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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우리를 뒤따르는 공포의 터미네이터>의 줄거리:
일곱인 재앙과 일곱나팔 재앙이 끝나고 이제 일곱대접의 재앙이 시작 되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정말 무서워 해야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 어떤 재앙보다 무서운 것이 나를 뒤 따르고 있다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영화속 터미네이터 같아서 끝까지 나를 뒤 따라와서는 반드시 나를 비참하게 죽게 할 것임을 밝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공포의 터미네이터는 무엇이고 그것을 피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를 뒤따르는 공포의 터미네이터
(계14:13~20)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우리를 뒤따르는 공포의 터미네이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우리를 뒤따라서 끝까지 죽이려고 하는 공포의 터미네이터’
이것이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이 터미네이터를 피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아주 끔찍한 범죄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 당시 미혼이었던 25세의 한 여성이 재판정에서 증언을 하게 됩니다.
이 여자가 증언하는 피고가 누구냐 하면 그 당시의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사건인데, 동거녀를 홧김에 죽이고 죽은 시체를 방에 놔두고 나와서 길을 가다가, 집 앞에서 길을 가던 한 여대생과 스치게 됩니다. 여대생이 미안하다고 하고 떠나는데 쫓아가서 그 여대생을 죽입니다. 그렇게 죽인 두 여자의 시체를 비료부대에 담아서 버렸어요. 이것이 이제 발각이 되어서 재판에 서게 되는데, 경찰에서는 이 사람이 범인임이 분명한데 증거가 없었던 차에 이 25세의 미혼 여성이 여대생을 죽이는 현장을 목격한 거예요. 그래서 증언하게 되고 살인자는 감옥에 들어가서 20년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 증언을 한 여자 분은 결혼해서 현모양처로 딸 하나를 낳아 키우면서 행복하게 열심히 정말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20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나온 이 희대의 살인마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흥신소에 의뢰해서 이 여자의 이름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찾아와요. 이 여자는 바야흐로 딸이 커서 결혼을 하려고 함이 들어오고 하는 상황인데.
결국 이 여자를 몇 달간 괴롭히고 돈을 뜯어내고 온갖 모욕과 구타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서 여자는 말도 못하고 남편도 자기 아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심지어는 원룸까지도 이 여자에게 구하게 해서 살고 있으면서, 내일이면 이제 딸이 시집을 가는데, 그 전날 여자를 불러내서 돈 500만원을 갖고 오게 해서 돈을 뜯고, 장난삼아 딸의 청첩장을 어디서 구했는지 청첩장을 흔들어대면서 결혼식 날 딸을 죽일 거라고 하니까, 더 이상 못 참고 이 여자가 범인에게 대들었다가 결국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딸은 결혼도 못하고 결혼 당일 날 시신을 트렁크에 담아서 산 속에 버려놓은 것을 10일 만에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끈질긴 악연이죠. 끝까지 따라와서 결국은 이 여자 분을 죽이고 만 것이에요.
이 사건을 비유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이런 무시무시한, 치를 떨 수밖에 없는 터미네이터가 있습니다. 내 터미네이터가 있다는 거예요. 끝까지 나를 따라와서 결국은 나를 죽이고야 말 터미네이터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고 심지어는 내가 죽어서도 나를 따라와서 결국 나를 죽일 터미네이터가 있어요.
그게 뭐냐?
오늘 1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고 나옵니다.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행한 일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3대 7중 재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온갖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다 이야기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외부적으로 어떠한 재앙이 일어나도 사실 그것은 이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를 따라오는 공포의 터미네이터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끝까지 나를 따라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행한 일입니다.
도둑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살인범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살인범이 죽이는 것은 육체만 죽여요. 그런데 내가 과거에 행한 나의 행위는 끝까지 나를 따라와서 내 몸이 죽은 다음에도 나를 따라와서 나를 죽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적이 아니고 이북의 김정은이 아니에요. 일본의 망발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아닙니다. 내가 행한 행동입니다.
그러면 내가 행한 행동이 끝까지 나를 따라와서 나를 죽이는 터미네이터라는 이 말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냐?
나의 행동이 어떻기에 그러냐는 겁니다.
14절에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분이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라고 나옵니다.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분’
주님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추수를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 보면 인자이신 주님이 아니라, 하늘 성전에서 천사가 하나 나와서 똑같이 날카로운 낫을 들어서 역시 추수를 하는데 포도를 추수합니다. 그 옛날에 중동 땅에서 포도를 추수하면 포도자체를 먹기 보다는 포도주를 담갔나 봐요. 그 포도주를 담글 때에 포도주 틀에 집어넣고 발로 밟습니다. 그러면 그 포도가 짓이겨지고 으깨지면서 포도에서 액이 나오고 그것이 포도주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포도주 만드는 과정을 그대로 심판의 과정으로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곳곳에서도 이렇게 포도주 틀에 포도를 넣고 짓이기고 으깰 때 포도가 터지고 즙이 흐르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피가 흐르는데 그 피가 말굴레에까지 이르렀다고 나옵니다. 피가 얼마나 흘렀는지 천육백 스다디온에 흘렀고 피가 흐른 깊이가 말 높이까지 차올랐다는 것입니다.
20절에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라고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14장의 본문과 앞에서 봤던 1~12절까지도 포도주 이야기가 자꾸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따라오는 어떤 재앙보다도 무서운 우리의 행동이 터미네이터인데, 이 행동의 내용이 뭔지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이 포도주가 제공해 준다는 거예요.
포도주가 뭐라고 했죠?
8절에서도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라고 나옵니다.
왜 큰 성 바벨론이 심판을 받게 됩니까?
모든 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음행을 하게 합니다. 음행을 하게 함으로써 진노의 포도주가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10절에서도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설명했어요. 포도주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진노의 포도주가 되는 이유는 뭡니까?
기쁨이라는 말을 제가 굉장히 많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 만큼 기쁨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는데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는 것도 기쁨의 소리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뭡니까? 창조 맨 마지막에 지으신 인간과 더불어 안식을 함께 나누면서 기쁨을 누리기 위한 것이었고, 그 기쁨을 누리는 장소로써 기쁨이라는 뜻의 에덴동산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뒤에 인간들이 잃어버린 것이 기쁨의 동산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 기쁨이란 것이 어떤 도움이 되느냐?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 마음을 점검해 볼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기쁘냐? 기쁘지 않으냐?”
‘내가 지금 기쁨이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에 쌓여있고, 기쁨이 사라지고 시기와 질투에 매여 있고, 기쁨이 사라지고 누구를 미워하고 있다.’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평강은 다 같은 의미의 단어들 아닙니까?
이러한 감정이 내게 없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나가서 열심히 뛸 거잖아요. 왜 뜁니까?
백이면 백 예외 없이 기쁨을 위해서 뜁니다. 기쁨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뛰고 있는 거예요. 장사하시는 분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장사를 합니까? 돈을 벌어 기쁨을 얻기 위해서.
자식을 키우는 엄마는 왜 그렇게 애써서 키우고 있습니까? 기쁨을 얻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너 잘 되라고 하는 것이지, 나 잘 되자고 하는 것이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식이 잘 될 때에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봐도 기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추구하지는 않더라도 기쁨을 추구하고 있는 거예요.
보세요.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인간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가 본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은 따라갑니다.
뭘 따라 갑니까?
내게 만족과 기쁨을 줄 것이라고 믿는 대상을 잡으려고 쫒아갑니다. 따라가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뭐가 만들어집니까?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거예요.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나는 말하고 행동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행동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게 기쁨을 줄 것이라고 내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그것을 쫒아가면서 하는 말과 행동들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다 내 뒤를 쫓아오고 있는 겁니다.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행동들이 왜 터미네이터가 되어서 죽음 이후에까지 나를 쫓아와서 나를 죽이느냐?
말씀 드렸듯이 어제 본 8절에서 ‘큰 성 바벨론이 음행하게 하므로 진노의 포도주를 받게 한다.’
이 말은 내가 내 마음의 빈 공간을 하나님이외의 것으로 마음의 심연이 가득 채워지고 만족함이 느껴지고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만 가지면 기쁠 거야, 이것만 있으면 만족할 거야, 이것만 이루면 내가 기쁠 수 있어’라고 믿어지는 이 모든 것들이 우상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들이 다 음행이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 여자 친구가 나하고 있을 때보다 내 친구와 함께 있을 때에 훨씬 더 잘 웃고, 훨씬 즐거워하고, 훨씬 행복해 한다면 이것은 벌써 심리학적 차원에서 간음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이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서, 그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을 획득하기 위해 추구하는 모든 행동과 모든 말이 다 음행입니다.
그리고 그 음행의 행동들이 나를 따라와서, 마치 20년 전에 증언했던 희대의 살인마가 20년 뒤에도 그 여자를 쫓아와서 기어코 딸의 결혼식 전날에 여자를 죽여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죽이는 것이 내가 한 행동이고, 그 행동의 내용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로 내 마음이 기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음행인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을 보세요.
왜 여러분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까?
자식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돈이 안 벌리기 때문에, 건강이 안 좋기 때문에, 옆집에 있는 외제차가 없기 때문에, 옆집 아줌마가 들고 다니는 명품 백이 없기 때문에… 지금 다 음행하고 있는 것이고, 예외 없이 이 음행이 우리를 끝까지 따라와서 죽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단 하나의 예외를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어떤 예외의 말씀입니까?
13절에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마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주 안에서 죽을 때에 오히려 내가 행한 행동은 터미네이터가 아니라 그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우리의 후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14장 4절의 말씀을 이야기해야 돼요.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순결한 자라’
이 이야기는 독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음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구절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어린 양을 따라가며 산 사람들이 죽을 때에 주 안에서 죽는 겁니다. 어린양을 따라가지 않은 사람들이 죽으면 주님 밖에서 죽는 겁니다. 주님 밖에서 죽는 자들에게는 그가 한 행동이 그를 죽은 다음에도 죽이는 터미네이터가 될 것이고, 주 안에서 어린양을 따라서 살다가 죽으면 주 안에서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어린양을 따라가면서 하던 행동들이 그의 후견인이 되어서, 그에게 하나님께서 복의 상급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행동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말하면 어린양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을 따라 갈 때에는 반드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 행동들은 그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후견인이 된다는 겁니다. 스폰서가 된다는 거예요.
‘어린양을 따라 어디든지 간다.’
이 말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매 순간 우리는 어린양을 따라 가야 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마음에 덜컥 겁이 생겨요.
‘이렇게 돈이 없다가는 우리 식구 굶어죽겠다.’라는 순간에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를 생각하면 이제 돈을 따라가는 겁니다.
‘내 마음의 걱정을 없앨 수 있는 길은 손에 돈을 쥐는 것이다. 돈이 나의 걱정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돈은 그런 능력과 힘이 있다. 그러므로 내게 걱정을 없애 줄 돈과 능력을 잡아야한다’라고 하면 어린양을 좇아가지 않고 주 바깥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양을 좇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돈 때문에 걱정이 생겼는데, 어린양을 쳐다보니까 십자가를 향해 가십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듯이 저항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십니다. 그 십자가를 쫒아가서 죽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은 돈 때문에 걱정하는 그 상황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돈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 자식이 문제인 상황에 대해서, 건강이 안 좋은 상황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는 겁니다. 죽었더니 어린양이 부활해요. 같이 부활합니다. 부활했더니 어린양이 승천해요. 내 마음이 같이 승천합니다.
승천해서 보니 돈 없는 상황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서 안식을 누리고 평강을 누립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이 땅에서 해야 될 행동과 말과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셔서 성령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그런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님을 통해서 한 행동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복을 받도록, 나를 뒤따라오는 모든 행동들이 나의 후견인이 돼 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회개해야 해요.
뭘 회개해야 하느냐?
한창 대한민국 전체를 휩쓸었던 모토가 있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우리는 목적을 따라가면 안 돼요. 어린 양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목적을 이루고 싶을 때마다 어린양을 따라가서 목적에 대해서 죽어야 돼요. 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갖고 계시면 됩니다. 그러면 된 거예요. 내 마음은 하나님께 가면 됩니다. 내 마음이 그 목적을 추구하면 안 돼요.
그리고 회개하세요.
“긍정의 힘”
긍정의 힘을 따라서 살아왔던 것을 다 회개하세요. 그 긍정의 힘을 따라서 살았던 그 행동과 말이 여러분을 쫓아가서 죽음 다음에도 쫒아가서 여러분을 죽일 겁니다. 회개해야 돼요.
자기 계발서를 따라간 사람들 다 회개하세요. 어린양을 따라가야 합니다. 목사님을 따라간 사람들 다 회개하세요. 나를 따라오라고 말한 목사님도 회개하세요.
목사의 정의는 교인 각자가 자기의 삶에서 어린양을 따라가도록 돕는 자이지, 나를 따르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모습에서 모범이 될 수는 있지만 목사님을 따라서는 안돼요. 권사님을 따라서도 안 되고, 장로님을 따라가서도 안돼요. 앞서 믿어서 장로님 되고 권사님 되고 집사님이 됐으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어린양을 따라가도록 돕는 일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거 우리가 회개할 일이에요. 유행 따라 사는 것 아닙니다. 남들이 한다고 하는 것 아니에요. 남들이 다 하는데 나만 없어서 두려움이 생기고 창피하고 루저 같은 느낌이 들 때에 어린양을 따라서 그 느낌에 대해서, 그 상황과 그 깨달음과 판단에 대해서 죽어버립니다. 어린양을 따라가야 되는 거예요.
16절에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 지니라”라고 나옵니다.
‘인자와 같은 이,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으로 추수를 한다.’
곡식이 익었기 때문이에요. 주 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곡식이 온전히 익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가 매사에 어린양을 따라서 십자가를 통과하는 겁니다. 매 순간 날마다 죽는 거예요. 내 마음을 살펴보면서 내가 지금 기쁘냐? 안 기쁘냐? 기쁘면 왜 기쁘고, 안 기쁘면 왜 안 기쁘냐를 보면서 그 이유를 찾아내서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에 안 기쁘다. 하나님이 아닌데도 다른 것 때문에 기쁘다. 또 내가 기쁘지 않은 이유를 보니까 하나님이 계신데도 다른 것이 없다고 기쁘지 않다’
이런 것을 잘 살펴서 어린양을 따라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어린양을 따르는 것이 곡식이 온전히 익은 상태라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고.
또 하나의 메시지가 뭐냐?
우리 인생의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4월이 되면 모내기를 합니다. 조그마한 모를 논에 심는 모내기를 하는데 지금 가보면 온 들판이 황금빛이에요. 추수를 시작하는 곳도 있어요. 한 6개월 동안의 벼의 존재 이유는 추수 때를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내려와서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내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내기를 했기 때문에 논에 심겨진 작은 벼의 존재의 의미는 추수를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6개월 동안 자라는 모든 과정 중에서, 8월쯤에 벼의 인생의 성공을 구가하고 이러는 것이 없어요. 그 6개월 전체의 과정이 마지막 추수 때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나게 된 이유가 뭐냐?
이 세상에서 삐까번쩍한 자리에 올라서는 것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하라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태어난 겁니까?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육체를 통해 만나게 되는 많은 대상들, 내게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질 만한 많은 가치들, 사랑할만한 매력을 갖고 있는 많은 대상들이 있는 가운데, 그것들을 다 제쳐버리고 오직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만을 기쁨의 원천으로 생각하며 사는, 익은 곡식의 상태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겁니다.
그렇게 익은 곡식의 상태가 됐는데도 안 데려가시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익은 곡식이 되도록 이끌라고 안 데려가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대통령 되고 부자 되고 자손 많이 낳고 이런 것은 다 마귀가 만들어낸, 즉 음행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유혹과 미혹이고, 진정으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추수되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과정 자체는 클라이맥스가 없어요. 절정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절정은 추수되면서, 죽음과 함께 추수될 자로 완성되면서 우리 인생의 절정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추수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러면 추수될 수 있는 자가 어떤 자입니까?
내 행동이 나를 따라와서 나를 죽이지 않는 자, 내 행동이 나를 따라와서 하나님 앞에서 복 받게 후견인이 될 수 있는 자.
어떻게 그런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까?
어린양을 따라가서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하여 마음이 죽음으로써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가운데 말하고 행동한 사람의 그 행동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복 받도록 후견인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왜 지금 살아계십니까?
추수 때를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추수 때를 위해서 죽음과 함께 온전히 익은 곡식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만을 기쁨으로 생각해서 날마다 어린양을 따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서, 주님이 공생애를 위해 내려오셨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똑같은 과정을 가도록 다른 사람을 돕는 그 사명을 위해서 살려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추수 때가 되어서 포도주로 짓이겨지는데 천육백 스다디온, 즉 320km까지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입니다.
포도주 틀에서 쥐어짜진다는 것이 뭘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고 그것을 추구했던 모든 시간들이 다 죽음의 피를 채웠던 순간들이고, 그 죽음의 피를 채우고 살았던 인생의 시간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 열려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 불행의 길을 가겠어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 안에서 죽으면 됩니다.
어떻게 주 안에서 죽습니까?
어디든지 어린양을 따라가면 됩니다.
어디로 갑니까?
어린양은 십자가로 가십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뒤에 나타나는 이 땅에서의 나의 행한 행동이 나를 따라와, 나에게 하나님의 복을 추천하는 후견인들이 될 수 있는 삶을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끝까지 나를 따라오게 되는 나의 행동이 나를 죽이는 터미네이터가 될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복을 천거하는 후견인이 될 것인지, 어린양을 따르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음을 알고, 오늘 하루 종일 내 마음의 기쁨의 상태를 잘 살펴서 어린양만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내가 살면 무시무시한 터미네이터가 죽음 위에 죽음을
어린 양을 따라 십자가 생활화로 그리스도가 사시면 복에 복을
땅을 살 것이냐? 하늘을 살 것이냐? 누구의 말을 듣고 행동을 할 것이냐?
주여! 도와 주셔서 그리스도의 알곡으로 추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입니다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생명수를 날마다 마시며 살수있는 그 십자가 생명수를 다른이들도 마실수 있도록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감사합니다. 항상 생명이 되고 쉼이 되는 말씀으로 기뻐요.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구절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