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 북구청역에서 만나
시골제비님. 주이니님 차로
한티재까지 이동하였다.
주차장에 우리 차만 있었다.
한티재 오전 10시 30분 출발.
수태지 오후 6시 도착.
한티재 - 삼갈래봉 - 파계봉 - 마당재 -
상여바위봉 - 가마바위봉 - 톱날능선 -
110번 삼성암지 갈림길 - 이말재 -
수태지.
9km. 2만 보. 7시간 반.
아침부터 짙은 운무로
팔공산 서부 능선에
우리 대구방 7명만 보였다.
일기 불순하면
대구 사람들은
궂은 날씨 탓에 관절 통증이 도지는가.
붐비던 팔공산 주능에
사람의 종적은 있으나
오가는 등산객의 모습은 끊김.
극단적 보신주의와 연관 있나.
내 연배 지기들 보면 그렇다.
불상사 발생하면 땅에 찰싹
달라붙어 눈알만 굴리는 복지안동[伏地眼動]은
대구 사람이 제일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오후 4시부터 시간당
1mm 수준의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띄엄띄엄
떨어지는 정도다.
이런 비는 비옷 없이 2시간 동안
그대로 맞아도 기분이 좋다.
여리히님. 시골제비님. 은풀잎님.
푸른강님. 주이니님. 산사랑님이 같이하였다.
이분들이야말로 진정한 프로.
날씨 가리지 않고 악천후에도
자기가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 나서는
용기를 가지신 분들이다.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마당재 전까지는
유순하지만
톱날능선길 전 구간,
그리고 이말재 도착까지
쉬운 길,
편한 길은 절대 아니다.
내려갈 땐 쪼그려 앉아
스틱을 땅에 박아야 하고,
올라갈 땐 밧줄을 잡고
공중에 매달려야 할 경우가 여러 번 있다.
다리를 최대한 쩍벌리고
용을 있는 힘껏 짜내야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앞서신 분은
뒤따라 오는 분의 스틱도 잡아주시고
손을 뻗어 당겨주셨다.
이것 이외에도 장애는 많았다.
어둑어둑한 산길.
시야를 방해하는 곰탕 운무.
빗물 가득한 낙엽 덮인 길.
물기로 반들반들한 바위.
그러나 유머 넘치는 시골제비님의
재담으로 산행 내내 웃음이 일었다.
멧돼지 안위 걱정에 불어 제치는
호루라기 소리에 오히려 우리가 신명 났다.
자신의 에너지 원천이라며
보온병에 가득 담아 온
아이스커피를 거리낌 없이
건네주신다.
누님 팬덤이 공연히 형성되는 건 아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알바도 2번 있었다.
톱날능선에서 한번.
이말재 지나서 한번.
코스 이탈을 7명이 동시에
바로 알아채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짙은 운무 때문에 10m 앞도 안 보였고
무엇보다
동서남북 방향 분간도 어려웠다.
온 천지가 뿌연 상태에서
동물적 감각이 집단 지성의 형태로 나온 것이다.
모든 것이 생존에 불리한
극한 상황에서
무사하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에서 나온
예민한 <<촉>>으로 보인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아무 탈없이 하산하게 되어
정말 기쁘다.
이것은 7명이 합심한 결과이다.
같이 걷는 동료들과 협응하여
원하는 성과를 만들어 내었다.
같이 걸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후기글 적는 이 순간에도
밀려오는 고마움에 가슴이 뛴다.
감동으로 마음이 떨린다.
흥분되고 저릿하다.
이것이야말로
산행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이고 행복인가 보다.
동행한 산친구와 길벗에 대한
무한하면서도 유쾌한 신뢰.
서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 어땠을까.
이제 각자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같이 있는 듯한
비현실적 몽환.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억들.
누가 이렇게 비 오는 날에
함께 걸어주겠나.
그저 고맙다는 말만 나온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산행 공지가 대구방에 뜨기만 해도
벌써 이들의 가슴은 설렌다.
예약도 필요 없고
그냥 가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반겨주는 산.
그런 산 얘기만 나오면
그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고
가슴은 콩닥콩닥 뛴다.
같이하면 더 행복하다.
그래서 인도행은 이들에게 축복이다.
① 한티재 - 삼갈래봉
오르내림이 빈번하지만
길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 정도 짙은 안개면
이것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것 같은 절박함이고
"한 서린 여자 귀신의 입김" 같은 처절함이다.
삼갈래봉. 파계사 성전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② 삼갈래봉 - 파계재 - 파계봉 - 마당재
삼 형제 바위. 왼쪽이 막내. 오른쪽이 맏이
은풀잎님은 이날 3번이나 미끄러졌다.
원당봉산 표석.
파계사가 대구 양반들의
무뢰한 같은 행패 때문에
애를 무진장 먹었다.
놈들은 후손 없으면
아이 점지해 달라고
절에 와서 생떼를 쓰면서도
중 앞에만 서면
발길질이고
업신여기며 거들먹거렸다.
전쟁이 나거나
부역 일거리가 생기면
자기 집 종 부리듯이
중을 강제 동원했다.
원당봉산(願堂封山)은
'원당'과 '봉산'이란 두 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원당(願堂)은
왕실의 안녕(安寧)이나 명복(冥福)을 빌던 장소를 뜻하며,
봉산(封山)은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금지한 산을 의미한다.
이 원당봉산 표석은
숙종 후궁 숙빈 최씨가
영조를 회임하였을 때
순산 기도를 올려준 대가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절을 원당이라 불렀다.
왕의 출생을 도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 표석이
양반의 횡포로부터
파계사 사찰 재산의 약탈을
어느 정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왕실과 사찰.
그리고 양반층의 역학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예가 바로
파계사 경내에 있는 '하마비'다.
앞면에 ‘대소인 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라고 적혀 있다.
이 비석이 왕실의 원당에 감히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양반이나 유생들이 파계사에서
난리를 피우지 못하도록 힘을 실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양반과 유생의 횡포로부터 절을 지키고자
이 절 주지 현응대사가
숙종 임금에게 설치해 달라고
요청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정도의 뒷배가 있는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엄포였다.
'사찰은 종이를 비롯하여 온갖 잡물을 지방 군현에 납부하여야 했고,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사적인 침탈을 당하기도 하였다.
각 사찰은 원당으로 지정받아 왕실이나 중앙 세력과 연결하여
과중한 경제적 부담과 침탈을 막고자 하였다.
궁방의 원당을 혁파하라는 조치는 간혹 내려졌지만
왕실의 원당은 없어지지 않았고
사찰에서 자의적으로 원당을 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
17세기 승군은 축성뿐 아니라 궁궐·산릉·제언 조성에도 동원되었다.
17세기 중반부터 100년간 20여 회가 넘게 삼남의 승려가
산릉 조성에 동원되었고, 궁궐 조영에도 광해군에서
현종대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참여하였다.
이 시기 국가의 요역 체제는 노동력의 직접 징발 대신
필요한 재정을 부담하게 하는 금납화(金納化)로
방향이 전환되었지만,
승려는 오히려 국역 체제에 더욱 편입된 것이었다.'
<<김용태. 한국불교사에서 인용>>
"승려들은 산성이나 왕릉, 궁궐을 짓는 공사에 무시로 동원되었지만
삯을 주지 않아 빌어먹거나 굶주렸다.
왕족들이 사냥을 즐길 때면 각도의 승려를 불러 몰이꾼으로 삼았다.
궁궐 후원의 해자 파기, 세도가의 묘지기, 시체의 수습과 매장,
관청과 세도가의 땔감 장만하기, 약초와 양념 마련,
상여 메기와 무덤파기 등의 부역에 동원됐다.
또한 절승지 유람에 유생 모시기는 가혹했다.
가파른 산길에 가마를 메고 가다 보면
돌부리에 걸린 발에서 피가 터졌고,
그 위에서 양반들이 스님의 머리에 마구 털어댄 담뱃불로
머리가 그슬리기도 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가마를 놓치면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았다.
그렇게 사찰에 당도한 양반들은
기생을 불러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등 수행의 도장인 사찰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승려들은 양반이 떴다고 하면
절간을 비우고 줄행랑을 쳤다."
출처 : 조선팔천. 이상각 著
양반 유생들이 중을 멸시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중이 목탁만 두드리며 무위도식한다는 점이다.
제 놈들도 서민 백성들의 피 빨아먹고사는 처지인데
중들에게 이런 이유를 갖다 대니 어처구니가 없다.
똥 묻는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둘째는 중들이 절로 출가하여 장가를 들지 않아
인구가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 머릿수대로 세금을 받아내야 하는데
중이 늘어나면 세금이 걷히지 않는다는 이유다.
참으로 웃긴다.
5백만 명 안 되는 사람도
배불리 못 먹여 살리는 곡물 생산량에
조선 팔도가
매년 격심한 식량난을 겪는데도
수탈 대상 숫자만 헤아리고 있었다니
참으로 한심하다.
파계재. 파계사에서 군위 부계면 남산리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내가 이제까지 본 버섯에서 제일 큰 것.
이름은 모른다.
해발 990m 파계봉.
이곳에서
동쪽으로 200보 더 간 자리가
정상석 자리보다
조금 더 높다.
"흐린 날엔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끌어당겨 주기로 하자."
마당재 헬기장
마당재. 127번. 부인사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③마당재 - 상여바위봉 - 가마바위봉 - 톱날능선 - 삼성암지 갈림길
상여바위봉부터 걸음이 느려졌다.
이때부터 길이 험했다.
평탄한 길은 마당재에서 끝났다.
이 구간 1.3km 걷는데
2시간 반이 걸렸다.
시골제비님은 높은 곳을 싫어하신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제대로 서있기 어려웠다.
가마바위봉(1050).
서봉보다 100m 낮지만
서부 주능에선 서봉 다음으로 높다.
톱날 능선 시작점.
올해 3월 마당재 부근 부인사 능선에서 찍은 사진.
촬영 대상 풍경의 숫자면에서
6월 산행과는 일단 비교가 안된다.
자욱한 안개가 걷힌 말간 하늘의
톱날 능선을 구경하려면
https://m.cafe.daum.net/dobojourney/1KpX/23458?svc=cafeapp
조금 더 좋은 사진을 원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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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물로 미끄러웠다.
비옷 속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비옷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마치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숨을 제대로 쉬면 옷 단추가 터질 듯하다.
마가목. 가을에 열매가 붉은색으로 변한다.
겨울 흰 눈이 내려도 붉은 열매가 유지된다.
열매는 당뇨와 고혈압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가목은 이른 봄 싹이 틀 때의 모습이
말의 이빨과 닮았다 하여
마아목(馬牙木)이라 불렸다.
토르(tor) 지형.
팔공산 주능선의 바위는 화강암의 풍화 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다.
오르고 내리는 동작에 힘이 많이 필요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몸의 균형을 잃고
천길 절벽 아래로 떨어질까 무서웠다.
이곳은 톱날 능선 끝자락이라서
평탄한 땅이 제법 나왔다.
산꾼들은 이곳을 '미정덤'으로 불렀다.
급경사 데크 계단
④ 삼성암지 갈림길 - 이말재 - 수태지
서봉 1km 앞두고 110번 위치목에서 우틀하여
삼성암지 마애여래상으로 내려갔다.
한티재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6km.
5시간 반이 걸렸다.
삼성암 옛터(96-1번 위치목)는
서봉(96번 위치목) 서쪽
100m 못 간 해발 1,080m에
위치해 있다.
북쪽 서쪽 동쪽은 막혀있고 남쪽만 터여있다.
마치 도끼날로 찍어낸 듯한 지형이다.
절은 언제 폐사되었는지 모른다.
등산객을 위해 새로 지어진 정자만 있다.
일설에는 원효스님의 제자 여덟 분 중
세분의 스님이 이곳 암자에서 수행득도하여
삼성암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나머지 5명은 오도암에서 득도하였다고 한다.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상.
조각된 바위가 약간 기울어져있다.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한다.
올해 1월에 찍은 사진이다.
너무 어둑해서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불은
따로 보러 가지 못했다.
불상은 주능 110번에서 급경사길 500m 내려와
850m 등고선 타고 왼쪽으로
조금 들어간 자리에 있다.
삼성암지와 400m 떨어져 있다.
팔공산 주능선
비로봉 왼쪽과 오른쪽에
동봉 서봉 거느리고 있듯이
대칭하여 1개씩 마애약사여래상을 세웠다.
부인사 밑 신무동 용수천에도
염불봉 바로 아래 염불암에도
동화사 봉황문 옆에도 마애여래상이 있다.
600 고지에 이를 때까지
급경사길이 계속된다.
수직으로 400m 내려가야 한다.
600m대 산길은 부드럽기가
마치 새색시 같다.
"세상에 이런 길도 있나?" 할 정도다.
이말재 벼락 맞은 나무.
나무 상부가 썩어감에 따라
키가 매년 조금씩 줄어든다.
이말재 통과하고
50m 정도 내려왔을 때
샛길이 보이길래
번듯한 길 놔두고
급한 마음에 덥석 선택.
결국 알바로 이어졌는데.
한번 지나가는 길을
3번이나 왕복했다.
왔다리갔다리.
그나마 긴 거리 아니고
험한 길이 아니라서 천만다행.
표현은 못했지만
이미 지나갔던 길 오르고 내리길
반복하고 있었으니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쥐구멍이라도 보였으면
숨었을 정도.
팔공산 순환도로 출구.
작년 10월에 복미쌤 깃발해서
이 길로 서봉 올라가다가
길을 잃고 고생했다.
서병장님. 두리봉님. 예쁜맘님이 같이 했다.
수태교
수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