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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7월 19일 주일 메시지
누가가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23
제목: 다양성이 공존하여 번성하는 공동체
누가복음 13: 1~17
설교 목적
지난 주일에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서 다루었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인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그 사명을 같이 한다.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여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라고 부름을 받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하나님의 경륜의 관점에서 살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망각할 때 사람이 바벨탑을 쌓거나 하나님을 부족의 수호신으로 오해하여 배타적인 민족이 되고 만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을 늘 기억하고 그 일에 동참하기를 기도하는 교회가 어떻게 그 소임을 다할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을 통해서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누가복음 13장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대리인인 우리가 먼저 대리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롤모델로 삼아 그의 가르침을 잘 살펴서 오늘에 적용하고자 한다. 이 본문을 여섯으로 나누어 각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주제들이 오늘 우리 상황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번 주는 우선 세 개의 주제를 생각해 보고 다음 주에 나머지 주제들을 생각해 보겠다. 이 메시지를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할 일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설교 개요
1. 들어가는 말
2. 1~5: 험담보다 공감과 자성을
3. 6~9: 본분을 망각하지 말라
4. 10~17: 두려움에 물든 신앙
5. 다양성이 공존하여 번성하는 공동체
1. 들어가는 말
지난 주일 우리는 ‘교회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시는 까닭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함께 관리하고 그것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언약하시며 그들이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에게 제사장의 특권과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같은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에 다니며 만민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맡은 임무는 아담 부부가 맡은 피조세계의 관리자요, 또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처럼 제사장으로서 열방의 축복과 모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세상은 회복되고 혼돈한 땅에는 질서가 세워지며, 공허한 땅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 위대한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의 축복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토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빛나는 제사장들로 만드시려는 가르침입니다. 마찬가지로 열방을 위한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예수님은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쉐마라고 하는 신명기 명령(신 6:4~9)은 교육 명령이며, 예수님의 지상사명(마 28:18~20)도 선교만이 아니라 선교와 교육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교회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 임무를 잘 수행하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르침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많이 가르치겠습니까? 그들은 성경을 아예 암송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이 오셔서 가장 많이 책망을 하신 대상은 성경을 가르치는 레위인들과 율법교사들입니다. ‘가르치되 무엇을 가르치는가? 배우되 무엇을 배우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가르침으로 말하면 신천지 신도들만큼 많이 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이 너무 불량하여 그들의 삶이 한국 사회에 위험요소가 되며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우는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하는데 그 말씀을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교회의 존망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베뢰아인들처럼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들처럼 과연 이 말씀이 그런 뜻인가 하는 깨어 있는 정신으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 소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시며 참된 대리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본보기를 잘 살펴서 따라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 교회 설립 39주년 기념주일이라서 교회에 대하여 설교를 했는데, 오늘부터 다시 누가복음 강해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강해설교는 지난 주에 제기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 문제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 소임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 험담보다 공감과 자성을(1~5절)
누가복음 13장의 첫 이야기는 어떤 두어 사람이 예수께 와서 한 사건을 들려주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사건이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누가복음 13:1, 공동번역)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 왜 이런 이야기를 일러드린 것일까요? 빌라도라는 통치자가 얼마나 악한가를 드러내어 폭동을 일으키자는 것일까요? 아니면 갈릴리 사람들이 무모하게 빌라도의 심기를 건드려 죽었다고 그들의 경솔함을 지적하려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들도 어떤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누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를 받는다더라 하는 뉴스도 듣습니다. 정치인들의 스캔들도 하루 종일 뉴스에서 반복 재생되며 인터넷도 그런 소식을 무한반복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그 소문을 알리며 때로는 험담하기도 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말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에게 대한 불미스러운 소식이 들려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2~5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죽임당한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으시고 그 말을 전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듣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소식을 들은 너희도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게 하라.’ 사람들에게 임한 재난을 이야깃거리로 삼지 말고 그 사건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처럼 권면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그리고 로마 교회에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언제나 재난이 있을 수 있고 사건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공감해주는 것입니다.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은 함께 애도해 주고, 기쁜 일을 맞은 사람은 함께 즐거워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험담하지 말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스스로 정결한 삶을 살도록 다짐하는 계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이 세상을 사는 방식은 험담이 아니라 공감과 자성(自省), 즉 자기 성찰입니다.
3. 본분을 망각하지 말라(6~9절)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한 비유를 들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3:6~9
이 이야기는 삼 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겠다는 포도원 주인의 결심을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하나님의 임무를 망각하고 세월을 허송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를 예수께서 비유로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은혜를 베푸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며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말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 보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말은 그들이 열방에게 모범을 보임으로 하나님 경외하는 삶을 가르칠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본분을 망각하는 사람은 마치 집을 짓되 설계도를 잃어버린 건축자와 같습니다. 본래 꿈꾸던 집이 지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도 정신을 가다듬고 목적과 의도를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글은 지을 수 없으며 설령 짓는다 하더라도 그 글은 횡설수설하여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본분과 삶의 목적을 망각한 사람이 짓는 인생의 집이 이와 같습니다. 그가 매일 쓰는 인생의 이야기가 이와 같이 무질서하고 갈팡질팡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공동체의 일원이며 하나님께 부름 받은 존재라는 사실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세계를 아름답고 생명 충만한 곳으로 만드신다는 이 목적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될 것입니다.
나무는 뿌리에서 물과 양분을 흡수하여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햇빛에 비추어서 인생의 열매를 맺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본분을 망각하면 아무리 그의 시간과 물질이 많더라도 그것은 도무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도리어 죄의 열매만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 삶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부탁합니다. ‘일년만 더 기다려 주십시요. 제가 잘 가꾸고 돌보겠습니다. 그런 후에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 때 찍어버리십시요.’ 우리 모두에게는 심판의 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4. 두려움에 물든 신앙(10~17절)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하실 때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 꼬부라져 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자는 온전하게 되어 기뻐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화를 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누가복음 13:14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일에 대하여 회당장이 칭찬은 하지 않을망정 화를 내며 비방합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병 고치는 일은 엿새 동안의 평일에 하고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면 거룩하게 지키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규정을 정했습니다. 그 규정들 때문에 안식일에 얼마 이상 걸어가는 것을 금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길가에 있는 이삭을 훑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을 보고 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바리새인들이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누가복음 6:1~5).
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까요?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이 믿는 하나님은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비롯하여 율법을 잘 지키지 않으므로 나라도 망하고 성전도 불타고 장정들은 먼 나라에 끌려가고 부녀들은 겁탈(劫奪)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소홀히 여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그들의 과거를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우려하여 그토록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는 끔찍합니다. 독재국가를 보십시요. 거기는 화려한 카드섹션을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창의성과 자발적인 봉사정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두려움에 의해 경직된 박수와 조작된 환호성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획일화된 사회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들판에 옥수수가 가득 심겨져 있는 평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온통 옥수수밭입니다. 다른 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종류의 생물만이 있는 자연은 바이러스에 치명적입니다. 자연은 다양한 생명이 서로 어우러질 때 아름답고 건강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다양하게 생명을 창조하셨고 다양성을 추구할 때 세상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다양한 것을 품을 수 있는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공존하고 어우러집니다. 미국이 강대국으로 자라날 때 전 세계로부터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여 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회를 용광로(melting pot)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다양한 생각이 꽃피고 어떤 나라에서 왔든지 어떤 인종이든지 누구나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미국 사회가 문화적 자신감을 상실하고 두려움이 그들을 점령할 때 미국은 문을 닫고 장벽을 세우며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외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이나 베트남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의 문제라고 여기고 원조를 하거나 관심을 기울이며 청년들을 군대로 보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의 문제만이 ‘우리’의 문제요,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을 위해서 방위비를 뜯어내려고 온갖 수단을 모색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회당장의 신앙은 두려움에 기초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예수님에게 화를 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혜택을 받게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게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화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용서와 은총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서로를 형제와 친구라 하면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피조세계를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라는 초청의 메시지입니까?
우리의 전도는 천국 아니면 지옥을 선택하라는 양자택일의 최후통첩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참 인간의 도리와 본분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멋진 대리인의 삶을 보여주고 함께 그 일에 동참하자는 권면입니까?
우리가 기대하고 꿈꾸는 인류의 미래는 점점 타락하다가 죄가 가득하여 마침내 불심판을 받아 불에 타버리게 될 것이지만, 선택받은 몇 사람들은 공중에 들림 받아 저 우주 어디엔가 있을 천국으로 이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피조세계를 돌보시고 회복하시려고 대리인들을 부르시고 보내셔서 일하셨듯이 오늘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부르셔서 예언자들의 꿈처럼 사막을 낙원으로, 광야를 생명의 평원으로, 그리고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여호와의 물 댄 동산으로 회복하실 것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위 두 가지 그림 중에 어느 것입니까?
우리가 사죄의 의미와 전도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어떤 그림을 마음에 그리느냐에 따라 오늘 우리가 만나는 현실을 해석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행을 비방하고 분노한 회당장은 그의 마음에 어떤 신앙과 두려움이 있는지를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이 두려움에 기초한 신앙을 가진 회당장의 신앙과 비슷하지 않은 지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을 노아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심판, 그리고 장차 올 불심판 이야기로 읽어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서 아담 부부와 노아 가족, 그리고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빛을 발하게 될 이스라엘에 대한 기대 어린 눈망울로 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하나님의 심판을 앞당기기 위해 땅끝까지 전도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땅끝에 있는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기쁨을 누릴 생각으로 선교와 전도를 할 수는 없었을까요? 이런 생각은 회당장의 비뚤어진 마음처럼 왜곡된 것임을 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5. 다양성이 공존하여 번성하는 공동체
지금부터 천 년 전, 서양의 끝자락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라는 도시는 서양의 그 어느 도시보다 발달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거기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 이슬람 신자와 아프리카 원주민인 베르베르인들은 서로 공존하며 자신들의 기량을 펼치며 도시를 발전시켰습니다. 그 도시에 도서관이 80개나 되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당대에 최첨단의 문화를 선도했습니다. 그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다스린 인물은 압둘 라흐만 3세(929~961)입니다.
이 이슬람 지도자가 다스리던 시대가 저물고 기독교 통치자가 그 도시를 점령하고 나서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습니다. 상당수 무슬림들은 모로코나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받아준 곳은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이스탄불의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안달루시아의 두뇌집단들이 대거 이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문명의 중심은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로 옮겨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다민족 사회로 변화된 지 오래입니다. 이제 다양한 인종이 다양한 종교를 이루고 공존하는 사회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하여 지구촌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을 선도하느냐 아니면 아시아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로 다시 되돌아 가느냐가 판가름 날 중요한 시점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본래 이민자들의 나라로 출발했으나 이제 이민자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나라, 외국 유학생들을 추방하겠다고 겁주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차별과 배제는 독재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독재자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기득권에 집착하면 선배가 후배를 억압할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열어가야 할 미래에 대한 꿈이 살아 있다면 가능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영입하고 환영하며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그들의 재능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격려하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더 이상 인종이나 피부색 그리고 출신지나 학력 등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우리편 그들의 편을 가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며 나의 생각이 귀한 것처럼 그들의 생각도 귀하게 여겨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 온전하지 않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나와 다른 그의 생각이 결국 나에게 유익이 될 것을 확신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결국 우리와 함께 할 동지요 동무요 동역자요 공동 상속자임을 알고 그렇게 대우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을 배운 사람들의 삶입니다.
안식일에 장애인을 치료해 준 예수님을 향하여 분을 냈던 회당장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누가복음 13:15~17
“안식일이라 해서 자기 소나 자기 나귀가 배고프지 않도록 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하물며 열여덟 해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그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예수님의 말씀은 이 고통받는 여인도 우리와 같은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와 다르지 않으며, 이 사람은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으며, 이 사람은 우리 중에서 같은 형제요 친구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일깨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하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그 일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대리인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고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와 같은 의미로 '우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우리는 가족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우리는 자기 나라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우리는 온 세상 만민을 포함합니다. 자기 집에서 기르는 소나 나귀는 우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회당에 참여한 병든 여인은 우리 가족이라고 생각할 줄 모른다면 회당장처럼 교리나 편견으로 사람을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약한 사람이 숨 쉴 공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세계인이 존경하는 인도의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나라의 위대함은 가장 약한 사람들을 그 나라가 어떻게 대우하느냐로 드러난다.
A nation’s greatness is measured by how it treats its weakest members.
Mahatma Gandhi.
우리나라의 위대함은 코로나 상황 속에서 전국민을 우리 의료보험이라는 울타리 속에 감싸 안았기에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위대한 대한민국은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라는 공존의 울타리에서 함께 살아가며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 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입니다. 18년 동안이나 억눌린 여인을 풀어 자유롭게 해 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공동체 안에 약하여 억눌린 사람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정중한 악수를 청하며 살아갈 때 그곳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넓게 이루어지느냐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전도지를 뿌리고 성경을 나누어주느냐에 있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포함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여 개종하게 하려는 전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종교 갈등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우리라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생육번성충만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이 성취될 것입니다. 천 년 전에 유럽의 끝자락에 있는 코르도바라는 도시에서 이슬람 지도자가 보여준 콘비벤시아(Convivencia) 공존의 정신을 오늘 아시아의 동쪽 끝자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실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 주에는 누가복음 13장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으로 사는 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끝>.
누가가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23.다양성이 공존하여 번성하는 공동체.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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