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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무명중생 원문보기 글쓴이: 南無
땀 흘리는 비석 |
유적지종류 : 사찰 관련 장소 :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설화종류 : 사찰전설 시대 : 조선후기 <요약> 밀양·표충사 표충사(2004.11.25현재 사찰 DB 없음) 색인 추가 : 인물 - 남봉스님 색인 <내용> 임진왜란 때 나라를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에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이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설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 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봉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담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림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쫙」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경루 날씨인데도 비석 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15해방, 6·25동란, 4·19학생의거, 5·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16혁명 때는 5일간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 3말 8되나 흘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25 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이 표충비에 서려 있다고 믿고 있지요. 매년 관광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 여 명의 관광객이 들르는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안내합니다.』 사명당 추모회 구장회 회장의 말처럼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체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똑같아서 앞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뺨으로 흘러내리는 듯 비석 전후면 머르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외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저희들은 사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노 한 분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62년 장마 때는 보리가 썩어 나갈 정도였는데도 비석엔 습기 하나 차지 않았다.』며 사명대사의 높은 도력을 거듭 강조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
표충각은 삼비문(三碑門)을 지나 표충비각으로 들어가는 삼문 왼편에 있는 사당(祠堂)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이 건물은 재약산 표충사를 축소한 것이며, 1838년(헌종 4) 표충서원이 천유대사(天有大師)에 의해 재약산 아래 영정사(靈井寺)로 옮겨지면서, 비각을 보전하기 위해 지은 원당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외부는 3단의 장방형 화강암을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과 기둥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로, 외벽에는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건물 전면에는 주련 4기와 ‘표충각’이라는 편액 1기가 걸려 있다.
내부에는 건물 후벽에 붙은 제단 위로 사명대사(四溟大師)ㆍ 서산대사(西山大師)ㆍ영규대사(靈圭大師)의 3대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보통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사명ㆍ영규대사가 봉안되나, 이곳은 사명대사의 수호사찰이어서 사명대사의 진영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영은 면 바탕에 채색되어 있으며, 크기는 높이 176㎝, 폭 126㎝이다. |
표충비각 |
송운대사 영당(松雲大師 影堂)의 비각으로 일명 표충비(表忠碑)ㆍ삼비(三碑)ㆍ‘땀흘리는 비(汗碑)’ 등으로 불린다.
송운(松雲)은 사명(四溟)과 함께 사명대사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南鵬) 스님이 삼강동 어귀(현재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것으로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 380㎝에 비신은 높이 275㎝, 너비 98㎝, 두께 56㎝에 달하는 거대하고 장중한 비석이다.
비석의 정면에는 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松雲大師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사적기(表忠寺事蹟記)를 음각하였다.
정문 비문의 내용은 송운스님의 평생 행적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빛나는 구국충렬을 찬양한 것으로,
영조 때의 문신 이의현(李宜顯)이 글을 짓고 김진상(金鎭商)이 글씨를 썼으며,
영상을 지낸 지수제(知守齊)ㆍ유척기(愈拓基)가 전액을 썼다.
뒷면에는 서산대사의 공덕과 기허대사(騎虛大師)의 사적을 칭송한 비문을 썼는데,
비문은 이우신(李雨臣)이 짓고 글씨는 윤득화(尹得和)가 썼으며, 전액은 조명고(曺命敎)가 쓴 것이다.
또한 옆면에 새긴 표충사사적기는 영조 때 문형(文衡)인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것이며
서명균(徐命均)이 비문을 쓰고, 조명교가 전액을 썼다.
표충비 |
이 비는 1738년(영조 14)에 남붕스님이 표충당의 영당 건립과 함께
추진한 사업의 일환으로, 당대의 명유(名流)들이 비문과 글씨를 짓는 등
사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참여한 조선후기 비의 걸작이다.
비의 조성은 당시 영정사(靈井寺) 스님인 범윤(梵玧)이 각자하고
시공ㆍ감독하였으며, 1805년(순조 5)에는 주지 경명(頃明)이 비각을
보수ㆍ단청하고, 1807년 봄에는 정일(鼎馹) 스님이 비각중수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천유(天有) 스님이 표충사 영당을 비롯한 사우(祠宇)를
영정사로 이전하면서 이 비각을 표충비각이라 이름하고 독자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비각 오른쪽에 자그마한 원당과
그 아래쪽에 삼비문(三碑門)을 건립하여 정문으로 삼았다.
그 후 비각의 관리는 표충사 승려가 번갈아 파견되어 담당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대처승이 허물어진 원당과 요사를 모두 헐고
포교당을 지어 비각을 보존하였다.
광복 후 구연운(具蓮耘) 스님이 비각관리를 맡아 비각과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가람을 보존하고 정비하여 수십년간 삼대사의 충혼을 받들어왔다.
이 비는 ‘한비(汗碑)’라 하여 나라에 큰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 비면에 자연현상으로 땀방울이 맺혀 마치 구슬처럼 흐르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곳 사람들은 나라의 우환을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이러한 영험은 기후변화에 따른 외기(外氣) 현상이라고도 하고, 비석 자체의 함염(含鹽) 현상에 기인한 것이라고도 하여
과학적인 해명을 하고 있지만,
땀 흐르는 광경을 목격해 온 이곳 주민들은 그러한 설명을 믿지 않고 사명대사의 영험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비석의 사면에서 흐르는 땀이 여름날 농부의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처럼 맺혀 며칠씩 계속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옆면 혹은 한 면에만 잠깐씩 흐르다 그치기도 하여 그 신비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 땀이 비석의 전면(全面)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비신의 글자 획 안에서만 흘러나와 과학적으로 풀지 못하는 영험으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표충비라는 이름보다 ‘땀 흘리는 비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_()_()_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