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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선악과
2007-09-04 12:28:07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
-c.프레드.엘퍼드 지음/남경태 옮김 /도서출판 그린비-
제 1 장
*1. 한국인들은 악(惡)을 믿지 않는다. 악(惡)은 사람과 생각 사이에 이원론과 대립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난다. 한국인들은 악(惡)대신 사람들 사이에 관계(關係)를 만들어낸다. 이 관계(關係)는 워낙 긴밀하게 짜여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악(惡)과 같은 개념들이 존립할 수 있는 이중성이 생겨날 수 없다.
악(惡)이 생겨나려면 일종의 분리와 구분이 필요한데 한국인들은 그것을 너무나 두렵게 여기므로 악(惡)이 존재할 수 있도록 나둘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악(惡)을 믿지 않게 된다. ( p. 24 )
*2. 한국은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종교적으로 다양화되어 있으면서도 민족적으로는 동질인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적 다양성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민족이 각기 저마다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단히 동질적인 인구 내에 여러 종교가 퍼져있다. 인류학자들이 100%+100%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연구하기에 최적의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서로 자신의 요소를 양보하면서 섞이는 문화와는 달리 자신의 요소를 순수하게 유지하면서 외래의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
한국 문화(100%+100%문화)에서는 새로운 믿음이 채택되어도 낡은 믿음을 대체하지 않는다. (무궤 주(註) - 습의(褶衣), 자연은 원칙은 불변 항상 새로운 모습)
한국은 지금까지 역사상 다른 민족들이 거의 겪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산업화된 서구에서는 200년이나 걸린 근대화를 한국은 불과 30년 만에 달성했다. 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급속히 근대화되고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옛것과 새것이 상당기간 공존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p. 27 )
*3 한국인들이 악(惡)에 관해 이야기하는 태도는 종교 및 연령과는 그다지 상관없어 보인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조차도 악(惡)을 주제로 말할 때에는 그리스도교도라기 보다는 한국인의 자세를 취해서 사실상 불교도와 다를 바 없게된다. ( p. 32 )
한국인들이 악(惡)을 믿지 않는 이유는 악(惡)에 관한 어떤 합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p. 34 )
한국인들은 악(惡)과 같이 세계를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 개념들에 관해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문화가 이원론적 개념들이 피상적이고 그릇되고 해롭기 때문에 거부하기로 결정했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렇게 이원론(세계화)을 증오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는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울타리를 쳐놓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 p. 35 )
*4. 나는 한국인의 악(惡)에 대한 불신이 기본적으로 언어적인 현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인 현상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조직된 결과이다. 언어 행동은 그 관계를 드러내고 반영한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 p. 38)
"관계를 말해주면 악(惡)이 뭔지 말해드리리다." 한국인들은 내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판에 박힌 대답이며 한국적 세계관의 핵심이지만 서구세계와 접촉했을 때에만 보이는 반응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그들과 이야기하고자 하는 조사자 외국인에게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말의 의미는 악(惡)이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관계가 모든 것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관계를 말해주면 악(惡)이 뭔지 말해주겠다."는 말이 악(惡)에 대한 정의라면 진정한 악(惡)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惡), 이를테면 무관함, 절대적 소외와 비관련성에 대한 두려움, 순수한 고독, 절대적 차이 등일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악(惡)에 대한 정의라면 정의이다.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악(惡)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문화생활을 해가면서도 결과적으로 악(惡)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다. (무궤 주(註) - 한국인들의 신(神)에 대한 정의)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처럼 말로써 자신의 두려움을 표현하지 않는다. 내 주장은 그들의 침묵으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이다. 악에 대한 부정(否定)은 세계 안에 악(惡)모양의 구멍,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를 만들어낸다. 그 내용은 절대적 타자성과 (절대적) 차이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서구에서 학문적으로 말해지는 타자(他者)의 두려움이 아니다. 한국적 두려움은 스스로에게 타자(他者)가 된다는 두려움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이 책의 결론으로 왜 한국인들이 세계화를 그토록 겁내는지를 다루었다. 세계화는 한국인들이 더 이상 자신을 식별할 수 없는 세계, 한국인들이 스스로에게 타자(他者)가 되는 세계(지옥-무궤 주(註))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서구인들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악(惡)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긴밀하게 짜여진 인간관계망 속에서 살고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재앙(?)이면서도 안식처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악(惡)이라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 자체로는 얻을 게 없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이 경험을 세계화에 대한 공포와 연관짓는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한국의 모습과 해야 할 일에 관해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악(惡)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인들의 세계화 경험을(이원론에 대한 인식-무궤 주(註))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은 세계화를 자아에 대한 심각한 위험, 즉 스스로에게 타자(他者)와 이방인(異邦人)이 되는 위험으로 경험한다. 한국인들이 세계화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상 세계화를 멀리하려는 전략이다.
한국인들이 그저 세계화를 두려워하기만 하는 거라면 그것을 악(惡)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세계화의 악(惡)은 세계화가 가져오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매력에서도 나온다.(무궤 주(註)- 선악과의 매력과 두려움, 정녕 죽으리라. 신(神)이 되리라.) 세계화는 자유와 계몽을 약속한다. 스스로에게 타자(他者)가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동시에 더 풍요롭고 복잡하게 중첩된 자아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다.(?) 새로운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신을 버려야 하니까. 한국인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세계화에 대해 냉소적인 서구인들은 세계화를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중에서 선택하는 거 정도로 여길 뿐 낡은 질서를 부수는 데서 생기는 경이감을 잃어버렸다. ( p. 39-42 )
*5 서구의 악(惡)개념이 지니는 미묘하고 두드러진 특징들을 간단히 정리한 것 (『악(惡)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c. 프레드 앨퍼드 지음 1997)
① 악(惡)은 아픔에서 쾌락을 느끼며 무자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악(惡)을 조작한다. 사디즘은 악이다.
② 대개의 경우 악(惡)은 악의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악의적인 쾌락, 파괴와 고통에서 느끼는 환희까지를 뜻한다. 일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그런 것을 악마성(惡魔性)이라 부른다. 또 이런 경향이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사람도 있다. 악(惡)을 믿기 위해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는 없다.
③ 선과 악(신(神)과 귀(鬼), 천(天)과 마(魔) - 무궤 주(註))은 대립물(對立物)이 아니라 샴쌍둥이이기도 하다. 즉 한 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있을 수 없으며 한 쪽을 알지못하면 다른 쪽도 알지못한다. (무궤 주(註)- 유불선에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선과 악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대립하며 대개의 경우 이 대립은 역사의 동력(무궤 주(註)- 전쟁)이 된다.
④ 악(惡)은 반드시 혐오감만 주는 게 아니라 매력적이기도 하다. 밀턴의 악마에서부터 괴테의 파우스트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문화적 영웅들은 대부분 악(惡)하거나 악(惡)에 빠져있다. 블레이크는 악마가 모든 것을 장악한 실낙원(무궤 주(註)- 지구)을 언급하면서 선(善)보다 악(惡)이 창조성과 더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고 말한다. 만약 악(惡)에게 매력이 없다면 그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⑤ 악(惡)은 우리가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기도 하다.(무궤 주(註)-로마서 7장 참조) 이것은 오늘날의 서구에서는 지배적인 견해가 아니지만 구약성서의 세계에서는 그랬다. 신(神)은 인간에게 나쁘고 불쾌하고 해로운 일도 행한다.(사45.7,렘4.6,암3.6,미2.3,전1.13,욥2.10)
1775년 리스본의 지진은 1세기 이상동안 악(惡)의 전형이었다. 지금은 유대인 대학살이 그 역할을 한다. 지질학적 사건을 두고 악(惡)을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유념해 보라. 이런 현상은 오늘날 서구에서도 있지만 그다지 중시할 일은 아니다.
⑥ 악(惡)은 수백 년 동안 서구를 괴롭혀왔던 신정론(神正論)-악(惡)의 존재도 신(神)의 섭리라는 주장-의 문제를 만들기도 하고 풀기도 한다. 정보제공자들 중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도 그 문제로 많이 고민했다. 지선(至善)의 전능한 신(神)이 어떻게 죄(罪)없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악(惡)이 그 문제를 낳는 것은 지선(至善)의 전능한 신(神)이 그 문제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惡)은 신(神)과 악(惡) - 무궤 주(註) 천(天)과 마(魔), 선과 악)-을 구분하는데서 비롯되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결로 가는 첫걸음이다.
⑦ 사람들은 악(惡)에 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대개 대량학살과 같은 윤리적으로 무서운 행위를 말하지 않고 공포(恐怖)스러운 경험을 말한다. 미국에서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 (이중에는 한국계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이 흔히 말하는 악(惡)의 사례는 어린 시절 어두운 지하실에 갇혔던 경험이었다. 폴 리쾨르(1969,30.347)는 「악의 상징성」에서 이런 차원의 악(惡)을 다루면서 인간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윤리적 공포를 말한다. 그 결과는 뿌리와 연대감 상실이며 더 이상 세계 속에 머물지 못한다는 느낌이다.(cf. 유배, 귀양, 이방인, 나그네, 아웃사이더)
악(惡)은 문자 그대로 무(無)이다. 즉 무(無)에 대한 공포, 모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의 절대적 소외감이다. 악(惡)의 경험은 심지어 자아(自我)조차 인간으로 여기지 못하는 절대적 타자(他者)로 전락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무(無)의 경험 때문에 악(惡)을 주제로 이야기를 지을 경우 사람들은 흔히 로봇이나 흡혈귀를 등장시키는 것이다.(무궤 주(註) 인터넷) 카프카의 「변신」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 경험이다.(무궤 주(註) 변신(變身)=가짜 중생(重生))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이유는 그의 가족이 그를 그렇게 간주했고 가족의 지위와 안락(安樂)을 위한 도구로서 그를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 철저한 소외의 경험을 왜 그냥 끔찍하다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악(惡)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서구의 악(惡)에 관해서 만이 아니라 동양에서의 악(惡)의 부재(不在)에 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p. 57-60)
*6 korean values in the age of globalization의 개요
① 한국인이 악(惡)을 믿지 않는 이유는 어떤 것을 악(惡)이라고 부르면 자신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을 악(惡)이라고 부르는 관계(關係)에 얽혀있기 때문이다.(무궤 주(註)- 관계주의=100%선(善)이자 100%악(惡)으로 화할 가능성=태극문화)
② 이런 사고방식의 기원은 한국인의 자아개념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2장과 3장에서 다룬다.
③ 한국인은 악을 믿지 않지만 서구에서 악(惡)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④ 만약 한국인이 악(惡)의 개념을 쓸 수 있다면 아마 세계화를 악(惡)이라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화는 전통적 관계(부담스럽기는 하지만)를 엄격히 도구적 관계(무궤 주(註)- 사이비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인에게 좋지 않은 결과이며 내가 세계화를 스스로에게 타자가 되는 경험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⑤ 한국인들에게는 왜 세계화가 그토록 두려운 지를 아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악(惡)의 개념이 필요 없다. 악(惡)의 개념은 경험을 이해하거나 악(惡)을 회피하는 데 중요하지 않다.
⑥ 내가 악(惡)의 개념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가 유명론자(개체만이 실재하고 보편은 그 개체에서 추상하여 얻은 명목일 뿐이며 개관적 존재 또는 개관적 타당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론-옮긴이)라서가 아니라 도(道)를 따르기 때문이다. 도(道)에서는 이름은 실재의 손님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⑦ 현실은 매우 모호하므로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해석이 필요하다.
⑧ 여기에 계몽의 개념으로 들어가는 단초가 있다. 즉 계몽을 보편자나 보편자의 잔해에서 찾지 않고 이전에는 문화적으로 모순적이라 여겼던 요소들을 결합하는 생활방식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7장에서 논의된 점술치료사가 그 예이다.
⑨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는 파괴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새로운 계몽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⑩ 우리는 계몽이 엄청난 것이라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그 새로운 가능성을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황혼녘을 날기 시작한다면 회한은 계몽의 열쇠라 할 수 있다. ( p. 61-62)
*7 악(惡)의 개념이 세계 속에서 자아(自我)가 겪는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리쾨르는 악의 전사(前史)를 쓰면서 악(惡)을 뿌리 없는 상태 즉 인간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라고 말한다.
한국인도 비슷한 경험을 말하지만 서구인과 대화할 때를 제외하고는 악(惡)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관계를 말해주면 악(惡)이 뭔지 말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관계가 우선임을 뜻한다. 2장과 3장네서는 한국인의 관계를 뜻하는 한국인의 자아개념(무궤 주(註) - 관계아(關係我)=우리)을 다루는데 그 논의를 거쳐야만 4장과 5장의 악(惡)의 개념(무궤 주(註)- 도구아(道具我)=기계)으로 들어갈 수 있다. 6장에서는 왜 한국인들이 세계화를 악(惡)으로 여기는지 악(惡)이 어떻게 계몽과 관계되는지를 다룰 것이며 7장에서는 세계화가 계몽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p 60 )
제 2 장
*1. 한국인은 집단적 자아(무궤 주(註)-관계적 자아=가족적 자아=우리 자아)를 갖고 있다. 그들은 나를 행위의 중심으로 삼지 않고 우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집단 속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고민한다.(100%개인주의+100%집단주의 문화) ( p. 63 )
비록 유교에 일반적으로 연관된 공동의 가치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류학자 빈센트 브랜트(1971)는 한국문화에 자기과시를 향한 보상적 경향이 뿌리깊게 박혀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문화는 공동주의적 관점만이 아니라 대립하는 가치들의 갈등,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공격적인 기업가 정신과 정부와 재계의 긴밀한 관계가 결합되어 이룩한 독특한 한국의 경제발전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도 바로 그러한 갈등이다. 6장에서 나는 이 갈등 때문에 한국인들은 세계화를 향한 다음 행보, 즉 서구경제에서 시장질서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진다는 점을 다룰 것이다. 시장질서는 경제개혁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적인 것의 핵심이라고 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간의
균형(무궤 주(註)-가족주의=관계주의)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 67 )
한국인들은 놀랄 만큼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심이 강한 듯 하다. 내가 있는 주립대학의 경우 한국인 학생들은 미국학생들보다 그런 성향이 훨씬 강하다. 또한 한국인들은 개인적 노력과 보상간의 연관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흔히 " 얼마를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집단적 자아의 모토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무궤 주(註)-개체주의, 전체주의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일 수 있는 유기체주의가 바로 한국철학) ( p. 68 )
*2. 한국인들은 분리된 개인이 아니므로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경쟁은 실상 개인간의 경쟁이 아니라 가족들간의 경쟁이다. 개인은 늘 자기 자신 그 이상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입시를 치르는 학생들의 뒤에는 거의 예외 없이 가족들이 따라온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 경제적인 토대(? 무궤 주(註)- 정(情)의 토대)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최근까지도 가족중 한 명이 여유 있는 중산층에 편입되면 나머지 가족들도 함께 편입될 수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 것을 '비도덕적 가족주의'라고 부른다. 부도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그런 말을 쓴 것이다. 원래 경제적 측면(레세페르-자유방임주의)에서 출발한 자유주의는 곧 도덕적 철학적 측면도 지니게 되었다. 즉 개인(個人)은 도덕적 가치의 중심이자 진리의 중심이 된 것이다. 경험주의는 바로 자유주의의 원칙이다. 비도덕적 가족주의에서는 가족이 중심이다. 서구의 경우에는 비도덕적 가족주의가 2천년간 이상이나 유지되면서 그 와중에 악(惡)의 개념이 탄생했다. (무궤 주(註)-한국적 가족주의=우주적 가족주의에서는 악(惡)의 개념 자체가 없다.) 한국의 사정은 더 복잡할 것이다. ( p. 69 )
*3. 한국의 자아가 지닌 집단주의(무궤 주(註)-유기적 가족주의)는 그들의 언어습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나'를 자주 사용하지 않으며 주로 '내 잘못'이나 '내 책임'이라는 말처럼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무궤 주(註)- 책화(責禍)) 반면 그들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한국인들은 심지어 '내 아내'를 말할 때에도 '우리 아내'라는 말을 쓴다. ( p. 70 )
한국사회에서 '우리'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왜 중요한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무궤 주(註)-유기체 자아인 우리는 천심(天心)=인심(人心)=민심(民心)이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창조한 우주이기 때문에 중요) 그 이유는 아마 '우리'의 대립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p. 75 )
한국인들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집단주의적이다. 한국의 문화, 모든 한국인의 심리의 중심에는 바로 개인주의적 자아와 집단주의적 자아간의 대립(?)이 있다. ( p. 75 )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집단적 자아를 가졌다고 규정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유교화(儒敎化)한 나라로 자처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인들은 강렬한 개성을 주장하면서 거기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 점에서 특히 일본인과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무궤 註-일본 집단주의의 전형/ 『국화와 칼』-일본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사실 여기에는 논리적 모순이 없다. 문제는 그 대립을 이러저러한 목적, 이러저러한 연속선으로 해소하려는 게 아니라 계속 유지하는데 있다.(p.77 ) *4. 개인주의-집단주의 연속선은 불가해한 것을 매력적인 경험적 발견으로 만들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개인주의의 수많은 척도를 대단히 중시하는 한국인들은 집단주의의 수많은 척도로 역시 대단히 중요시한다. (무궤 註-개인주의 서구와 집단주의 동양 쌍방으로부터 공격당하는 한국민족정신)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적 한국인들도 연속선이 모호해질 정도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뒤섞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 모호한 연속선은 자동으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한쪽을 다른 쪽보다 중시함으로써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간의 심리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도 제거해준다. 그 결과 흥미로운 일탈은 거의 사라지게된다. ( p. 94 )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나아가 더 이상의 것들을 동시에 포괄하는 더 섬세하고 세련된 한국인들의 자아관(自我觀)이다. (무궤 주(註)- 한국을 세계화해서는 안되고 세계를 한국화해야할 이유 / 홍익인간(弘益人間)=홍도익중(弘道益衆)=재세이화(在世理化)=광명이세(光明理世) )
제 3 장
*1. 한국인들은 도구적인 양식으로 가치화된 관계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나'로 행동하면서도 '우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의 독특한 정신병의 한 형태인 화병(火病)은 사람들이 집단적 문화(관계적 문화)속에서 미치는 현상을 말하는데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심리장애인 경계선장애나 자기도취장애와는 대조된다.( p. 99-100 )
*2.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고립과 고독이 최악이라는 생각은 그저 자명할 뿐이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상호의존을 잘 알고있으며 자신의 견해와 믿음을 억눌러가면서까지 집단에(가족에) 들어맞도록 하려한다. 그렇게까지 집단에 어울리려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화(火)를 내는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갈등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다. 단지 좋은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 p. 104 )
은영이 약하고 빈틈이 많은 자아(自我)를 가지고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보다 자율적이지 못하고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가치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잘 알고있으며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으므로 현명하게 한쪽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현실의 가치들 속에서 올바르게 선택할 줄 아는 게 바로 강한 자아(自我)의 특성이 아닐까? 은영의 자아는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고도로 개별화되었다는 점에서 강력한 자아(自我)이다.(무궤 주(註) - 우리자아의 특징) p. 106
*3.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치심은 집단주의문화의 특징이고 죄의식은 개인주의문화의 특징이다. 흔히 수치심의 문화는 구체적 관계로부터 추상하고 일반화하는 능력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한다. 나쁜 짓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며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와 반대로 죄의식의 문화는 현실적 관계를 일반원칙으로 내면화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들켰느냐 아니냐는 상관없다. p. 107
"내가 매우 나쁜 짓을 한다면 내 친구들과 가족이 알게되고 나를 더 이상 존중해주지 않을 거예요. 내 자리를 내주려하지 않겠죠."
"내 행동은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내 가족의 것이기도 해요. 내가 나쁜 짓을 한다면 내 가족도 나쁜 인상을 받게되죠."
이게 바로 수치심일까? 자신의 행위에서 가족이라는 특수한 타자를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그렇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심리는 단지 체면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의(가족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개인적인 좌절감이기도 하다. 이것은 과연 사랑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서양인의 마음보다 덜 성숙한 것일까? 한국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수치심과 죄의식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느꼈다.(무궤 주(註)-집단주의문화 일본민족의 수치심100%+개인주의문화 미국의 죄의식100%=유기체주의문화 한민족의 정한(情恨))
그것은 한국인들의 마음에서 그 개념들이 혼동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구분이 애초부터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p. 111
*4. 집단적 자아와 강력한 개인적 자아는 실상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한국에서 보는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율적인 집단적 자아이다. 고도의 개인주의와 고도의 집단주의가 결합된 양태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궤 주(註)- 50%+50%의 기계적 자아=선악과 자아가 아닌 100%+100%의 자율적 자아=생명과 문화)
더욱이 그것은 심리적 갈등만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까지 치료하는 처방이다.( p. 115-116)
*5. 한국에서는 출세하기 위하여 '관계망(關係網)'을 짜는 게 아니라 세상의 그물에서 바깥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관계망을 짠다. 따라서 그만큼 필사적이다. 나아가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관리하는 것은 필사적인 일일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을 재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것과 자신의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 실상 그것은 아무런 차이도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창조적인 일이 주변적인 분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무궤 주(註)-저자가 한국의 창조적 문화를 집단주의 문화로 오해한 것)
창조적인 분야에서는 관리할 인간관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무궤 주(註)-기계를 발명하는데 해당. 자연의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조직은 유기적 관계이기에 관계를 창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창조적인 분야.) (cf. 서양의 도구적 관계망은 돈을 먹여 특정한 대가를 얻어낼 수 있는 직위에 오를 만한 사람을 확보하는 것.) p. 118
*6. 한국인들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명예가 아니라 정(情)이다. ( p. 123 ) 추상화된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추상화된 정(情)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정(情)은 현실의 공동체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으며 오직 타자(他者)와의 현실적 관계 속에서만 실현되는 이념이다. 또한 정(情)은 개별성(무궤 주(註)- 파편화=부품화된 개인성)표현을 가로막는다. 개별성의 측면들을 억누르는 것(무궤 주(註)-한(恨))은 개별성을 희생(犧牲)시키는 것(무궤 주(註)-집단주의 문화의 특성/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자살 테러)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명예보다 더 단호한 선택이다. 정(情)은 개별성과 사회(집단성)를 매개하는 게 아니라 그 어느 것도 아닌 집단성(? 무궤 주(註)-유기적 관계성)의 상태이다. 한국인들의 정(情)에 대한 존중과 개인주의에 대한 존중을 결합하면(? 무궤 주(註)-정한(情恨)의 철학만으로) 일본에서보다 더 강력한 갈등의 처방이 얻어진다. p. 124
한국에서 정(情)이 지니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한국인들의 정(情)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조직의 기본원칙이기도 하다. 명예와 달리 정(情)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적(公的)생활과는 대립된다. '우리끼리만'이라는 태도로써 가까운 사람들의 테두리를 단단하게 둘러쳐서 사회로부터 이반(離反)시키기 때문이다.(무궤 주(註)-정한(情恨)=100%공(公)+100%사(私))
만약 문화를 유지하는 역할로써 법(法)과 정(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한국인들은 정(情)을 선택할 것이다. 한국에서 정(情)의 중요성은 그것이 사회적 안정과 질서의 원천으로서 기능한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정(情)은 사회통제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전통적 지혜는 가족이 응집적이고 안정적이어야만 나라와 세계도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함병춘)
서양인들은 사회적 안정을 위해 지도자들에게 정(情)을 베푸는 것을 엄청난 위험으로 이해한다.
정(情)과 관료주의적 형식주의는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일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p. 125-127
*7.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간의 갈등은 보편적이지만 결과는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자립을 바라면서도 소외되지 않고 집단에 속하기를 바라면서도 갇히기는 싫어하는 것은 한국인들만이 아니다. p. 130
화병(火病)은 '분노의 억압으로 인한' 한국민족의 고유한 증후군이다. p. 131
화병(火病)은 한국인의 고유한 장애이며 문화의 억압성(抑壓性)을 반영하고 있다. 그 억압은 정서적인 것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기회가 없다고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한국의 의사들이 사회 심리적 요소를 뒤섞어 진단하는 방식은 아주 놀랍다. 그들은 환자의 가족과 한국문화와 역사의 억압적 요소들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기다랗고 연속적인 고통의 사실 혹은 '끈적끈적한 줄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한 억압적인 삶에서 비롯되는 분노를 특징짓는 말로 한국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것이 바로 한(恨)이다.(무궤 주(註)-한(恨)은 화병이 승화(昇華)한 것) p. 133-134
화병(火病)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익숙한 한국문화는 구성원들에게 탈출구를 주지 않고 짓누를 위험성을 지닌 문화이다.(무궤 주(註)-한(恨)이 바로 화병(火病)의 탈출구/원수사랑 인내(忍耐) 인고(忍苦)의 열매) p. 136
한(恨)은 한국의 심리와 역사를 나타내는 상징이며 기호언어이다. (루크 김)(무궤 주(註)-정(情)은 한(恨)의 나무요 한(恨)은 정(情)의 열매이다.) p. 137
한국사회는 연결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 얽혀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변에 사람들은 너무 많은 반면 진정한 연관은 너무 적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화병(火病)과 한(恨)의 근원이 되었다. 한국 단편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로부터 짓눌림과 배제를 동시에 겪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세계에 고립된다는 것을 뜻한다. p. 140-141
제 4 장
*1. 한국인들은 서구인들보다 덜 개인주의적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개인주의적이다. 그들은 집단주의(무궤 주(註)-유기적 관계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모든 심리의 핵심에 놓여있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갈등을 치유한다. 자아(自我)와 세계의 갈등을 이런 식으로 해소하면 악(惡)을 알기가 쉽지 않다. 자아(自我)와 타자(他者) 사이에 악(惡)이 등장할만한 공간이 충분치 않아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공간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한국인들은 악(惡)을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p. 143
한국에서는 한국인들이 악(惡)을 부인한다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부인'이라는 말에 이미 경험의 부인(否認)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인들은 악(惡)이 자신의 경험 속에 출현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경험을 조직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는 없다. 한국인들은 악(惡)에 관해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악(惡)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만든 세계에는 악(惡)이 존재할 공간이 없는 것이다. 그런 악(惡)을 이해하기란 상당히 복잡한 일이다. p. 145-146
*2. 황금률(나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7.12, 논어5.12)은 규칙이 아니라 관계다. 이 관계와 공감에 바탕한 도덕성이 악(惡)의 개념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세계와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계의 견지에서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내 부모 내 형제와의 관계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악(惡) 그리고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어느 한국인의 이 이야기는 그의 부모와 형제가 특별히 악(惡)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에게는 부모 형제가 모든 것 세계전체 모든 의미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세계가 아주 긴밀하다면 악(惡)이나 다른 모든 것들을 가족과 가족에 기초한 관계로부터 배우고 알 수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악(惡)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을 악(惡)이라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악의(惡意)를 비난하는 것이며 세계전체가 아니라 가까운 주변의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악(惡)'이라는 말은 세계전체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악(惡)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과 정(情)이 있는 사람들을 크게 증오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놀랍다. 게다가 한국어에는 그것을 가리키는 '미운 정(情)'이라는 말도 있다. 나쁜 정(情)이라는 뜻이지만 어쨌든 그것도 정(情)은 정(情)이다.
자신의 선택보다 주어진 운명 같은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끈적끈적한 줄을 본다. 이 한국인이 말한 운명이라고 말한 그 정(情)의 밧줄에 묶여 있을 때는 미워하는 사람을 악(惡)으로 여기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것은 이 불가능성이 더 먼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심지어 가족과 정(情)의 그물 바깥에 있는 익명의 사람들에게까지 연장된다는 점이다. 한국에 악(惡)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는 현실적 관계가 긴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가 전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p. 160
가족관계를 다른 관계들과 구별할 수 있어야만 악(惡)을 일반화하는 게 가능하다. 사회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라면 그래서 모든 관계가 가족관계에 기초하고 있다면 따라서 낯선 사람조차도 '할아버지'나 '아주머니'처럼 가족구성원을 가리키는 용어로 불릴 수 있다면 악(惡)은 생각할 수 없다. 악(惡)이 있다면 가족 자체가 악(惡)이라고 말하는 셈이 된다.
모든 관계를 가족관계의 보는 것은 가치선택이며 세계를 풍부한 의미로 짜여진 인간관계망으로 만들고자 하는 결정이다. 자아가 중첩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항상적(恒常的)인 연결상태에 있으며 정(情)이 도처에 존재하는 세계는 신경증의 세계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전통의 일부인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전통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한국인들은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그런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여느 선택이 그렇듯이 그 선택도 모종의 결과를 낳는데 그게 바로 악(惡)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p.161
*3. 한국적 관점에서 본다면 악(惡)은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자체이며 혹은 관계의 배반이다. 서구적 악(惡)개념의 내용이 관계에 내재하는 기대를 침해한다는 견지에서 정의되는 것이라면 악(惡)의 개념은 개인의 행위에서 관계의 성질로 이동하게 된다. 만약 그 관계가 도덕적 단위라면 개인은 진정으로 부도덕해질 수 없다. 즉 부도덕성은 개인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개인은 무지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분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악(惡)할 수는 없다. 분별 없음은 부도덕성의 범주라기보다는 비사교성의 범주에 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사회에 소속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못한다. 그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이며 도덕성과 무관한 곳에서 스스로 선택한 은둔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악(惡)이 아니다.
악(惡)은 개인에게 적용되기 어렵지만 집단에도 쉽게 적용될 수 없다. 집단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도덕적 행위자의 성질은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집단이 아니며 사탄이 유혹하려는 영혼 역시 집단이 아니다. 일단 관계의 속성이 되고 나면 악(惡)은 그 도덕적 힘을 상실하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동시에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않게 된다. 서구의 일부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받아들여 악(惡)이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유는 신(神)과의 관계에서 모두가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굳이 신(神)을 제 3자로 설정하지 않는다 해도 악(惡)을 실패한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곧 악(惡)의 사라짐을 뜻한다. 사라짐은 나쁜 것이 아니다. p. 162
*4. 한국의 악(惡)관념에서 가장 놀라운 점 한가지는 악(惡)이 악독한 타자(他者)에게로 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강력한 가족관계는 타자(他者)를 악마(惡魔)화하는 방식으로 구축되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 인간관계망 바깥에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아무런 존재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외부에 있다는 자체가 대단히 끔찍한 것이므로 굳이 외부의 악(惡)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무궤 주(註)-관계망의 반대는 무(無) ) 같은 이유로 외부의 악(惡)에게 붙일 이름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깥은 곧 악(惡)이다. 바깥은 또한 무(無)이기도 하다. 따라서 악(惡)은 무(無)이고 두려움이며 비존재(非存在)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리쾨르는 「악의 성질」에서 윤리적 두려움이란 인간세계와 연결되지 못하고 뿌리와 유대를 잃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윤리적 두려움이 바로 한국인들이 어떻게 악(惡)을 경험하는지를 말해준다. 물론 한국인들은 그것은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초월하며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말하는 대신 아는 사람 없이 혼자 있는 것이 가장 나쁜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에게는 그것이 악(惡)의 개념과 가장 가깝게 통한다. 한국인들은 악(惡)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악(惡)의 상관물인 소외(疎外)와 고독을 두려워할 따름이다. p. 168
서구에서는 악(惡)한 타자(他者)가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싸울 상대가 되어 주는 것이다. 서구의 경울 악한 타자(他者)는 환영을 받으며 우리의 두려움에 얼굴과 장소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생각이 환영을 받지 못한다. 북한을 악(惡)이라 부르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준다. 한국인들은 북한을 외부의 악(惡)으로 소외시킬만한 모종의 거리감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말 그대로 여전히 가족이다. 어떤 불교도는 일본의 점령까지도 가족관계의 일종으로 간주한 바 있었다. 일본을 맏형으로 삼아 아시아 국가들 간의 더 커다란 가족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인들도 이원론적 태도로 타자(他者)를 단지 대상으로만 여길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한 주장이었다.(무궤 주(註)- 일본의 집단주의=일원론(一元論)과 한국의 유기적 관계주의=불이(不二)불일(不一)론의 차이를 올바르게 인식해야만 일본의 침략이 진정한 가족관계를 형성하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타자성(他者性) 자체가 워낙 무서운 범주이므로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악(惡)이라고 부르는 어느 누구라도 거리를 둘 수 없는 것이다. p. 169-170
*4. 일설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명이 상당히 발전해 있었으므로 증기기관 같은 간단한 기계를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사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신체가 미학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기계를 가지고 일한다면 깊은 소외(疎外)를 느끼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기계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느낌을 주지 못하며 세계자체도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인들은 타자(他者)의 세계를 대하면서 그리스인들이 기계의 세계를 대할 때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타자성(他者性)과 차이(差異)가 너무 크면 그 자체로 두려움이 되어버리고 세계는 비인간적인 곳이 된다. (무궤 주(註)- 선악과의 세계관과 영생과의 세계관) p. 170
*5. 우리는 낯익은 타자(他者)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의 자아(自我)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코후트의 쌍둥이 전이=다른 자아 )
한국인들은 그 쌍둥이 전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므로 그런 측면을 가지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는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코후트가 어느 여성에 관해 한 말을 들어보자. "그녀의 자아는 단지 그녀가 자신과 상당히 닮았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그녀는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말은 오히려 이해하려는 노력을 뜻하며 차이를 인정하게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함께
있고 싶을 따름이다. 한국인을 잘 아는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친구들과 얼마나 가까이 느끼는지 알 것이다.
쌍둥이 전이의 정반대의 경우 즉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인간성을 느낄 수 없는 경우를 살펴보자. "카프카의 「변신」에서 충격적으로 묘사한 것과 같이 인간에게 닥치는 가장 고통스런 감정은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질 때이다."(코후트 1980.20)
이것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두려움이지만 한국인들의 경우에는 특히 심하다.
아마 한국인들이 절대적인 타자성(他者性)의 두려움을 유달리 크게 인식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자(他者)들이 직접적인 인간관계망의 일부가 아닌 순수한 타자(他者)들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한국인들의 후각이 특별히 발달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자성(他者性) 자체가 상상하기도 끔찍한 것이라면 악(惡)도 그런 것은 당연하다. p. 171-172
*6. "악(惡)이란 돈이나 권력 명예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욕심을 부리는 거예요." 한국의 노인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p.177
악(惡)은 일부 사람들이 그 한계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몫 이상의 돈, 권력, 명예 혹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 매장공간까지를 차지하려할 때 생겨난다. 관계를 말해주면 악(惡)이 뭔지 말해주겠다는 말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누가 자기 몫 이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겠다는 뜻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 발언이며 여기서 평가되고 있는 것은 사실상 관계다. 그는 관련된 사람자체는 알 필요가 없고 단지 관계만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악(惡)은 부패한 관계다. 관계가 적당히 할당해 준 경계를 넘어가는 자가 생기면 악(惡)이 생겨난다. p.181-182
*7. 악(惡)은 단지 어떤 사람들이 사회적 생산물 중에서 자기 몫 이상을 가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더 가진 만큼 다른 사람들이 덜 가져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부자(富者)에게만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에도 화(火)를 내야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한(恨)의 근원이 있다. p. 182
*8.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아는 것은 개인적 자질이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 무지에 의해서 깨질 수 있는 인간관계가 축적되어있는 덕분이다. 그 감정적 무지란 바로 사람들이 언제나 그리고 이미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p.183
알면서도 일부러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부자들은 관습과 생활방식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p. 185 )
제 5 장
*1. 한국인들은 경계를 인정할 경우 찾아올 분리감과 실망감에 대한 분노 때문에 악(惡)을 부정하는 것일까?
악(惡)은 궁극적인 경계 궁극적인 타자(他者)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대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인들이 악(惡)을 알기 위해서는 분리가 필요하다기 보다는 분리 그 자체가 그들이 알지못하는 악(惡)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악(惡)을 신(神)으로부터의 분리로 보는 그리스도교의 견해와 통하는 바가 있다. 또한 도(道)에서 말하는 완벽한 무(無)- 경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無)밖에 없기에 완벽하다.-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나는 한국인들이 무엇보다도 무(無)를 두려워한다는 점을 말했는데 이제는 그들이 무(無)를 이상화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두려움과 이상화를 병렬시키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이상화는 가장 흔한 부정(否定)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두려운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의미를 전환시키고 심지어 역전시키기 때문이다. 아마 그 역전은 단순한 부정(否定)이 아닐 것이다. 아마 모든 창조는 그와 같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 심지어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전환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부정(否定)의 승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공포를 도(道)와 같이 아름답게 또 다른 미학의 의미로 포장함으로써 공포를 견디는 것이다. p. 199
제 6 장
*1. 가족, 학교, 지역적 연고의 '우리'와 우리 한국사람의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다. 이 틈에서 한국인들은 자유를 느끼고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하게 된다. 정(情)은 단지 관계인 것만이 아니라 분리이기도 하다. 정(情)은 경계선을 다시 설정하여 집단적 세계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 그 분리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양측이 사랑을 교환하는지 아니면 돈을 교환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한국인들은 대개 그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p. 254
제 7 장
*1. 한국인들은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아픈 점을 알아내는 점술가를 좋아한다. 그들은 구원을 받기보다는 모종의 힘과 카리스마 앞에서 투명해지를 바란다. 다시 말해 자신을 고통스럽게 드러내기 보다 남들이 그 고통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말로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남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한국인들은 말을 불신한다. 말은 분리를 끌어들인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침묵은 말하지 않고도 남이 알아줄 가능성을 함축하거나 보장한다. 따라서 말을 매개로 하지 않는 관계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고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침묵이 무책임성을 은폐하는데 이용될 수도 이용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따금 우리는 우리가 뭘 생각하고 뭘 행동하는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기도 한다. 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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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韓)=환(桓)'이란 하나 뿐만 아니라 전부 둘 다를 지칭하는 한민족(韓民族)의 핵심기호어이다. '한얼' '한울' '한올'은 한국의 정신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정(情)은 청(靑)+심(心)이니 이기적인 서구의 개인주의보다 더 개인주의 측면의 유기적인 관계망(네트워크)인 한국정신의 표현이요, 한(恨)은 간(艮=열매)+심(心)이니 동양의 집단주의(전체주의=사회주의)보다 더 공동체(共同體)적인 한(韓)철학의 측면이다. 오늘의 한국에는 이러한 민족정신보다 이기적 개인주의와 기회주의적 집단주의가 결합된 한(韓)철학과 유사한 듯 보이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폐해만을 뭉뚱그려 놓은 사이비 한국정신이 더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듯 하여 가슴이 아프다.
정해년 처서절(處暑節)에 무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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