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생명, 온문화로 나아가는 살림과학의 길
〈2024 살림학연구소 첫돌맞이 한마당잔치〉
모셔배움(강연) ①
과학기술의 역할과 효용은 무엇일까. 근대 과학문명은 인간의 뜻대로 자연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을 비약적으로 키운 반면, 수많은 문명의 비극을 낳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 힘을 생명살림에 알맞게 다스리는 힘과 잇지 못해, 산업자본과 국가 전쟁기술에 복무하며 생태계-관계망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난 10월 열린 살림학연구소 첫돌맞이 한마당잔치에서 강연한 최무영 서울대 명예교수는 ‘온생명’ 개념에 기초해 인간과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화해하는 ‘온문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기후위기, 핵에너지 문제, 양극화, 생태계 파괴, 문화 획일화 같은 문제들은 기본적으로 물질문명, 과학과 기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온생명 개념에 기초해 자연, 인간,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화해하는 온문화로 확장을 모색해야 합니다.”
낱생명이 아닌, 상호작용하는 온생명
‘온생명’은 개체 단위(낱생명)로 생명을 바라보는 이해를 넘어, 태양과 지구, 지구상의 모든 생명과 무생물들이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이루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낱생명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보생명과 관계성을 통해서만 생명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과학에서 접근하는 환원주의적이고 개체적인 생명이 아닌, 총체적인 복잡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생명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자연현상에는 완전히 질서정연하지도, 완전히 무질서하지도 않은, 경계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이성이 크다는 특성을 가지는데, 이를 ‘복잡성’이라고 합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자연 자체에 복잡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복잡성의 핵심 재료는 ‘쩔쩔맴’입니다. 쩔쩔맴은 갈등이 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결이 맞는 온전함을 이루어 냅니다. 이는 자연현상뿐 아니라 사회로 바꾸어도 그대로 성립합니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 이러한 준안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협동과 상호작용이 가장 중요합니다.”
최무영 교수는 협동과 상호작용은 소통과 정보교류로 일어나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인간과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온문화’라고 제시했다. 문화는 다양한 관점에서 정의될 수 있지만, 최 교수가 생각하는 문화는 거대한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 문화는 생활공동체, 민족, 국가 등 문화형성 단위의 내부와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 가깝다는 것이다.
“생명과 문화는 정말 비슷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자유에너지와 부호(code)라고 지적했는데, 둘 다 정보를 가리킵니다. 문화의 본질도 정보라고 할 수 있어요. 생명의 정보 저장 도구가 DNA라면, 문화의 정보 저장 도구는 인간이지요.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환경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자유에너지를 얻어 생명을 유지합니다. 문화도 마찬가지예요. 문화는 사람들의 상호교류를 통한 정신적 공감, 곧 자유에너지를 얻어 확산됩니다.”
온우리, 온문화로 나아가는 길
최무영 교수는 가족, 사회, 민족, 국가를 넘어 ‘온우리’가 되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언어’라고 짚었다. 언어는 문화현상의 기록과 전승뿐 아니라, 문화의 변화와 창조를 선도하는 역동적 기능을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오랫동안 학문의 현장에서 지내 온 최 교수는 특히 학계나 소위 전문가 집단에서 쓰는 언어문화의 문제점을 주목했다.
“대학이나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쓰는 말을 보면 외래어가 많고, 한글이 아니라 아예 로마자로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영어를 잘 모르는 이들의 언어 소통을 빼앗는 일이지요. 이는 세계화가 아니라 미국화입니다. 미국 문화 제국주의에 한글문화가 잠식하는 현상은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젊은이와 어린이들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말이 다양성을 잃고 획일화되는 현상은 우리뿐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최무영 교수는 물리학 분야에서도 갈말(학술용어)을 다듬는 작업이 1991년부터 이어졌다고 전했다. 학계에서 될 수 있으면 토박이말을 쓰고 한글용어를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블랙홀’은 ‘검정구멍’, ‘암흑성운’은 ‘어둠별구름’, ‘공명’은 ‘껴울림’, ‘광자’는 ‘빛알’ 등으로 바꾸어 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실제 학계 현장에서는 여전히 외래어 사용에 지나치게 쏠려 있는 현실이다.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 외부와 교류를 풍부하게 하면서 온문화로서 함께 성장하자는 게 제 뜻입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에는 그 자체로 ‘사이(間)’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사람과 사람 사이, 더불어 사는 삶을 뜻하지요. 온의식을 지닌 인간으로서 온문화로 함께 나아가는 모색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가 물질문명, 과학과 기술이 양산해 낸 부정적인 결과들을 넘어서는 길이 되리라 생각해요.”
살림과학의 관점에서 온생명, 온문화를 풀어 낸 강의 현장에는, 저마다 살림터에서 이웃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살림꾼과 살림길벗 100여 명이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