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본관은 義城(의성), 이름은 昌淑(창숙), 心山(심산)은 그의 號(호)이다. 선생의 父 김호림은 경북 봉화 바래미(海底) 八吾軒(팔오헌 :김성구) 자손으로 태어나 文貞公(문정공) 東岡 金宇?(동강 김우옹)선생의 경북 성주로 出家(출가)한 바, 선생은 13대 종손(출생:1879년 음력 7월)이다. 훗날 왜경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하체가 부자유스러워지자 남들이 ?翁(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 불렀는데 선생도 따라서 스스로를 벽옹이라 하였다.
선생은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독립과 통일민족 국가의 건설이라는 민족적 대의를 위해 오로지 일생을 바치었으니, 철들면서부터 시작된 애국계몽운동, 국내외에서의 혁명적 항일 투쟁, 해방 후의 반독재 민주투쟁, 분단 체제하의 통일정부 수립운동 등이 그것이다
心山(심산) 金昌淑(김창숙)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國亡(국망)에 무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功勞爵(공로작)'을 수여한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였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 는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李載完(이재완), 순종의 장인 尹澤榮(윤택영), 명성황후의 동생 閔泳璘(민영린)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때 일제는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지배층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김창숙은 『자서전-벽옹(?翁) 73년 회상기』 에서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은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은 大儒(대유) 李承熙(이승희)와 함께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_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를 올렸다. 고종은 아무런 회답이 없었고 김창숙은 통곡하고 돌아왔다.
1909년에 접어들면서 나라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져갔다. 일진회 주구들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을 빌미로 융회 황제에게 ‘한일합방’을 상주하는등 매국광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일진회 두목 宋秉畯(송병준)·李容九(이용구)와 그들의 주구 최창규, 이원달 등이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김창숙은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개략 70여명이 참석하였음) 총무로 추천되어 이같이 말했다.
“............ 우리의 의리상 일진회 역적들과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 이놈들을 성토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두 백면서생으로 손에 아무무기도 갖지 못했으니 놈들의 고기를 씹고 가죽을 벗겨 원수를 갚자 해도 실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형세다. 하물며 요즘 조정에서는 유생들이 상소해서 국사를 말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 역적을 성토하는 방법은 오직 중추원에 건의하는 한 길이 있을 뿐인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한가.” 『자서전』
심산 김창숙의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 라며 처벌을 주장하는 건의문에 하나둘 호응자가 나오니,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하는 사안이라 최종 서명자는 소수(김창숙, 김원희, 이진석, 최우동 등 4명)였고, 중추원에 보냈다. 성주 주둔 일본 헌병분견대 소장 노전(盧田彌之介)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곧 반역이 아닌가?" 라며 건의문 취소를 요구하자, 김창숙은 "사직(社稷·나라)이 임금보다 중한지라, 난명(亂命·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충성하는 길이다"라고 답한다. 이 문제로 피체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룬다
<청천서당(晴川書堂)은 고종5년(1868년) 청천서원이 훼철되자 김창숙의 아버지인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서당으로 꾸민 것. 1910년 김창숙이 애국계몽의 일념으로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 교사로 활용하였고 직접 거처하기도한 독립운동사의 뜻 깊은 건물이다>
파리장서사건(제1차 유림단사건)을 주도하다
나라가 끝내 멸망하자 김창숙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황하다가 '선세(先世)의 유업'을 망치겠다는 모친의 꾸짖음을 듣고 경서(經書)에 매진했다. 김창숙은 “자서전” 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성의정심(誠意正心)·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가 모두 여기서 벗어나 딴 데 구할 것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유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선비 김창숙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창숙은 1919년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한탄했다. "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데 3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김창숙은 곽종석(郭鍾錫) 등 전국의 유림 137명을 규합해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청원서)를 보내는 계획을 세운다.
이 청원서(請願書)를 일명 ‘파리장서(巴里長書)’라고 하는데, 심산 김창숙선생의 주도로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海底理해저리) 소재 ‘만회고택’과 ‘해관구택’에서 한국 유림의 대표들이 극비리에 모여 숙의하고 최초 문안을 작성.서명하였다.
심산은 총137명이 서명한 '한국독립청원장서(韓國獨立請願長書)'를 품에 숨겨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각국 언어로 번역하여 파리의 김규식을 통해 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기로 하고, 국내의 각 학교에도 이를 우송하도록 하였다. 한국의 유림이 역사 앞에 겨우 체면치레를 하게 된 것이다.
얼마 후 국내에 우송된 「파리장서」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곽종석 이하 대다수의 유림들이 피체되었으며, 일부인사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 등이 감옥에서 순사하고, 다른 많은 관련자들이 일경의 잔혹한 고문으로 죽거나 처형당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의 의원(경북대표)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임시정부 그리고 한성 임시정부 등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난립하였는데,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효율적인 정부 운영과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정부 조직이 필수적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 11월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임시정부는 크게 분열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심산은 반 이승만 세력의 앞장에 섰다. 이승만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연합국 27개국 대표가 참석)에 정한경과 공동 명의로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민족자주독립을 주장한 김창숙은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승만 탄핵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이시영, 이동녕, 김구, 안창호 등 의정원과 각료, 간부들은 임시정부의 분열을 우려하여 탄핵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로써 임시정부에서 단재 신채호와 심산 김창숙 등 강경파들은 임시정부의 노선 자체를 비판하게 되면서 극심한 노선 갈등을 빚게되고, 이들은 임시정부와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1919년 10월 11일)>
단재 신채호(申采浩), 우당 이회영(李會榮)과 함께 친일파의 집을 털다
심산 김창숙은 1921년 2월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이어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자주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중국의 손 문(孫文)과 교섭하여 광복운동 자금 57만원을 제공받았다.
<박자혜 여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결혼사진>
또한 김창숙은 독립을 위한 실천에는 주저하지 않는 선비의 면모를 보여준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단재 신채호(申采浩)와 의기투합(우당과 단재는 아나키스트인데, 아나키스트와 유림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비타협적 항일 의지로 이루어진다.)하여 국내 친일파 자금이 흘러든 북경 모아호동 고명복의 집을 턴 것이다. "모아호동은 귀족들이 사는 곳으로 경비가 철통같아 일을 끝내려면 치밀한 사전계획이 필요했다. …김창숙이 앞장을 섰고 이을규·이정규·백정기가 그 집으로 잠입하여 값진 물건을 빼내어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 모아호동 사건은 각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다. 교포는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모두 깜짝 놀랐다. 전 수사진이 동원되어 범인 체포에 나섰다."
또한 김창숙은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다. 북경 정부의 임시집정 단기서(段祺瑞)의 비서였던 김달하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가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비워놓았다고 회유하자 김창숙은 "네가 나를 경제적으로 곤란하다고 매수하려 드는구나. 사람들이 너를 밀정이라 해도 뜬소문으로 여겨 믿지 않았더니 지금 비로소 헛말이 아닌 줄 알았다"라며 우당 이회영과 상의해 제거를 논의했고, 의열단 유자명(柳子明)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1925년 3월 다물단(多勿團)과 합작해 김달하를 제거한 것이다. 김달하를 처단한 직후 김창숙은 국내로 잠입했다.
독립군 양성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다 _제2차유림단사건_
김창숙은 이회영과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북경 정부의 전 외교총장 서겸(徐謙)을 통해 북경 정부의 실권자 풍옥상(馮玉祥)과 교섭해 내몽골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 3만여 정보(町步)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이회영은 이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간도로 망명을 떠나기 전(44세) 이회영>
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은 국내 잠입을 결심했다. 심산이 국내에 잠입한다는 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었다. 일제는 「파리장서사건」의 주모자 “심산”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개간지를 확보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위험 앞에 몸을 사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1925년 8월 북경을 떠나 서울로 잠입했다. 서울에서 정수기 등과 비밀결사 '신건동맹단'을 조직하고는 직접 영남으로 내려가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뒤여서 반응이 신통치 않자 김창숙은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것은 나라 사람들이 호응해줄 것을 진심으로 기대했던 것이오. 전후 8개월 동안 겪고 보니 육군(六軍·천자의 군대, 많은 숫자의 군사라는 뜻)이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고 방금 왜경이 사방으로 깔려 수사한다니 일은 이미 낭패되었소. …내가 지금 가지고 나가는 자금으로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거론하기도 만 번 어려울 것이니… 이 돈을 의열단 결사대의 손에 직접 넘겨주어 왜정 각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여 우리 국민들의 기운을 고무시킬 작정이요…."『자서전』
일부 자금만을 확보한 김창숙은 1926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다시 상해로 향했다. 그가 출국한 뒤 국내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수백명의 전국 유림들이 검거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 이 발생한다.
나석주 열사의 의거를 주도하다
심산은 상해에 도착하여 김두봉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석오와 백범에게 국내의 정세를 설명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심산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온 자금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사업을 시작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뒷날을 기약하고 우선 의열투쟁을 벌여서 일제 기관과 친일 부호들을 박멸할 것을 제안하였다. 의열투쟁을 통해 국민의 의협심을 불러 일으켜서 큰 규모의 사업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나와 친한 결사 대원으로 나석주, 이승춘 같은 이가 지금 천진에 있고, 의열단원도 많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으니 당신은 유자명과 상의하여 먼저 무기를 구입해 가지고 천진으로 가서 기회를 보아 실행하는 것이 옳겠소.” 백범이 이렇게 말하여 즉시 무기를 구입할 자금을 유자명에게 주었다. 유자명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 김창숙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고향에 가서 친구들에게 돈을 모아가지고 왔는데, 이 돈으로 폭탄과 권총을 사서 적인(敵人)들과 투쟁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석주(羅錫疇)는 그때 천진에 있었는데, 나는 김 선생과 폭탄과 권총 한 개를 사서 상해에서 배를 타고 천진에 가서 나석주를 만나 서로 상의한 결과 나석주는 자신이 행동하겠다고 말했다."『유자명, ; 한 혁명자의 회억록』
<나석주(얼굴사진) 열사가 응징의 폭탄을 던진 일제 침략의 중심기관 동양척식회사. 1908년 세워져 1945년 패망까지 존속한 동척은 토지가 최대의 생산수단이었던 한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국책회사였다>
1926년 세모를 물들였던 나석주 의사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인 노동자 馬中德(마중덕)으로 변장해 입국한 나석주는 1926년 12월28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경기도 경찰부 전전(田畑唯次) 경부보와 동양척식회사 토지개량부 대삼(大森太四郞) 차석 등 3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떨어지자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라고 군중을 향해 소리치고 자결했다.
일제의 고문, 웃으며 받다
일제는 신출귀몰하게 국내에 ‘잠입’하여 유학자와 부자들을 ‘선동’하고 ‘불령자금’을 ‘탈취’해간 심산이란 존재가 보통 위협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에서 손문과 회담하고 중국 국민당 간부들을 설득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는 심산의 외교 역량에도 두려움이 따랐다. 멀리 몽고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겠다는 정보에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사냥개와 같은 왜경과 밀정을 따돌리고 600여 명의 ‘연루자’가 생길 정도의 대담하고도 치밀한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출국하였다. 일제는 심산을 붙잡거나 암살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1926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임된 김창숙은 유자명에 의해 의열단 고문으로도 추대된다. 그러나 그해 12월 지병인 치질이 재발해 들것에 실려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에 있는 영국인 경영의 공제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받았지만 성과가 좋지 않아 이듬해 2월에 재수술을 받았으나, 별로 효과가 없어서 몇 달 뒤 3차 수술을 받았다. 이 무렵 큰아들 환기가 국내에서 왜경의 심한 고문 끝에 출옥한 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겹쳐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 밀정들을 염려하여 극비에 붙였기에 이동녕, 김구, 김두봉, 정세호 등 애국지사들이 문병을 오는 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세백, 박겸이란 자가 문병을 왔다. 이들은 광주에 있을 때 중국어와 영어를 강습 시켰던 청년들로 상해에 있을 때에는 김창숙과 여러 달을 함께 지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밀정이었다. 다음날(1927. 6.10) 영국인 경장이 일본 총영사관 형사 6명을 데리고 병실로 돌입했다.
영국 총영사가 서명한 체포장을 제시하고, 바로 일본 영사관 내 감옥에 감금시켰다. 장기(長崎·나가사키)와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거쳐 부산으로 압송된 김창숙은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피체될 당시에 몸이 많이 아픈 데다 거듭된 고문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오히려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고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필묵을 달라 하여 자신의 심경을 써 주었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磊落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주) 磊落(뇌락) :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
일제는 한 달 남짓하여 경찰부에서 검사국으로 이송시키고 검사국에서 곧 대구 형무소로 이감하여 예심으로 넘겼다. 이때 변호사 김용무와 손치은 두 사람이 변론에 나서겠다면서 위임서에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심산 김창숙은 시 한 수를 써서 거부하는 뜻으로 삼았다.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달성 옥살이 일 년이나 넘길 줄 어찌 알았으리
모친 죽고 자식 죽어 집은 이미 쓰러지고
꿈속에도 들리네 아내와 며느리 울음소기
기구한 방득이여 도망한들 어디가 즐거우랴
죽어도 빛나도다 강개한 천상이여
화복궁퉁이 원래 하늘에 매였으니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노라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달성에서 신음만 일삼는가
세상맛을 다 보아 이는 이미 시린데
이정의 뜨거움 뼛속에 와 닿네
내 노예로 기자의 야광을 차마욕되다 하랴
정을 얻어야 죽어도 영고아임을 비로소 아는 법
그대의 뜻 고마우나 구구한 변호사여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노라
재판은 1928년 10월 19일 대구 지방법원 제2호 형사법정에서 변호인도 없이 개정 되었다. 심산은 재판장의 심문에 “그렇다” “아니다” 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본적은?” 이라는 심문에 심산은 “없다”고 답했다. “없다니?”라는 재판장 반문에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있겠느냐.”이런 식으로 재판에 임했다. 이 재판에는 일반인은 한 사람도 방청이 허용되지 않고 다만 고등계 형사 3,4명만이 방청했다.
예심판사 하세가와는 “나는 지금까지 조선인 독립운동자를 많이 대해 왔지만 김창숙처럼 강의불요한 사람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그대의 꺾일 줄 모르는 투지가 장하기는 하나 조선이 무슨 힘으로 독립을 하겠다는 것인가?”고 심산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심산은 “내가 보기에는 일본인의 안목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것 같소. 그렇게 천하대세를 모르고 망동하는 것을 보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공판에서 검사의 무기형 구형에 판사는 14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나석주 의사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사건의 주동자로 인정하여 살인미수, 「치안유지법」위반, 「폭발물 취급령」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형을 선고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운동자 중에서 14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들도 최고 3년 징역형이었다.
이때에도 변호사 김완섭(金完燮)이 변호를 자청하며 거듭 만나자고 요청하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군은 무슨 말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김완섭이 '입회한 간수의 기록이 필시 조서에 들어가 앞으로 재판에 크게 불리할 것' 이라고 염려하자, "나는 일찍이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군은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초연했다.
심산 김창숙은 예심 과정에서 당한 형언하기 어려운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고 하반신이 불구가 되었다. 여기에서 ?翁(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1928년 14년형을 선고받은 김창숙은 대전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옥중에서도 의기를 굽히지 않다
대전 형무소에서도 심산의 옥살이는 언제나 가중되는 겹옥살이었다. 1933년 새로 부임한 전옥(典獄·간수장) 궁기(宮崎)가 절하기를 강요할 때에는 결단코 이를 거부하였다. “내가 옥에 들어온 지 6-7년이 되었지만 옥리를 보고 머리 한 번 까딱하여 절한 일이 없다. 나는 위협으로 내 뜻을 변할 사람이 아니다”하며 거부하였다.
죄수들이 전옥에게 절하는 것은 예의라고 겁박하자. “내가 너희들에 대하여 절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 대저 절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끝내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7년 세월 이미
죄수로 몸져 누웠으나
나의본 자세를 지킴은
나쁘지 않았어라
머리를 조아라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전옥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자 극도로 화가난 전옥은 간수들을 시켜 허용했던 필묵과 서적을 모두 압수하고 병동에서 끄집어 내 잡범들과 같은 좁은 감방으로 보냈다. 예나 이제나 양심수를 일반 잡범의 감방에 넣는 것은 보복성 가중형벌이다.
이 무렵에 대전 형무소에는 안창호와 여운형도 수감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감된 것이었다. 반갑다기보다 이렇게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물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간수가 전해주었다.
간수가 전해주는 이야기로는 도산이나 몽양은 모두 모범수라고 했다. 그들은 다 같이 옥칙을 잘 지켜 저마다 상장을 탔다고 하며 머지 않아 가출옥의 특전을 입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과연 두 사람은 가출옥의 특전으로 얼마뒤 출감해 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심산은 가출옥이란 상상도 못했으며 또 기대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출감에 착잡한 심경으로 시 한 편을 썼다.
「앵두꽃 핀 창살 옆에 - 안창호와 여운형에게」
앵두꽃 핀 창살 옆에
서리처럼 비치는 달빛
문득 이 광노
감상을 일으키네
벽 하나 사이에 있는 친구
한 세상이 막힌 것 같으니
누구를 대하여
이 심회를 기울이리.
<왼쪽부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심산에게 있어서 옥살이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계속되는 회유책이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체로서도 조국 광복에 대한 집념은 육신의 아픔에 비례하고, 그럴수록 일제 당국의 회유책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어느 날 간수가 최남선이 지은 「일선융화론」이란 책을 들고 와 읽고나서 감상문을 쓰라고 하였다. 책에는 최남선 근래의 이력이 화려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중추원 참의, 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위원, 총독부 고적보존회위원 등 다채로왔다.
심산은 「3.1독립선언서」를 쓴 유능한 학자가 이렇게 타락했는가, 분개하였다.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의 근본이 함께 서백리아 동부에서 발생한 같은 혈통이라는 것과, 문화 계통도 같이 근거한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노기가 극에 달한 심산이 책을 비틀어 짖어 간수에게 던지며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의 미친개 짖듯한 이 흉서를 내가 읽을 성싶으나. 만육을 한대도 그 죄는 갚을 길이 없을 것이다”라고 호통쳤다. 심산은 이어서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이런 사람으로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으로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오히려 죄가 남는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간수에게 필묵을 받아 즉흥시 한 편을 지어 그에게 전하였다.
기미년 독립을 선언하던 날
의성의 외침이 육주를 진통터니
굶주린 개 도리어 원식을 위해 짖는도다
양의사의 비수를 들 사람 어찌 다시 없으랴.
주)양의사: 양근환(梁槿煥)이 1921년 도쿄에서 국민협회 회장이자 '시사신문' 사장 민원식(閔元植)을 칼로 찔러 처단함
간수가 깜짝 놀라서 “14년이란 긴 형을 받고도 이렇게 격렬한 말만 하다가 어찌 살아서 옥문을 나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오히려 걱정하였다.
오랜 옥고와 일제의 끊이지 않는 괴롭힘으로 김창숙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934년 더 이상 복역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게 되자, 일제는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 주었다. 둘째 아들 찬기의 집에서 요양하다 부인과 가족이 함께 대구 남산동에 새 거처를 구하였다. 하지만 검사국과 경찰에서 밤낮으로 감시하여 지인들은 물론 일가 친지들이 문병을 오고 싶어도 화가 두려워 찾아오지 못하였다. 심산은 1936년 설날 새벽 대구 거처에서 이런 심경을 토로하는 시 한 편을 지었다.
「설날 새벽에」
십 년 연루에서
아홉 번 죽을 뻔한 몸이
어떻게 또 이 봄을
맞이하는가.
처는 늙어, 무슨 일로
산중에 가고
아이는 병이 들어
바닷가에 누웠구나.
옛 나라 의관은
눈물만 남았는데
풍악 소리 요란한 곳
눠 집이란 말인가
까먹거리는 등불 아래
억지로 술잔을 드시
백 가지 감회에
잠 못 이루네
백양사에서 憂國詩(우국시)를................
연금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감시하는 자들도 힘이 겨웠다. 그래서 차라리 어느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 정양하기를 바랐다. 1936년 3월 심산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대구의 거처에서 떠나 울산 백양사로 옮겼다. 그무렵 망명지에서 심산과 각별한 사이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신채호가 뤼순 감옥에서 8년 옥고 끝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1936년 2월 21일). 심산은 백양사에서 그 소식을 듣고 시를 ?어 애도했다.
<일경에 피체(1928.5.8)된 신채호>
「단재를 애도하여」
들으매 그대의 시신을
금주의 불로 태웠다 하니
이 땅의 정기 그대와 함께
모두 거두어졌도다
옥루의 수문으로
그대는 잘 갔네만
항아리 속에......
하루살이같이
뒤에 죽는 사람들
이 부끄러움 어찌하랴
들으매 그대 여친이
청주로 돌아왔는데
오직 한 줌 재로
우구에 묻혔도다
묻노니 그대의 혼백도
따라 돌아왔는가
그대는 아마 앞서 간
보로를 따라 놀겠지.
「도산이 찾아와서」
어제 단재의 혼을 통곡해 보냈더니
오늘 뜻밖에 도산이 찾아왔네
넘어질 듯 부여안고 말문을 열지 못하는데
눈물만 비 오듯 입술을 적시네
심은후의 송별시를 다시 외우며
짐짓 손을 잡고 떠나지를 못하네
김일송(金一松) 동삼(東三) 초혼사(招魂辭)
- 1937년 일송 김동삼이 옥사(서대문형무소)하자, 그 부음을 듣고 지은 사(辭) -
일송 선생이 마침내 서대문 감옥에서 돌아가시니, 그 친구인 승려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등이 장사를 지냈는데, 신계사(神溪寺)에 모시고 가 다비(茶毘)에 붙였다고 한다.
아! 선생은 유교도인데, 이 나라 청산에 이제는 묻어드릴 곳도 없어서, 몸은 불가(佛家)의 불꽃에 기탁하고, 혼백은 날아올라 보재(溥齋: 이상설) 단재(丹齋: 신채호) 같은 몇몇 군자와 함께 하늘을 떠돌게 된 것이 아닌가? 벽옹(?翁: 앉은뱅이 늙은이) 김우(金愚: 심산이 자신의 이름을 우로 부름)는 동해가의 학성산에서 병들어 쉬고 있다가, 북쪽을 바라보며 크게 곡하고 초혼(招魂)의 노래 몇 수를 지어, 향도(香徒)로 하여금 노래하여 혼백을 부르게 함이다.
제산(?山)은 우뚝 솟고 제수(?水) 깊으니 ?山屹兮?水奫
그 정기(正氣) 바로 받아 태어난 님하! 正氣亭毒兮生若人
아! 정기야 길이 남아 쓰러질 줄이- 嗚呼正氣兮長不湮
넋이여 돌아오라, 춤을 추면서. 魂歸來兮庶??
<일송 김동삼(마포 감옥 수감 때 모습)>
요동(遼東)이라 누런 티끌, 바람 어둔데 遼塵黃兮遼風黑
더욱더 청청(靑靑)하던 일송(一松)의 모습. 一松靑靑兮生?色
아, 그 일송 마저 이제 쓰러졌다니 嗚呼一松兮今已?
넋이여 돌아오라, 애처롭기도! 魂歸來兮正惻惻
북경(北京)의 다락 차갑고 저자 어둔데 燕樓冷兮燕市冥
문산 가니 북풍에 비릿내 풍겨... 文山去兮北風腥
아. 하늘도 취하여서 안 깨는 기색, 嗚呼天醉兮尙不醒
넋이여 돌아오라, 머물지 말고. 魂歸來兮莫留停
(文山: 송나라 충신 문천상의 호)
신계(新溪)는 목메어 울고 한수(漢水) 슬픈데 新溪咽兮漢水悲
한 치의 묻을 땅 없어 다비(茶毘)하다니! 無地可?兮?茶毘
아. 나라 찾을 그 날이 다가오리니 嗚呼探環兮也有期
넋이여 돌아오라, 안 흩어지고. 魂歸來兮莫支離
학산(鶴山)의 슬픔이여, 낙포(洛浦)의 생각! 鶴山哀兮洛浦思
용호(龍虎) 가니, 울부짖는 여우 삵괭이. 龍亡虎逝兮號狐狸
아. 황하(黃河) 맑을 그 날이 꼭 오리니 嗚呼河淸兮會有時
넋이여 돌아오라, 주저치 말고. 魂歸來兮莫遲疑
「패강 서풍」
- 1938년 3월 도산 안창호 사망소식을 접하고 읊은 도산 안창호 만사 -
한스럽다. 관서 오백 년
숱한 호걸들이
어둠 속에서 울었구나
풍운이 때마침
기남자를보내니
팔도의 아이들도
큰 이름 외고 있네
사직이 망할 즈음
왜인들 교만 떨자
조각배로 하와이에 피를 토했다
나라를 건지자면
홍사해야 한다고
높은 단에서 우이를 잡고
분분한 지저귐을 진압했거니
기미3월에
일만 우레가 터지자
못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
자결 소리에 놀랐네
상해에서 크게 모여
영수로 추대하니
일시의 여망
님에게로 모였도다.
풍상에 자빠지고
엎어진 지 십여 년
그대의 수염 나의 머리털
흰 빛이 어지러웠지
마침내 원수의 손에 떨어져
같이 남관쓰고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였네
지난 해 남쪽으로
나를 찾아 위로할 적에
손을 잡고 말 없이
눈물만 흘리었지
주름처럼 겹겨반 속마음을
다 내풀지 못하고
갈림길에 다달아
헤어지기 차마 어려워
아, 어려워했지
나라의 원수 갚지 못하고
대유의 길 바삐 떠나니
패강 서풍에
골목마다 울음이 슬프건만
영남의 병든 부로는
끈질겨 죽지 아니하네
몸을 백으로 해도
속하기 어려운데
아, 이 회포 어이 할거나
「중양일에」
- 한용운에게 전하여 보냄 -
우습다. 가짜 연명이
국화철에 병들어 누웠구나
율리는 어디메냐
부질없이 술주시만 읊는구나
우습다. 가짜 천상이
절식하기 몇 번인가.
시시가 어디메냐
부질없이 정기시만 읊는구나
우습다. 가자 휘원이
할복할 때를 멀리 기다리네
모리가 어디메냐
부질없이 화엽시만 읊는구나
우습다. 가짜 여해가
백면으로 시대를 아파하네
거북선은 어데 두고
부질없이 서해시만 읊는구나
우습다 가짜 열경이
산방에 홀로 앉았네
풍악은 어디메냐
부질없이 표염시만 읊는구나
「내 어찌 차마 말하랴」
내 어지 차마 말하랴
옛 우리 삼한나라
눈물이 뿌려질 제
간담도 떨리어라
묻노니 이천만 동포여
무슨 낯이 있기에
좋은 강산이라
즐겨 노는가
눈을 들어 바라보라
거센 파도 몰아쳐
하늘에 맞닻은 것을
구멍난 배에 실려
울부짖는 소리
한창인데
어기여차
배 젓는 일
사공에게 맡기련만
두렵구나
삿대 잡은 자들
남의 손에 넘겨줄가를
심산은 1944년 일제 패망을 예견하고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동맹(建國同盟)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활동하다 성주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옥문을 나섰다. 이때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던 김창숙의 차남 찬기(燦基)가 1945년 10월 머나먼 이국 땅 중국의 중경에서 해방의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한 줌의 재로 돌아왔다. 장남 환기도 1927년 일제에 의해 고문사한 터라 심산의 슬픔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성면 발표하다
서울에 올라와 전동여관에 머무르던 어느 날 몽양 여운형이 찾아왔다. 여운형은 건국준비회의 진행 상황과 함께 정당이 60여 개가 난립하고 있음을 알려 주면서, 영호남 독립 운동가들을 규합해 정당을 조직하는데 당수로 취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내가 듣기에 60여 정당이 조직되어 있다 하니, 어찌 정당이 이렇게도 많은가? 나라와 강토는 아직 완전히 수복되지 못하였고, 정식 정부 역시 성립을 보지 못한 이때에, 정당의 어지러운 싸움이 이와 같이 심한 지경에 이르러서 저 60여 당이 만약 정권과 정책을 서로 다툰다면, 새로 일어날 대한민국이 필연 저네들의 손에서 다시 망하게 되지 않을까 두렵도다. 지금 여러분이 비록 나를 당수로 추대하였으나, 나는 허영에 이끌리어 그 당수의 자리에 나아가 여러 정당과 더불어 마침내 몸을 버리고 나라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1946년 1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비상정치국민회의를 소집하면서, 김창숙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권동진, 오세창, 조만식, 홍명희 등과 함께 특별위원으로 선임되고, 이어서 미주둔군 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으로 민주의원이 구성되면서 최고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창숙은 민주의원이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모체가 아니라 주둔군의 자문기관에 지나지 않는 데 반감을 품고 의장인 이승만과 정면 대결에 나섰다.
민주의원의 사회를 맡은 이승만의 독주에 대해, 김창숙은 “슬프다. 저 이승만이란 자는 미국에 아첨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독재정치를 하려는 수법의 징조를 여기서 보겠구나. 국가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이니 통탄할 일이다”라며 개탄하였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이로써 더 악화되어 갔다.
심산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굳어지자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8년 2월 5일 발표된 김창숙의 「성명서」는 이러하다.
1. 유엔 한국위원단이 한국에 지고 있는 사명은 내정간섭이 아니라, 남북통일 총선거로 통일 정부 수립에 관하여 외세의 부당한 간섭을 거절함에 있다고 믿는다.
2. 단선 단정은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을 조장함에 불과하니 북한 지방을 소련에 허여하려는 것이다.
3. 외군의 주둔 밑에 자유로운 선거가 있을 수 없고, 이에서 생기는 정부는 괴뢰 정부인 것이다.
4. 남북 정치 요인 회담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1948년 3월 김창숙은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와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임시로 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 정부 또는 양 국가를 형성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2년 뒤에 벌어질 6·25 전쟁의 참화를 정확히 예견한 성명서였다. 그 2년 뒤 김창숙은 서울에서 6·25를 겪었다.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이 지지를 종용하자 단칼에 거절한다. 1951년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했는데, 그해 봄 이승만 '하야경고문'을 발표했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김창숙은 이미 미 군정 산하 민주의원 회의석상에서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성토했다고 전한다.
"당신은 오늘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소?"
이승만은 답변을 거부한다.
“당신은 답변할 말이 없으니까 불법수단을 써서 사람을 제지하려 드느냐?”
이승만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결코 응답하지 못하겠다.”
“오늘 이승만의 답변을 듣지 않고는 나는 해가 질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겠다.”
“나는 결코 당신의 질문에 응하지 않겠소.”
이승만은 퇴장을 선언하고 자리를 빠져나간다.
“당신이 내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 퇴장한다니 어찌 그리 비겁한가!” 『자서전』
1952년 이승만이 당선(재선)을 위해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들고 나와 국회가 반대하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어 헌병부대를 동원해 국회통근버스를 제지하고 10여명을 구속했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의 서곡이다. 심산 김창숙은 야당인사들과 이승만을 반대하는 재야인사와 함께 부산 남포동 음식점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 및 시내행진을 계획했다. 주요 서명인사들은 이시영/김창숙/이동하/김성수/장면/전진한/백남훈/조병옥 등이다. 그러나 대회시작무렵 괴청년들(백골단)의 습격으로 심창숙은 모시 두루마기가 피투성이가 되는 테러를 당하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부산 국제구락부사건/ 1952.6.20)
이 사건후 대통령직선제와 내각책임제 개헌안 일부를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국회에서 강압적으로 통과되고 그해 8월5일 이승만은 재선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설립
한편 김창숙은 반 이승만 노선을 걸으면서 친일 유림단체와 성균관의 정비에 나섰다. 난립된 전국 유림을 유도회(儒道會) 총본부로 통합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황도유학의 청산에 나섰다. 김창숙은 미군정 당국의 반대에도 유도회 총회를 개최하고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며 친일파를 몰아냈다. 1946년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부와 군에서 관리하던 향교재산으로 재단을 설립해 유림들이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김창숙은 친일파를 등용한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인 탓으로 이승만 정권의 압력에 의해 성균관 유도회를 비롯해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된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의 급서로 이승만이 또다시 당선되자 "이제 전국의 민심은 각하에게서 이탈되었다"라면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대통령 3선 취임에 일언을 진(進)함'이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김창숙을 모든 자리에서 쫓아내는 공작으로 맞섰다. 교육부는 1956년 '김창숙 명의'로는 신입생 모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냈고, 그는 결국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성균관대학교 총장직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도연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과는 반대로 조국의 현실이 그러하지 못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반귀거래사(反歸去來辭) _ 1956.10. _
돌아갈꺼나! /歸去來兮
전원이 이미 황폐하니, 어디로 돌아가리? /田園已蕪將安歸
조국의 광복에 몸을 바치매 /余旣獻身兮光復役
뼈가 가루된들 슬플까 마는 /縱粉骨而奚悲
모친상 당하고도 모른 이 몸은 /有母喪而不知
되돌리지 못하는 불효에 울뿐! /痛不孝之莫追
이역만리 갖은 풍상 다 겪으면서 /飽風霜於異域
나날이 그르쳐가는 대업 탄식하다가 /嗟志業之日非
문득 크나큰 모욕을 받아 /身旋陷於大?
죄수의 붉은 옷 몸에 걸쳐도, /穿虜?之赤衣
고생을 달게 받아 후회는 없고 /忍苦辣而不悔
행여 도심(道心) 쇠해질까 걱정했노라. /懼道心之或微
눈앞에 고향을 바로 두고도 /鄕山在望
쇠사슬에 묵이어 가지 못 했네 /繫械莫奔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 나서니 /?疾而?, 始出牢門
쑥밭된 집안에는 남은 것 없고 /室廬蕩殘, 舊物無存
농사 아니 지으니 무엇 먹으며 /不農奚餐
빚을 수도 없으니 그 무슨 술 마시리. /不釀奚酒
친척도 모두들 굶주려 하니 /親戚亦其窮餓,
솟구치는 눈물이 얼굴을 가리네. /釀危涕而被?
아내도 집도 없어진 지금 /旣靡室而靡家
어느 겨를 일신의 안정 꾀하리. /寧遑謀於奠安
음험하기 짝 없는 사람들 있어 /紛鬼?之?物
내 고향의 날뜀을 봐야 했어라. /任跳梁於鄕關
삼팔선이 나라의 허리를 끊고 /哀三八之斷腰
그 더욱 슬픈 것은 동족의 무덤 /最傷心於京觀
모략 받아 죽은 이들 너무나 안타까와 /歎明夷之入地
하늘 우러러 하소연한들 그 누구 돌아오리 /仰皓天而不還
아! 거의 다 죽어가는 병든 이몸엔 /噫垂死之病夫
아무리 둘러봐도 어정댈 한 치 땅도 없도다. /顧無所於盤桓
돌아갈꺼나! /歸去來兮
돌아가 세상과의 연을 끊으리. /從此息交而?遊
세상 우습게 알아 감은 아니어도 /非傲世而長往
부귀영화 내 뜻이 아님이어라. /寔榮貴之無求
그러나 늙고도 창창한 마음 /髮雖短而心長
나라 일만 걱정되고 안타까웁고, /惟天下之是憂
노복을 불러 봐도 안 나타나니 /呼長鬚而不見
서쪽 밭에 밭갈 일 누구와 상의 하리. /孰問耕於西疇
물결에 몰아치는 바람 사나워 /湖海?急
외로운 배 노마저 꺾이었나니 /棹折孤舟
저기 저 치솟은 건 무슨 산이뇨 /直峻何山
머리 두고 내가 죽을 고향 쪽 언덕. /是吾首邱
고향 쪽 바라보며 차마 못가니 /望岡臺而??
세월은 물같이 빨리 흐르고 /歲華忽其如流
안타까와 맑은 샘물 손에 떠들고 목 늘여 어정이느니 /?晴川而延?
늘그막에 편히 좀 쉬었으면 싶어도 /庶嚮晦而宴休
비웃고 조롱하는 나쁜 무리들. /奈?揄之惡?
나로 하여 고향에 머물게도 하지 않아 /不?我而淹留
그 어찌 마음 조여 갈 곳 몰라 함이리 /胡爲乎??迷所之
남북을 몰아치는 흑풍 사나워 /南北黑風惡
화평을 이룩할 기약 없으니 /和平未易期
저기 저 사이비 정인군자를 /彼叢?之亂苗
죽는 대로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竭蹶而耘?矢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리 /死道路兮亦何恨
가만히 외어보는 위후의 억시 /誦衛候之抑詩*
해처럼 밝디 밝은 나늬 마음은 /?白日之此心
귀신에게 물어봐도 떳떳하도다 /質諸鬼神可無疑
* ≪시경≫ 대아大雅의 억抑은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안타까워 하며 주周 여왕?王을 풍자하고 자신도 경계한 위衛 무공武公의 노래다
이듬해에는 성균관장,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958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운동에 나서고 81살 때인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에 나서면서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 서한을 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또한 백범 김 구(白凡 金九)선생 및 일성 이 준(一醒 李儁) 열사 기념사업회장 및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구선생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김구선생살해내막”이란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김창숙을 찾아온 '아주 특별한 손님' 박정희
김창숙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던 1962년 5월 5일, '아주 특별한 손님' 하나가 병문안을 왔다. 1961년 5월 16일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사회 지도층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직접 병문안을 온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찾아왔으니 아무리 몸이 아프더라도 일어나는 흉내라도 내야 할 텐데, 심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김창숙은 벽을 향해 몸을 홱 돌리며 박정희를 외면했다.
그가 박정희를 냉대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일본군 장교 출신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 앞에서는 한 치의 타협도 할 수 없다는 꼿꼿한 선비 정신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는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84살 때인 1962년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5월 11일, 김창숙 선생(5월 10일 타계)의 빈소를 찾은 박정희
심산 김창숙지사는 유림 출신으로 대의(大意)와 명분에 입각한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으로 불굴(不屈)의 실천과 행동주의에 일관함으로써 우리 근현대사에 드물게 진보적 유학(儒學)정신과 민족주의를 일치시킨 실천적 지성의 사표가 되었다.
그가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는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역사의 임무를 전해준다.
통일은 어느 때에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김수환추기경과 심산상/일화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추기경에게 심산상(心山賞)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이 상은 독립투사이자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의 업적을 기려서 제정한 상인데,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부의 진통이 있었다. 심산선생은 저명한 유학자이다. 유학자인 심산선생 이름으로 주는 상을 기독교인이 받아서 되겠느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수상자를 추기경으로 결정하고 추기경의 의사를 타진한 결과 추기경은 수상을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런데 심산상을 수상한 사람은 심산선생의 기일(忌日)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고 모두들 놀랐다. 후일 기독교계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자 추기경은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 말했다고 한다.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교수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어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교수들의 회비와 기타 찬조금으로 운영하던 터이라 그 때 상금이 고작 7백만 원이었다. 후일 추기경께서는 사람을 시켜서 조그마한 상자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는 상금 7백만 원에 3백만 원을 더한 일천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선생의 본관은 義城(의성), 이름은 昌淑(창숙), 心山(심산)은 그의 號(호)이다. 선생의 父 김호림은 경북 봉화 바래미(海底) 八吾軒(팔오헌 :김성구) 자손으로 태어나 文貞公(문정공) 東岡 金宇?(동강 김우옹)선생의 경북 성주로 出家(출가)한 바, 선생은 13대 종손(출생:1879년 음력 7월)이다. 훗날 왜경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하체가 부자유스러워지자 남들이 ?翁(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 불렀는데 선생도 따라서 스스로를 벽옹이라 하였다.
선생은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독립과 통일민족 국가의 건설이라는 민족적 대의를 위해 오로지 일생을 바치었으니, 철들면서부터 시작된 애국계몽운동, 국내외에서의 혁명적 항일 투쟁, 해방 후의 반독재 민주투쟁, 분단 체제하의 통일정부 수립운동 등이 그것이다
心山(심산) 金昌淑(김창숙)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國亡(국망)에 무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功勞爵(공로작)'을 수여한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였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 는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李載完(이재완), 순종의 장인 尹澤榮(윤택영), 명성황후의 동생 閔泳璘(민영린)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때 일제는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지배층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김창숙은 『자서전-벽옹(?翁) 73년 회상기』 에서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은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은 大儒(대유) 李承熙(이승희)와 함께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_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를 올렸다. 고종은 아무런 회답이 없었고 김창숙은 통곡하고 돌아왔다.
1909년에 접어들면서 나라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져갔다. 일진회 주구들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을 빌미로 융회 황제에게 ‘한일합방’을 상주하는등 매국광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일진회 두목 宋秉畯(송병준)·李容九(이용구)와 그들의 주구 최창규, 이원달 등이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김창숙은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개략 70여명이 참석하였음) 총무로 추천되어 이같이 말했다.
“............ 우리의 의리상 일진회 역적들과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 이놈들을 성토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두 백면서생으로 손에 아무무기도 갖지 못했으니 놈들의 고기를 씹고 가죽을 벗겨 원수를 갚자 해도 실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형세다. 하물며 요즘 조정에서는 유생들이 상소해서 국사를 말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 역적을 성토하는 방법은 오직 중추원에 건의하는 한 길이 있을 뿐인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한가.” 『자서전』
심산 김창숙의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 라며 처벌을 주장하는 건의문에 하나둘 호응자가 나오니,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하는 사안이라 최종 서명자는 소수(김창숙, 김원희, 이진석, 최우동 등 4명)였고, 중추원에 보냈다. 성주 주둔 일본 헌병분견대 소장 노전(盧田彌之介)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곧 반역이 아닌가?" 라며 건의문 취소를 요구하자, 김창숙은 "사직(社稷·나라)이 임금보다 중한지라, 난명(亂命·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충성하는 길이다"라고 답한다. 이 문제로 피체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룬다
<청천서당(晴川書堂)은 고종5년(1868년) 청천서원이 훼철되자 김창숙의 아버지인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서당으로 꾸민 것. 1910년 김창숙이 애국계몽의 일념으로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 교사로 활용하였고 직접 거처하기도한 독립운동사의 뜻 깊은 건물이다>
파리장서사건(제1차 유림단사건)을 주도하다
나라가 끝내 멸망하자 김창숙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황하다가 '선세(先世)의 유업'을 망치겠다는 모친의 꾸짖음을 듣고 경서(經書)에 매진했다. 김창숙은 “자서전” 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성의정심(誠意正心)·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가 모두 여기서 벗어나 딴 데 구할 것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유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선비 김창숙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창숙은 1919년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한탄했다. "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데 3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김창숙은 곽종석(郭鍾錫) 등 전국의 유림 137명을 규합해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청원서)를 보내는 계획을 세운다.
이 청원서(請願書)를 일명 ‘파리장서(巴里長書)’라고 하는데, 심산 김창숙선생의 주도로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海底理해저리) 소재 ‘만회고택’과 ‘해관구택’에서 한국 유림의 대표들이 극비리에 모여 숙의하고 최초 문안을 작성.서명하였다.
심산은 총137명이 서명한 '한국독립청원장서(韓國獨立請願長書)'를 품에 숨겨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각국 언어로 번역하여 파리의 김규식을 통해 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기로 하고, 국내의 각 학교에도 이를 우송하도록 하였다. 한국의 유림이 역사 앞에 겨우 체면치레를 하게 된 것이다.
얼마 후 국내에 우송된 「파리장서」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곽종석 이하 대다수의 유림들이 피체되었으며, 일부인사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 등이 감옥에서 순사하고, 다른 많은 관련자들이 일경의 잔혹한 고문으로 죽거나 처형당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의 의원(경북대표)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임시정부 그리고 한성 임시정부 등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난립하였는데,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효율적인 정부 운영과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정부 조직이 필수적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 11월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임시정부는 크게 분열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심산은 반 이승만 세력의 앞장에 섰다. 이승만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연합국 27개국 대표가 참석)에 정한경과 공동 명의로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민족자주독립을 주장한 김창숙은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승만 탄핵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이시영, 이동녕, 김구, 안창호 등 의정원과 각료, 간부들은 임시정부의 분열을 우려하여 탄핵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로써 임시정부에서 단재 신채호와 심산 김창숙 등 강경파들은 임시정부의 노선 자체를 비판하게 되면서 극심한 노선 갈등을 빚게되고, 이들은 임시정부와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1919년 10월 11일)>
단재 신채호(申采浩), 우당 이회영(李會榮)과 함께 친일파의 집을 털다
심산 김창숙은 1921년 2월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이어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자주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중국의 손 문(孫文)과 교섭하여 광복운동 자금 57만원을 제공받았다.
<박자혜 여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결혼사진>
또한 김창숙은 독립을 위한 실천에는 주저하지 않는 선비의 면모를 보여준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단재 신채호(申采浩)와 의기투합(우당과 단재는 아나키스트인데, 아나키스트와 유림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비타협적 항일 의지로 이루어진다.)하여 국내 친일파 자금이 흘러든 북경 모아호동 고명복의 집을 턴 것이다. "모아호동은 귀족들이 사는 곳으로 경비가 철통같아 일을 끝내려면 치밀한 사전계획이 필요했다. …김창숙이 앞장을 섰고 이을규·이정규·백정기가 그 집으로 잠입하여 값진 물건을 빼내어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 모아호동 사건은 각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다. 교포는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모두 깜짝 놀랐다. 전 수사진이 동원되어 범인 체포에 나섰다."
또한 김창숙은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다. 북경 정부의 임시집정 단기서(段祺瑞)의 비서였던 김달하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가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비워놓았다고 회유하자 김창숙은 "네가 나를 경제적으로 곤란하다고 매수하려 드는구나. 사람들이 너를 밀정이라 해도 뜬소문으로 여겨 믿지 않았더니 지금 비로소 헛말이 아닌 줄 알았다"라며 우당 이회영과 상의해 제거를 논의했고, 의열단 유자명(柳子明)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1925년 3월 다물단(多勿團)과 합작해 김달하를 제거한 것이다. 김달하를 처단한 직후 김창숙은 국내로 잠입했다.
독립군 양성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다 _제2차유림단사건_
김창숙은 이회영과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북경 정부의 전 외교총장 서겸(徐謙)을 통해 북경 정부의 실권자 풍옥상(馮玉祥)과 교섭해 내몽골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 3만여 정보(町步)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이회영은 이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간도로 망명을 떠나기 전(44세) 이회영>
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은 국내 잠입을 결심했다. 심산이 국내에 잠입한다는 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었다. 일제는 「파리장서사건」의 주모자 “심산”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개간지를 확보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위험 앞에 몸을 사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1925년 8월 북경을 떠나 서울로 잠입했다. 서울에서 정수기 등과 비밀결사 '신건동맹단'을 조직하고는 직접 영남으로 내려가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뒤여서 반응이 신통치 않자 김창숙은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것은 나라 사람들이 호응해줄 것을 진심으로 기대했던 것이오. 전후 8개월 동안 겪고 보니 육군(六軍·천자의 군대, 많은 숫자의 군사라는 뜻)이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고 방금 왜경이 사방으로 깔려 수사한다니 일은 이미 낭패되었소. …내가 지금 가지고 나가는 자금으로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거론하기도 만 번 어려울 것이니… 이 돈을 의열단 결사대의 손에 직접 넘겨주어 왜정 각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여 우리 국민들의 기운을 고무시킬 작정이요…."『자서전』
일부 자금만을 확보한 김창숙은 1926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다시 상해로 향했다. 그가 출국한 뒤 국내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수백명의 전국 유림들이 검거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 이 발생한다.
나석주 열사의 의거를 주도하다
심산은 상해에 도착하여 김두봉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석오와 백범에게 국내의 정세를 설명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심산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온 자금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사업을 시작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뒷날을 기약하고 우선 의열투쟁을 벌여서 일제 기관과 친일 부호들을 박멸할 것을 제안하였다. 의열투쟁을 통해 국민의 의협심을 불러 일으켜서 큰 규모의 사업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나와 친한 결사 대원으로 나석주, 이승춘 같은 이가 지금 천진에 있고, 의열단원도 많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으니 당신은 유자명과 상의하여 먼저 무기를 구입해 가지고 천진으로 가서 기회를 보아 실행하는 것이 옳겠소.” 백범이 이렇게 말하여 즉시 무기를 구입할 자금을 유자명에게 주었다. 유자명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 김창숙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고향에 가서 친구들에게 돈을 모아가지고 왔는데, 이 돈으로 폭탄과 권총을 사서 적인(敵人)들과 투쟁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석주(羅錫疇)는 그때 천진에 있었는데, 나는 김 선생과 폭탄과 권총 한 개를 사서 상해에서 배를 타고 천진에 가서 나석주를 만나 서로 상의한 결과 나석주는 자신이 행동하겠다고 말했다."『유자명, ; 한 혁명자의 회억록』
<나석주(얼굴사진) 열사가 응징의 폭탄을 던진 일제 침략의 중심기관 동양척식회사. 1908년 세워져 1945년 패망까지 존속한 동척은 토지가 최대의 생산수단이었던 한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국책회사였다>
1926년 세모를 물들였던 나석주 의사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인 노동자 馬中德(마중덕)으로 변장해 입국한 나석주는 1926년 12월28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경기도 경찰부 전전(田畑唯次) 경부보와 동양척식회사 토지개량부 대삼(大森太四郞) 차석 등 3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떨어지자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라고 군중을 향해 소리치고 자결했다.
일제의 고문, 웃으며 받다
일제는 신출귀몰하게 국내에 ‘잠입’하여 유학자와 부자들을 ‘선동’하고 ‘불령자금’을 ‘탈취’해간 심산이란 존재가 보통 위협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에서 손문과 회담하고 중국 국민당 간부들을 설득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는 심산의 외교 역량에도 두려움이 따랐다. 멀리 몽고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겠다는 정보에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사냥개와 같은 왜경과 밀정을 따돌리고 600여 명의 ‘연루자’가 생길 정도의 대담하고도 치밀한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출국하였다. 일제는 심산을 붙잡거나 암살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1926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임된 김창숙은 유자명에 의해 의열단 고문으로도 추대된다. 그러나 그해 12월 지병인 치질이 재발해 들것에 실려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에 있는 영국인 경영의 공제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받았지만 성과가 좋지 않아 이듬해 2월에 재수술을 받았으나, 별로 효과가 없어서 몇 달 뒤 3차 수술을 받았다. 이 무렵 큰아들 환기가 국내에서 왜경의 심한 고문 끝에 출옥한 지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겹쳐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 밀정들을 염려하여 극비에 붙였기에 이동녕, 김구, 김두봉, 정세호 등 애국지사들이 문병을 오는 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세백, 박겸이란 자가 문병을 왔다. 이들은 광주에 있을 때 중국어와 영어를 강습 시켰던 청년들로 상해에 있을 때에는 김창숙과 여러 달을 함께 지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밀정이었다. 다음날(1927. 6.10) 영국인 경장이 일본 총영사관 형사 6명을 데리고 병실로 돌입했다.
영국 총영사가 서명한 체포장을 제시하고, 바로 일본 영사관 내 감옥에 감금시켰다. 장기(長崎·나가사키)와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거쳐 부산으로 압송된 김창숙은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피체될 당시에 몸이 많이 아픈 데다 거듭된 고문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오히려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고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필묵을 달라 하여 자신의 심경을 써 주었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磊落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주) 磊落(뇌락) :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
일제는 한 달 남짓하여 경찰부에서 검사국으로 이송시키고 검사국에서 곧 대구 형무소로 이감하여 예심으로 넘겼다. 이때 변호사 김용무와 손치은 두 사람이 변론에 나서겠다면서 위임서에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심산 김창숙은 시 한 수를 써서 거부하는 뜻으로 삼았다.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달성 옥살이 일 년이나 넘길 줄 어찌 알았으리
모친 죽고 자식 죽어 집은 이미 쓰러지고
꿈속에도 들리네 아내와 며느리 울음소기
기구한 방득이여 도망한들 어디가 즐거우랴
죽어도 빛나도다 강개한 천상이여
화복궁퉁이 원래 하늘에 매였으니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노라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달성에서 신음만 일삼는가
세상맛을 다 보아 이는 이미 시린데
이정의 뜨거움 뼛속에 와 닿네
내 노예로 기자의 야광을 차마욕되다 하랴
정을 얻어야 죽어도 영고아임을 비로소 아는 법
그대의 뜻 고마우나 구구한 변호사여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노라
재판은 1928년 10월 19일 대구 지방법원 제2호 형사법정에서 변호인도 없이 개정 되었다. 심산은 재판장의 심문에 “그렇다” “아니다” 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본적은?” 이라는 심문에 심산은 “없다”고 답했다. “없다니?”라는 재판장 반문에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있겠느냐.”이런 식으로 재판에 임했다. 이 재판에는 일반인은 한 사람도 방청이 허용되지 않고 다만 고등계 형사 3,4명만이 방청했다.
예심판사 하세가와는 “나는 지금까지 조선인 독립운동자를 많이 대해 왔지만 김창숙처럼 강의불요한 사람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그대의 꺾일 줄 모르는 투지가 장하기는 하나 조선이 무슨 힘으로 독립을 하겠다는 것인가?”고 심산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심산은 “내가 보기에는 일본인의 안목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것 같소. 그렇게 천하대세를 모르고 망동하는 것을 보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공판에서 검사의 무기형 구형에 판사는 14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나석주 의사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사건의 주동자로 인정하여 살인미수, 「치안유지법」위반, 「폭발물 취급령」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형을 선고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운동자 중에서 14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들도 최고 3년 징역형이었다.
이때에도 변호사 김완섭(金完燮)이 변호를 자청하며 거듭 만나자고 요청하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군은 무슨 말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김완섭이 '입회한 간수의 기록이 필시 조서에 들어가 앞으로 재판에 크게 불리할 것' 이라고 염려하자, "나는 일찍이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군은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초연했다.
심산 김창숙은 예심 과정에서 당한 형언하기 어려운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고 하반신이 불구가 되었다. 여기에서 ?翁(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1928년 14년형을 선고받은 김창숙은 대전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옥중에서도 의기를 굽히지 않다
대전 형무소에서도 심산의 옥살이는 언제나 가중되는 겹옥살이었다. 1933년 새로 부임한 전옥(典獄·간수장) 궁기(宮崎)가 절하기를 강요할 때에는 결단코 이를 거부하였다. “내가 옥에 들어온 지 6-7년이 되었지만 옥리를 보고 머리 한 번 까딱하여 절한 일이 없다. 나는 위협으로 내 뜻을 변할 사람이 아니다”하며 거부하였다.
죄수들이 전옥에게 절하는 것은 예의라고 겁박하자. “내가 너희들에 대하여 절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 대저 절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끝내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7년 세월 이미
죄수로 몸져 누웠으나
나의본 자세를 지킴은
나쁘지 않았어라
머리를 조아라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전옥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자 극도로 화가난 전옥은 간수들을 시켜 허용했던 필묵과 서적을 모두 압수하고 병동에서 끄집어 내 잡범들과 같은 좁은 감방으로 보냈다. 예나 이제나 양심수를 일반 잡범의 감방에 넣는 것은 보복성 가중형벌이다.
이 무렵에 대전 형무소에는 안창호와 여운형도 수감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감된 것이었다. 반갑다기보다 이렇게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물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간수가 전해주었다.
간수가 전해주는 이야기로는 도산이나 몽양은 모두 모범수라고 했다. 그들은 다 같이 옥칙을 잘 지켜 저마다 상장을 탔다고 하며 머지 않아 가출옥의 특전을 입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과연 두 사람은 가출옥의 특전으로 얼마뒤 출감해 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심산은 가출옥이란 상상도 못했으며 또 기대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출감에 착잡한 심경으로 시 한 편을 썼다.
「앵두꽃 핀 창살 옆에 - 안창호와 여운형에게」
앵두꽃 핀 창살 옆에
서리처럼 비치는 달빛
문득 이 광노
감상을 일으키네
벽 하나 사이에 있는 친구
한 세상이 막힌 것 같으니
누구를 대하여
이 심회를 기울이리.
<왼쪽부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심산에게 있어서 옥살이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계속되는 회유책이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체로서도 조국 광복에 대한 집념은 육신의 아픔에 비례하고, 그럴수록 일제 당국의 회유책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어느 날 간수가 최남선이 지은 「일선융화론」이란 책을 들고 와 읽고나서 감상문을 쓰라고 하였다. 책에는 최남선 근래의 이력이 화려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중추원 참의, 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위원, 총독부 고적보존회위원 등 다채로왔다.
심산은 「3.1독립선언서」를 쓴 유능한 학자가 이렇게 타락했는가, 분개하였다.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의 근본이 함께 서백리아 동부에서 발생한 같은 혈통이라는 것과, 문화 계통도 같이 근거한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노기가 극에 달한 심산이 책을 비틀어 짖어 간수에게 던지며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의 미친개 짖듯한 이 흉서를 내가 읽을 성싶으나. 만육을 한대도 그 죄는 갚을 길이 없을 것이다”라고 호통쳤다. 심산은 이어서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이런 사람으로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으로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오히려 죄가 남는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간수에게 필묵을 받아 즉흥시 한 편을 지어 그에게 전하였다.
기미년 독립을 선언하던 날
의성의 외침이 육주를 진통터니
굶주린 개 도리어 원식을 위해 짖는도다
양의사의 비수를 들 사람 어찌 다시 없으랴.
주)양의사: 양근환(梁槿煥)이 1921년 도쿄에서 국민협회 회장이자 '시사신문' 사장 민원식(閔元植)을 칼로 찔러 처단함
간수가 깜짝 놀라서 “14년이란 긴 형을 받고도 이렇게 격렬한 말만 하다가 어찌 살아서 옥문을 나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오히려 걱정하였다.
오랜 옥고와 일제의 끊이지 않는 괴롭힘으로 김창숙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934년 더 이상 복역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게 되자, 일제는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 주었다. 둘째 아들 찬기의 집에서 요양하다 부인과 가족이 함께 대구 남산동에 새 거처를 구하였다. 하지만 검사국과 경찰에서 밤낮으로 감시하여 지인들은 물론 일가 친지들이 문병을 오고 싶어도 화가 두려워 찾아오지 못하였다. 심산은 1936년 설날 새벽 대구 거처에서 이런 심경을 토로하는 시 한 편을 지었다.
「설날 새벽에」
십 년 연루에서
아홉 번 죽을 뻔한 몸이
어떻게 또 이 봄을
맞이하는가.
처는 늙어, 무슨 일로
산중에 가고
아이는 병이 들어
바닷가에 누웠구나.
옛 나라 의관은
눈물만 남았는데
풍악 소리 요란한 곳
눠 집이란 말인가
까먹거리는 등불 아래
억지로 술잔을 드시
백 가지 감회에
잠 못 이루네
백양사에서 憂國詩(우국시)를................
연금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감시하는 자들도 힘이 겨웠다. 그래서 차라리 어느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 정양하기를 바랐다. 1936년 3월 심산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대구의 거처에서 떠나 울산 백양사로 옮겼다. 그무렵 망명지에서 심산과 각별한 사이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신채호가 뤼순 감옥에서 8년 옥고 끝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1936년 2월 21일). 심산은 백양사에서 그 소식을 듣고 시를 ?어 애도했다.
<일경에 피체(1928.5.8)된 신채호>
「단재를 애도하여」
들으매 그대의 시신을
금주의 불로 태웠다 하니
이 땅의 정기 그대와 함께
모두 거두어졌도다
옥루의 수문으로
그대는 잘 갔네만
항아리 속에......
하루살이같이
뒤에 죽는 사람들
이 부끄러움 어찌하랴
들으매 그대 여친이
청주로 돌아왔는데
오직 한 줌 재로
우구에 묻혔도다
묻노니 그대의 혼백도
따라 돌아왔는가
그대는 아마 앞서 간
보로를 따라 놀겠지.
「도산이 찾아와서」
어제 단재의 혼을 통곡해 보냈더니
오늘 뜻밖에 도산이 찾아왔네
넘어질 듯 부여안고 말문을 열지 못하는데
눈물만 비 오듯 입술을 적시네
심은후의 송별시를 다시 외우며
짐짓 손을 잡고 떠나지를 못하네
김일송(金一松) 동삼(東三) 초혼사(招魂辭)
- 1937년 일송 김동삼이 옥사(서대문형무소)하자, 그 부음을 듣고 지은 사(辭) -
일송 선생이 마침내 서대문 감옥에서 돌아가시니, 그 친구인 승려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등이 장사를 지냈는데, 신계사(神溪寺)에 모시고 가 다비(茶毘)에 붙였다고 한다.
아! 선생은 유교도인데, 이 나라 청산에 이제는 묻어드릴 곳도 없어서, 몸은 불가(佛家)의 불꽃에 기탁하고, 혼백은 날아올라 보재(溥齋: 이상설) 단재(丹齋: 신채호) 같은 몇몇 군자와 함께 하늘을 떠돌게 된 것이 아닌가? 벽옹(?翁: 앉은뱅이 늙은이) 김우(金愚: 심산이 자신의 이름을 우로 부름)는 동해가의 학성산에서 병들어 쉬고 있다가, 북쪽을 바라보며 크게 곡하고 초혼(招魂)의 노래 몇 수를 지어, 향도(香徒)로 하여금 노래하여 혼백을 부르게 함이다.
제산(?山)은 우뚝 솟고 제수(?水) 깊으니 ?山屹兮?水奫
그 정기(正氣) 바로 받아 태어난 님하! 正氣亭毒兮生若人
아! 정기야 길이 남아 쓰러질 줄이- 嗚呼正氣兮長不湮
넋이여 돌아오라, 춤을 추면서. 魂歸來兮庶??
<일송 김동삼(마포 감옥 수감 때 모습)>
요동(遼東)이라 누런 티끌, 바람 어둔데 遼塵黃兮遼風黑
더욱더 청청(靑靑)하던 일송(一松)의 모습. 一松靑靑兮生?色
아, 그 일송 마저 이제 쓰러졌다니 嗚呼一松兮今已?
넋이여 돌아오라, 애처롭기도! 魂歸來兮正惻惻
북경(北京)의 다락 차갑고 저자 어둔데 燕樓冷兮燕市冥
문산 가니 북풍에 비릿내 풍겨... 文山去兮北風腥
아. 하늘도 취하여서 안 깨는 기색, 嗚呼天醉兮尙不醒
넋이여 돌아오라, 머물지 말고. 魂歸來兮莫留停
(文山: 송나라 충신 문천상의 호)
신계(新溪)는 목메어 울고 한수(漢水) 슬픈데 新溪咽兮漢水悲
한 치의 묻을 땅 없어 다비(茶毘)하다니! 無地可?兮?茶毘
아. 나라 찾을 그 날이 다가오리니 嗚呼探環兮也有期
넋이여 돌아오라, 안 흩어지고. 魂歸來兮莫支離
학산(鶴山)의 슬픔이여, 낙포(洛浦)의 생각! 鶴山哀兮洛浦思
용호(龍虎) 가니, 울부짖는 여우 삵괭이. 龍亡虎逝兮號狐狸
아. 황하(黃河) 맑을 그 날이 꼭 오리니 嗚呼河淸兮會有時
넋이여 돌아오라, 주저치 말고. 魂歸來兮莫遲疑
「패강 서풍」
- 1938년 3월 도산 안창호 사망소식을 접하고 읊은 도산 안창호 만사 -
한스럽다. 관서 오백 년
숱한 호걸들이
어둠 속에서 울었구나
풍운이 때마침
기남자를보내니
팔도의 아이들도
큰 이름 외고 있네
사직이 망할 즈음
왜인들 교만 떨자
조각배로 하와이에 피를 토했다
나라를 건지자면
홍사해야 한다고
높은 단에서 우이를 잡고
분분한 지저귐을 진압했거니
기미3월에
일만 우레가 터지자
못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
자결 소리에 놀랐네
상해에서 크게 모여
영수로 추대하니
일시의 여망
님에게로 모였도다.
풍상에 자빠지고
엎어진 지 십여 년
그대의 수염 나의 머리털
흰 빛이 어지러웠지
마침내 원수의 손에 떨어져
같이 남관쓰고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였네
지난 해 남쪽으로
나를 찾아 위로할 적에
손을 잡고 말 없이
눈물만 흘리었지
주름처럼 겹겨반 속마음을
다 내풀지 못하고
갈림길에 다달아
헤어지기 차마 어려워
아, 어려워했지
나라의 원수 갚지 못하고
대유의 길 바삐 떠나니
패강 서풍에
골목마다 울음이 슬프건만
영남의 병든 부로는
끈질겨 죽지 아니하네
몸을 백으로 해도
속하기 어려운데
아, 이 회포 어이 할거나
「중양일에」
- 한용운에게 전하여 보냄 -
우습다. 가짜 연명이
국화철에 병들어 누웠구나
율리는 어디메냐
부질없이 술주시만 읊는구나
우습다. 가짜 천상이
절식하기 몇 번인가.
시시가 어디메냐
부질없이 정기시만 읊는구나
우습다. 가자 휘원이
할복할 때를 멀리 기다리네
모리가 어디메냐
부질없이 화엽시만 읊는구나
우습다. 가짜 여해가
백면으로 시대를 아파하네
거북선은 어데 두고
부질없이 서해시만 읊는구나
우습다 가짜 열경이
산방에 홀로 앉았네
풍악은 어디메냐
부질없이 표염시만 읊는구나
「내 어찌 차마 말하랴」
내 어지 차마 말하랴
옛 우리 삼한나라
눈물이 뿌려질 제
간담도 떨리어라
묻노니 이천만 동포여
무슨 낯이 있기에
좋은 강산이라
즐겨 노는가
눈을 들어 바라보라
거센 파도 몰아쳐
하늘에 맞닻은 것을
구멍난 배에 실려
울부짖는 소리
한창인데
어기여차
배 젓는 일
사공에게 맡기련만
두렵구나
삿대 잡은 자들
남의 손에 넘겨줄가를
심산은 1944년 일제 패망을 예견하고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동맹(建國同盟)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활동하다 성주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옥문을 나섰다. 이때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던 김창숙의 차남 찬기(燦基)가 1945년 10월 머나먼 이국 땅 중국의 중경에서 해방의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한 줌의 재로 돌아왔다. 장남 환기도 1927년 일제에 의해 고문사한 터라 심산의 슬픔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성면 발표하다
서울에 올라와 전동여관에 머무르던 어느 날 몽양 여운형이 찾아왔다. 여운형은 건국준비회의 진행 상황과 함께 정당이 60여 개가 난립하고 있음을 알려 주면서, 영호남 독립 운동가들을 규합해 정당을 조직하는데 당수로 취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내가 듣기에 60여 정당이 조직되어 있다 하니, 어찌 정당이 이렇게도 많은가? 나라와 강토는 아직 완전히 수복되지 못하였고, 정식 정부 역시 성립을 보지 못한 이때에, 정당의 어지러운 싸움이 이와 같이 심한 지경에 이르러서 저 60여 당이 만약 정권과 정책을 서로 다툰다면, 새로 일어날 대한민국이 필연 저네들의 손에서 다시 망하게 되지 않을까 두렵도다. 지금 여러분이 비록 나를 당수로 추대하였으나, 나는 허영에 이끌리어 그 당수의 자리에 나아가 여러 정당과 더불어 마침내 몸을 버리고 나라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1946년 1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비상정치국민회의를 소집하면서, 김창숙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권동진, 오세창, 조만식, 홍명희 등과 함께 특별위원으로 선임되고, 이어서 미주둔군 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으로 민주의원이 구성되면서 최고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창숙은 민주의원이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모체가 아니라 주둔군의 자문기관에 지나지 않는 데 반감을 품고 의장인 이승만과 정면 대결에 나섰다.
민주의원의 사회를 맡은 이승만의 독주에 대해, 김창숙은 “슬프다. 저 이승만이란 자는 미국에 아첨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독재정치를 하려는 수법의 징조를 여기서 보겠구나. 국가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이니 통탄할 일이다”라며 개탄하였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이로써 더 악화되어 갔다.
심산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굳어지자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8년 2월 5일 발표된 김창숙의 「성명서」는 이러하다.
1. 유엔 한국위원단이 한국에 지고 있는 사명은 내정간섭이 아니라, 남북통일 총선거로 통일 정부 수립에 관하여 외세의 부당한 간섭을 거절함에 있다고 믿는다.
2. 단선 단정은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을 조장함에 불과하니 북한 지방을 소련에 허여하려는 것이다.
3. 외군의 주둔 밑에 자유로운 선거가 있을 수 없고, 이에서 생기는 정부는 괴뢰 정부인 것이다.
4. 남북 정치 요인 회담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1948년 3월 김창숙은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와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임시로 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 정부 또는 양 국가를 형성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2년 뒤에 벌어질 6·25 전쟁의 참화를 정확히 예견한 성명서였다. 그 2년 뒤 김창숙은 서울에서 6·25를 겪었다.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이 지지를 종용하자 단칼에 거절한다. 1951년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했는데, 그해 봄 이승만 '하야경고문'을 발표했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김창숙은 이미 미 군정 산하 민주의원 회의석상에서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성토했다고 전한다.
"당신은 오늘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소?"
이승만은 답변을 거부한다.
“당신은 답변할 말이 없으니까 불법수단을 써서 사람을 제지하려 드느냐?”
이승만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결코 응답하지 못하겠다.”
“오늘 이승만의 답변을 듣지 않고는 나는 해가 질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겠다.”
“나는 결코 당신의 질문에 응하지 않겠소.”
이승만은 퇴장을 선언하고 자리를 빠져나간다.
“당신이 내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 퇴장한다니 어찌 그리 비겁한가!” 『자서전』
1952년 이승만이 당선(재선)을 위해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들고 나와 국회가 반대하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어 헌병부대를 동원해 국회통근버스를 제지하고 10여명을 구속했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의 서곡이다. 심산 김창숙은 야당인사들과 이승만을 반대하는 재야인사와 함께 부산 남포동 음식점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 및 시내행진을 계획했다. 주요 서명인사들은 이시영/김창숙/이동하/김성수/장면/전진한/백남훈/조병옥 등이다. 그러나 대회시작무렵 괴청년들(백골단)의 습격으로 심창숙은 모시 두루마기가 피투성이가 되는 테러를 당하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부산 국제구락부사건/ 1952.6.20)
이 사건후 대통령직선제와 내각책임제 개헌안 일부를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국회에서 강압적으로 통과되고 그해 8월5일 이승만은 재선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설립
한편 김창숙은 반 이승만 노선을 걸으면서 친일 유림단체와 성균관의 정비에 나섰다. 난립된 전국 유림을 유도회(儒道會) 총본부로 통합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황도유학의 청산에 나섰다. 김창숙은 미군정 당국의 반대에도 유도회 총회를 개최하고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며 친일파를 몰아냈다. 1946년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부와 군에서 관리하던 향교재산으로 재단을 설립해 유림들이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김창숙은 친일파를 등용한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인 탓으로 이승만 정권의 압력에 의해 성균관 유도회를 비롯해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된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의 급서로 이승만이 또다시 당선되자 "이제 전국의 민심은 각하에게서 이탈되었다"라면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대통령 3선 취임에 일언을 진(進)함'이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김창숙을 모든 자리에서 쫓아내는 공작으로 맞섰다. 교육부는 1956년 '김창숙 명의'로는 신입생 모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냈고, 그는 결국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성균관대학교 총장직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도연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과는 반대로 조국의 현실이 그러하지 못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반귀거래사(反歸去來辭) _ 1956.10. _
돌아갈꺼나! /歸去來兮
전원이 이미 황폐하니, 어디로 돌아가리? /田園已蕪將安歸
조국의 광복에 몸을 바치매 /余旣獻身兮光復役
뼈가 가루된들 슬플까 마는 /縱粉骨而奚悲
모친상 당하고도 모른 이 몸은 /有母喪而不知
되돌리지 못하는 불효에 울뿐! /痛不孝之莫追
이역만리 갖은 풍상 다 겪으면서 /飽風霜於異域
나날이 그르쳐가는 대업 탄식하다가 /嗟志業之日非
문득 크나큰 모욕을 받아 /身旋陷於大?
죄수의 붉은 옷 몸에 걸쳐도, /穿虜?之赤衣
고생을 달게 받아 후회는 없고 /忍苦辣而不悔
행여 도심(道心) 쇠해질까 걱정했노라. /懼道心之或微
눈앞에 고향을 바로 두고도 /鄕山在望
쇠사슬에 묵이어 가지 못 했네 /繫械莫奔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 나서니 /?疾而?, 始出牢門
쑥밭된 집안에는 남은 것 없고 /室廬蕩殘, 舊物無存
농사 아니 지으니 무엇 먹으며 /不農奚餐
빚을 수도 없으니 그 무슨 술 마시리. /不釀奚酒
친척도 모두들 굶주려 하니 /親戚亦其窮餓,
솟구치는 눈물이 얼굴을 가리네. /釀危涕而被?
아내도 집도 없어진 지금 /旣靡室而靡家
어느 겨를 일신의 안정 꾀하리. /寧遑謀於奠安
음험하기 짝 없는 사람들 있어 /紛鬼?之?物
내 고향의 날뜀을 봐야 했어라. /任跳梁於鄕關
삼팔선이 나라의 허리를 끊고 /哀三八之斷腰
그 더욱 슬픈 것은 동족의 무덤 /最傷心於京觀
모략 받아 죽은 이들 너무나 안타까와 /歎明夷之入地
하늘 우러러 하소연한들 그 누구 돌아오리 /仰皓天而不還
아! 거의 다 죽어가는 병든 이몸엔 /噫垂死之病夫
아무리 둘러봐도 어정댈 한 치 땅도 없도다. /顧無所於盤桓
돌아갈꺼나! /歸去來兮
돌아가 세상과의 연을 끊으리. /從此息交而?遊
세상 우습게 알아 감은 아니어도 /非傲世而長往
부귀영화 내 뜻이 아님이어라. /寔榮貴之無求
그러나 늙고도 창창한 마음 /髮雖短而心長
나라 일만 걱정되고 안타까웁고, /惟天下之是憂
노복을 불러 봐도 안 나타나니 /呼長鬚而不見
서쪽 밭에 밭갈 일 누구와 상의 하리. /孰問耕於西疇
물결에 몰아치는 바람 사나워 /湖海?急
외로운 배 노마저 꺾이었나니 /棹折孤舟
저기 저 치솟은 건 무슨 산이뇨 /直峻何山
머리 두고 내가 죽을 고향 쪽 언덕. /是吾首邱
고향 쪽 바라보며 차마 못가니 /望岡臺而??
세월은 물같이 빨리 흐르고 /歲華忽其如流
안타까와 맑은 샘물 손에 떠들고 목 늘여 어정이느니 /?晴川而延?
늘그막에 편히 좀 쉬었으면 싶어도 /庶嚮晦而宴休
비웃고 조롱하는 나쁜 무리들. /奈?揄之惡?
나로 하여 고향에 머물게도 하지 않아 /不?我而淹留
그 어찌 마음 조여 갈 곳 몰라 함이리 /胡爲乎??迷所之
남북을 몰아치는 흑풍 사나워 /南北黑風惡
화평을 이룩할 기약 없으니 /和平未易期
저기 저 사이비 정인군자를 /彼叢?之亂苗
죽는 대로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竭蹶而耘?矢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리 /死道路兮亦何恨
가만히 외어보는 위후의 억시 /誦衛候之抑詩*
해처럼 밝디 밝은 나늬 마음은 /?白日之此心
귀신에게 물어봐도 떳떳하도다 /質諸鬼神可無疑
* ≪시경≫ 대아大雅의 억抑은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안타까워 하며 주周 여왕?王을 풍자하고 자신도 경계한 위衛 무공武公의 노래다
이듬해에는 성균관장,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958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운동에 나서고 81살 때인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에 나서면서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 서한을 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또한 백범 김 구(白凡 金九)선생 및 일성 이 준(一醒 李儁) 열사 기념사업회장 및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구선생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김구선생살해내막”이란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김창숙을 찾아온 '아주 특별한 손님' 박정희
김창숙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던 1962년 5월 5일, '아주 특별한 손님' 하나가 병문안을 왔다. 1961년 5월 16일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사회 지도층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직접 병문안을 온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찾아왔으니 아무리 몸이 아프더라도 일어나는 흉내라도 내야 할 텐데, 심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김창숙은 벽을 향해 몸을 홱 돌리며 박정희를 외면했다.
그가 박정희를 냉대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일본군 장교 출신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 앞에서는 한 치의 타협도 할 수 없다는 꼿꼿한 선비 정신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는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84살 때인 1962년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5월 11일, 김창숙 선생(5월 10일 타계)의 빈소를 찾은 박정희
심산 김창숙지사는 유림 출신으로 대의(大意)와 명분에 입각한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으로 불굴(不屈)의 실천과 행동주의에 일관함으로써 우리 근현대사에 드물게 진보적 유학(儒學)정신과 민족주의를 일치시킨 실천적 지성의 사표가 되었다.
그가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는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역사의 임무를 전해준다.
통일은 어느 때에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김수환추기경과 심산상/일화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추기경에게 심산상(心山賞)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이 상은 독립투사이자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의 업적을 기려서 제정한 상인데,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부의 진통이 있었다. 심산선생은 저명한 유학자이다. 유학자인 심산선생 이름으로 주는 상을 기독교인이 받아서 되겠느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수상자를 추기경으로 결정하고 추기경의 의사를 타진한 결과 추기경은 수상을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런데 심산상을 수상한 사람은 심산선생의 기일(忌日)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고 모두들 놀랐다. 후일 기독교계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자 추기경은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 말했다고 한다.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교수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어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교수들의 회비와 기타 찬조금으로 운영하던 터이라 그 때 상금이 고작 7백만 원이었다. 후일 추기경께서는 사람을 시켜서 조그마한 상자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는 상금 7백만 원에 3백만 원을 더한 일천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