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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후서 2장 1-8절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그가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자들에게 주셨는데, 그 목적은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요구하기도 하시는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명령의 형식으로 요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부패된 본성으로는 결코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명령의 형식을 통해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시는데, 이것을 사도 베드로는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내용으로 하자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내용과 같습니다(빌2:12). 그리고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아 보는 자들에게 너희가 이러한 모든 내용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항상 이것들이 생각나도록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을 예상하고서 자신이 없더라도 이것들을 생각나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금 동일한 진리를 너희에게 가르친다고 설명합니다.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기 때문에 주께서 다시금 재림하실 때까지 진리의 말씀에만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의 모든 예언은 결코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결코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에서, 그러나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해서 어떤 신비적인 방식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예언하던 선지자들조차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증언한 것과 같은(벧전1:10 참조) 그런 방식으로, 좀 더 쉽게 말하면 오직 성경의 정신으로 그러나 오직 성경이 전 성경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그런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오늘부터 보게 되는 베드로후서 2장의 경우 거짓 선생들이 교회 안에서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있었는데, 이런 차원에서도 성경을 결코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이전에도 있었지만 지금도 거짓 선생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우선 백성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다고 말하는데, 율법 아래 있던 교회,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었던 일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구약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만 일어났던 일인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이 너희 중에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고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13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1-3) 오늘날도 이적과 기사를 보임으로, 그리고 그런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명기 13장은 이런 이적과 기사를 통해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말함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신상 사건처럼 이것이 곧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말하면서 유혹한다면 사실은 좀 더 교묘한 형태가 되어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단은 이런식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신명기 18장에서는 다음의 말씀도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그러면서 19절과 20절에서 다음의 경고를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대하여 백성들 마음 가운데 저 선지자의 말이 여호와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묻는다면 이것으로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18:22)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참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성취함이 없다면 자기 마음대로 말한 것이고, 그런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예가 예레미야 당시 거짓 선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백성들의 기대에 맞게 예언을 일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렘14:13)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성취되었는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참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바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렘14:15-16)
지금 신명기와 예레미야의 말씀만 봤지만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있어왔는데, 이와 같은 일이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에 앞서 예수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말씀으로 경고하기도 하셨고, 지금 사도 베드로도, 나아가 다른 사도들을 통해서도 이런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일이 베드로가 편지를 쓸 시점에서 베드로 이후에는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 심판을 위해 재림하시고 심판하시기까지 거짓 선생들이 있게 되는 일은 계속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는 것이고, 굳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일들이 있는가? 조금 전에 신명기 13장을 언급했지만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자리 할 수 없도록 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과연 하나님만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지 시험하여 알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것은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시기 위한 것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으로 하자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지, 아니면 모레 위에 집을 짓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집을 짓는 자와 같다고 할 때 너희가 어디에 집을 짓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반삭 위냐? 아니면 모레 위냐? 바로 이런 차원에서도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깨어 있으라고 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들은 멸망하게 하는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멸망이나 저주로 이끄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이것으로만 보면 참된 선생의 경우 참된 가르침을 통해 영생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거짓 선생과는 반대되고, 그런 측면에서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것 아닌가란 생각을 하기 쉽지만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숨기고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앞서 금송아지 신상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가만히 끌어들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럴듯한 허울 아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교활하고 음흉하게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매튜 풀 주석 참조). 참된 가르침이 아니라 거짓된 가르침으로 은밀하게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반대되는 것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것처럼 해서 결국 거짓된 가르침으로 끌어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고후11:14). 당연히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은 결코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고후11:15). 물론 가장한다는 말 때문에 모든 이단들이 거짓을 진리처럼 가장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진리에 대한 이단 가운데는 실제로 자신의 교리가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가르침이 성경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받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멸망하게 하는 이단은 가만히 끌어들여, 은밀하게 그리고 가장 유사한 것으로 끌어들여 결국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들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만듭니다.
때문에 주의하라,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사도 베드로는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의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주를 부인하게 만드는 모든 것,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임을 부인하게 하는 것, 나아가 주님의 것임에도 주님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모든 거짓된 가르침을 주의해야 합니다. 칼빈의 주석을 보면 주를 부인한다는 것과 관련해 유다서 1장 4절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도 합니다. 즉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는 말씀으로 바른 길을 떠나 온갖 방종에 빠져버리는 자들 역시 주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교리, 다시 말해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 가르침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않을 때도 주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지만 요한일서를 보면 이런 어투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더욱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도록 하기 위한 권면의 형태이지, 택함 받은 백성조차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않을 때 주를 부인하는 자로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나의 주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주인의 뜻을 따르고 있지 않다면, 베드로후서 1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일에 더욱 힘쓰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늬만 주의 백성으로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시면서 주의 뜻을 알고 행하는 데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과 관련해 우리가 주의해야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라는 부분인데, 주를 부인했다는 것은 주에 대한 고백도 거짓된 고백이고 결국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택자가 아니라 유기자로 이해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자들을 사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께서 그들을 사셨다면 택자가 아닌 유기자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최근 소요리문답 20문을 살폈지만 영생으로 택하신 자들만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으로 정해진 자들을 위해서도 구속자로 말미암아 은혜언약을 맺으셨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 부분을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이렇게 혹은 저렇게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 중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노라는 그들의 자기 주장뿐만 아니라 악한 행실로 말미암아 그렇지 않음이 드러날 때까지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는 유형 교회의 일반적인 행태와도 관련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노라고 고백하지만 그러나 행실로 그를 부인하는 자는 사실상 자신을 사신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러분, 은혜언약의 실제적인 대상은 택자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가시적 교회 안에서 주를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주를 고백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자로서 성찬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백성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은혜언약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히브리서의 증거처럼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히6:4-5). 그러나 유기자라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주를 부인하는 자로 있게 되는데, 그런 자들과 은혜언약을 맺으셨다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죽었다고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부르심과 관련해 일반적인 의미와 효력이 있다는 의미로 구분한다고 할 때 자기를 사셨다는 표현은 실제 효력이 있다는 측면보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표현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표현 때문에 택자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유기자를 위해서도 죽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유기자까지도 사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좀 더 나아가 유기자를 위해서 죽으셨지만(충분성) 그 효력에 있어서는 믿는 자들에게만 있다는(유효성) 그런 논리로 가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고, 그 효력 역시 택자에게 만 있습니다. 당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핏 값으로 사신 대상은 택자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2절과 3절을 보시면 저들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우선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우리말 번역으로는 호색하는 것이라고 해서 여색을 몹시 좋아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좀 더 넓은 의미로는 방탕함, 무절제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자유로운 욕망에 따라 행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역사 속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모든 사람이 호색하는 것, 방탕하고 무절제함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절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는 자들, 그래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방탕하고 무절제하다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서는 호색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이 이러하다보니 거짓 선생들로부터 가르침 받는 자들도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게 되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비방을 받게 되는가?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도를 통해 가르치는 바는 결코 방탕하고 무절제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에서 가르친 내용만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5절 이하 7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결국 거짓 선생들은 외적으로는 진리의 도를 가르치는 것처럼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바 참된 진리의 도가 아님을 그들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진리의 도를 증명해야 하겠습니까? 방탕함과 무절제함이 아니라, 5절 이하 7절의 내용을 통해 참된 진리 가운데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 부패함이 있고, 또 우리가 매우 연약하여 때로는 방탕하기도 하고 무절제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죄를 완전히 버리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비방 받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 선생들이 아니라 진리 가운데 서 있는 선생일지라도, 그리고 그런 진리를 배우는 성도일지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주의하라고 할 때 그들의 정체가 이러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이런 모습에서 떠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권면에 걸맞은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3절을 보시면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여기 보면 거짓 선생들의 또 다른 특징 한 가지를 말하는데,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탐심 때문에 진리를 진리 그대로 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진리의 도는 탐심은 물리쳐야 하고 버려야 할 것으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골로새서에서는 탐심이 곧 우상숭배와 같다고 가르칩니다(골3:5). 그런데 어떻게 진리를 진리 그대로 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지어냅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진리에 무엇을 더하거나 무엇을 빼는 방식으로 지어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자로 하여금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듭니다.
여러분, 목회자에게 있어 주의해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다면 방탕함, 무절제함, 호색함과 같은 것과 탐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가지로 넘어지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목회자만이 아니라 진리의 도를 배우고 진리를 따른다고 하는 성도도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넘어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특히 탐심, 세상 물질에 대한 탐욕은 거의 버려지지 않는 것처럼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는 그런 모습으로 삽니다.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너무나도 드뭅니다. 이러하다보니 기복주의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평강, 평강, 평강을 외친 그런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너희 죄가 이렇다, 죄에 대하여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에 대해서는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진리의 도를 배우는 자들은 진리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도 버릴 수 있어야 하고, 학벌도 버릴 수 있어야 하고, 10년 20년 30년 근무한 직장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합니까? 진리를 위해,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하는데, 누가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듣는 것은 말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하면서도 이익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버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십니까?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큰 상급,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그래서 고백하는 것이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주신 하나님이 가장 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신 하나님만으로 사는 존재가 성도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가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존재가 신자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측면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광야 40년을 허락하시는데, 우리는 이런 광야 생활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배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광야 생활을 잘 살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는 것, 먹고 마시기 위해 물질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 배우고 있습니까? 전자를 배우고 있다면 후자에 대해서는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로부터 배우는 자가 아니라 참된 진리의 도를 배우는 자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속히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신 차리기 위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진리의 도를 더욱 세워가야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도가 올바르게 세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거짓된 것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 후반부는 방탕함, 무절제함, 호색 그리고 탐심으로 있는 거짓 선생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할 때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해 심판과 멸망 외에는 기다리고 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한 적이 없으며, 또한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않고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실제적인 예를 세 가지로 말하는데, 4절 이하 8절이 그 내용입니다. 4절의 경우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내용이고, 5절은 노아 시대와 관련해서 홍수 심판을 내리신 내용이고, 6절 이하 8절은 롯과 관련해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로 4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다서 1장 6절에서는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설명하는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그들이 범죄한 천사들입니다. 이들이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것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바로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고 마지막 심판 때까지 결박하여 흑암에 가두어 두셨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까지 결박하여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도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런 마귀에 대하여 어떻게 결박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20장의 내용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20:1-3)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가 있지만 아무리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 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처럼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어떤 대상도 하나님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음모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을 시험하고자 하되 하나님의 뜻 밖에서 행하는 바가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때도 하나님의 권세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잠깐 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그들이 강하게 역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세 밖에서 행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천사라도 범죄한 대상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생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실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심판을 지체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멸망을 예비해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5절입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범죄한 천사의 경우 언제 그들이 범죄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모든 만물의 창조 이후, 그러나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타락 하기 이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창세기 기록의 내용으로 하자면 창세기 3장 내용보다는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 홍수의 경우는 창세기 6장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노아 당시 저들의 영적 상태는 영적인 것에 대해 거의 무관심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밝히기도 하셨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24:38-39) 베드로전서 설교 때도 이 부분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은 단순히 일상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를 통해 심판에 대한 경고를 했지만,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노아를 통해 오직 의를 전파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상의 삶만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적인 삶에 대하여 돌아보는 자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결국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 심판이 내려졌던 겁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만큼은 보존하셨는데, 이때 어려운 것은 일곱 식구를 보존하셨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택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노아 시대 홍수가 한편으로는 심판의 내용으로 있지만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는 구원의 표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에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3:20-21) 구원의 표라는 것은 구원 자체는 아닙니다. 홍수 심판을 통해서는 방주 안에 있어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저들에 대하여 홍수로 심판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어지럽히는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이런 심판 가운데서도 의를 전파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보존하셨습니다. 교회의 소망, 성도의 소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구원의 표라고 말함으로 가시적 교회의 성격으로 있다는 것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가시적 교회를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 교회를 보존하시는데, 거기에 가라지가 있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오직 택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의를 전파한 노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자만이 구원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예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인데, 6절에서 8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이것은 창세기 19장에 있는 사건으로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지게 될 때 롯이 선택하여 갔던 곳이 소돔 땅이었습니다. 롯이 소돔이 있는 쪽을 택한 것은 물이 넉넉하여 살기 좋은 외형을 띄고 있었기 때문인데, 창세기 13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13:10)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에서 소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들이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13:13) 소돔 성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은 그 죄악 매우 심각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 외에는 내놓는 것이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가 창세기 19장에서 나타나는데,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이때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는데, 롯의 집을 방문한 천사들에 대하여 소돔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가? 창세기 19장 4절과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심판하시고야 마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일을 통해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 본을 삼으셨다고 말씀하는데, 유다서 1장 7절에 보면 동일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거짓 선생들은 이것이 본이 되고 거울이 되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거짓 선생들이기 때문에 정작 저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가? 심판이 있음을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사건을 통해 우리가 거울로 삼고 우리 자신을 비춰봐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본문을 통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과연 롯을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창세기를 통해 볼 때 롯으로부터 의롭다고 할 만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를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의 행실은 많은 부분 의에 합당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 연약함을 나타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런 연약함이 거의 세상 사람들과 방불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소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행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면, 롯의 경우는 그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의로운 롯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는 의인 롯이 그들 중에 거하면서 날마다 저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 19장에서 소돔 성 사람들이 두 천사를 내놓으라고 할 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자신의 두 딸을 주겠다고 하는 부분도 있지만(창19:8), 그의 심령은 그렇게 평안하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그의 양심을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노아 시대 홍수 심판과 다를 바 없는 면을 보여주는데,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심판을, 그리고 그런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혹은 자기 백성의 무리 안에 있는 자들을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사건은 창세기를 통해 나타난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심판이 지금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있다고 해서 안심해도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든지 멸망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때문에 거짓 선생들은 이런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정작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성경 기록의 목적은 저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살펴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과연 진리의 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같은 내용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나아가 진리의 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런 진리의 도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살고자 우리를 주의 진리의 말씀으로 계속해서 돌아보고 있는가?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더욱 힘써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진리의 도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1장을 통해 강조한 것처럼 이 모든 것에 앞서 주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홍수 심판 가운데 노아와 그의 식구를 보존하신 것처럼, 또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롯과 그의 두 딸을 보존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때로는 그의 백성에게 속한 자들을 일시적으로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보존은 역사 속에서만 있지 역사의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백성 외에는 보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더욱 수고하고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걸어가야 할 자리는 결국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외에 없으며, 또한 성도가 기뻐하고 기뻐해야 할 내용은 하나님 자신 외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동일한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