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신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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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보았을 때 아릿한 슬픔을 주었던 이 가난한 풍경이, 지금은 평화를 상징하는, 움직이는 엠블럼처럼 보인다. 지옥을 헤매다온 며칠 사이에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눈은 정직하고 마음은 간교한 것일까. p11, <무화과나무 아래> 중.
* 건물 안은 종합병원 대기실 분위기와 비슷하다. 북적거리는 인파, 살다보면 받아들이지 못할 운명은 없다는 듯 의외로 담담한 표정들, 환자와 보호자란 언제 바뀔지 모르는 삶의 자리라는 순응의 태도와 원색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그렇고(…). p70.
*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말하는 나까지도 위로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진화된 거짓말을 하고 싶다. 내가 만든 픽션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 p110.
* 엄마, 사는 게 왜 이리 지루해? 조잡한 픽션이 없이는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으니. 나 누구에게도, 한 번도 붉은 꽃이었던 적 없으니. 여태 살았는데 아직도 서른이라니. p111. <무언가> 중.
* 누군가에게 받는 사랑 때문에 오만한 것들에게선 빛이 나. 그건 태양빛을 이기는 유일한 광채야. p147.
* 슬플 땐 강물을 내려다보는 게 아닌데. 흐르는 강물은 슬픔은 증폭시키고 기쁨은 덧없이 실어가 버린다. (…)
같이 부대끼던 생명의 존재감이 또렷해지는 건 그것이 부재할 때이다. p148. <달걀 삼키는 남자> 중.
* 모든 거짓말은 아름답다. 자신을, 혹은 상대를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나 거짓말을 하니까. 다만 끝까지 지켜지지 못한 거짓말만이 더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자신을, 상대방을 깊이 찌른다. p190, <모래폭풍> 중.
* 너에게 필요한 모든 걸 다 해주었으니 상처를 줄 자격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도, 나도. 사람들은 가족이 아닌 남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을 말들을, 절대로 주지 않을 상처들을 당연한 듯 가족에겐 던진다. p198.
* 사랑에 빠진 자는 전장에 나가지 않는 법. p203.
* 살아간다는 건 전공이든 부전공이든 이론의 공허하고 부질없음을 날마다 절감하는 과정이다. p211, <소년은 울지 않는다> 중.
* 비디오방을 같이 가자는 건 어떤 메타포를 가지는 걸까. 은유가 과잉된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확실히 피곤하다. p256, <검은 숲에서> 중.
* ……여름의 끝이 이토록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네. 헤어지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없었네…… p294.
* 재이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생각났다. 젊은 날의 말론 브란도가 나왔던 영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영화의 장면이 어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날까. 난 몰라요, 그 남자를 몰라요. 고개를 젓던 여자의 깜찍한 표정. 삶과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표절하는 것 같다. p314,<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중.
- 정미경《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생각의 나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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