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 국회와 정치권을 교착상태에 빠뜨린 브렉시트협상의 가장 난제중 하나인 소위 백스톱(Backstop)이라는 조항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사이의 국경설정에 관한 협약이다. 영국이 유럽연합으로부터 탈퇴를 원하는 주원인이 자국의 자율권을 강화하고자함이고, 당연히 자율권의 확보를 위해서는 공식적인 국경의 재도입도 필수적으로 따르게 된다. 유럽공동체내에서는 형식적으로 국경이 존재할뿐 경제적, 사회적인 장벽으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않고 있다. 비록 영국은 유럽26개국의 셍겐(Schengen)조약에 포함되지 않아 출입국관리는 실행하고 있지만, 유럽연합의 일원으로 상품,
자본, 서비스와 노동의 이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가 없다. 하지만 브렉시트는 새로운 관세장벽을 비롯한 모든 교역의 새로운 시스템도입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따라서 국경설정도 동반과제로 부각한다. 유럽연합입장에서도 브렉시트협상에 있어서 백스톱은 근본적인 전제조건이고, 관세부과를 위하여 국경을 어느 곳에 정하는 문제는 필수적이다. 따라서 영국과 북아일랜드를 통하여 지상으로 직접적인 경계를 하고 있는 아일랜드의 입장에서는 국경도입이 첨예한 이슈일수밖에 없고, 정치적으로도 공식적인 국경도입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정부는 2016년 브렉시트결정이후에 다른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지속적인 로비를 통하여 백스톱 조항을 탈퇴조항에 포함시켰다.
백스톱의 주요 골자는 만일의 경우 유럽연합과 영국이 순차적인 탈퇴조약을 성사시키지 못 하여도, 차후의 적절한 대안이 체결될때까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사이에 국경을 도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이것이 관철되기 위해서는 영국은 탈퇴이후에도 유럽연합의 관세동맹에 잔류하거나, 아니면 북아일랜드와 영국본토사이에 가상적인 국경을 설정하여 관세절차를 실행하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영국입장에서는 브렉시트에도 불구하고 유럽관세동맹에 머물지만 비회원국으로서 아무런 권리행사를 할수없게 되어 브렉시트의 궁극적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동시에 현재 북아일랜드 집권당인 민주연합당(DUP)은 전통적으로 영국과의 통합을 강력히 주장하였기때문에 북아일랜드와 영국본토사이의 국경은 절대로 받아들일수 없는 조건이다. 보수당이 민주연합당의 지지없이는 의회의 다수를 상실하는 현 상황을 고려하면 비록 소수당이지만 무시할수 없는 요구이다.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사이에 국경도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데는 오랜 역사적, 정치적 배경이 있다. 북아일랜드는 아마도 20세기에 존재하였던 가장 첨예하고 복잡한 분쟁지역중의 하나로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느껴지는 현장이다. 영국이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점령한 것은 12세기이지만 두 나라는 결코 완전히 통합하지 못 하였다. 종교적으로 천주교인 아일랜드와 개신교인 성공회를 기반으로한 영국은 오랜점령기간을 통하여 갈등이 심화되었고, 대규모의 영국인 집단이주로 상호간 대립은 더욱 첨예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지주소유의 토지는 영국이주민에게 강제 수용당하고, 모든 공직이나 중요한 시설물들의 취득은 영국인에게만 허용되었다. 게리맨더링을 통해서 공직자선거에서 개신교 대표에게 유리한 위치를 인정하는등 끊임없는 차별정책은 지속되었다. 따라서 아일랜드사람들은 꾸준하게 저항하였고, 영국은 점령자로서 무차별하게 억압하였다. 특히 현재 북아일랜드가 속한 얼스터(Ulster)지역은 지리적으로 영국과 가까운 이유로 많은 영국이주민이 거주하였고, 산업도 발달하여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는 오히려 더블린을 제치고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은 빈번하였고, 18세기말에 프랑스와 미국혁명에 힘입어 더욱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독립운동이 격렬해지면서 국가의 안보에 위협을 느낀 영국정부는 19세기에 접어 들면서 영국과 아일랜드를 합병하는 법을 통과하고, 영국연합왕국(United Kingdom)이 탄생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1840년대에 아일랜드전역을 휩쓴 대흉년에 대한 영국정부의 무관심은 기아와 이민으로 아일랜드인구를 2백만명이나 감소시켰고, 아일랜드사람들의 반영감정을 더욱 증폭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0세기에 이르면 독립운동은 더욱 조직적으로 이루어 지고, 신페인(Sinn Fein)을 시발로 여러 정당결성도 형성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일랜드전지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1차세계대전이후에 이루어진 국민투표에서 영국에서 이주한 개신교신자들이 과반수인 얼스터의 6개지방은 영국제국에 남기로 결정을 하여, 결국 나머지 26개 지방으로 구성된 아일랜드공화국이 독립하고 6개지방은 북아일랜드로 남아 영국에 잔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1922년 아일랜드의 독립은 아이랜드섬을 분단되게 만들었고,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피와 눈물로 젖은 20세기를 장식하게 된다. 특히 1960년대이후 조선산업등의 몰락으로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천주교의 독립운동파와 개신교위주의 잔류파의 투쟁은 한층 격렬해 진다. 여러번에 걸친 영국군대와 경찰의 과잉진압과정에서 평화적인 시위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과격한 독립운동지지자들의 테러공격은 북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영국본토및 유럽의 영국군사기지로까지 확산되었다. 1960년대후반부터 벨파스트 평화협정이 맺어진 1998년에 걸친 북아일랜드분쟁의 결과로 35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불행한 역사로 기록된다. 비록 평화협정으로 아일랜드정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북아일랜드에 대한 공식적인 주권주장을 포기하였지만, 개정된 헌법도 북아일랜드가 원하면 언제든지 아일랜드에 통합될수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아일랜드국민들은 북아일랜드가 궁극적으로 아일랜드로 합쳐져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아일랜드정부 역시 공식적으로 아일랜드섬의 일국원칙을 정치적으로 포기할수 없는 입장이다. 당시에도 북아일랜드의 민주연합당은 평화협정에 유일하게 동참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사이의 국경은 또 다시 물리적 폭력을 재발할수 있는 여지를 제공할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벨파스트 평화협정을 맺을수 있었던 커다란 이유도 영국과 아일랜드가 유럽공동체회원국이었기에 국경문제나 관세절차등의 문제해결이 가능하였다. 브렉시트를 옹호하는 일부 보수당 정치인들은 과거 대영제국의 전통을 이어 받아 전세계국가를 상대로 독자적으로 유리한 자유무역정책을 전개하고, 적은 부담으로 유럽연합과도 통상관계를 수립할수 있다고 호도하였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사이의 국경도 첨단기술을 도입하여 디지털 통관관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고, 그러한 기술 역시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500킬로미터에 달하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사이의 경계는 일반적인 국경과 달리 꼬불꼬불하고, 국경을 통과할수 있는 교차로는 심지어 유럽연합국가와 동구유럽국가들사이의 국경선에 비하여도 많기때문에 일일이 세관조사를 하는것이 불가능하다. 과거에도 유럽경제공동체가 성립되기전까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국경은 일반소비상품뿐만아니라 무기를 반입하는 밀수업자들의 천국이었다. 물론 백스톱은 최악의 경우 채택될수 있는 최종적인 제안이지만, 모든 당사자가 쉽게 동의할수 없는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브렉시트협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