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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의 비용, 주민참여예산위원회 단상 나는 올해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위원 공모에 신청했고, 운이 좋게도 추첨되어 주민참여예산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메르스의 여파로 여러 일정이 연기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차근차근 회의는 진행되고 있다. 주민제안사업이 접수되었고, 각 분과별로 제안된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현장 실사를 곧 나갈테고, 현장 실사 후에는 역시 회의를 거쳐 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할 것이다. 여름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하는 ‘주민참여예산 한마당’을 진행하고,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주민참여예산으로 집행할 사업이 2016년 예산에 편성된다. 그렇게 편성된 사업은 시의회를 거쳐 최종 의결되어 구체적인 사업으로 집행될 것이다. 시민들이 사업을 제안하고, 그렇게 제안된 사업을 역시 시민으로 구성된 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검토하여 다음해 예산에 편성하며, 그 과정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추진과정을 시민들이 직접 모니터링 하는 주민참여예산제도는 분명 매우 놀라운 제도이다. 서울 정도 규모의 거대 도시에서 각 자치구의 주민참여예산제도와 함께 광역단위의 제도가 함께 굴러가는 지금의 모습을 우리는 분명 ‘성과’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원회 회의나 실제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아쉬운 점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단, 회의자료가 사전에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다. 회의에 참가하는 주민참여예산위원들은 회의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회의에서 다룰 내용들을 서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몇 일전 진행된 회의에서는 회의를 진행하는 위원장단 역시 회의자료를 충분히 숙지하지 못해 회의 진행이 원활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위원장단이 “저희도 이 자료를 오늘에서야 여러분과 같이 받아서 회의 진행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누차 이야기한다. 그 자리에 참가한 누구도 위원장단의 잘못이 아님을 알지만, 위원장단은 연신 민망해한다. 현장실사를 나가는 사업을 담당 부서에서 선택해서 자료를 만들어 배포했지만, 현장실사를 나가게 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분명 문서를 검토하면, 어떤 기준이 있을테고, 전문성에서 비교우위에 있는 담당 부서의 판단을 결국 신뢰해야 할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그 기준이 충분히 공유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배포된 자료 사이의 어떤 상이점이 발생할 경우(예컨대, 심사 대상 자료집에 없는 사업이 현장실사 명단에는 들어있다거나), 회의는 급격히 혼란스러워진다. 대부분 그런 경우 급한 일정에 의한 단순한 실수일 경우가 많지만, 중요한 것은 이 회의에 참가하는 참가자들이 전체 흐름과 중요한 기준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의 참가자들에게 명확한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효과적인 회의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은 분명 옳은 판단이지만, 그럼에도 그 임무를 둘러싼 전체 흐름은 분명히 합의되어야 하는 문제다. 회의자료를 포함하여, 회의록 역시 사후에 충분히 공유되지 못한다. 따라서,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참가자들은 전체 회의에 참가하고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서 찾아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물론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자구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이겠으나, 이런 고민이 현재 시스템에서 충분히 고려되고 있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단지, 서울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서만 겪는 일은 아니다. 지역의 어떤 회의자리에 갈 때, 현장에서 받는 회의자료의 방대함에 먼저 놀라고, 그 회의자료에 대한 어떤 판단이 그 자리에서 요구될 때 두 번 놀라는 경험이 제법 많다. 수많은 위원회들과 우리가 애정하는 ‘거버넌스’라는 단어의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는 순간들이다. 시민이 참여하는 정책과 그 구조는 언제나 소중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시민참여가 옳다는 합의가 우리사회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참여정책의 비용, 그러니까 참여 정책의 품에 대해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의 친구, 공무원 이런 비판적인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우게 되면 누군가 탓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 우리는 공무원, 혹은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관료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깨어있는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괴물 같아 보이는 이 공무원들은 대체 누구인가? 지난 6월 13일, 메르스의 위험 속에서도 서울시 지방공무원 임용시험이 진행되었다. 7급과 9급 공무원 임용시험에 총 7만7천여명이 시험에 응시했고, 경쟁률은 57.1:1에 달한다. 마스크를 끼고 수험장에 등장하는 사진이 유독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나의 친구,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의 친구들이 이 시험에 응시했다. 사진 속에 등장한 마스크를 낀 수험생들, 그러니까 노량진과 신림으로 상징되는 공무원 준비생들은 이 난감하고 불안한 시대, 저성장 고실업 시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우리들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57.1:1의 경쟁률을 뚫고 공무원이 된 우리들의 친구들은 이 괴물 같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또 한명의 괴물이 된다. 회의자료를 사전에 공유하지 않고, 각종 위원회와 거버넌스 구조를 요식행위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이 된다. 실업문제의 피해자에서 시스템을 유지하는 ‘갑’이자 ‘괴물’이 되는 것은 어느 하루아침의 일이다. 공무원이 끼지 않은 우리들의 회의테이블은 어떤가? 시민사회, 지역사회, 마을의 회의는 어떠한가? 그나마 공무원이 끼는 회의는 공무원을 탓하고, 시스템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깨어있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이 충족되는데, 우리들의 회의는 더 어렵다. 심지어 각종 SNS의 등장으로 온라인 영역에 폭넓게 확산 된 수많은 그룹은 일상적인 소통과 회의를 돕는 장치가 되어가기 보다는 감정적인 상처와 다양한 피해의식을 양산하는 장애물이 되어가기도 한다. “카톡방이 없는 모임은 있을지언정, 카톡방이 한 개인 모임은 없다.”라는 이야기가 돈다. 역할에 따라, 혹은 회의의 위상에 따라 별도의 추진 그룹이 존재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전체 그림과 의사결정의 과정이 충분히 공유되거나 인지되지 못한 상태라면, 이 구조는 매우 위험하다. 일상의 민주주의를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와 도구들의 등장에 비해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치명적으로 취약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경우에도 인사치레로 주고 받는 “어디 가세요?”라는 질문에 “회의 가는 길이에요.”라는 대답이 전체 대답 중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회의 간다고 이야기 하면 등장하는 대화의 패턴은 “아니, 무슨 매일 회의야?”하는 한심함을 내포한 질문과 멋쩍게 웃으며 “그러게 말이에요.”하는 유체이탈적이고 자아분열적인 나의 대답이다. 서로를 ‘회의주의자’라고 칭하며 농담처럼 주고 받는 말들이 너무 익숙하다. 사실 우리는 정말 많은 회의를 한다. 초등학교 때 경험한 학급회의부터, 대학의 조모임까지, 우리의 성장과정에는 수많은 회의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 회의의 경험들이 ‘무의미’했던 것일까, 우리는 ‘회의’를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회의를 해야 한다. 각자 자신에게 ‘좋았던 회의’의 경험이 있는가? 비전과 목표가 공유되고, 공유된 비전과 목표에 맞는 회의체의 구성과 회의의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운영, 결과에 책임지는 회의 구성원들과 평가까지. ‘좋은 회의’의 기억의 원형이 있는가? 있다면 곰곰이 그 기억을 재구성해보고,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중 누군가가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합리적이고, 필요한 회의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회의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녹색당의 전원추첨 대의원대회 : 가장 보통의 민주주의
연결하여, 녹색당의 자랑 ‘전원추첨제 대의원대회’라는 시스템을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녹색당은 창당부터 전원추첨제 대의원대회를 진행해왔다. 벌써 세 번째 전원추첨제 대의원대회를 진행했다. 대의원대회는 당헌이 정한 당의 최고대의기관이다. 사업과 예산을 검토 및 의결하며, 중요정책과 당의 진로에 관련하여 최고의결기관인 전국당원대회에 부의할 권한이 있다. 녹색당은 이 대의원대회를 구성하는 대의원을 전원 추첨으로 정한다. 지금도 추첨제 민주주의는 어떤 이들에게는 대의민주주의가 갖는 한계를 극복할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여겨지며 꾸준히 언급되고 제안되고 있다. 사실 나는 여전히 추첨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의 대체시스템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크다. 그럼에도 녹색당이 원칙으로 갖고 운영하는 전원추첨제 대의원대회는 큰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다. 정확히는 전원추첨제라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비용과 품이 녹색당의 발전과 나아가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성장에 기여할 것에 대한 확신이다. 전원추첨제라는 시스템에는 회의 참가자간 정보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템적으로 그 정보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주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나 지자체로 봤을 때는 행정부와 공무원에 가까운 사무처와 당의 당직자들은 대의원들의 회의 안건 숙지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 첫 번째 진행된 대의원대회에서는 개별 안건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 영상이 제작되었고, 최근 진행된 대의원대회에서는 안건 설명회를 개최하였다. 대의원회의 당일에도 사전 토론 시간을 충분히 배치한다. 이것이 이른바 참여의 비용이다. 참여를 공허한 구호에 머물지 않게 하고, 실제 결정과정에 수렴시키는 품이다. 시스템은 이 비용과 품을 정확히 인정해야 한다. 제안하건대, 나는 가까운 시점에 녹색당의 전원추첨제 대의원대회의 경험, 그 성과와 한계를 명확히 진단하는 평가토론회가 열렸으면 한다. 특히, 이 시스템이 당원들에게 어떤 성장을 안겼고, 또 당원들이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정치적 효능감을 경험했는지를 중심으로 평가해봤으면 좋겠다. 그 평가를 중심으로 우리가 더 지출해야 하는 비용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원하는 이 제도를 요식행위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한 품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위에 언급한 녹색당이 대의원대회를 준비하며 들인 품은 사실 엄청 특별한 것은 아니다.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정당들, 그리고 기성정당들까지, 회의의 절차와 안건의 충분한 공유는 정치적 결사체인 정당 조직들에게 어쩌면 익숙한 이슈일 것이다. 그 이슈가 피로도를 상승시켰는지, 아니면 참여의 효능감을 안겨주었는지는 녹색당을 포함하여 모든 정당들이 평가해봐야 하는 지점이겠지만, 어쨌든 정당들은 그것이 ‘원칙’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이것만으로 우리 사회에서 회의와 더불어 쓸데 없는 것으로 취급받는 정당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여겨진다. 정당은 지역사회에서, 시민사회 곳곳에서, ‘좋은 회의’의 경험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지역사회에서 정당이 역할하고 기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목표이자 미션이다. 서울 민주시민교육 조례에 대한 기대와 우려 한편, 서울시는 2014년 「서울특별시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이르면 올해 8월까지 「민주시민교육 종합계획」을 마련해 발표할 예정이라 한다. 반가운 일이면서 한편 우려스러운 일이다.
조례에 의하면 민주시민교육은 ‘1.민주주의의 기본원리와 정치제도의 이해 및 정치참여에 관한 교육, 2.영토, 역사, 정통성, 전통문화, 사회통합, 평화통일 등에 관한 교육, 3.시민의 권리와 의무, 참여와 책임, 의사소통, 합리적 의사결정, 갈등조정, 문제해결 등 역량과 자질 함양에 관한 교육, 4.자유, 자율, 공정, 준법, 배려·나눔, 다양성 존중 등 공유 가치에 관한 교육, 5.그 밖에 민주시민교육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교육’을 그 내용으로 한다. 서울시는 ‘2015 서울형 민주시민교육 공모사업’을 개시한 것을 포함하여 ‘민주시민교육’을 제도화하는 과정에 돌입한 듯 보인다. 모든 제도화 과정이 그렇듯, 민주시민교육이 단지 사업에 머무르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사회적 토론을 우리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착하고, 예의 바른 시민이 아니라, 치열한 회의를 견디고 주도할 수 있는 정치적 책임주체로서의 시민을 만들어내는 교육과정으로 민주시민교육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교육 커리큘럼을 통해 ‘민주시민’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민주시민교육의 강의실을 둘러싼 우리의 시민사회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을 강의실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일상 곳곳에서 만나게 될 정치 참여의 공간, 그리고 다양한 회의의 경험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질문하고, 변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회의’의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잘 싸우고, 잘 해결하고, 목표에 도달하고, 평가했던 참여와 회의의 경험을 생산해야 한다. ‘좋은 회의’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진행하는 민주시민교육이란 끔찍하지 않은가?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서울시의 어떤 알리바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례에 민주시민교육의 내용으로 담겨있는 ‘다양성 존중’이 교과서나 강의실의 언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성 존중을 둘러싼 곳곳의 갈등과 정치과정에 직접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경험이 절실하다. 결국 민주시민교육이라 함은 끊임없는 경험과 훈련을 통해 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회의들, 위원회들이 실제 그 역할과 위상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완전할 수 없지만,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변화하고 성장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사회적 비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협소한 대상을 두고 하는 요구가 아니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어딘가에서 어떤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거나, 혹은 앞으로 어디서든 시스템을 운영하게 될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무엇보다, 회의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이다. <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