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신들의 폭노(暴怒)
자고로 어느 나라든지 문무충돌이 항상 있으니 이것은 위정자가 잘 조종하지 못한 관계로 되는 것이다. 잘 인도하면 무사하고 잘 인도하지 못하면 큰일을 빗어낸다. 칼을 갖은 무사를 박대하고야 어찌 무사하리요. 평화재 모현원에서 된 일은 모든 무신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우리는 연발(燃髮) 비협(批頰)의 모욕을 더 참을 수 없다는 소리가 도처에 들리었건은 문신들의 귀에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왕과 문신들의 미혹이 극도로 깊어졌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서로 의논하되 우리가 더 참을 수 없으니 이때 기회를 잃지 말고 거사하기를 약속하였다. 왕이 만일 화평재로부터 연복정과 흥왕사로 해서 궁으로 들어가면 참고 기다렸다가 왕이 보현원에 들어갈 때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이튿날 왕이 과연 보현원에 들어갈 새 오문전(五門前)에 이르러 사신을 불러 술을 마시며 말하되 장하다 이 곳은 무사들의 유희처라 하고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시작하여 무신들의 불평을 아는 고로 후상을 주려는 뜻이다. 한뢰가 사랑을 얻지 못할까 하여 장군 이소응의 뺨을 쳐서 넘으트린 것을 본 무신 이의방 이고등이 금군을 모아 왕이 문에 들어가려 할 제 문신 임종식(林宗植) 이복기(李復基) 등을 쳐 죽이고 한뢰는 환란들 틈에 끼였다로가 폭발하여 왕의 곁에 있는 문신들 문관(文冠)을 쓴 자는 모조리 죽이고 왕을 호종 하였던 문신 대소를 묻지 않고 일인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이고 무관들도 문관 모양을 가진 자 다 죽음을 당하였다. 죽음이 길 가에 산 같이 쌓아졌다.
정중부는 그 왕를 보내여 행궁문을 지키고 이고 이의방은 날랜 군사를 택하여 왕경에 들어가 대궐 곁에 있는 추밀원 부사 양순젇ㅇ(梁純精)과 감찰어사 최동식(崔東埴) 등과 월내 요원들을 다 죽이고 또 태자궁에 가서 김거실(金居實) 이보인(李甫仁) 등 십 수인을 죽이니 이름을 타서 불평을 가졌던 일반 무신들이 다 일어나 상서 우승 김방시(金放時) 등 50여인을 죽이고 숨은 자도 조사하여 다 죽이니 왕이 크게 두려워하며 정중부를 불러 난을 그치라 하되 듣지 않고 왕은 거제로 태자는 진도로 귀양 보내고 왕의 동생 익양공호(翼陽公皓)를 맞아 위에 오르게 하되 이가 곧 명종(明宗)이다.
이 급보가 국내에 전함에 명종 3년 8월에 동북 병마사 김보당(金甫當)과 남로 병마사 배윤재(裵允材) 등이 일어나 정중부를 치고 정황을 회복케 한다 칭하고 중외에 선언함에 각 처에 응하는 자 많았다. 정중부가 장군 이의문 등을 보내어 서로와 남로로 나누어 칠새 배김 양군이 다 이롭지 못하였다. 전왕의 실력이 너무 많고 또 문신들의 지나치는 교만을 다 미워 하는 고로 오히려 이런 변이 마땅하다는 이가 많다. 그 후에 이의운 등이 또 전왕을 유인하여 곤원사(坤元寺) 북연(北淵)에 이르러 왕을 밀쳐 못에 빠져 죽게 하니 국권을 전부 무신들의 손에 들어갔다.
문신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누명을 겨우 보전할 뿐이다. 이때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또 기병하여 정중부 이의방을 친다고 선언함에 절령(岊嶺) 이북(以北)이 다 응하였다. 조정에서 윤인첨(尹鱗瞻)을 보내어 로별하다. 조위통의 선봉이 개경까지 왔거늘 이고 의의방 등이 나아가 쳐서 크게 이기었다. 대동강까지 이르러 평양성을 에워싸고 상거한지 월여에 돌아왔던 조위통이 금나라에 귀부하여 구원을 청하니 금국이 사신을 보내어 전왕의 죽은 이유를 묻거늘 전왕은 병으로 죽었다 답하니 사신이 이에 물러갔다. 이듬해 관군이 또 조위통을 쳐서 파하고 위통을 잡아 죽이다.
한뢰는 이소의 뺨을 치고 김돈은 중부의 수염 태워
더 참고 더 견딜 수 없다 기개당당 우리 무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