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구 자전 같은 사탄의 역사>의 줄거리:
지구의 자전속도는 적도에서 시속 약 1700km라 하지요. 만약 지구 주변의 대기는 그대로 있는데 지구만 그 안에서 자전한다면 초속 470m의 바람이 생기고 이 때 발생하는 소리로 인해 인간의 고막은 다 터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 대기도 지구를 따라 같이 운동함으로 소리가 나지 않고 느끼기조차 어렵습니다. 이처럼 지구 전체에 걸쳐서 활성화되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단의 역사가 아무도 몰래 바람한 점 없이 무음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구 자전 같은 사탄의 역사
(이사야 27:1~13)
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지구 자전 같은 사탄의 역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구 자전 같은 사탄의 역사’
태풍 솔릭이 제주도를 지나서 북상할 것이 예고되어 염려하고 있습니다.
태풍 솔릭이 굉장히 강한 태풍이라고 하는데, 이 태풍의 반경 내에서 풍속이 가장 센 곳은 초속 40m에 이른다고 합니다. 웬만한 것은 다 날아가는 풍속이지만 시속 144km정도입니다. 그런데 지구가 자전할 때의 속력은 적도 부근에서 시속 1,700km에 이릅니다. 아무리 큰 태풍이라도 초속 50m면 광풍 중의 광풍입니다. 행여 지구가 도는 속도로 바람이 분다면 초속 470m나 됩니다.
한 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대기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고정된 상태에서 지구가 시속 1,700km로 돌면 대기와 지구 표면 간에 마찰이 생깁니다. 그러면 당연히 초속 470m의 바람이 생길 뿐만 아니라, 공기와의 마찰에 의한 엄청난 소리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소리는 인간의 고막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구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는 같이 돌고 있기 때문에 그만한 바람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구 밖은 진공상태이기 때문에 소리를 전달할 매질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커다란 지구가 시속 1,700km, 초속 470m의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표면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을 느끼지 못한 채, 다만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으로 지구의 자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사실입니다. 지구는 엄청난 속도로 자전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전혀 체감하지 못하는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우리의 삶에서도 벌어집니다. 지구의 자전처럼 전혀 알아차릴 수 없지만 실은 인간세상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도 지구의 70억 인구 대부분은 사탄의 역사를 체감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지구가 시속 1,700km로 자전하지만 체감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의 역사는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알아채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경제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군사적으로 대치하기도 합니다. 혹은 한 나라 안에서도 이런저런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삶이 재미없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알아채지 못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탄의 역사 때문입니다. 알아차리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지만 모르는 상태에서의 삶은 평생 괴로움과 고통으로 짓눌립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사야는 24장부터 폭로해왔고, 오늘 본문의 1절을 통해서 그 정체를 완벽하게 밝혀내고 있습니다.
먼저 13~23장까지 이방 열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있었고, 22장에서는 유다에 대한 심판의 예언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특정한 나라들에 대한 예언이 끝나고, 24장부터는 인간 세상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됩니다. 그러면서 선민의 구원이 같이 이야기되는데, 24~27장까지를 묶어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고도 합니다. 종말 때에 있을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심판이 예언되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 보았던 24~26장은 종말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정신 차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사도 바울과 루터가 말했던 것처럼 날마다 죽음으로써 오늘의 사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 복음이 생활화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집중적으로 쏟아지게 되는 바로 그 과녁을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종말 때에 하나님의 심판의 과녁들을 드러냄으로써 지금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이 집중되는 첫 번째 과녁은 하나님을 젖혀두고 이 땅에서 기쁨거리를 찾으려는 삶입니다. 두 번째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젖혀두고 이 땅에서 안정감의 토대를 확보하려는 삶입니다. 세 번째로 현실감은 곧 믿음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기준으로 볼 때에 세상에 불신자는 없습니다.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믿음과 현실감이 동의어인 이유는 마음을 어떤 대상에게 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감은 존재하는 많은 사실들 속에서 마음을 준 사실만이 나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토대가 되고 삶의 현장이 되고 삶의 영역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신경(Credo)은 그 본래의 뜻이 ‘마음을 꺼내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크레도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내 마음을 꺼내 하나님께 드리는 것 말고 다른 무엇으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내 마음을 통째로 예수님께 드리겠다는 결단의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러한 세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는 땅을 현실로 수용하는 삶에 주어지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리워야단 즉 사탄의 형태도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날랜 뱀 리워야단’이라고 하였고, 둘째로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이라고 하였고, 셋째로 ‘바다에 있는 용’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우선 표현상에서 어색한 부분을 찾아 바로잡아 봅니다.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이라고 하였는데 문장 자체가 어색하고 날랜 뱀과 꼬불꼬불한 뱀이 하나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곧’이라는 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날랜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 바다의 용으로써 세 마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리워야단이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나라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24~27장은 종말 때에 보편적이고 포괄적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나라를 지칭한다고 해석한다면 이러한 흐름에 어긋남과 동시에 종말 때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 자체를 무색하게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세 가지 사탄의 모습은 앞서 보았던 세 가지 삶의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날랜 뱀’은 땅에 배를 붙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뱀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땅에 붙이고 기쁨을 찾아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배후에는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달에는 흑자가 500만원 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흑자가 마음을 기쁘게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우리 안에서 생겨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탄이 우리 마음을 유혹한 것입니다. ‘이번 달에 500만원이 흑자나면 네 마음이 기쁠 거야.’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비어있기에 땅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습니다. 그러나 빈 마음은 하나님 이외에 채울 방법이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는 기쁘고 만족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는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없는데 마귀는 우리를 속였습니다. 돈을 벌면 마음이 기쁠 것이라고 유혹하며 하나님을 향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유혹합니다. 자녀가 최소한 SKY중에 한 군데를 들어가야 기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유혹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스스로 생각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SKY 중에 한 군데에만 들어가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합니다. 마귀의 말을 그대로 옮겨 실천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면 좋겠다, 무엇이 되면 기쁘겠다, 무엇이 이루어지면 만족하겠다.’라는 마음은 내 생각이 아닙니다. 날랜 뱀 리워야단이 우리의 마음에 속삭이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에게서 나온 바람직한 생각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이 지구의 자전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기를 간구하는 대신에, 사탄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돈 좀 벌었으면 좋겠다, 자녀가 잘되면 좋겠다, 몸이 건강해서 오래 살면 좋겠다, 여행 좀 갔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어마어마하게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모습입니다. 똬리를 튼 뱀이 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칼로 쳐서 죽이리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또 우리에게 와서 속삭입니다. ‘노후에 연금이 있어야 편하게 살 수 있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편하게 살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진정한 평강은 이런 것으로는 얻어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면 제자들이 모여 떨고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셔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과는 반대로 세상이 주는 안정감에 목숨을 걸고자 합니다. 안정된 노후, 안정된 직장생활, 안정된 경제, 안정된 건강상태, 안정된 자녀의 상태 등을 원합니다. 이 바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모든 생각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셋째로 바다의 용이 나타납니다.
다니엘 7장이나 계시록 13장에 보면 ‘바다’는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하는 세력의 모든 짐승이 튀어나오는 곳입니다. 요즘의 인식과는 다르게 옛날 사람들에게 바다는 그 깊음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그곳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을 흉악한 짐승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기쁨과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의 역사를 주도해가는 두 사탄을 능가하는 가장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용입니다. 당시의 인간으로써는 바다 속에 무엇이 있는지 완전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앞서 보았듯이 몸으로 부딪히는 이 땅의 상황을 현실로 느끼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려운 현실에 처해있다고 여길 때에 그 현실감이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탄은 그 정도로 완벽하게 숨어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상황이 나의 현실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이 나의 현실입니다.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현실이지, 돈이 없고 몸에 병이 난 것이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몸에 병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이 현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몸으로 대하는 상황을 현실로 느끼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시고 기쁨으로 교제하시며 일체를 이루고 계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까마득한 전설이나 교리쯤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기독교가 지어낸 공상 같은 이야기로 치부해버립니다. 오히려 삼위일체라는 말을 삼위일체 영어나 삼위일체 기업 경영 같은 곳에 제멋대로 가져다 씁니다. 그들에게 현실은 어디까지나 몸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에 이것이 현실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골리앗과 블레셋 군사들과 대치 할 때입니다.
그 때에 이들은 골리앗이 포효하는 모습을 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현장에서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고도 만군의 주 여호와가 함께 계심을 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현실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던 시절을 예로 들어봅니다. 십 년 동안을 도망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의 손으로부터 다윗을 매번 구해주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울의 손으로부터 구하셨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던 다윗에게 왜 이런 고통을 겪게 하셨던 것일까요? 사울에게 쫓기고 아둘람 굴과 광야를 전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을 두어야 할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이 마음을 두어야 할 현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이 붙잡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에 들어갔을 때에도 현실로 여겨야 하는 것은 왕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만을 현실로 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현실을 잊어버렸을 때에 밧세바 사건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부딪히는 사건과 상황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현실을 개선하고 열매 맺히기 위해 애쓰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부터 사탄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이 땅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이 땅에서 안정된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이 땅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유혹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하나님도 찾고 예수님의 이름도 부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얻겠다는 기쁨과 안정감과 이 땅에서 개선시키고 싶은 현실을 도와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악랄한 사탄의 소리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평강과 안정의 토대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현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십니다. 내가 몸으로 살아가는 이 땅은 창조주 하나님의 현실이고 하나님의 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보이는 어떤 것도 기쁨의 원천으로 삼거나, 안정의 토대로 여기지 않으며,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고, 안정감의 토대로 삼고, 유일한 현실로 고백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현실이 되어서 보시기에 좋으신 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지금도 온 세계 70억 인구가 마음속에서 유혹하는 사탄의 속삭임을 듣고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 생각에 따라 이 땅에서 기쁨을 추구하고 안정된 토대를 추구하고 이 땅의 상황을 현실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것만 되면 기쁘겠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날랜 뱀 리워야단의 말입니다. ‘이것만 되면 안정되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똬리를 튼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의 말입니다. 몸으로 부딪히는 상황을 현실로 삼습니다. 이것은 바다에 있는 용의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칼을 드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말에 마음을 빼앗긴 나를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죽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기쁨의 원천, 안정감의 원천, 유일한 현실로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끌고 올라가셔서 기쁨과 안정감의 원천이시자 유일한 현실이신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그 즉시 하나님의 현실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삶은 하나님의 과제가 되고 하나님의 활동 현장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화함으로써 날랜 뱀의 속삭임, 똬리를 튼 뱀의 속삭임, 바다에 있는 용의 속삭임을 차단하고 물리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우리의 마음을 몽땅 쏟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랜 뱀과 똬리를 튼 뱀과 바다에서 나온 용의 우렁차고 설득력 있는 외침과 속삭임에 분연히 맞서게 해주셔서 하나님만을 기쁨의 원천, 안정감의 원천, 유일한 현실로 모시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