래(聖敎西來, 성스런 가르침이 서쪽에서 왔다)란 현판이 걸려 있어 백마사가 인도 불교를 근간으로 창건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낙양시(洛阳市) 노성(老城)동쪽 12㎞지점 백마사진에 위치한 동한(东汉) 영평(永平)11년(68)창건된 사원으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건립된 첫 번째 사원으로, 광무제 아들 동한의 명제(明帝)가 된 유장(刘庄)은 꿈속에서 머리에 광채가 나는 금빛사람이 날아와 궁궐 위를 몇 바퀴 선회하고 다시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서역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불법을 구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백마사로 인해 중국에서 불교가 처음으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영평11년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등이 명제의 사신 채음(蔡愔)의 간청으로 불상과 경전을 흰말에 싣고 낙양으로 들어왔으며 이듬해 사찰이 건립되며 이름을 백마사라 하였다. 이후 송·원·명 각 왕조에서 중수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백마사는 중국 제1고찰(中国 第一古刹)이며 세계에서도 저명한 불교 사찰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총면적은 4만여㎡에 달한다. 절의 이름인 백마는 인도에 파견한 승려 일행이 백마(白馬)에 경전을 싣고 돌아온 것에서 유래되었는데, 그것을 뜻하는 듯 절 입구 양쪽에는 송(宋)나라 때 만들어진 두 마리의 백마상(白馬像)이 서 있다. 백마에 불상과 불경, 그리고 스님을 싣고 왔으니, 불법승 삼보를 싣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 백마사 입구 산문
정문은 3개 아치형 대문으로 이루어져 불교에서의 고난을 벗어나는 3겹의 문을 상징하며 한나라 때의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기와지붕은 우리와 비슷하나 벽이 모두 붉은 색이고, 우리나라 절은 담이 없는 열린 구조임에 반하여 중국사찰은 담으로 둘러 쌓여 있다. 백마사도 마찬가지지만 출입문이 한국의 사찰과 비교했을 때 무척 작다.
▶ 천왕전
▶ 인도 승여 가섭마등의 상
▶ 천왕전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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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사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느 절과 마찬가지로 사천왕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따로 우회로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천왕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 절의 특징이다. 그런데 사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상이 그다지 무섭게 생겨 보이지 않는다. 소림사의 무시무시한 사천왕상과 비교가 될 정도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는 천왕전(天王殿)이 보이는데 내부에는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眠)의 상이 달마처럼 닮은 배를 내 놓고 앉아 있다.
▶ 대불전
▶ 향 공양을 드리는 중국인들
▶ 대불전 불감의 불상
▶ 대불전 뒷면에 있는 목조 관제음보살상
그 뒤로 대불전, 대웅전 등의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백마사에는 두개의 중요한 전각이 있는데, 대불전과 대웅전이다.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대불전 앞에는 향을 사르는 단에선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대불전의 내부를 보니 마루로 되어 있고 바닥에 방석이 깔려 있어서 절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목조 불상인 듯한 불상의 머리 위엔 일산이 씌워져 있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는 제자 가섭과 아난이 서 있고 문수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있다. 대불전 뒤에는 신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목조 관세음보살상이 보인다. 중국 사찰에는 전각 뒤편에 관세음보살상이나 수호신으로 보이는 듯한 상이 있다.
▶ 대웅보전의 불상
▶ 18 나한상
▶ 대웅전 뒷면의 수호신장
대불전 뒤에 대웅보전이 있는데,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대웅전 중앙에 석가모니부처, 좌측에 약사불, 우측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불상 좌우 벽면에 원나라 때 조성된 나한상이 모셔져 있는데, 우리의 해학적인 모습과 달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웅보전 뒷면에는 창을 든 무사풍의 수호신장을 볼 수 있다.
▶ 접인전
▶ 접인전 내 아미타삼존불
대웅전 뒤에 또 하나의 전각이 보이는 데 ‘접인전’이라 한다. 접인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접인전 앞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몰려 있는데,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신앙이 강하다고 한다. 불단에 꽃 공양이 눈에 띈다.
▶ 제운탑
제운탑(濟雲塔)은 백마사 산문 밖 동쪽 200m지점에 위치한 석탑으로 석가사리탑(釋迦捨利塔)이라고 부른다. 사서에 따르면 동한 영평 6년(69년), 백마사를 방문한 한 명제는 두 고승으로 부터 사원 동남쪽에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언덕이 있는데, 그 속에서 광채가 난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듣는다. 고승을 대동하고 찾아간 명제는 직접 눈으로 그 빛을 확인하고 고승들에게 명하여 그 자리에 탑을 쌓도록 명하였다. 명제의 지시에 따라 지어진 탑은 9층의 목탑이었고, 높이가 500여 척에 달해 “제운탑(齊雲塔)이라 불렸다. 원래의 제운탑은 북송말기 금나라의 침략으로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금(金)대에 다시 지어진 석탑이다. 벽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높이는 35m, 총 13층으로 되어 있다. 금나라 때 지어졌다고 하여 금방탑(金方塔)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탑 앞에서 손뼉을 치면 개구리 울음소리를 닮은 메아리가 되돌아온다고 한다.
▶ 장경각
▶ 석원진전관 전시물
장경각을 오르는 계단 아래 석원진전관(釋源陳展館)이 있다. 이 안에는 백마사 창건 이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역사와 고승, 그리고 백마사 축소 모형, 외국에서 백마사에 기증한 보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청량대
▶ 비로각
▶ 비로각 내 불상
▶ 지루가참 화상의 좌상
▶ 18 나한도
장경각 우측으로 가 계단을 오르면 청량대(淸涼臺)라 쓰여진 문이 보이고 그 뒤에 비로각(昆盧閣)이 있는데 밀사(密獅)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불감에는 세 존의 불상이 있는데, 가운데 것은 비로차나불(毗盧遮那佛)이며, 좌우의 것은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이다. 불교에서는 이 세 불을 합쳐 “화엄삼성(華嚴三聖)”이라 부른다. 또, 지루가참 화상의 좌상과 사자와 호랑이, 코끼리를 타거나 걷는 18 나한도(羅漢圖)도 보인다.
▶ 지루가참 화상
▶ 법보각
청량대 좌측에는 법보각이 있는데, 법보각에는 인도에서 증송한 동제 불상과 십여 종의 법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나 문이 닫혀 있다.
▶ 당나라 때 석주를 받치던 주춧돌
청량대 계단을 내려오면 우측에 당나라 때 석주를 바치던 주춧돌이라는 당대석주초(唐代石柱础) 4곳이 보인다. 당나라 안록산의 난 후 백마사 중건 전 사용하던 석주를 받치던 주춧돌이라고 한다.
▶ 모란 화원
법보각에서 내려오면 우측 정자 주변에는 모란을 무척 많이 심어 놓았다. 뤄양의 상징이 모란이라는데 사찰에도 무척 많이 심겨져 있다. 주변의 모란꽃은 삼월이라 꽃 봉우리 만 올라오고 아직 피지 않고 있다. 모란의 도시 낙양에선 4월 중 모란이 만개할 때 모란축제가 열리는데, 조금 일찍 이곳에 온 것이다.
▶ 태국풍의 절
▶ 태국풍 절에 있는 조형물
정자 건너로는태국양식의 사찰의 모습도 보인다. 태국양식의 사찰은 대부분 공사 중이다.
▶ 인도풍의 절
▶ 인도풍 법당
▶ 법당내 석가모니상
▶ 인도 총리 방문 기념
▶ 인도 불교 사진 전시
출구쪽의 붉은 색 돔이 인상적인 인도양식의 사찰은 2005년 중국 국무원총리와 인도총리의 종교적 협력방침에 따라 2006년에 착공되어 3년만인 2009년에 완성되었다. 주건물인 대불전(大佛殿)의 높이는 21m이며, 원통형 몸체에 돔형 지붕을 가지고 있다. 인도산 황사암을 사용하였으며, 대불전에서 모시고 있는 불상은 인도에서 증송한 석가모니좌상이다. 석가모니상의 높이는 4.5m이며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 굽타시기에 제작된 불상 중에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처가 처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 기둥에는 이색적인 인도풍의 무늬를 새겨 놓아 인도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중국에 와 매 번 중국풍의 절과 사당만 보다 인도풍의 사찰을 보니 신선한 느낌이 든다. 돔으로 들어가는 기둥엔 인도 총리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념판이 걸려 있고 좌우 회랑에는 인도의 불교 역사를 보여 주는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