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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Ben-Hur]
노인기
벤허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마차경주가 아닐까. 억울하게 노예 생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집은 폐허가 되어있고 어머니와 누이는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미국의 작가 루 윌리스(1827~1905)의 작품으로 유대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소설이다. 루 윌리스는 미국의 작가이자 변호사, 군인, 주지사를 거친 정치인이기도 했다. 벤허 서문에 윌리스가 성경을 반박하고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다가 얼마 못되어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었으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후 그의 첫 작품이 바로 벤허이다.
A.D. 26년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치리 하에 있었다. 어느 날 새 총독이 예루살렘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총독의 최고 보좌관으로 유다 벤허의 어릴 적 함께 자란 로마인 친구 메살라였다. 메살라가 예루살렘으로 오자마자 벤허를 초대하여 로마가 유대를 통치하는데 도와주기를 청한다. 물론 벤허 자신이 유대인이므로 동족을 괴롭게 하는 일에 협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 일로 로마인 메살라와 유대인 벤허는 의절하게 된다.
얼마 후 새 총독이 많은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거리를 시찰 행진하는데 시민들이 집 위에서 혹은 길거리로 몰려와 새 총독을 구경하느라 소란하다. 행렬이 유다의 집을 지나갈 무렵 지붕 위에서 구경하던 벤허의 여동생이 낡은 기와 장에 무심코 손을 댐으로 그만 기와장이 총독에게로 떨어져 총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메살라는 벤허가 총독에 대한 테러라고 보고 즉시 병사 여럿을 데리고 지붕으로 향한다. 그리고 벤허와 누이 주변 함께한 사람들을 체포한다. 벤허는 절대 고의가 아니고 단지 기와장이 낡아서 떨어진 것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소용이 없다.
메살라는 혼자 남아서 기와 장의 상태를 살펴보니 벤허의 말대로 낡아 살짝만 대어도 금방 떨어진다. 벤허가 고의로 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메살라는 벤허가 새로 부임한 총독을 원치 않아 위해를 입혔다는 죄목을 달아 그를 노예상에 넘긴다. 그의 누이와 어머니 또한 흉악범들을 가두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 감금된다. 노예상으로 끌려가는 노중 모진 고문과 채찍으로 이미 탈진이 된 벤허, 손과 발은 착고에 채워져 있어 물가로 갈 수도 없고, 또 마실 수도 없다. 오직 누군가 물을 떠다가 마시우게 하지 않는 한 탈진으로 죽을 지경이였다. 그때 홀연히 한 사람이 쓰러진 벤허에게 다가와 물을 마신다. 고마운 사람의 이름도 감사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로마 병사의 채찍이 이어진다.
끌려간 곳은 로마 함대의 격노꾼 이었다. 배의 제일 밑창 양옆으로 노예들의 발이 착고에 채워진 상태로 노를 젖는다. 혹 전투 중 배가 파선되어도 이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가운데 통로로 긴 쇠사슬이 있어 각자의 착고 고리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고리를 풀지 않는 한 배와 함께 바다 밑으로 수장될 수밖에 없다. 육중한 함선의 노를 젖는 일은 워낙 고역이라 노예들이라 할지라도 1년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벤허가 속해있는 함대에 새로운 장군이 로마로부터 부임해왔다. 퀸투스 아리우스 해군 제독,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장래가 총망 받는 장군이며, 훗날 집정관의 자리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격꾼이 있는 밑에까지 시찰을 나왔다. 여러 노예들 중 유독 벤허를 보고는 이 배에 온 지 얼마나 되었냐고 묻고 어디 출신인가도 묻는다. 벤허의 생김새가 노예치고는 어딘가 범상한 데가 있음을 직감한다. 벤허를 시험하고자 배의 속도를 최고로 높여본다. 다른 노예들은 이내 픽픽 쓰러지지만, 벤허는 그만할 때까지 끝까지 버틴다. 대단한 체력이다.
이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벤허가 속해있는 함선이 그만 마케도니아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함선이 침몰 위기에 놓이게 되고, 위험을 직감한 노예들이 흥분하기 시작한다. 제독의 명령으로 벤허의 착고 만 쇠사슬로부터 분리되고, 다른 사람 것은 다 채워져 있다. 배가 침몰하면 전부 몰살당할 것을 알고는 겪노실은 폭동이 일어난다. 해적선의 반격이 만만 찬아 여러 함선이 침몰한다. 운 좋게 빠져나온 노예들은 잡혀도 노예로밖에 살지 못할 것을 알고는 나무 조각 등에 의지한 채 멀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군인들 또한 바다 위에서 제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데 도망치는 노예까지 지킨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해서 인지 묵인한다. 퀸투스 제독도 바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데 유일하게 벤허만이 헤엄쳐 다가가서 제독을 무사히 구출한다. 벤허도 다른 노예들처럼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벤허는 제 목숨 하나 건지고자 죽어가는 사람을 애써 외면할 사람은 아니었다.
어쨌든 퀸투스 아리우스 제독은 무사히 해적의 침략으로부터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벤허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퀸투스 제독이 벤허를 양자로 삼았다. 벤허가 유대인인 것과 신분이 노예인 줄도 알면서 자신의 양자로 맞은 것이다. 하루아침에 노예 신분에서 로마의 권세 있는 장군의 아들이 되었다.
또한 퀸투스 장군의 가문과 부와 명예를 모두 물려받게 된다. 그 고된 노역을 오로지 메살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견뎌낸 벤허! 반드시 살아남아서 누이와 어머니의 행방뿐 아니라 몰락한 유다 집안의 명예도 회복하고, 친구이자 호민관인 메살라에게 복수도 해야 한다.
존경받는 로마제국의 명예와 존영을 얻었지만, 어머니와 누이를 찾기 위해 유대로 돌아온다. 이미 폐허가 된 집은 예전의 영예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상심이 되고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는지 슬픔에 잠긴다. 이때 인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누이의 시종을 보던 에스더이다. 하루아침에 모시던 주인들이 모두 끌려가고 아무도 없는 집을 늙은 아버지와 함께 지키고 있었다. 또 한 그녀는 예전부터 벤허를 마음속 깊이 사모하고 있었다. 아마 그 사모함으로 긴 시간을 견디지 않았을까. 벤허를 보자 놀라움과 서글픔으로 그간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다.
잠시 후 차근차근 안부를 묻기 시작하는 벤허!
“마님과 아씨는 주인님 끌려가실 때 함께 병사들이 어디론가 끌고 갔어요. 그 후론 한 번도 뵙지도, 들리는 소식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구나” 한편 메살라는 벤허가 로마제국의 권위와 명예를 얻고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누이와 어머니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메살라는 부하에게 벤허의 가족들의 행방을 알아보게 하는데, 아직 지하 감옥에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입소 후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식기 그릇이 비어있는 것으로 갈음했다. 서둘러 병사들을 지하감방으로 보내 확인하는데, 그동안 굳게 닫힌 채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던 옥문이 열린다. 횃불을 밝혀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가는데 순간 놀라 뒷걸음질 친다.
어머니와 누이는 그만 문둥병에 걸려있었다. 보고를 받은 메살라는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를 감옥 밖으로 내보낸다. 흉칙한 모습으로 어디를 갈 수도 없고, 문둥병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시내를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었다. 밤에 두 모녀는 자신의 살던 집으로 가보았다. 기둥에 숨어서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꿈에 그리던 아들 벤허를 보게 된다. 건강하게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고 있다. 자식 앞에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고, 이렇게 울고만 있다. 얼마 후 에스더에게도 추한 모습을 가리고는 문둥병이 걸렸으니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살아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벤허에게는 우리를 만난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한편 로마 황제를 위한 전차 경기가 있음을 공고하고 지원자를 접수하는데 매년 수 많은 병사들이 지원한다. 우승자에게는 부와 명예가 주어지며 단숨에 출세할 수도 있다. 벌써 수년째 메살라가 우승을 독식하는 중이다. 훌륭한 말을 여러 필을 가진 아랍 상인이 벤허가 말을 잘 다루는 것을 보고는 자기의 준마로 대회에 나갈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벤허는 어머니와 누이를 찾는 것이 먼저이므로 거절한다. 백방으로 수소문도 해보고 했지만, 도무지 행방을 알 길이 없다. 이번 대회에도 메살라가 출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벤허도 출정을 감행한다. 오직 메살라에 대한 복수를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으므로 좋은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차 대회는 워낙 거칠고 변수가 많아 뒤집히거나 전복, 파손등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빈번하다. 결승선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우승하게 되어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아랍 상인의 말들은 몸 색깔이 온통 흰색으로 네 마리다 훈련이 잘된 준마인데 달릴 때 목 뒤 갈 귀가 인상적이다. 한두 번 벤허와 호흡을 맞춰보니 잘 따라주었다.
드디어 나팔 소리와 함께 경주가 시작된다. 메살라와 벤허는 투구를 쓴채 서로를 노려본다. 메살라는 이 기회에 벤허를 이용해 벤허의 부와 로마제국의 명예를 자기가 차지하고, 다시는 회복 되지 못하게 제대로 혼내줄 심산이고, 벤허는 오직 메살라에 대한 원망과 원한이 가슴 가득 사무친 가운데 메살라를 강렬하게 직시한다.
노련한 메살라가 선두로 치고 나간다. 반면 벤허는 선두와는 제법 거리가 있다.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는 속도가 굉장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선두와의 경쟁에서 메살라에 의해 큰 부상을 당하고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둘 경쟁에서 밀려나고 벤허의 마차가 점점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메살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벤허가 치고 나와 자신과 선두 다툼을 하니 더욱 흥분하여 자신의 말들에 채찍을 강하게 한다.
그래도 벤허보다 속도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말에게 가하던 채찍을 들어 벤허를 향해 치기 시작한다. 자칫 말고삐를 놓쳐 마차에서 떨어 질뻔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으로만 들어오면 이기는 것으로 정정당당하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무기들을 마차에 부착하여 부딪치는 상대를 무력화시킨다. 메살라의 마차의 회전축에는 양방향으로 상대 바퀴의 간 살들을 마치 전기톱처럼 순식간에 절단하는 장치가 되어있어 여기에 당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벤허의 마차도 조금만 더 메살라의 마차와 가까와 졌으면, 다른 전차들처럼 전복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예리한 장치가 위협적인 것을 눈치채고는 거리를 유지한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던 격렬한 싸움을 한다. 서로의 원한을 고스란히 마차경주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결국 메살라의 마차는 벤허에 의해 박살이 나고 자신은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죽음 직전까지 가는 엄청난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번 경주의 우승자는 물론 벤허이다. 들것에 실려 사경 중의 메살라를 만나러 간 벤허!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충분히 용서할 마음을 갖고 있는 벤허. 하지만 메살라는 끝내 벤허를 외면하고 자기 출세의 걸림돌로 인식해서인지 증오로 몸부림친다.
한편 벤허의 누이와 어머니는 문둥이로 격리된 채 에스더가 옷과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서 벤허에 대한 안부를 전해준다. 일정하게 에스더가 외출하는 것을 이상히 여긴 벤허가 에스더를 다그치자 그만 어머니와 누이의 소식을 전한다. 그토록 찾아 헤맸건만, 눈물을 흘리는 벤허!
그길로 문둥이 촌으로 향한다. 그곳은 일반인과 엄격히 분리된 곳이라 갈 수 없다고 에스더가 강하게 만류해 보지만 벤허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 누이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막상 도착해보니 모두 얼굴을 가린 채 죄인처럼 도망친다.
어머니와 누이가 먼저 벤허를 발견하고는 굴속으로 몸을 숨긴다. 이런 모습으로 도무지 아들 앞에 설 수가 없었다. 그저 먼 발치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벤허! 에스더가 메시야의 복음의 말씀을 듣기를 간청한다.
하지만 벤허는 거절한다. 온통 메살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지금은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에스더는 계속해서 벤허를 회유하려 애쓴다.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마음속의 원한도 치유 받을 수 있고 문둥병자, 소경등 온갖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벤허에게 간절한 말로 강권한다. 에스더의 거듭된 간청에 못 이겨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선다.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벤허가 메시야를 처음 본 순간 너무나 놀랐다. 오래전 노예로 사슬에 묶여 끌려가고 있는데 갈증으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물을 먹여주던 바로 그분이 아닌가.
얼마후 메시야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십자기를 지고 채찍을 맞으며 골고다로 향한다. 벤허가 물을 떠서 그분께 먹여주려 하나 허락지 않는다. 벤허의 주된 내용은 놀랍게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원수에 대한 응징을 다룬 것 같지만 작가의 의도는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이전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가장 잘 나타낸 영화가 또 한 벤허이다.
작품 벤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축성 있게 나타내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영화로웠지만,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제국들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의 지배하에 있을 때 자주 로마에 반기를 들어 급기야 유대땅에 사는 것을 허락지 않고 전 세계에 흩어짐을 당한다. 일명 디아스포라가 이때 시작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세계 약 102국으로 분산되어 어디를 가더라도 칼의 고통이 뒤따랐다. 그로부터 약 1900년이 흐른 뒤 세계 2차대전에는 희생자 수가 극에 달해, 히틀러로부터 약 600만명이 짧은 시간에 죽임을 당한다. 아무도 이스라엘이 나라로 탄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1948.5.14. 마침내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다. 주권을 빼앗긴 지 2500년 땅에서 쫓겨난 지 1900년 만의 일이다. 혹자는 20세기의 가장 큰 기적으로 인류가 달에 착륙했던 것보다. 이스라엘의 독립 가능성이 훨씬 더 낮다고 한다.
벤허는 그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 강대하게 되고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을 들어 이방인들을 판단하고자 함이다. 그 후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는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아 예전의 모습을 회복했다. 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다시금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2. 탄 생 (꽁트)
노인기
오늘도 P는 좁은 아트리에 에서 그림을 그린다.
화실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조그마한 본인의 집 구석방이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고, 언제부터인가 복합부위 통증증후군을 앓고서부터 그 통증을 감내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뭔가 한곳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버텨낼 재간이 없기에 더욱 집중해야만 했다. 아픔과 고통으로 말미암는 그의 처절한 작품들은 그 깊이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P는 휠체어를 탄다. 그의 아내 Y도 휠체어를 탄다. 자녀는 생물학적으로 가질 수 없는 조건으로 서로가 잘 알고 있었고, 또 처음부터 자녀에 대한 부분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다.
다만 불편한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고, 힘이 되기를 바람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선택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가 않았다. 당장 생계가 제일 큰 문제였다. 하반신 마비의 크게 불편한 몸으로 설상가상 복합부위 통증증후군까지 앓고 있으니, 그 고통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P는 어릴 때 빨리 치료를 받았으면, 그래도 휠체어 신세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몹시 가난한 탓에 치료를 받을 형편이 못 되어 그만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그의 몸은 다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운명과 맞서 일어났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했다. 대기업에 취직도 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잘 나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몸 이곳저곳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인해 결국 회사를 거만 두기에 이른다.
이 무렵 결혼도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정상 가정이 봤을 때 불쌍하다고 측은히 여길 수도 있지만, 둘은 어느 가정보다 행복했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P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뭔가를 배우기 위해 힘들지만 끝임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하기를 또 몇 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우연히 취미를 갖도록 도와주는 이럴 테면, 외국어를 가르쳐주고, 서예교실도 있고, 특이한 글씨체를 취미로 배울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요리, 탁구, 배드민턴 등 운동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문화센타를 소개받아 발을 들어놓게 되었다. 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일주일에 세 번을 꼬박 참석한다. 그나마 이곳에서 뭔가를 배우며 시간을 보낼 때가 좋았다.
불편하지만 탁구도 재미있고, 컴퓨터 강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한번은 컴퓨터게임을 본인에게 가르쳐준 강사를 가볍게 이기고, 같이 배우기 시작한 동료들과 주변인들을 놀라게 하고, 컴퓨터 수리 응용등 은 한 번 만 가르쳐주면 두 번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나날이 배움의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 그렇게 재밌었고,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잠시나마 덜어주었다. 건강도, 물질도 어느 것 하나 만족함이 없지만 행복했다.
P는 오늘도 문화센타 배움의 교실 2층으로 향한다. 비장애인들은 성큼 몇 계단씩 단번에 뛰어오르지만, P는 계단 옆 꼬불꼬불 통로 같은 휠체어 길을 뒤에서 누가 밀어주는 이 없이 힘겹게 양손으로 바퀴를 돌리며 건물 입구에 들어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교실로 막 들어서는데 문득 벽에 걸려있는 읽기도 쉽지 않은 액자 속 글씨체에 묘한 감정을 느끼고 물끄러미 한참을 올려다본다.
“P씨 뭘 그렇게 올려다보세요?” 공예를 가르치는 김 선생이다. “아 아닙니다. 글씨체가 하도 신기해서요.”
“읽을 수 있겠어요?” 물음으로 봐서 읽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하는 눈치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의 작품이에요?”
“글씨 강좌를 하고, 있는 이 선생이 3년 걸려 개발했다고 합니다.” “아 이 선생님 작품이었군요. 내용도 직접 쓰신 건가요?”
“아니요. 글은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입니다. 그리고 저쪽 것은 또 다른 필치의 서시이고요.” 고개를 돌려 김 선생이 가리키는 액자를 올려다보았다. P의 눈에는 두 액자 모두 예술작품같이 높이 보였고, 자신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놀라웠다. 글씨가 주는 매력을 처음 느껴보았다. ‘우리말 글씨도 이렇게 아름답고 어떤 글씨체를 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글의 무게와 내용과 뜻의 전달이 보다 명확하고, 힘이 있구나.’하고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새삼 놀랍고 신선했다. 이왕 문화센타에서 배움의 시간을 갖고자 함이 아닌가. 액자 속의 글씨 정도는 못해도 배워나 보자. 순간 P는 새로운 도전으로 자신만의 글씨체를 개발하는 것으로 정하고, 그길로 이 선생의 강의를 신청하고, 글씨 수업에 열중한다. 교실은 열 대여섯 명 정도 자리하고 있었다. P가 가장 나중에 합류했다.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집에 가서 그날 배운 것을 계속 반복했다. 힘들지만 그리고 기대만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꾸준히 강사의 한마디 말도 손동작도 놓치지 않고, 따라 하기를 시작한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함께 수업을 받는 사람들은 최소 3개월에서 6개월은 넘었다. 모두 P같이 시작은 나도 한 번 배워 보고 싶다는 충동과 또 열심히 하면 나도 할 수 있겠지 하고 막상 시작은 했지만, 진전은 그다지 없었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모든 글자가 마치 한 모양체로 자음 모음 좌우 높이가 한 글자같이 일정한 크기를 하고 거기에 작가의 혼신을 다해 정성을 불어 넣어야 만이 생명력이 있으리라고, 하기 사 강사도 개발 기간이 3년은 족히 걸린 것을 아무리 따라 한다고 해도 단시간에 마스터 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P는 달랐다. 삼 개월이 채 못되어 선생보다 더 뛰어났다. 선생도 함께 수업받는 동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액자속의 글씨체보다 정교하고 내면 가득 또 다른 깊이가 느껴졌다. P는 겸손하게 선생님이 잘 가르쳐준 덕분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노력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소질을 타고났다고, 밖에 달리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글씨체 강의하던 이 선생도 인정했다. 그리고 P를 신기해했다. “P씨 아무래도 뒤늦게 본인의 또 다른 재능을 발견하신 것 같습니다.” 가까이서 P를 지도하고, 직접 발전 과정을 봐온 터라 놀랄 수밖에. “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P는 계속해서 이 선생의 강의를 시청했다. 그리고 자기만의 글씨체를 보다 깊게 끌어내었다. 글씨의 깊이가 느껴졌다. 강사 이 선생과 P가 그동안 완성한 작품들을 모아서 공동 전시회를 계획한다. 물론 서예부에서도, 아기자기한 공방 소품들과 옆 교실의 아마추어 미술품 몇 점도 함께 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P의 작품 앞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잠시 후 그들은 하나둘 작품을 구매하기 시작한다. 그날 출품한 P의 열여섯 작품이 한 편도 남김없이 모두 새로운 주인을 찾아갔다. P도 놀랐다. 몸은 늘 통증으로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날 밤은 아내와 기쁨을 함께하며, 하얗게 지새웠다. 좋아서 시작한 글씨 공부가 물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눈은 한숨도 붙이지 못했지만, 몸과 마음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 같다.’ 문화센타 2층으로 늘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함께한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P는 처음 액자속의 작품을 보고 도전하고픈 충동을 느끼듯 문득 어떤 깨달음같이 일생일대의 역작을 만들고 싶은 강한 충동이 속에서 마그마같이 솟구침을 또 한 번 느낀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갖고 태나 났는지 또 자기 속에는 어떤 남다른 능력이 있는지 내가 뭘 자신있어 하며, 또 뭘 좋아하는지 나에게는 남에게 있지 않은 다른 뭔가가 있는 지를 잘 모르고 살아간다. 물론 잘 알고 비교적 일찍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재능도, 능력도, 장점도, 잘 모르고 평생을 그냥 지나쳐 버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P는 인생 중반에 우연히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했다.
내 속에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또 다른 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옆에서 아내는 새로운 용기와 또 다른 미션 과도 같은 도전을 주문한다. “여보! 남들은 몇 년 걸려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주 짧은 시간에 완성한 걸 보면, 물론 쉬지 않고, 노력도 있었겠지만, 어디 노력만으로 되겠어요” 아내 Y가 남편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지 한껏 남편을 추켜 세운다. 아마 오래도록 남편을 지켜본 결과 아무에게나 있지 않은 뭔가를 발견했나 보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의 재능을 또 다른 방향으로 도전해보는 건 어떻겠어요?” P는 아내가 깍아 준 사과를 입안 가득 머금은 채 말은 못 하고 눈만 크게 확장되어 아내를 내려다본다. 이 사람이 시방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럴까. 기대반 염려반 표정이다. 겨우 사과를 넘긴 후 P가 묻는다. “무슨 말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해보세요.” P부부는 서로 존댓말을 한다. 처음부터 언제나 존댓말이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속상한 일이나 기분 나쁜 일로 아무리 짜증이 난다 할지라도 한 번도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은 거의 한 적이 없다. 아내 Y가 말한다. “당신이 그림을 그려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림을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 건 당신이 잘 알잖소.”
“물론 잘 알죠.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화가나 그의 작품들로 대화를 나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요.” P가 웃으면서 말한다. “당신 보기에 글씨보다는 그림이 돈벌이가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래요?” 모처럼 P의 농담에 두 사람은 활짝 웃는다.
아내는 남편이 어렵다고 하는 글씨체를 얼마 못 되어 자기만의 독특하고 품격있는 작품으로 탄생되는 것을 보고는 그럼 이 사람이 그림에도 소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고 한다. 사실 P는 지금까지의 삶이 말해주듯 예술적인 부분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을뿐더러 꿈도 꿔본 적이 없었다.
용케 아내가 찾아내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으로 말미암는 용기를 심어준다.
한 번도 붓을 잡아본 기억이 없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P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P가 자기만의 글씨체를 확립한 것 같이 그림도 반드시 자기만의 화법으로 새롭게 탄생할 거란 확신이 생겼다.
다시 주민센타에서 글씨 수업이 아닌 이번엔 그림 반으로 등록을 하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약 20여 명이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모였다. 모두 성인들이라 태도가 진지했다. 게 중에는 어릴 때 그림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형편상 배우지 못하고 세월이 지난 후 뒤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있고, 중년의 부인들 중에는 자녀들이 이미 장성하여 어머니의 손길이 크게 필요치 않고, 남편을 출근시킨 후 취미로 그림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업은 낮 시간에 하므로 주로 여자들이 많았다. P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인지 많이 어색해했고, 힘들어했다. 그림은 글씨와는 또 달랐다. 글씨는 본인이 좋아서 시작해 언제 시간이 가는지도 몰랐지만, 하지만 그림은 달랐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아무래도 힘들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겨우 삼키고 억눌렀다. 아내는 남편의 표정을 살핀다. 글씨를 배울 때와는 사뭇 다름을 느껴서인지 수업 잘 들었냐고 묻지도 않는다. P는 속으로 아내가 물어봐 주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아내가 물어봤으면 P는 수업중에 먹었던 생각들을 틀림없이 말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다음 날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에 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리했다. 밤새 많은 갈등이 있었다. 한 번 참석해보고 에이 못하겠다 그림은 내 적성이 아니야 하고 말했을 때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그녀는 본인이 느끼기에 틀림없이 남편이 타고난 재주가 있는데 하며, 나보다도 나를 더 안타까워할 것이다. 나로 인해 실망하고, 속상해하고, 힘들어할 아내를 마음속에 떠올려 보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P는 일단 최선을 다해보기로 한다. 그러나 기초가 전무 한 가운데 발걸음과 마음이 여전히 무거웠다. 두 번째 수업이다.
오늘 수업은 데생이다. 데생은 색채보다는 주로 선을 이용하여 작품을 그려내는 것에 중점을 두는 미술이다. P에게는 용어도 생소하다. ‘4B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다니 미술의 세계도 참 다양하구나’ 강사가 일러주는 대로 포인트를 잡아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따라 해 보지만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것처럼 유치했다.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래도 P는 자신의 미세한 손끝에 와 닫는 연필의 촉감은 붓하고는 또 달랐다. 나쁘지 않았다. 소묘가 미술의 기초라고 하니 일단 열심히 해보는 수밖에 한 달 정도만 최선을 다해보자 다짐처럼 마음을 먹고는 처음 글씨체를 익힐 때와 같이 집에서도 낮에 배운 것을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했다. P의 집념은 어릴 때부터 무서울 만큼 대단했다. 학원이나 과외를 따로 다닐 형편이 못되므로 삼각함수를 비롯한 적분 미적분 언어영역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학교수업과 참고서만으로 해결했다. 그는 선생님의 수업을 절대적으로 의지한 채 집에서는 반드시 그날 배운 수업들을 되새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다음날 어김없이 해소했다.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배움을 갖는다는 것. 또 나날이 지식이 향상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힘들지만 놓기 싫었다. 아내 Y도 남편의 그런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술이 어디 의욕과 집념 가지고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아내 Y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면 Y는 남편 P가 단순히 글씨체를 자가 육성하는 모습을 봄으로 그것이 그림으로까지 연결이 됐으면 좋겠다 하고 순진하게 생각한 것일까? 아니다. 아내 Y는 생각이 처음부터 달랐다.
언제부터인가 남편 P가 직장에서의 과도한 스트레스로 몸이 허약해지고 이곳저곳 후유증이 막 들고 일어날 무렵 취미로 뭔가를 배우기를 원했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인생의 무게로부터 잠시나마 쉬어가기를 원했었다. 기대와는 달리 P의 문화센타 출입은 또 하나의 삶이 되고 늦었지만, 그토록 바라던 인생의 즐거움을 비로소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복합부위 통증증후군은 갈수록 악화되어 처음 회사를 그만둘 때, 그리고 문화센타를 처음 다닐 때는 그래도 비교적 초기증상을 앓고 있었다. 통증이 시작될 때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파온다. 통증의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땀으로 흠벅 젖는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빨리 지나가는 수밖에 아~~아 악 하는 그 고통의 소리는 가히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러다 도무지 못 견뎌 눈이 뒤집혀지고 입에서는 말도 신음소리도 못 내고 하얀 거품 같은 침이 나올 때면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살 려 주 세 요’ 몸 전체는 굳었고 손은 떨고 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아주 강한 마약성 진통제를 주사하여 맞고는 겨우 잠이 든다. 그리고는 잠시 고통을 잊는다.
P는 어쩌면 이때가 가장 행복할 것이다. 깨어나면 고통의 시간이 꿈이었기를 바라고, 혹 잠에서 깰 때는 남들처럼 아프지 않은 건강한 몸으로 기적같이 낫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깨기가 두렵다. 왜? 깨고 나면 또 통증이 찾아올 테니까. 어느 순간부턴가 ‘단 하루라도 정상적으로 살아봤으면, 나도 남들처럼 안 아프게 살아봤으면’ 아내 Y는 그동안 남편 P가 문화센타에서 이것저것을 배울 때와 어느 순간 글씨에 매료되어 열심일 때 한곳으로의 강한 집중력은 아픔도, 잠시나마 비껴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의 손재주에 여러 가지 가능성도 발견했다. 하지만 복합부위 통증증후군으로 말미암는 고통은 그 강도가 점점 심하여 P를 몹시 괴롭게 했다. 특히 궂은날 아니 비 오기 전날은 거의 죽음에 가깝다. 그래서 아내 Y는 P가 그림을 글씨처럼 새롭게 시작해보길 원했다.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P는 아직 까지 그림 보다는 그래도 글씨가 좋았다. P는 그림공부를 하는 내내 틈틈이 하고 싶은 글씨를 새겨 작품화했다.
몸이 아플수록 통증이 찾아올수록 더욱 매진했다.
문득 사랑의 결정체와 같은 말씀을 온 힘을 다해 그의 마지막 작품처럼 쏟아 넣기 시작했다. P의 집중력은 정말 놀라웠다. 엄청난 통증의 아픔을 담아서인지 작품은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느껴졌다. 가로 약 100센티미터 세로 80센티미터 크기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해마지않았다. 글씨도 그림 이상으로 전달 능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속으로 한 달 정도만 그림 수업을 수강하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글씨를 처음 대할 때처럼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강의 후 집에서 배웠던 것을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한다. 아내 Y의 예상이 적중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P는 보다 전문적인 그림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한 모든 것이 불편하기가 정도를 넘어서 내가 이일을 계속해야 되나 하고 회의가 느껴질 때가 많다. 그만큼 장애물이 많이 놓여있어 움직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P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또한 죽음과 같은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그림공부는 계속해야만 했다. P의 병명은 아직까지 약도 개발되지 않았다. 의사도 정확하게는 발병원인과 치료를 알지 못한다. 처방이라고 해야 고작 마약성 진통제를 주사기에 넣고 최후에 본인이 아니면 보호자가 주사하여 통증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P는 문화센타가 아닌 미술전문 학원으로 등록을 마쳤다. 그동안 그려두었던 두 점의 그림을 가지고 심사를 거쳐 합격한 후 강의를 수강하기에 이르렀다. 대 부분 미대 지망생들과 미대생들로 임용고시를 염두에 두고 전문 공부를 하는 사람들로 분위기가 센타 하고는 사뭇 달랐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학원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놓고 공부를 한다. 이 사람들에 비해 나이도 많은 내가 과연 끝까지 잘 버틸 수 있을까? P는 자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미술에 대한 목표와 이루고자 하는 분야가 있지만, 사실 P는 어떤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전공 분야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고통 가운데 그림에 온전히 몰두함으로 마치 모르핀 약같이 잠시나마 아픔을 잊어보기 위함이었다. 처절했다. 신기하게도 그런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이 있을 때 그는 더욱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글씨처럼 그림도 눈에 띄게 발전되었다. 약 석달쯤 지났을까 강사도 P의 그림을 보고서는 많이 놀라와 했다. 처음 두 점의 그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달 더 학원을 수강하고는 자신만의 화법을 터득하여 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좁은 집을 정리하고 방 한 칸을 온전히 화방으로 쓰기로 했다. 비록 집에서이지만, 그는 하루를 매우 엄중하게 분할하여 시간을 체계적으로 계획했다. P의 집은 어느새 물감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하루 열두 시간씩 그림 그리기와 세 시간씩 이론을 병행한다. P에게는 고된 작업이고 체력적으로도 무척 힘든 일이다. 거의 정신력이 지배적이었다. 어느덧 이렇게 하기를 수년이 흘렀다. 놀랍게도 P는 그림에 집중하면서 육신의 고통으로 부터 점차 적응하여 갔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 사이 갤러리 전시회를 세 번 가졌다. 모두 성공적이었다. 전시회 작품들은 기간중에 모두 판매가 되었다. 독특한 자기만의 화법으로 작품을 끌어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P의 작품에는 그런 오묘함이 느껴졌다. 일반인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통증과 싸우며, 붓 하나 선하나에 아픔 한 점을 도화지에 불어넣고 색을 입히고, 하기를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의 작품들은 이렇게 하여 탄생했다. 병마로 인한 고뇌와 갈등 남들과는 많이 다른 인생사를 오로지 가슴에 간직한 채 오직 그가 그린 작품만이 그의 말을 대신한다.
3. 소묘(자화상)
노 인 기
바람이 불어도 이제 춥지 않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계절(季節)은 추운 겨울을 지나 새싹을 띄우는 봄으로 행진(行進)한다. 옛날에는 그 흐름이 몹시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급물살같이 빠르게 흘러간다. 마치 뒤를 돌아보면 한참 흘러간 것처럼. 어느덧 세월의 흐름이 익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자연계의 이상 현상으로 자전과 공전이 예전보다 빨라진 것일까? 젊은 사람들에겐 그 옛날 내가 느꼈던 것처럼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질까? 나는 지금 인생의 어느 시점에 서 있는 것일까? 백수의 절반을 살아왔지만, 비가 언제 올지 또 내리는 비는 언제 거칠지 오락가락하는 비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처럼 내일 일은 잘 모르겠다. 항상 배움의 자세를 갖고자 애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여전히 부족하다 못해 도무지 나는 할 수 없는 마음가짐이다.
영상의 기온을 회복하면서 사람뿐만 아니라 새들도 식물도 분주하다. 모두 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지난가을은 마치 사랑하는, 님을 떠나보낸 것처럼 다시없는 힘든 나날들이었고, 맨정신으로 견디기란 죽음처럼 두려웠다. 외로움이었다. 그 모든 적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안부를 물어보는 이 없고, 안녕하며, 인사를 건네는 이도 없다. 참 슬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인생의 긴 시간을 놓고 봤을 때 오늘의 이 외로움도 꼭 필요했으리라 여기고 혼자 묵묵히 감내하며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돌이켜보면 그때가 몹시 그리울 것이다.
자정이 다될 무렵 하루 일과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선다. 불과 몇 시간 후면 돌아올 자리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나선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둬야 또 내일을 지탱할 수 있다. 피곤한 인생이다. 하늘 아래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 있을까? 물론 어디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근심과 걱정이 없는 일은 모르긴 해도 없을 것이며, 그런 일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겨우내 웅크리고만 있다가 봄볕이 따스해서인지 길가에서 네다리를 꼿꼿히 하고, 꼬리와 엉덩이를 쭉 뒤로 빼고는 송곳니를 드러낸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어지간히 귀찮은 표정이다. 차가 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첩해야 할 몸은 느릿느릿 행동이 꿈 뜨다. 빵빵해도 소용이 없다. 되려 차가 멈춰섰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뒤돌아보며 ‘왜 그래’하는 불만 섞인 얼굴이다. 이것도 봄에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종종 아파트단지 내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서 열심히 땅바닥의 모이를 쫒는다. 제법 살들이 통통하다. 그래서일까 차가 와도 피할 생각을 않는다. 분명히 차 밑으로 들어가는걸 봤는 데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움직이면 오리처럼 뒤뚱뒤뚱 차 옆으로 걸어 나온다. 사람들이 지나가도 날지 않는다. 좀 가까와 지면 빨리 걷는다. 사람과 차들에 익숙해서인지 도통 위험 한 줄을 모른다. 인생들도 주위 사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자칫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비근한 예로 운전도 처음엔 많이 긴장 하지만 자동차기기가 조금 익숙해지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마음이 매우 숙달된 사람처럼 자신도 모르게 그만 자신 상태를 망각하고 만다.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긴장을 늦추지만, 안았더라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늘 긴장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긴장을 하며 사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된다. 회사에서도 수시로 회의를 한다. 업무적이던 때론 비 업무적이던 자주 모여서 의논을 한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많다. 땅이 채 해동이 되기도 전에 농부는 밭을 갈아놓고, 거름을 미리 덮어놓았다.
어디선가 시골 냄새가 피어 올라왔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가슴을 설레 이게 한다. 처음 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약간의 긴장감이 살짝 흥분하게 한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늘 높이 맹금류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날개를 넓게 펼친 채 유유히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다. 원의 세계가 점점 좁아지더니 어느 순간 빠른 속도로 땅위로 내리 꼿는다. 아마 사냥감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나 보다. 정확도는 놀랍다. 빠르게 움직일 때는 바람을 가르는 날개의 퍼덕임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무엇을 그토록 재빠르게 움킨 것일까? 물고기일까. 설치류일까. 아니면 파충류? 파충류는 아직 경칩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조금은 더 기다려야 될 것 같다. 이렇듯 살아 숨을 쉬는 모든 것은 각각 부여된 생존의 본능을 따라 움직인다. 독수리는 멀리 볼 수 있는 눈과 강한 발톱과 부리로 사람도 사냥하기 어려운 짐승들을 쉽게 잡는다. 여러 종류의 새 중에 특별히 부여된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른 아침마다 우유를 담은 탱크로리 차가 신선한 우유를 목장으로부터 수집하여 이송한다. 푸른계곡을 지나 굽이쳐 흐르는 물은 급하게 바다로 연하여 흘러간다. 이따금식 송어가 물 밖으로 펄쩍 뛰어오르고는 물결을 일으키며, 물속으로 사라진다. 강은 생동감이 넘친다. 어느 지점에선 소리도 요란하다. 가까이서 들을 땐 수많은 군사의 우렁찬 함성 같기도 하고, 고요한 중에 있을 땐 여인의 속삭임 같기도 하고, 주변 지리의 상황에 따라 소리와 모양과 형상들이 제각각이다. 이렇듯 자연은 신비한 부분이 많다. 삼라만상 모든 형질을 학자의 눈으로 살펴본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 수 있으랴. 잘 모른다는 고백이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분 앞에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리라.
사람의 길이 본인에게 달려있는 것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걷는 자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생각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강한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보다도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역사의 흐름을 바꾼 실수 가운데는 지도자가 자신이 얼마만큼 연약한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교만하게 임하다가 잘 못 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침 물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냇가를 따라 휘감아도는 바람과 이제 막 떠오르는 해는 빠르게 대기 중의 수분을 어디론가 몰아간다. 물길이 닫는 곳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최종 목적지는 바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굽이진 길을 따라 걷노라면 봄기운을 머금은 대지로부터 흙냄새가 난다. 아마 새 생명을 틔울 준비를 하는 가보다. 건초더미가 있는 곳에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물길을 따라 좀더 걷다 보니 징검다리가 크리스마스 실의 그림엽서같이 정겹게 놓여있다. 당연히 건너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징검돌과 돌 사이는 물살이 빠르다. 고기들은 밖에서 봐도 같은 종끼리 소규모 무리를 지어 다닌다. 빠른 물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거슬러 오르기를 반복한다. 물 밖의 풍경이나 고기들이 유영을 즐기는 물속이나 모두 평화로워 보인다.
얼마를 걸었을까 이번엔 나무로 만든 둘레길 같은 다리가 강 옆을 나란히 하고 또 어떤 곳에선 나뭇길이 강 위로 돌아나 있기도 했다. 물은 맑고 푸르다. 어떤 곳은 깊다. 천천히 걷고 싶다. 아치형 다리난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고개를 밖으로 하여 유유히 흘러가는 강을 내려다본다. 벤치에 앉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거미가 복잡하게 올가미 형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속에서 거미줄이 어떻게 생성하는지는 몰라도 뒤 꽁무늬에서 잘도 나온다. 참 신기하다. 거미는 다리가 왜 이렇게 많을까? 궁금했는데 우연히 집짓는 광경을 목격한 후에는 여덟 개나 되는 다리를 모두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목적지를 따로 정해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형용 할 수 없는 기운이 나를 이끈다. 한 시간쯤 강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여러 사람이 플라잉 낚시를 즐긴다.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 낚시 옷을 입고는 어떤 이는 허리 정도 또 어떤 이는 무릎 정도 입수하여 낚싯대를 부산하게 움직인다. 줄과 낭창낭창한 대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숭어를 낚은 모양이다. 대롱 매달려 나오면서도 꼬리는 완강하게 몸부림친다. 짜릿한 손맛을 본 낚시꾼은 ‘이놈아 좀 기다려 놓아줄게’ 하고 바늘을 물고기 주둥이에서 꺼낸 후 그대로 놓아준다. 처음부터 물고기를 잡아 요리할 생각은 없었고, 겨우내 느끼지 못했던 손맛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약간 떨어진 곳은 잔잔하고 강폭이 넓어 청둥오리로 보이는 무리가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고 있다. 어디선가 또 다른 무리가 날아와 물 위로 사뿐하게 내려앉는다. 참 신기하다. 청둥오리는 하늘을 자유로이 날기도 하고, 물에서도 자유롭다. 착지하는 장면을 처음 보았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기기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것도 물 위로 착지할 수 있을까? 잠시 후 무엇에 놀랐는지 일제히 물 위에서 후다닥 몇 발자국 뛰어서는 날갯짓하며, 날아오른다. 착지와 비상이 땅 위도 아니고, 물 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참 놀랍다.
하늘은 오늘따라 구름의 무리가 크게 형성되어있다. 만약 파란 하늘에 구름이 없다면 많이 심심했을 것 같다. 새가 날아다니고, 조금 있으면, 나비와 벌들의 바쁜 계절이 돌아온다. 꽃들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수정을 하고, 열매를 맺는다. 결국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땅밑에선 겨울의 혹독함을 묵묵히 감내하고, 조용히 움트기를 기다렸다가 따스한 바람이 남쪽에서부터 올라오면 어떻게 알고 생명이 나오기 시작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반드시 존재한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어떤 시인은 별을 노래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하며, 함께 자란 친구들의 이름과 어머니를 불러보고 자신의 이름을 쓰고는 흙으로 덮어버렸다. 아마 시인도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젠가 생명이 다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멀리 계신 그리운 어머니와 친구들이 많이 생각이 났나 보다.
봄은 언제나 생동감이 넘친다. 겨우내 움츠림에서 벗어나 힘껏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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