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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그 락
전창수 지음
1.
여기가 어디일까. 한참을 생각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앞뒤에서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는 굉장히 요란했다. 기어를 넣기 위해 한참을 애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끙끙거리고 있는 것일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수시로 바뀌고 있는 신호등과 꼼짝 않고 빵빵거리는 차들의 행렬. 분명 여기는 사거리 한복판인 듯한데, 나는 왜 여기서 꼼짝 않고 있는 것일까. 정신을 차려보려 애 써 보지만, 좀처럼 상황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어는 들어가지 않았다. 손에 너무 힘을 주었나.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역시,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시동이 꺼졌다. 차키를 돌리고 다시 기어를 넣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마찬가지로 기어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기어를 넣던 손을 멈췄다.
“이것 보쇼? 좀 나와 보소! 내가 차 빼 놓을 테니, 견인차라도 부르쇼! 이거 원, 차 막히는 거 안 보이쇼? 초보면 옆에 선생님이라도 모시구 다닐 것이지, 혼자서 이러고 있으면 어쩌겠다는 거유? 초보딱지는 왜 안 달구 다녀!”
참다 못한 아저씨가 쏘아붙인다. 내가 초보였던가? 내가 알기로, 나는 분명 10년 이상 차를 몰고 다녔다. 나는 할 수 없이 옆자리로 비켜섰다. 아저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시동을 켜더니, 이내 도로 건너편 보도 옆에 차를 갔다 세운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쇼! 당신 같은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우리는 시간이 생명인 사람들이야. 이런 식으로 시간낭비해서는 아니 되지 않겠소? 그리 생각 안 하쇼?”
나는 잠시 멍하니 그 아저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그런데…… 제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죠?”
“허, 이 사람이? 정신 나갔네? 차 뺄 생각은 안 하고 다른 생각만 했나 보지? 사람들 말에 따르면 한 시간도 넘게 그러고 있었다더군. 사람들도 그렇지, 사람이 차를 못 빼고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으면 직접 차를 빼 주든지 할 것이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으니, 그 모양들 아닌가. 댁이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가만있지 말고 도와달라고 말 좀 하쇼. 괜히 바쁜 사람들 타이어 붙잡고 늘어지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빨리 가자고 내게 난리를 치네. 이보쇼. 댁처럼 욕먹기 전에 난 가 봐야겠수다. 알아서 처리하쇼.”
“저, 아저씨!”
“왜 그러쇼?”
“아저씨는 누구신지요?”
“누구긴? 지나가는 행인이올시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그 아저씨는 그러더니, 휭하니 가버렸다.
한 시간이나 내가 이러고 있었던 말인가. 기억을 더듬어보자.
나는 개천을 걷고 있었다. 개천의 끝자락에서, 차가 다니는 굴다리를 통과할 때면 하루살이 떼들이 내 얼굴로 달려들었다. 아니, 그들이 달려들었다는 것은 내 착각이다. 그들은 그냥 거기서 살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걸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길을 위해 그들의 영역을 지나치는 것이다. 통행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을 지나고 나면, 다시 햇볕이 들고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숨 쉬는 곳에서 계속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사람 생각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은 내게 왜 그렇게 자신의 상황만 보는 거냐고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왜 그렇게 이기적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그러면서 말했다.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지 말고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시켜 종합적으로 볼 줄 아는 안목도 가져야 한다고. 이것 역시 정확히 말하면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답답하냐고. 왜 이렇게 자기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냐고. 그때의 나는 그 사람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잘 먹고 잘 살아!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진심이야?”
“아니, 정말이야. 나는 진심 따위 몰라. 안녕!”
그 생각의 어디쯤에서, 문득, 개울물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개천은 이미 지나쳤으며, 굴다리의 끝에는 더 이상 개천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쌩쌩 지나치는 자동차의 바람소리만이 내 귓가를 휙휙 스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소리, 듣기 싫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는 길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의 헤어짐 따위 아무렇지 않았고, 개천이 사라진 것 따위 별거 아니었다. 나는 차들이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겨 버렸다.
그 다음부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술을 마셨던가? 손에 입김을 불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술 냄새 같은 건 전혀 나지 않았다. 이 차는 내 차가 아니던가? 나는 차번호를 확인했다. 분명히, 내 차의 번호였다. 10년 동안 끌던 내 차. 어떻게 된 것일까? 다시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어 본다. 이번엔 재대로 걸렸다. 난 여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었단 말인가?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은 곧 사라지고 어둠이 나를 맞이했다. 너무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도 두려운 어둠이다. 저 멀리 희미하게 빛이 새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다가간다. 터널이었다. 차들은 여전히 쌩쌩 달리고 있었고, 나는 그 터널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저기를 건너야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희미한 형광불이 줄지 어 서 있는 터널을 들어서는 순간, 차들이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하나 둘 셋…… 이상하다. 모든 차들이 내게 위협을 하듯, 내가 걷는 그 보도를 향해 돌진해 오다가 슬쩍 비켜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 안에 들어선 내 자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야만 했다.
나는 그 사람 생각을 했다. 내가 헤어짐을 통보하기 전에는 먼저 그 사람이 헤어지잔 말을 했고, 나는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그 사람에게 매달렸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그 사람의 이 말이 내게 비수를 꽂았다. 맞는 말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냈다.
“그래, 알았어! 네 맘대로 해봐!”
그리고 그 사람과 그날 첫 키스를 했다.
나는 첫 키스를 하듯, 그 터널을 뚫었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무슨 구호 같은 외침을 반복했다. 처음엔 입으로만 했다. 그 구호에 점점 마취되었다. 그러다가 손을 대각선으로 흔들면서 무슨 시위라도 하듯이 그 구호를 외쳤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지! 저쪽에 있는, 얼마 안 되는 곳에서 눈부신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연의 빛이다. 드디어, 터널의 끝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방금 낮이었던 거 같은데, 어느 덧 다음날 아침이 된 것일까? 나는 그 빛을 본다. 그리고 빛을 향해 돌진한다. 돌진하는 나의 얼굴에 기쁨이 감돈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된다고 하던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빛 속에 그 사람이 서 있다.
2.
“이보쇼. 정신 좀 차려보쇼! 차는 어디가고 이러고 있수? 강도 당했구만. 쯔쯔쯔. 어째 걱정된다 해서 와 봤더니.”
눈을 떴다. 아까 전에 나를 도와줬던 그 아저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 아저씨의 어깨 너머 비치는 저 동그란 물건을 달이 아니던가? 머리가 욱신거렸다. 나는 머리를 움켜쥔다.
“한대 얻어 맞으셨구만? 그래도 다행이구랴. 심하게 맞지는 않았으니. 댁이 어디쇼? 내 바래다 줘야겠는 걸.”
“아저씨, 그것보다 여기는 어디죠? ”
“아하, 길을 잃으셨구만! 여기는 지도에 없는 마을이라서 여기 와서 길을 잃는 사람이 많수다. 이런 곳에 올 때는 택시를 타는 것이 좋을 거요. 괜히 참상 당하고 나서 울고불고 하지 말고. 그나저나 집이 어디유? 맘 바뀌기 전에 내 차 타고 가쇼. 강도당했으면 땡전 한 푼 없을 텐데, 집에는 어찌 갈려고 그러고 있소?”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담배, 라이타, 심지어 껌종이까지.
“하하, 아직도 정신이 나가 있구만. 얼른 타쇼, 타서 얘기합시다. 나도 강도당할까 걱정이요.”
그 아저씨는 그 마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특히, 밤에 그 마을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귀신들려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쉬우니, 항상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절대 지도에 실리지 않으며 한번 온 사람들은 그 마을에 대대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 마을을 아는 사람들은, 마을 주민이 아닌 한, 그 마을에서 사고를 당했다거나 혹은 그 마을을 밤에 걸어 다녔던 사람뿐이라고 한다. 또한 그 마을을 지나칠 수 있는 택시기사도 그 마을사람인 경우가 많으며, 다른 지역의 택시기가들은 좀처럼 그 마을 가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나도 거기에서 사고를 당했으니, 항상 조심하라며 충고의 말 역시 잊지 않았다. 어느 덧 내 그리운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습니까?”
“이 사람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나 보구랴. 걱정마쇼. 또 볼 테니까! 하지만, 다음에는 댁이 나를 구해야 할 거요! 명심하쇼. 그곳은 귀신이 사는 마을이라는 거!”
그 아저씨는 낮에 그랬던 것처럼, 또 휭하니 사라졌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주차장을 둘러보았다. 내 차가 보이지 않았다. 경비실로 갔다.
“아저씨, 제 차 도난신고 좀 해주시겠어요? 그리고 저희 집 비상열쇠 좀 주시구요!”
“도난신고라니? 그쪽 차는 그대로 있던 것 같은데? 아침에는 다른 차 타고 나간 거 같던데, 차를 빌렸었나 보네? 쯔쯔쯔. 빌린 차를 도난당하면 어떡한다지? 암튼, 비상열쇠는 여기 있네. 그리고 지갑까지 통째로 도난당한 것 같은데, 카드분실 신고는 되도록 빨리하게. 잃고 나면 찾기 어렵다지, 아마?”
나는 주차장을 다시 둘러보았다. 내 차는 10년간 매일 놓아두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잠시, 정신이 멍했다. 방금 전에 보이지 않던 차가 왜 갑자기 보이지? 내가 탔던 그 차는 뭐였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분명, 귀신이 나오는 마을에 간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한 순간, 그곳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네, 아저씨,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잃어버린 것들, 얼른 찾아야겠어요.”
3.
현관문의 열쇠를 딴다. 딸그락. 내겐 이 경쾌한 음이 마음에 든다. 마음의 열쇠를 따듯이 내 집의 문이 내게 어서 들어오라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 한 발을 내딛으면 주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자동감지 형광불빛이 고개를 쑥 내밀면서 인사를 한다. 깜빡깜빡. 신발을 벗어 놓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 거실의 형광등을 켠다. 시커먼 어둠을 밝혀주는 저 형광등불의 흰 빛은 너무나 화려하다.
전화기의 리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전화는 자주 오지 않는다. 가끔, 회사나 집에서 급한 용무가 있거나 안부를 묻기 위해 걸리는 전화가 전부다. 매일 확인하는 전화이긴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처럼 하루라도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빠진 듯하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고 했던가? 이 전화기는 그 아저씨가 내게 생일 선물로 준 것이다.
“내가 전화했을 때 네가 없는 거 싫어. 네 목소리 녹음해 놔, 알았지?”
그리고 그 전화기에는 매일 그 아저씨의 목소리가 녹음되었고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좋아서 들었었지만.
오늘도 역시 그 텅 빈 세상은 나의 습관을 말리지 못하고, 공허한 잡음소리만을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눈을 감는다. 세상은 너무나 고요하다. 베란다 창문, 거실 창, 그리고 방바닥의 창문들을 모두 닫고 나면 내게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나만의 숨소리뿐. 명상에 잠기는 순간은 감미롭다. 그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숨결은 너무나 곱다. 그 사람은 눈을 감고 나의 애무에 몸을 맡긴다. 좀 더 감각적인 키스와 감각을 지닌 육체로의 여행. 그러나 나의 무딘 감각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게 말했다.
“그렇게 했는데, 흥분도 안 돼?”
그 사람은 내게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섹스를? 애무를? 감각을? 사랑을? 나는 그 사람이 단지 한 사내의 육체를 원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참는 거지.”
눈을 뜬다. 무엇을 참았다는 말이었을까? 나는 그 사람에게 무엇이었을까? 그 사람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나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육체적 본능.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씨x놈! “여보세요!”
“예, 여기 경찰선데요. 내일 좀 경찰서로 나와 주셨으면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누구 아는 사람 있나 와서 확인 좀 해 주십시오. 자세한 건 나오시면 아실 겁니다.”
그러더니, 전화는 툭 끊어졌다. 왜 이렇게 일방적인 사람이 많지, 하는 생각에 잠겨버린 나는 그 이상한 마을이 자꾸 떠올라 가슴에는 시퍼렇게 서늘한 마음이 차갑게 물들어갔다.
4.
씩씩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누구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또렷한 목소리로, 자 이번 곡은 G.O.D.의 “거짓말”입니다, 하는 아침DJ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라디오를 언제 켰지? 탁자 위에 널려진 담배꽁초와 빈 맥주병들. 내가 술을 마셨었나?
예전에는 술을 마셨을 때마다 항상 그 사람에게 습관처럼 전화를 걸곤 했었다.
“너 어제 나한테 한 말 기억해?”
“아니, 내가 뭐라고 했는데.?”
“너, 나한테 막 화낸 거 알아?”
나는 술 먹고 한 일이라 기억 못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간절하게 무언가를 원할 때 그것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나는 정말 기억 못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는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뻔한 거짓말을 했다. 그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그때에나 지금이나.
경찰서에서는 용의자를 가려내듯, 사람들을 일렬로 쫘악 늘어놓고 내게 저 중에 아는 사람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아는 사람만 말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참을 둘러보던 나는 저기 저쪽 끝에 어제 나를 도와준 그 아저씨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이상하다. 저 아저씨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나는 어이없게도 아저씨를 보니 반가워서 손을 흔들었다. 아무 반응이 없다. 손을 흔드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경찰관이 중얼거렸다. ‘속았군……’그 경찰관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엇에 속았다는 거지? 경찰관은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물어본다.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 저 아저씨가 강도당한 절 집에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 아저씨가 왜 저기 있죠? 친절한 분이신데.”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제 선생님의 차가 도난당했는데, 모르셨습니까?”
“제 차요? 멀쩡히 세워져 있던데요? 저도 제 차가 도난당한 줄 알았는데, 멀쩡히 세워져 있더라구요.”
“아 그러셨습니까? 아무튼, 저 분이 선생님을 집까지 데려다 주신 분이 분명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아, 죄송합니다. 사건이 명확해지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사건이 해결되면, 꼭 알려드리겠고 약속드립니다. 제가 직접 찾아뵙도록 하지요.”
“예, 어쩔 수 없지요.”
퇴근하는 길은 그지없어 아름다웠다. 며칠 전 그 사건 이후로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았다. 버스로, 지하철로 가는 길이 그렇게 복잡한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나름대로 견딜 만은 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시간보다는 덜 피로해서 오히려 더 좋았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는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여자들 틈새로 끼일라치면 내 입장은 더욱더 난처해지곤 했다. 괜히 치한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양손은 최대한 손잡이로 향해 있었고 여자들을 피하기 위해 온갖 자세를 다 갖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나의 자세에 별 신경 안 쓰지만, 간혹 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키 작은 사람이나 아이들은 키득대기도 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다는 것에 차츰 놀라고 있었다. 그렇게 키득대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보면 나도 덩달아 웃기도 했다. 그러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주위 사람들도 모두들 하나같이 나를 보고 키득대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가 있는 주변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음이 그칠 때까지 내 주위의 <우리>가 된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웃음이 그치고 나서야 고개를 돌리곤 했다.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오늘의 행선지는 집이 아니라 대학로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을 참석하기 위해서다. 대학로는 살아 숨 쉬는 거리다. 사람들이 대부분 돌아가기 시작하는 새벽녘 이곳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거리의 부랑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돈 50원으로 줄다리기 하는 사람들, 간혹 가다 행위예술이 번번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압구정동이 오렌지족, 일명 부자들의 거리라 한다면 이곳은 나 같은 가난뱅이들이 잘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모임장소에 가니, 수하가 먼저 나와 있었다. 나는 순간 뭔가에 홀린 듯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빠, 괜찮아?”
만나자마자 묻는 말이 다짜고짜, 괜찮아? 라니?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소리야? 괜찮냐니?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는 거야?”
“오빠, 기억 안나? 지난 번에……”
“지난번에? 언제? 지난 번 모였을 적에? 그때 내가 술 먹고 실수라도 했나?”
그녀는 눈을 치켜뜨더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
“오빠, 지난 토요일인가 일요일인가 나한테 전화했던 거 기억 안 나?”
숨이 턱 막혀왔다.
“뭐라고? 전화? 내가 너한테?”
“아니야, 됐어. 잊어버려. 모르는 게 좋아. 그냥 나한테 전화했었다는 것만 알아둬.”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수하의 단호한 결심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래, 고마워.”
나는 내가 왜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 수하는 더 이상 대답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또 무슨 말을 지껄였을까. 혹시 그 사람에게 했던 말들을 수하에게 주절거린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모임시간 내내 수하의 표정을 살폈지만, 평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내가 아는 수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충격적인 일을 겪었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 사람.
수하를 알게 된 건 벌써 10년이다. 처음 내가 이 모임에 들어갔을 때 수하는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수하는 어색해하는 내게 참 잘해 주었고, 그것이 힘이 되어 나는 지금 그 모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수하는 알면 알수록 숨겨진 매력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과 겪었던 전쟁을 수하와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네가 그렇게 화내는 것 싫어. 나 공주라고 했잖아.”
“알았어, 앞으로 안 그럴게.”:
내가 그렇게 순진했었나? 그 사람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사과하고 매달리고 있있던 내가 보인다. 몇 번이나 그렇게 붙잡았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은 헤어지자는 말을 습관처럼 했었고, 나는 그때마다 매번 매달려야 했다. 맹목적으로.
5.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이상하다. 왜 똑같은 세상이 되풀이되는 걸까. 탁자 위에 널려져 있는 담배꽁초. 늘어진 빈 맥주병들. 지난번과 다른 것은 아침DJ의 목소리 대신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보세요?”
“오빠, 뭐야? 아무리 봐주려 해도 봐줄 수가 없어. 오빠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진짜!”
다짜고짜 화를 내는 수하의 목소리.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했길래. “:수하야, 정말 미안한데, 화부터 내지 말고 제발 말 좀 해줘. 내가 어떻게 했길래?”
“정말… 기억 안 나?”
평상시의 목소리를 되찾은 수하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맑고 쾌청했다.
“제발 말 좀 해줘라. 나도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다.”
“그래, 그럼 만나서 얘기해. 전화론 너무 길어질 것 같네. 술은 마시지 말구.”
“그래, 고마워”
요즘 들어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너무 자주 하는 것 같다.
‘딩동, 딩동’- 55 -
벨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손님까지? 오늘이 무슨 날이지? 아, 연휴의 첫날이었군.
“계십니까?”
“예, 나갑니다.”
문을 열자, 경찰복 차림의 한 중년의 사내가 등장한다.
“저, 기억하십니까?”
“아, 예. 사건은 해결되었나요?”
“예,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사실, 그 사건에 대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 전화를 주시죠. 그럼 제가 나갈 텐데요. 굳이 여기까지 이렇게. 이왕 오셨으니 차라도 한잔 드시지요.”
“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아침식사 안하셨죠? 같이 식사라도 하시는데. 저도
아침 전인데… 제가 식사 대접이나 해 드리려 합니다만.”
경찰관의 식사 대접이라……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문득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해졌다. 나를 도와줬던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도.
“아, 정 그러시다면. 굳이 사양할 것도 없지요.”
나가려던 참에 거실의 탁자 위를 한번 쓱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담배와 라이터, 빈 맥주 깡통. 그 망할 것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빨리 나가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듯했다. 나오니 아침공기가 상쾌하다. 그 경찰관을 따라 들어간 곳의 아침 해장국은 묵은 속을 녹여주기에 훌륭한 먹거리였다.
“오늘, 비번이십니까?”
“아, 예. 맞습니다. 비번. 알아보시는군요, 비번인 거.”
“예. 저랑 이렇게 아침식사를 하실 여유가 있으신 걸 보니, 비번이란 짐작이 가네요. 그런데, 비번인데도 그렇게 유니폼을 착용해야 합니까?”
“아, 참 그게. 선생님께서 혹시나 저를 기억 못하시면 어쩌나 해서 일부러 입은 것입니다.”
“일부러요?”
아침식사를 하러 들어오는 70대가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 역시 나와 같은 해장국을 시켜놓고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요?”
“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어서라고 다시 정정 해야겠군요. 자, 식기 전에 우선 드십시오. 먹고 나서 천천히 얘기해 드리죠”
내가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 이렇게 속이 든든해지는 해장국은 처음이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그 경찰관은 식사 중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식사에 열중하는데 딱히 물어볼 수도 없어서 대화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담뱃재가 내 호흡과 함께 타들어갔다. 그 경찰관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실은 얘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기분 나빠 하실지도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제 기억력 따윈 믿지 않으니까요.”
“하하하, 그러셨군요. 사실, 지난 번 선생님께서 서에 오셔서 지명하셨던 그 아저씨는 옷만 똑같이 입었을 뿐, 선생님께서 얘기하셨던 그분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 경찰관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보았단 말인가. 나는 그 아저씨의 눈을 봤을 뿐인데.
“선생님의 차에서 이상한 점 발견 못하셨습니까?”
“전 그날 이후로 차를 놔두고 다녀서,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차 팔아버릴까 고민 중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날 강도를 당하신 건 분명하지요?”
“사건 다 끝난 게 아니었던가요?”
“아,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 있어서.”
“아, 그 버릇. 버릇이란 거 함부로 못 고치지요. 제가 강도당하는 것도 버릇 중의 하나지요. 그런 일 자주 일어납니다. 신경도 안 쓰여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다행이죠.”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 제가 보험금이라도 노리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하하, 머리회전이 지나치게 빠르시군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일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경찰관은 나를 지금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취조를 하듯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날 일을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텅 빈 내 머리를 그는 이상한 얘기로 꽉꽉 채워 넣기 시작했다.
6.
쌩쌩 지나치는 자동차의 바람소리만이 그의 귓가를 휙휙 스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소리, 듣기 싫다. 그러나 그는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걷더니 그는 다시 개울가로 내려갔다. 물소리가 맑았다. 그는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너무 멀리 왔어’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맑고 초롱초롱하게 빛났지만, 어딘가 텅 빈 듯 했다. 무엇인가가 그를 압박하는 듯 했다. 그는 그렇게 계속 걷고 있었다.
아파트가 보인다. <드디어 왔군> 그의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여기가 내 집이군> 그는 흰 차를 가리켰다. <그래, 이게 내 차야. 드디어 자유다!> 그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출발이다, 자유를 향해!> 그는 아주 오래되고 울퉁불퉁한 길만을 골라서 차를 몰고 다녔다. 덜커덩 덜커덩.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본능적인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능숙하게 기어를 바꿨으며 차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서, 겨우 손가락 하나 닿을 만한 너비의 차이로 사고를 피해 가기도 했다.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백미러도 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앞만 보고 운전할 뿐이었다. 그의 온몸을 감각에 의존하고 있었다. 길에 이어진 들판의 도로를 지나 산을 넘었다. 다시 울퉁불퉁한 비포장의 길이 나올 때까지 그는 차를 몰았고 그 중간쯤에 차를 멈춰섰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 불안해 보였고, 급한 표정으로 기어를 넣기 위해 애썼다. 그때까지 그렇게 귀신이 곡할 정도로 운전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했다. 그의 얼굴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다, 그는 갑자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리를 갑자기 조수석으로 옮긴다.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는 그렇게 조금 앉아 있더니, 아무도 없는 옆자리에 대고 한마디 한다.
“저, 그런데… 제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죠?”
그는 조금 있다가 차 번호판을 확인하더니,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었다. 그는 이곳에 올 때와 같은 놀라운 솜씨로 다시 그의 차를 되돌려놓고 있었다.
7.
나는 다시 정신이 멍해졌다.
“선생님은 차를 집에 갔다 놓더니, 다시 그 길을 따라 선생님이 가셨던 그곳까지 걸어서 가셨습니다. 놀라웠습니다.”
“제가 정말 그랬다구요?”
“네 그러셨습니다. 그날 목격자의 증언도 나왔고, CCTV에 찍힌 선생님의 얼굴도 또렷이 보였습니다. 그날 선생님의 행적을 쫓느라 우리 모두 애먹었습니다.”
“왜 저의 행적을?”
“저희들도 이 사건이 이상한 사건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있는데, 범죄한 흔적은 없고. 강도는 당했는데, 막상 잃은 건 하나도 없는 사람. 그래서 정말 이상한 사건이다 싶어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그럼 나를 그때 나를 도와주었던 그 아저씨는 뭔가? 나는 정말 귀신이 들렸었던 것일까? 점점 더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제가 지명한 그 아저씨와 저를 집까지 태워준 그 아저씨는 뭡니까? 제가 환각을 본 것입니까?”
“선생님, 선생님을 댁까지 모셔드린 그 아저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날 혼자서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아무도 선생님을 모시고 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정신 병력이 있으신 것도 아닌데, 그 점이 의아했습니다. 저희가 내린 결론은, 꼭 선생님께서 정신과진료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그때 제가 지명했던 그 아저씨는요?”
“선생님. 그 분이 선생님을 보았다고 증언하신 목격자이십니다. 선생님께서 차를 위험하게 몰고 계시길래 선생님을 쫓아다녔다고 하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쫓아다니셔서 선생님은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고 그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저희도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선생님께서 사고를 내실까봐, 걱정하면서 바짝 뒤를 쫓아가셨다고 합니다. 선생님, 과속을 하지 않으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과속으로 찍히셨으면, 벌금은 물론이고, 위험운전으로 구속수사까지 당할 뻔 하셨습니다. 저희는 길고 긴 상의 끝에 선생님께서 병원 진료를 받으시는 조건 하에 위협운전을 한 건에 대해서는 기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무례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의 무례함이라도 보인다면, 화라도 내면서 몰아 부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기분 나쁘게 정중한 인간이었다.
“변명 한 가지만 더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 선생님께 말씀을 못 드린 것은 사건을 명확하게 파악하고자 함이었으니, 부디 양해바랍니다.”
햇볕이 너무 눈부시게 따가워, 손으로 눈에 그림자를 만들어 걸어야만 했다. 수하의 얘기를 들어야만 한다는 게 두려웠다. 나는 또 그녀에게 어떤 말들을 퍼부었을까. 이상한 욕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내 비밀이라도 털어놓았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녀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는지도 모른다. 수하는 먼저 와서, 졸린 듯 눈꺼풀을 비비고 있었다.
“아웅,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 잤네.”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수하는 평상시처럼 날 맞이해 주었다.
“어, 나 때문에 잠도 못잔 거야?”
“알면 됐어!”
수하의 퉁명스런 말투에 편안해짐을 느낀다. 반면에, 두려움도 함께 느낀다.
“내가 대체 뭐라 그랬는데?”
“급하기도 하셔라… 뭐 마실래?”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내 생각대로라면 수하는 내게 화내며 막 따져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어찌어찌했으니, 앞으론 그러지 마라, 이런 식의 말을 퍼부어야 정상이다. 아무리 봐도 내가 당하는 기분이다. 나는 수하의 맑은 눈을 빤히 바라본다.
“오빠, 오늘은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면 안 돼? 그냥 이거 마시면서, 그냥 마음껏 우리의 데이트를 즐기는 거야!”
갑자기 신이 난 수하는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날 수하와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수하는 내게 다음에는 연극을 보러 가자며, 내게 티켓을 구해 오라고 시켰다. 막무가내인 수하의 모습에 나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8.
병원에서 받은 검사결과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나의 이상적 징후는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날 수도 있는 현상이라는 게 의사의 소견이다. 나는 진단서를 떼고서 한편으로는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갔던 그 마을을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찾을 수 있을까. 문득, 나의 차가 생각났다. 어쩌면, 네비게이션에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까. 아니면, 블랙박스에라도 찍히지 않았을까. 그 마을을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내 차의 어디에서도 그 마을과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주행거리조차 의심이 갔다. 분명, 먼 거리였을 텐데? 그 사건 이전에 내가 기억하는 주행거리와 그 이후의 주행거리가 별 다른 차이가 나지 않았다. 분명, 멀리까지 간 것이 분명한데.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분명, 어딘가에 그 마을이 있을 것만 같았다. 보릿고개를 넘어가듯 나는 꾸역꾸역 길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내가 가는 길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한 기쁨. 그 기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하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오를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나를 도와줬던 그 아저씨의 얼굴도 어렴풋하게 떠오를까 말까 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 환각을 본 게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마을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믿음을 갖고 나아가기 시작하니, 길은 내게 진짜 그 마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차가 쌩쌩 달리고 있었고, 나는 어느덧 개천을 걷고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일까. 어디선가 본 듯한데. 여기가? 그렇다. 지난번에 왔었던 그 굴다리다. 나는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몇 걸음 앞에 그 사람이 있었다. 아, 또 나는 꿈을 꾸고 있구나, 하는 순간,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에게 조심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내 사라져버린 그 사람의 얼굴 대신, 그 아저씨가 내 앞에서 또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말을 걸고 있었다.
“또 헛것을 보는 모양이로군. 여기 함부로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또 오셨수?”
“여기는 대체 어디인가요? 여기는 뭐하는 곳이지요?”
“인생이 별로 행복하지 않은 모양이로구만. 여기를 또 온 걸 보니.”
“제가 보는 게 모두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수다. 여기는 진짜 존재하는 마을이고, 댁은 그냥 그 존재하는 마을의 일부를 보고 있을 뿐이오. 행복한 사람들은 여기를 찾아오지 않수다. 인생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를 오곤 하지.”
“이곳에 뭐가 있는데요?”
“그대의 환상, 그대가 원하는 마음이 보이는 곳이오. 그대 마음을 들여다 보시구랴.”
“제 마음……”
9.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뭔가, 또 아침인가? 얼른 시계를 보았다. 18시. 저녁 여섯시? 핸드폰에 새겨진 날짜를 본다. 오늘은 설날이다. 전화기의 벨소리는 계속 울려댔다. 왜 핸드폰이 아닌, 전화기로 계속 전화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투덜대면서 전화를 받자, 수하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오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새해 복 많이 드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랑 떡국 먹으러 가자!”
“지금?”
“그래, 지금!”
“근데, 너 나랑 사귀냐?”
갑작스런 나의 물음에 수하가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하하하. 오빠 말 대게 웃기다. 그래, 오늘부터 사귀는 걸로 하지 뭐!”
“내가 너랑 왜 사귀어야 하는데?”
“오빠 정말 기억 안나”
“뭘?”
“오빠가 나 좋아한다고 전화로 몇 번이나 떠들었는데.”
“내가?”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뺌하네.”
“나 그런 기억 없어.”
“안 속네!”
“응?”
“오빠! 사실은 말이지. 오빠, 나한테 전화해서 엄청 욕했어.”
“헉! 진짜?”
“그래, 진짜!”
“미안해”
“옛말에 그런 말이 있거든.‘내가 받지 않았으므로 그 욕은 여전히 그대의 것이오.’어떤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나도 기억은 안 나네. 오빠처럼. 그러니까, 오빠가 나한테 아무리 욕해도 그 욕은 여전히 오빠 거야! 그러니까, 떡국은 오빠가 사는 거야!”
오늘도 수하는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설날이라고 음식을 파는 가계가 없네. 어떡하지?”
“넌 설날 때 부모님 안 보러 가냐?”
“그러는 오빠는? 오빠도 안 보러 가잖아?”
“뭐 그야 그렇지만……”
“오빠, 왜 나한테 욕했어?”
“나 기억 안 나! 그런 적 없다고!”
“흐음… 정신과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왜 이런 날에 수하를 만나고 있는 것일까. 내 마음에 수하가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오빠, 우리 오늘부터 1일 할 거야 말거야?”
“나도 모르겠다.”
“무슨 대답이? 좋은 거야, 안 좋은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 알았다. 내가 좋아하면서 기다리지 뭐.”
“응?”
갑작스런 수하의 반응에 나는 어찌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내가 기다리겠다고! 내가 오빠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때였을 것이다. 수하의 눈에 그 아저씨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은 그때부터가 또 시작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그 아저씨의 눈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네 마음을 봐라… 네 마음의 저울추가 움직이는 곳에 네 마음을 맡겨 봐라.”
어쩌면, 이 순간이 내가 아주 오래도록 바라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은 이제 떠나고 없다. 마지막 헤어짐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내게 이유 없는 이별통보를 했고, 나는 그 사람에게 한동안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그 집착이 오히려 그 사람을 질리게 했고, 결국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다달았다. 급기야 그 사람은 나를 스토커로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매달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단순히 스토커일 뿐,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나는 그 후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인생에 목표 따윈 없었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았다. 이제 그 사람을 놓아야 하는데!
그 아저씨의 눈은 내게 또다시 말했다.
“수하가 너의 삶이길 바라지는 말아. 만약, 수하가 네 삶의 전부가 된다면 너는 그때처럼 또다시 절망하게 될 거야. 온전하게 너 자신의 마음을 봐라!”
그 아저씨의 눈이 사라지고, 다시 수하의 맑고 상쾌한 눈이 내 눈에 들어왔다. 수하의 눈이 몹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무슨 생각 중이야! 또 욕하려고 그러지!”
“아니, 아니야. 수하야, 오늘부터 1일 하자 그랬지?”
“응, 할래?”
“1일 말고 첫날 하자.”
“뭔 소리야?”
“너와 나의 인생이 시작되는 첫날.”
“그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그러니까 그게……”
“또 망설이는 것 봐! 됐어, 나 첫날 안해. 그런 깊이 있는 것 난 몰라. 그냥, 가볍게 사귀다가 좋으면 첫날 밤 하는 걸로!”
“결혼도 안 하고”
“고지식하긴!”
“그래도 결혼은 하는 게…”
“오빠, 1일 하자마자 청혼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결혼, 까짓 거 해주지 뭐.”
나의 당황스러움에 수하는 깔깔 웃음을 웃더니, 당장 웨딩드레스를 알아보러 가자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오빠, 밥 먹으러 가자. 우리 집으로. 배고프다. 당장, 밥 사 먹을 때도 없고.”
“집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마, 오빠,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려야지.”
그러면서,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갖고 싶은 선물을 받은 걸 마냥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나의 마음이 기우는 저울추는, 누군가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흐뭇해지는 경험을 하는 쪽에 기울고 있다는 것을. 그 저울추는 언젠가 제자리를 찾아 삶의 균형을 적절하게 맞추어 내 삶을 안전하게, 그리고 적당한 무게를 놓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수하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옆에 섰다. 내 옆에 선 수하가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오빠, 우리 부모님한테도 그렇게 욕하면 안 돼. 난 네가 좆같이 좋다는 말.”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옆으로 수하의 웃음소리가 허공 멀리 멀리로 산의 메아리가 울리듯 퍼졌다. 거리의 비둘기들이 나름대로 먹이를 쪼아대면서 그들의 머무름을 방해하는 우리들에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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