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고와 은혜
1971.05.02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아버님, 당신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일상 저희들과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이날로부터 이 한 달을 거룩한 한 달로서 아버님께 바쳐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만물이 소생하는 이 오월에 저희 심령도 만물과 같이 소생할 수 있고 번성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산에 피는 꽃과 벌나비를 보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한때는 가고 한때는 찾아온다는 것을 저희들이 새롭게 느끼게 되옵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게 될 때, 신앙생활을 하는 데 일상적이었던 저희들의 옛 때를 흘려 보내고 새로운 때를 맞이하면서 옛 때에 남아진 영양소를 중심삼고 새로운 때에 활기찬 모습으로 뻗어 나가야 할 것이 저의 신앙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요, 생활인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 아침, 아버지의 슬하에 부복하였사오니, 저희 마음이 몽땅 아버지께 흡수되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성상을 그리워하고, 당신의 심정에 잠기기를 간절히 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마음이 하늘과 더불어 인연되고, 그 인연된 마음이 내 자신을 일깨우고, 그 일깨워진 내 자체는 참다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고, 참다운 아버지를 부르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기쁨의 대상이 되어서, 아버지께서 무한한 축복을 베풀어 주시기에 아깝지 않은 거룩한 아들딸의 모습이 되어야 되겠사옵나이다.
저희들은 항상 세속적인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요, 언제나 개인의 생활 환경과 전통 가운데에서 허덕이는 처참한 모습이요, 저희의 신세는 고아와 같은 신세인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오니, 당신께서 사랑의 아버지가 되시고 사랑의 어머니가 되시어서 저희의 주위와 환경의 모든 고독함을 제거시키고, 마음이 메마르고 몸이 궁핍한 것을 풍요하게 하시어서, 저희들이 당신이 소망하시는 천국으로 행보를 갖추어 버젓이 나설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날들을 지내면서 저희들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은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옵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성상 앞에 저희 일신을 완전히 굴복시키시어, 저희들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존재요, 당신에게 바쳐진 존재임을 알게 하시옵고, '나'를 중심한 일념을 제거하고 당신으로 말미암은 자체를 세워 아버지 앞에 산제물로서 바쳐 드리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맹세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몽땅 아버지의 것으로 취하시어서 아버지의 것으로 남아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아침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모아 머리를 조아리고 하늘을 향하여 생명의 인연을 갈구하는 그들 위에 무한하신 사랑과 은사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또 세계 각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이 한국 땅을 바라보며 소망의 한날, 상봉의 한날을 그리워하며 아버지 앞에 축수를 드리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도의 길을 따라 나오면서 섭리의 노정이라며 개척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모진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오는 종교인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한 시대에 한 나라와 한 민족의 일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당신의 영광의 존전에서 찬양하고 감사하여 사랑받을 수 있는 무리로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고요히 고요히 저희들을 부르시옵소서. 내 세포와 내 피살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동하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정하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끌리어 아버지께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사탄의 요인을 저희들이 완전히 제거시켜 버리고, 아버지하고만 화합할 수 있는 개체의 요인으로서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본성의 자세를 지녀 가지고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 앞에 참되이 경배드리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재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도 은혜를 입게 되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은혜
그러면 은혜 중에서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내 생명을 구해 준 은혜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큰 은혜가 있다면 자신이 소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는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큰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을 구해 주고 자기가 생명 가운데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을 구해 주는 분이 있다면 그분이야말로 은인 중의 은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는 데 있어서 평범한 자리에서 은혜를 받는 것과 기뻐하는 자리에서 은혜를 받는 것과 수고하는 자리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자리에서 은혜를 받았다면, 기뻐하는 그 자리가 나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가 되느냐, 아니면 나라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가 되느냐, 아니면 세계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가 크면 클수록 받아지는 은혜는 자기 것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그 영향이 미쳐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것은 자기가 동기가 됨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겠지만, 국가를 중심삼고 기뻐하게 된 자리는 자기가 동기가 됨으로 말미암아 된 자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세계를 중심삼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도 자기가 동기가 됨으로 말미암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의미의 은혜라 함은 내가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동기가 되며, 세계가 동기가 되고, 역사가 동기가 되고, 이 시대가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큰 은혜는 짧은 기간내에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한 생애는 기껏해야 백년 미만의 짧은 기간입니다. 이 짧은 기간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수고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수고를 통해 나라가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은혜를 가져올 수 있겠느냐? 또, 나 자신이 세계를 위하여 충성과 희생과 수고를 했을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기뻐할 수 있는 은사를 가져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내가 동기가 되어서는 그런 은사가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가 기뻐할 수 있는 은사의 날과 때, 세계가 기뻐할 수 있는 은사의 날과 때, 그 때라는 것은 나를 넘어 수천 수만 년 전의 선조들이 남긴 역사적 전통을 통해서 은혜의 터전이 상속되어 내려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은사가 계승되어 오는가
민족을 중심삼고 볼 때 그 민족 가운데 그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고, 또 그 민족을 대표하는 선한 애국자가 얼마나 많았느냐에 비례하여 그 민족이 받을 수 있는 은사의 권이 빨리 올 것이요, 그 민족이 받을 수 있는 은사의 기간이 더욱 길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입장에 선 애국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느냐 하는 것과 얼마나 어려운 역사시대를 거쳐왔느냐 하는 문제에 따라 그 민족이 오랜 기간 은혜의 자리나 어떠한 민족 앞에 특출한 은사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가 은혜의 자리에서 즐길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려면 세계를 위해 정성을 들인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 정성을 들이는 것은 애국이 아니라, 성인의 반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이 세계가 그러한 은혜권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수고한 그 공의 터전이 두드러지게 될 때 비로소 세계적인 은사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걸 두고 볼 때, 세계적인 은사는 맨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적인 은사는 어떠한 사람들을 통하여서 찾아질 것이냐? 그리고 그 역사적 인연은 어떻게 연결되어 가지고 오늘날 우리와 우리 후대 앞에 연결되어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어떤 특정한 개인보다도 하늘을 따라 가지고, 천운을 따라 가지고, 천명에 의해 가지고, 크나큰 뜻을 품고 세계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서슴지 않고 자기의 일생을 수포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희생의 길을 감수하며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통하여 연결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터전이 없어 가지고는 세계를 살릴 수 없으며 세계가 기뻐할 수 있는 은사의 자리까지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이 세계적인 은사는 어떠한 애국사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인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세계를 위하여 산 성인들의 사상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연결하는 데 있어서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한꺼번에 일리(-理)를 제시해 가지고 은사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열 사람을 대표한 어느 특정한 성인 한 사람을 대표로 세워 가지고 세계적인 은사를 인간세계에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끝날이 되어오는 이 시대에 수많은 종교들은 재림사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들이 재림사상을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새로운 세계적인 은사시대는 반드시 종교의 이념을 통해 가지고 새로운 세계애를 실천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명자로 인하여 온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에, 기독교는 만우주의 주요, 만민의 어버이요, 만민의 구세주의 사명을 가진 한 분이 비로소 이 땅 위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은사시대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암암리에 교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개개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어떠한 사람들은 현재의 입장에서 복을 받고 행복스럽게 살는지 모르지만 그런 개인들의 행복이라는 것은 짧은 기간에 누리는 행복일 것입니다. 주기로 말하면 짧은 주기일 것입니다. 그런 주기를 갖추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은사권은 그 기준의 몇백 배 몇천 배가 될 것입니다. 또, 세계의 은사권은 그것의 몇만 배 몇억 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전통적으로 이어받아 일치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가지고 이것을 연결시켜야만 그런 은사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성인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도리를 자기의 생명을 바쳐 가지고 이끌어 나와 역사적 전통의 기원을 남기는 터전 위에서만이 세계적 은사권을 옮겨 놓을 수 있으며, 이것이 끝날까지 이어질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에 개인적으로만 복을 받고 살려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과연 그들이 세계의 은사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 자기 개인이 동기가 되고 자기 선조로 말미암아 동기가 된 것은 세계의 은사권과는 하등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때 수고를 해 가지고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할 때, 그것이 자기 씨족을 중심삼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터전으로 국가를 중심한 은사권을 이어받을 수 있겠느냐? 그것을 이어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세계적 은사권을 이어받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 은사권이라는 것은 종교의 이념이 뒷받침되어야 됩니다. 인륜이 아니라 천륜을 따라야 하는 것이요, 인정이 아니라 천정을 따라야 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세계의 은사권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천륜을 따라가는 길은 인간 위주하고 지상에 어떠한 사람을 중심삼은 것이 아닙니다. 유일무이하신 절대자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분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고 그분과 더불어 심신행보를 맞추는 노정에서만이 세계적인 은사의 터전이 남아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생명을 바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남겨 놓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까지 바쳐 가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데는 몸과 마음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정성이 극에 달하는 자리에서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야 비로소 천륜 앞에 인륜이 인연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구성에 세계적인 은사의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의 배후를 알아야
이런 점에서 볼 때, 은혜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오고 가는 길에서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과도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원수가 될는지도 모르고 나에게 복을 갖다 줄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내가 그렇게 만났다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더우기 나를 중심삼고 인연지어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그 배후에 역사적인 수고가 깃들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김씨와 박씨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박씨가 어느때에 김씨에게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다가 갚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시다. 이럴 때는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되겠습니까? 박씨의 후손은 김씨의 후손에게 자기 선조가 하지 못한 것을 갚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박씨의 후손인 자신은 모르지만 영계에 가 있는 선한 선조가 후손의 마음을 움직여 가지고 그 김씨의 직계 후손과 만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되면 박씨의 후손은 과거에 선조가 입었던 은혜를 갚아 주어야 됩니다.
은혜를 갚아 주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서 김씨가 선하고 은혜를 갚은 박씨가 선하더라도 선의 기준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김씨가 백만큼 선한 입장에 섰고 박씨가 오십만큼의 선한 입장에 섰다면, 김씨의 은혜를 입은 박씨가 자기의 후손을 통해 김씨나 그의 후손에게 그 은혜를 갚게 될 때, 그 김씨는 은혜를 갚아주는 것을 응당한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게 된다면 여기에서 두 사람의 선의 기준은 서로 상대적 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50의 기준이 100의 기준과 상대적 위치를 취하며 나타나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되어 가지고 맹세한다면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즉, 동등한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르기를 맹세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이유는 무엇이냐? 맹세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니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겁니다. 또, '교회에 대해서도 함부로 맹세하지 말 것이며, 교회 제단을 두고도 함부로 맹세하지 말 것이며, 교회의 제물 갖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한 것은 우리 인간의 기준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높은 기준에 있는 그 앞에서 함부로 맹세했다가 그 기준과 보조를 못 맞추어 하나되지 못하고 떨어지는 날에는 그 높은 기준의 몇 배, 몇십 배, 몇백 배, 또는 몇천 배로 타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세한다는 것은 아무 권위가 없는 것 같지만 주체의 권위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나는 통일교인이다' 라고 하는데 통일교회가 나올 때까지의 역사를 보면 수난의 과정을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가 출발하는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적 인연을 통합해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통합하는 데는 나쁜 인연을 통합한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역사적 인연을 통합해서 그 인연을 직계적으로 계승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귀섭리역사를 해오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 길을 가면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요, 이 길을 가면 오시는 주님과 더불어 천성에 가는 것이요, 이 길을 가면 주님과 더불어 천국의 왕궁에 가는 것이요, 이 길을 가면 하늘나라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길이 나오기까지 하늘은 그 배후에서 역사적인 수난과 선의 대가를 얼마나 많이 치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심는 데에 비례해서 그 결실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난길을 거쳐오면서, 더우기나 탕감복귀의 역사노정을 거쳐 오면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여기에는 개인이 동원되어 있고, 가정이 동원되어 있고, 종족이 동원되어 있고, 민족이 동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은사를 이어받으려면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회가 지닐 수 있는 은사는 역사적인 은사요, 수많은 국가의 국가권을 넘어선 자리의 은사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후의 은사인 것입니다. 이 은사는 종족, 민족, 국가를 넘는 은사의 터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은사와 하나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공의의 터전을 통하여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며, 그 치러진 기준을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는 터전의 자리에 서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리에는 지금까지 왔다 간 수많은 성현들의 심정과 인격이 있어야 되고 성현들이 흠모하던 천륜이 들어 있어야 되고, 천륜 가운데 제일 중심이 되어야 할 천정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중심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인격을 중심삼은 생명, 인격을 중심삼은 생명과 그 생명을 중심삼은 정(情), 즉 사랑이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삼고 통일교회에서는 심정을 논위(論謂)하는 것입니다.
그 심정의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이냐? 이것은 여러분 일대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대에 모두 소모되어서 끝낼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손만대에까지 남겨 줄 은혜이기 때문에 종적으로 내려진 이 은혜의 기반을 횡적으로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반을 닦는 데 있어서는 개인적인 수난길과 개인적인 수고의 길만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고하되 나라와 더불어 수고하고, 세계와 더불어 수고하고, 역사와 더불어 수고한다는 입장에 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찾아온 은사는 개인을 중심삼은 은사가 아니요, 특정한 어느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이라고 해서 지금 현재의 문명을 중심삼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선을 위주해서 세계 국가라는 한때를 바라 나오던 선한 사람들의 공적의 터전으로 말미암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사람들이 수고한 대가로 말미암아 찾아진 은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 큰 은사를 여러분이 어떻게 받아 감당할 것이냐? 여러분은 박씨면 박씨, 김씨면 김씨라는 아무개의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태어나서 살았다고 하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몇십 년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살이 되었으면 50년 동안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또는 7,80살이 된 노인이라면 7,80년 동안 이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 왔을 것입니다.
효자라면 부모의 뜻을 받들어 그 뜻을 남겨야 됩니다.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데는 재산이 있고, 후손이 있습니다. 효자가 되려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불효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팔아먹는 사람이 되면 불효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선조가 물려준 유산에 한 줌의 흙이라도 보태야지 그것을 깎아먹고 팔아먹는 후손이 되면 불효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선조들이 이 뜻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원리가 가르쳐 주는 내용이 사실이고 그렇다고 할 수 있기까지는, 그 배후에 수많은 성현들이 정성을 들이고 생명을 희생시켜 가지고 지금까지 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종착점을 향하여 역사를 몰아 나오고 시대를 수습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까지 연결시켜 나와 최종적인 교차점에서 상봉한 것이 바로 여러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있다면 이 이상의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시대도상에 내가 서다 보니 10년, 20년의 생애노정에서 역사적으로 굽이쳐 오는 크나큰 물결을 최고의 정상에서 맞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상속받은 재산을 소모시키는 것도 불효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의 자리에서 일치화시켜 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받은 그 은혜를 일체화시킨 자리에 서지 못하고 분열된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 은혜의 터전 앞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재산도 그렇지만 인격을 두고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 사상을 이어받아 철두철미한 목적의식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오든가 주권이 흔들리고, 혹은 생사가 걸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뚫고 나갈 수 있는 목적의식에 불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복귀를 위해서, 혹은 은사의 나라를 위해서 그 목적의식에 불타는 마음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어떠한 사람의 말에 움직이거나 어느 환경의 어지러움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불변의 인격관을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변의 인격관을 갖고 선조들이 가졌던 그 이상의 자리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 은사권을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갖춘 내용이 너무나 역사적이요,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일치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이것을 따르고, 이것을 염려하고 그 주위에서 서성거린다면, 그것은 은혜로서 남아지지 않고, 도리어 그 은혜가 떠나면서 모든 것을 다 가져갈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은사는 개인으로서 소화시킬 수 있는 은사가 아니라 나라와 세계와 더불어 소화해야 할 엄청난 은사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내가 이 은사를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은사를 대하여 허리를 굽히게 될 때에, 이 은사가 선조들이 백번 천번 허리를 굽혀 노력한 터전 위에 연결된 것이면 나는 천번 만번 허리를 굽혀도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뜻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데 있어서 밤이나 낮이나 시간을 더하기에 노력하고 피땀을 흘리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선조들이 우리를 찾아와 그 정성을 모아 받은 은사를 우리에게 맡길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은사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온 은사요, 그런 책임을 진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와 책임을 진 우리들이 이렇게 행동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은사가 은사다우려면
그렇다고 해서 찾아온 뜻과 은사를 받지 않고, 하나되지 않고, 그 은사가 요구하는 인격체가 못 되며, 그러한 환경을 이루어 드리는 책임을 못한다 해서 결코 이 은사는 망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은사를 받아 감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어디로 옮겨졌느냐? 자기의 편 된 어떤 지파에게 옮겨진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고 이 은사가 머물 수 있는 터전을 닦기 위해서 수천년간 수고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수고해 나온 그 모든 것이 부정되어질 때에는 그 터전은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넘어지니까 거꾸로라도 서야 합니다. 그러니 반대 입장에 있는 나라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따르던 사람을 중심삼고 나오다가 틀어지게 될 때는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옮겨 가지고 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기성교회, 기성교회로부터 반대받던 통일교회는 어떻게 되어질 것이냐? 여러분 이런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찾아온 이 은사는 통일교회만을 위한 은사가 아닙니다. 또한 통일교회 문선생 한 사람만을 위주로 한 은사도 아닙니다. 이것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로 보내 줘야 할 은사입니다. 세계로 빨리빨리 보내 줘야 할 은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총력을 감소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은사를 나라를 거쳐 세계로 보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수난길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은사를 은사다운 자리에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은사가 은사다울 수 있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그 은사가 은사다운 자리에 서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나라가 좋아하고, 나라가 좋아하는 것은 세계가 좋아하고, 세계가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언제나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은혜를 받았으면 내가 은혜 받았다고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어디로 돌려야 할 것이냐? 그 은혜의 동기는 나라도 아니요, 세계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했지 세상을 더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수고로이 찾아온 은사의 터전을 여러분이 더럽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엄청난 은사는 역사적인 은사요, 세계의 수많은 성현들이 정서적 전통을 이어받아 수천, 수만의 역사과정에서 수난과 희생의 고빗길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의 대가를 치르며, 역사과정에 말할 수 없는 수난의 역로를 거쳐 나오는 가운데 남아져 내려온 은사입니다. 이 길이 꼬부라졌다 펴졌다 하면서 오늘날 우리 인류 앞에 연결되고 내 생애 앞에 상봉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나라를 잃었던 백성이 나라를 되찾아 기뻐하는 이상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나라를 잃었던 어떠한 군왕이 망명객으로 있다가 다시 국왕의 권위를 되찾은 기쁨 이상의 기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세계를 제패한 이상의 기쁨을 느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은사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상으로 우리가 기뻐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죄 될 것이 있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이상으로 기뻐하는 무리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무리를 통하여 은사를 남겨 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뜻을 대하고 은혜를 대하면서도 그것이 은혜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은혜 입었다고 취해서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맹세하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이 무슨 꿈만 같다는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에는 물 안에 들어가서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있으면 그것이 자기의 생활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온의 변화가 없으니까 물 안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어서 물에 들어와서 목욕을 한다는 의식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 같고 저것도 이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욕은 목욕이요, 목욕이 끝나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달라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자의 생활은 신앙 없는 자의 생활과는 현격히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하늘의 크나큰 은사를 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늘의 은사는 왔다가 절대 그냥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석과 같아서 어떤 집에 은사가 왔다 가게 되면 거기에서 붙을 수 있는 것을 전부 붙여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게으른 자의 은사를 빼앗아 부지런한 자에게 준다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힘을 쓰려고 해도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봄날과 같은 시기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운세가, 뻗어갈 수 있는 봄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철이 올 텐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접붙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혼자는 늦어진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크면 그것을 지키려는 수고도 커야 한다
여러분,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이것을 인류 앞에 넘겨주어야 할 최후의 은사를 이어받아 가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점에 있어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환경적으로 닥쳐오는 세계적인 온갖 세파와 수많은 역사과정을 넘고 넘어 오늘날에 상봉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이 한 나라를 가진 것보다도, 세계를 점령하여 다스리는 것보다도, 하늘땅을 다 가진 것보다도 더 놀랍고 엄청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상처를 입을까봐 잠을 못 자고, 이것이 어떤 지장을 받을까봐 마음을 졸이며 가야 할 것입니다. 애기를 품은 채 원수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어머니의 입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애기를 품고 도망가는 어머니는 자신이야 피해를 입든 말든 애기를 위해서는 목숨을 내걸고 희생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 애기보다 더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청춘남녀가 그 상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왜? 일생을 중심삼고 가져올 수 있는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나큰 은사를 받은 사람을 얼핏 보면 복 대신 고통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책임을 많이 진 사람은 편안한 것 같지만 절대 편안치 않아요. 지금 선생님을 보라고요. 새벽 네시 10분쯤에 여기 왔는데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고, 이제 또 수택리로 가야 합니다. 편하지 않다구요. 그러면 이 은혜를 어떻게 지탱해 나가느냐? 이 은혜의 밑받침이 수고로 말미암아 지탱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지탱해 나가는 방법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대한 수고의 터전을 어떻게 유지시킬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가지고 어떻게 더 좋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여 후손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물려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상처를 입혀 가지고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나무에 가지가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해서 후손들에게 더 가치 있게 남겨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기에 반비례적인 수난의 길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복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가지고 복을 받겠다고 하면 도둑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복받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다면 그 녀석은 도둑놈입니다. 복을 받겠다는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돌아다니면서 날날이 모양으로 나발 불고 다니면 복을 못 받습니다. 자기가 당한 수난길을 가려 가야할 이 큰 몫을 어떻게 지고 갈 것이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남모르는 깊은 침묵이 그의 심정에서부터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모르는 엄격한 법도가 그의 생활 주변을 가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다짐하는 수고의 결정적인 노정을 통하여서 그 은사는 보다 빛날 수 있는 터전 위에 남아질 것이고, 보다 빛나게 후손 앞에 넘겨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될 때는 그 은사가 여러분의 후손을 때려잡고, 여러분의 후손이 가는 길을 막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나 내가 통일교회에 안 들어왔다면 모르지만 통일교회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날에는 아들딸들이 못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다니다가 나간 사람들이 잘되나 보라구요. 흔들흔들 해 가지고 잘되나 보라는 것입니다. 잘된 사람이 있나 생각해 보세요. 씨알맹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통일교회는 무서운 곳입니다. 일면은 무서운 곳이고 일면은 반대입니다. 반대는 뭐예요? 일면 좋은 곳입니다. 두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서운 면을 제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수고해야 됩니다. 이것을 막는 방법은 수고밖에 없습니다.
뜻을 위해 가는 동료가 백 명이 있을 때 1대, 2대, 3대쯤 가다 보면 백 단계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는 어디로 갈 것이냐? 그 백명 가운데 선봉에 서서 정성들이고 수고해 가지고 그 가치를 보다 입체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세워 주려고 하는 무리가 있다면, 은사는 그곳으로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것입니다. 갈 때는 여러분의 은사를 모두 끌어내어 가지고 갑니다. 선생님이 그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빚지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빚을 지면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빚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빚지기는 쉬워도 빚을 지우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요? 어렵기 때문에 수고로운 것입니다. 빚을 지우는 것은 수고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렵고 어렵더라도 이를 악물고 수고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수고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중심삼고 해야 합니다. 이 은혜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은혜는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로 가야 됩니다. '나를 통해서 빨리빨리 가라' 해야 됩니다.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밀어 주고 발전시켜 주었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영향력이 전역에 미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수고에 비례하여 좌우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뜻을 대하는 바른 자세
여러분이 이 통일교회에 와서 선생님을 만났지만 선생님이 찾아온 걸음과 여러분이 찾아온 걸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끔 맹세를 시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러분에게 선생님과 같은 입장에 설 수 있는 특권적인 은사를 부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과 같이 보조를 맞추어서 세 고개를 따라 넘어가야 합니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라 하지만 열두 고개는 세 고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춘하추동을 중심삼고 보면 봄절기는 세 달입니다. 정월고개, 2월고개. 3월고개, 이 세 고개는 넘어야 합니다. 세 고개를 따라 넘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 사흘, 3일기간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언제나 이 3일 기간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개인 고개를 넘어가고, 국가 고개를 넘어가고, 세계 고개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개인의 고개를 넘어가려면 나의 욕망을 버리고 나를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때려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탄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고개를 넘어가려면 사탄세계의 나라를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부정이 안 되거든 때려잡아서라도 부정시키고 굴복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탄한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세계의 고개를 넘으려면 사탄세계를 부정해야 됩니다. 부정 안 되거든 때려잡아서라도 부정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계가 복귀되는 것입니다. 자, 이게 쉬워요? 밤낮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 나간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은 물론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내 생명을 앗아 갈지 모르는 입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불안하고, 언제나 초조하고, 언제나 긴박하고, 언제나 선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이러한 생활과정을 거치는 것이 하늘이 찾아 나오는 고귀한 신앙의 자리에 선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없어 가지고는 이 은사를 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통일교회는 지금 위대한 은사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은사의 자리를 지탱시키자니 그 위대한 은사에 반비례적으로 닥쳐오는 극한 수난 속으로 때려 몰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은사가 민족적 수난의 고개를 평탄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요, 공식입니다.
세상에서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해 가지고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이 은사는 개인의 일생을 통하여서 전해 온 것이 아니라 수천만 대의 선조들의 피와 살을 오려 가면서 순교한 선열들의 핏줄을 따라온 것이요, 어떠한 국가의 애국정신을 지닌 한 개인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성인의 반열에 선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닦아 나온 모든 사상의 정수를 규합해 가지고 가져다 준 엄청난 것입니다. 이런 은사의 자리에 섰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기의 아내와 자녀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흥망을 판가름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 떨어졌다 이겁니다. 아브라함 가정, 노아 가정 등 수많은 가정들도 나가떨어졌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니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던 이상의 심정을 가져야 되고, 자식을 잡아 제사드리려던 그 이상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노아 가정이 모든 비난과 비소를 받으면서도 하나의 결의를 중심삼고 120년 동안 싸워나온 이상의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호화찬란한 영광의 자리를 일소해 버리고 거지의 탈을 쓰고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모세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 없는 은혜는 흘러가고 말아
현실 환경에 박자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건 전부 공식입니다. 이 길을 가지 않고는 그 은사를 계승할 수 없습니다. 현실과 박자 맞추지 않은 사람들도 전부 다 그 시대의 은사를 잃어버리고 하늘 뜻 앞에 한의 조건을 남겼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뜻을 대하는 우리들은 얼마나 정성들이고 얼마나 긴장되고 얼마나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다짐하며 이 길을 가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악당 중에서도 대악당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은 자기의 선한 선조들의 다리를 잘라 버리고, 목을 잘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재산 밑천 다 팔아먹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효자는 기쁜 일이 있더라도 부모의 얼굴을 봐 가면서 웃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충신은 군왕의 얼굴을 봐 가면서 웃는 것입니다. 자식은 자신이 기쁘더라도 부모가 슬퍼하게 된다면 그 기쁜 자리에서 슬픔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효자인 것입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천리(天理)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귀하고 높으신 은사인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은사를 지탱하기 위해서 그에 대비될 수 있는 몇천 배의 수고를 가해야 되는 것입니다. 수고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것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복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를 안 하겠다면 망할 가망성이 많지만, 그 은사 앞에 보답하기 위해서 더욱더 많은 수고를 하면서 감사하고 가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 복은 다른 곳에다 옮겨 놓아도 날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럴게 아니예요? 그 복은 통일교회와 더불어 남아질 것입니다. 이것을 남기려고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책임지고 지도하면 작전해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여러분의 복을 지탱할 수 있는 길이며,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무리 가운데 여러분을 참석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전법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둔하다는 것입니다. 곰처럼…. 한 고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나중이고 떨어지려면 떨어지라는 것입니다. 빤질빤질해 가지고 타진하고 이러쿵저러쿵 하다 보면 힘들어진다는 거예요. 그런 자들은 못 가는 것입니다.
말을 팔아먹는 사람들은 전부 다 걸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을 팔아먹는 녀석들은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밑천 없이 찾아 가지고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일대에서 찾아질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가야 이 복을 지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일 대, 이 대, 삼 대를 거쳐 가지고 이 복을 지탱시키지 않고는 도리어 그 집안이 화를 받을 수 있는 무섭고 두려운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말만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길을 닦아 나오면서 내 눈으로 많이 보았어요.
그러므로 수고와 은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수고 없는 은혜는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통일교회도 편안하게 적당히 믿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 석온씨 노친네의 찬송 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던 그 음성이 엉망이어서 놀랍지도 않습니다. (웃음) 그렇지만 매일 아침마다 내가 조용히 들어 보면 아주 반갑습니다. 그저 할머니 몇 사람이 모여 앉아 가지고 기운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내가 2층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 보면 그 노래가락이 선생님이 기도하는 데 박자 거리가 되더라 이겁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그거 보면 하나님께서 그 노래를 나빠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매일매일 새벽에 일어나 가지고 찬송을 하는 것도 할짓이 아니라구요. 그러나 하기 싫고, 남이 하지 않는 곳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수고를 터전으로 하지 않은 은사는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흘러가는데 그냥 흘러가지 않습니다. 끝날에는 어떻다구요? 무엇을 빼앗아서 어떻게 한다구요?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했지요? 있는 자는 돌려받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꺼떡꺼떡하는 녀석들은 통일교회 문선생한테 전부 다 깝대기 벗겨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 꺼떡꺼떡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몽땅 통일교회 문선생한테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기분 나빠도 할 수 없어요. 내가 전부 다 거두어 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저 영계를 통해 가지고 야단법석하는 사람들을 많이 내쫓아버렸습니다. 더 두면 더 나쁘게 되기 때문에 많이 쫓아냈습니다. 그가 닦아 가지고 한 단계 올라갔다고 꺼떡대거든요. 올라간 것은 누구로 말미암아 올라갔느냐? 나 때문에 올라갔습니다. 자기가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꺼떡대는 녀석들은 쏙 빼내는 것입니다. 빼낼 때는 그것만 빼는 것이 아니라 은혜까지 몽땅 빼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이니까 그 은혜까지 몽땅 빼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몽땅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반드시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재검토하고 수고의 터전을 공고히 하라
선생님은 지금 그런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서 그 싸움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면 일본을 중심삼고 기도하고, 미국이면 미국을 중심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미국을 누가 더 사랑하느냐? 내가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렇게 이렇게 역사적으로 조건을 세워 가지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일본을 더 사랑하느냐? 내가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천황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렇게 이렇게 조건을 세워 가지고…. 그래서 우리 통일교인들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서의 고관들 이상으로 고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고관이 그 자리에 설 때까지 고생하여 득세한 그 기준 이상 고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했다가는 꺾여 나갑니다. 영적 전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배후에서 조종하여 그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의 판도는 날이 가면 갈수록 내적으로는 커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식구가 많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세계적으로 몰려올 때가 올 것입니다. 세계 운세는 통일교회의 운세의 박자를 맞추기 위해서 벼락같이 변해 온다는 것입니다. 재미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수고와 은혜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겠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노라리 가락으로 해먹겠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사람들하고 다릅니다. 내가 선두에 서서 해보고 틀림없다고 하면 넘겨 줍니다. 틀리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 은사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비될 만한 수난과정을 거쳐서 계승해야지, 이것을 영광의 자리에서 계승하려 했다가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래 못 가서 나가자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수고와 은사라는 것을 잘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믿던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뜻이 언제 이루어지나? 이러다간 뜻이고 무엇이고 내 일생을 다 망치겠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작들은 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보다 하나님이 더 바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생각해 봤어요? 뜻이 언제 이루어지느냐고 말하고 다니는 녀석들, 얼마나 바빠서 그래요? 그런 녀석들이 뜻을 가로막는 거라구요. 바쁘기로 말하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바쁘시겠어요? 또 선생님은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선생님이 믿지 않는 거라구요. 내가 대신 책임을 지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느 누가 해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어떠한 것도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과거와 현재의 모든 신앙생활을 재검토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70년대의 긴박한 이 정세 앞에 뜻이 가는 이 절박한 과정에서 여러분이 지녀야 할 긍지가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명심하고, 시대와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게 은혜를 지탱시키고 활용하려면 거기에 비례하는 수고의 터전을 공고히 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알겠지요? 「예」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날 이 세계를 두고 볼때, 제일 은혜를 주고자 하시는 분이 아버님이요, 이 은혜의 터전을 남기기 위하여 제일 수고하시는 분도 아버님이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은혜는 수고하신 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아버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나이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공적인 입장에서 수고하고 있는 백성이 어디에 있는가 하며 찾아 나오셨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서보다도 소망의 나라와 소망의 민족을 위해서 수고하는 민족이 어디 있느냐고 찾게 될 때, 그 민족은 어떠한 나라를 중심삼은 특정한 민족이 아니라 종교권내에 서 있는 미래의 소망을 남기기 위한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그러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선민이 있는 것이요, 기독교 선민이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이렇게 1차, 2차, 나아가 3차의 선민권까지 찾아 나오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는 개인적인 입장이 아니라 세계적인 입장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나이다.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민족은 자주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희생적 입장에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수난길을 걸어온 민족이어야 된다는 원리적인 공식으로 미루어 보게 될 때, 한민족이 그러한 민족권내에 서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일개 국 이상의 시달림을 받아야 할 운명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 복귀의 천국을 바라보고 나오는 도상이었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한국은 강국의 틈바구니에 싸여 자력을 가지고 큰소리치지 못했고, 자기 주권을 중심삼고 환경을 움직이지 못한 비참한 민족으로 살아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비참한 역사를 거쳐 나오신 아버님은 당신과 같은 입장에 있는 한민족을 사랑하사 몇천 년만에 찾아 주신 줄 아옵니다. 이러한 은사의 터전을 받은 이 민족이 금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교차점에 선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좌로 가면 안 되겠고 기필코 우로 가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로 가려면 세계의 닻을 거는 터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하늘의 닻을 거는 터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우리는 나라보다 세계를 더 사랑하고, 세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서 세계를 붙들고 놓지 말아야 되겠사옵나이다.
내 일신의 힘이 모자라는 한이 있더라도 또다시 힘을 내서 붙들고, 영영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아버지 앞에 돌려 드린다는 최후의 다짐을 남긴채 손을 얹고 죽어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겠다는 이 엄청난 신념과 결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지, 내일의 소망 앞에 아버님이 찾으시고 남겨 오신 은사의 나라를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는가를 저희가 스스로 자각하여 철부지였던 과거의 모든 생활을 청산지음으로써 하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특권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일생에 있어서 영광을 바라기 전에 수난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다. 수난 가운데 웃고 사는 모습이 아니라 울면서도 마음으로는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러한 길로 가는 통일가의 운명을 아버지께서 길이길이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터전을 위하여 정성들이는 무리들은, 아버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오니, 정성에 정성을 더함으로써 아버지 앞에 감사드리는 모습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후대에 복귀의 천국을 마련해야 하는 각자의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오니, 저희들은 먼저 내 마음과 몸에서부터 천국을 이룰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정적인 천국, 종족적인 천국, 민족적인 천국, 세계적인 천국으로 넓혀 나가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저희 힘만으로는 되지 않겠기 때문에 저희들은 역사적 인연을 갖춘 아버지의 수고의 터전 위에 접붙여 가지가 되고 잎이 됨으로써 아버지의 수고에 보응(報應)하여 아버지의 은사에 플러스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이런 사실을 느끼면서 개개인에게 맡겨진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오늘의 개척자인 동시에 내일의 개척자가 되고, 한시라도 개척자의 심정을 잊어버리지 않고 싸워 나가는 아들딸로 이끄시어 수난이 극한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하여, 아버님께서 축복과 은사를 내리시며 너로 인하여 열매맺었노라고 칭찬하고 사랑할 때까지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 남아서 하늘을 위로해 드리고 땅에 안정점을 결정지어야 할 사명이 통일교회의 사명인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은혜는 그냥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에 의한 수고의 대가로 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공짜로 받아서는 오히려 화를 입는 터전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스스로 조심하며 끝날에 심판대에서 제거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심판대를 넘어 아버님의 축복을 받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